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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경운궁(덕수궁)과 광화문 나들이

by 연우아빠. 2011. 10. 9.
2011.10.8(토) 아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아내와 연우는 집에 있었고, 오후 4시에 유진이네 주말농장에 고구마 캐러 가야 해서
경운궁, 제정러시아 공사관, 환구단을 돌아 보기로 했습니다.


대한문 앞에 도착하니 마침 11시여서 수문장 교대식을 합니다.
제대로 된 조선 군대는 언제봐도 멋있습니다.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라 불렀는데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강제 퇴위당한 고종을 지칭해 큰놈(大漢)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불렀다는 얘기도 있고
한양이 번성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이름을 바꿨다는 얘기도 있는데
왜 바꾸었는지는 일본인들이 주동이 돼서 편찬한 고종 순종 실록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순종실록에 이름을 바꾼 일을 추진한 사람들로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일제 침략자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1급 매국노들이었습니다.

덕수궁으로 널리 알려진 경운궁은 원래 성종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습니다.
세조의 장자였던 의경세자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인 월산대군은 예종이 급작스럽게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할 첫번째 권리자였지만,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명회의 영향력으로
그의 사위였던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성종임금입니다.

임진왜란 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임금은 경복궁을 비롯한 전각들이 불타 없어져 머무를 거처가 마땅치 않았는데
월산대군의 사저인 이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이름짓고 머물렀습니다.
광해군 때에 이름을 경운궁이라 짓고 인목대비가 먼저 머물게 되었고, 문안에 불편하다 하여
창덕궁에 있던 임금도 결국 이리로 옮겨와 머물게 되었습니다.

왕궁이 아니었지만 왕궁이 된 것이지요.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트집 잡은 일본제국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키고 이곳에 머물게 합니다.
상황이 된 고종에게 덕수(德壽)란 칭호를 붙이는데 이것이 세간에 굳어져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의 공직자들과 같은 복제본을 보는 듯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식량 주권에 대한 구매자의 의사를 깡끄리 포기한 관료들 탓에
우리는 자기 돈을 주고 사먹는 음식물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대한문 옆에는 이렇게 한미 FTA에 대한 항의 표시로 단식을 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역사의 잘못을 저지른 지 1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길을 달려가는 바보들이 또 넘칩니다.



수장의 기수를 앞세우고 융복을 입은 병사들이 행진해 나옵니다.


뒤를 이어 취타대가 행진합니다.
버킹엄 궁에서 보았던 영국 근위병보다 화려하고 멋집니다.



황제는 사라지고 이름뿐이었던 제국도 종말을 고했지만 역사가 남긴 문화유산은 이렇게 서울 도심에서 빛을 발합니다.

취타대가 정렬을 마친 다음 큰 북을 울려 행사를 시작합니다.



패도를 장식한 멋진 수문 병사들이 도열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이 끝나고 관광객들을 위해 사진을 같이 찍어 줍니다.
준기를 대리고 뒤에 가서 복장을 설명해 줍니다.
패도를 차는 허리띠와 고리가 보이시나요? 사극에서 보여주는 것은 거의 대부분 엉터리입니다.
전통에는 애깃살과 애깃살을 쏠 수 있는 대통, 그리고 정상적인 길이를 가진 화살을 담고 있습니다.
활은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허리에 차고 다닙니다.



정관헌(靜觀軒). 고종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지은 건물입니다.
서양식이죠.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 발코니를 만들었습니다.
스위스 계 러시아인 사비틴이 1900년에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함녕전과 덕흥전 뒤쪽에 있습니다.



즉조당 뒤쪽에 있는 후원입니다.
1910년까지만 해도 여기는 경운궁 가운데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옛 궁궐을 일본이 다 헐어버려서 후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근정전의 축소판처럼 생긴 중화전
임진왜란 이후 이 곳은 근정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장엄한 경복궁을 보았을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패전의 뼈아픔을 절실하게 겪었을 것입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뼈 아픔에 철저한 변신을 했지만
어리석은 조정 관료들과 사대부들은 그런 시대의 충격에서 배운 것이 없는 듯 했습니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세상의 사람들 머리속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 듯 합니다. 



드므. 중화전에 불이 났을 때 방화수로 쓸 물을 담아 놓던 무쇠그릇입니다.
무쇠(주철)로 만든 것이라 가로로 받는 충격에 약합니다. 옆구리에 길게 금이 갔습니다.

청동 정(鼎). 6천년전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이래 동아시아 왕조 문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세발 솥입니다.
주석이 많이 섞여 있어서 푸른색 녹이 쌓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화전 뒤에 있는 석어당(昔御堂)입니다.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후 이 석어당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저 계단에 400여년 전 명의 허준이 선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르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건물에 대한 느낌이 달라집니다.
이중문으로 겨울에는 보온을, 들창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건물 구조입니다.
한옥 중에는 드물게 2층 건물입니다.


즉조당. 여기에서 광해군과 인조임금이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조선 왕궁 안에 처음으로 지은 서양식 건물 석조전입니다.
서양식 분수정원을 조성했는데 건물만 보면 유럽의 건물을 쏙 빼닮았습니다.
이 건물은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는데 1905년 일본의 오쿠라 토목회사에서 건축을 했습니다.
오쿠라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를 비롯해 수만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한 범죄자이며, 평생 무령왕릉을 도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도굴범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1917년에는 경복궁 자선당을 헐어 일본으로 훔쳐간 도적이기도 합니다.
그가 훔쳐간 우리 보물들은 오쿠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버젓이 일본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의 모습



중화문 바깥에는 광명문이 있습니다.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 일제가 흥천사 종과 자격루를 전시하기 위해 이리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광명문 아래에 보이는 것은 신기전 모형, 흥천사 종, 그리고 자격루입니다.


세종 때 처음 제작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는 원형 전체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물통과 물그릇, 좌대 등 일부만 남아 있어 아쉽습니다.
처음 만든 그래도 작동되는 자격루를 복원해 전시한다면 좋은 볼거리가 될텐데 문화재가 힘을 잃고 자리만 덩그라니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점심을 먹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올라가 이화여고 길로 계속 올라갑니다.
유럽의 도시처럼 조용한 길입니다.
서울 도심의 길도 이렇게 편도 1차선으로 차량 통행이 한산하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일까요?
걷고 싶은 길입니다.


경운궁 뒤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제정 러시아 공사관 터가 나옵니다.
경운궁 근처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제일 오른쪽 탑만 남아 있고 건물은 6.25때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렇게 탑 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이었는데 사바틴은 사방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여기에서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의 범죄를 상세히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살해 된 뒤에 고종황제는 비밀 통로를 통해 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역사교과서에서 '아관파천'이라 부르는 사건이지요.

슬픈 일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한 왕국의 침탈 상태를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왕궁 지근 거리에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사관들이 밀고 들어와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례한 일이지요.

우리는 비록 형식적으로는 독립한 국가로 있지만
지금도 수도 서울의 핵심 영역에 그 제국주의의 후예국가들이 대사관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미국, 영국, 러시아...

재미있는 것은 이 땅은 최근까지도 제정 러시아의 짜르였던 니꼴라이 2세의 소유로 되어 있었습니다.
울릉도와 마산에도 니꼴라이 2세의 땅으로 되어 있었는데 민족주의 단체들의 항의로 정부에서 공시를 거쳐
지금은 국유지로 편입하였습니다.

혹시 소련이나 러시아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1917년 볼세비키 혁명 때 레닌은 러시아 제국과 타국이 맺은 모든 조약과 계약을 계승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버렸기 때문에
사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정리해 버렸어야 했던 땅이었죠.


준기가 여기까지 왔으니 광화문을 보고 가자고 합니다.
경복궁은 많이 가서 이제 안가도 된다고 하더니 새로 복원한 광화문은 보고 싶답니다.
구리 이순신과 황금 세종대왕을 지나 광화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특템한 표정 ^^



광화문에서도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화문 안으로 들어가니 이런 모양입니다.
시각적으로 참 시원해 보이는 궁궐입니다.


광화문 글자가 잘 나오는 인증샷을 남기고
4시까지 고구마 캐러 수원에 가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환구단 보러 가자고 시청쪽으로 급히 내려가는데



준기가 이런 표지를 보더니 시간을 계속 지체합니다.
1392년 조선 건국부터 1910년 조선 멸망까지 1년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검은 돌입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이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났군요.


광화문 앞은 원래 조선의 핵심 관청터였습니다.
이조, 호조 등 6조 가 있었던 자리에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종 대왕 동상 아래에 지하에는 이런 전시시설도 있습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해 환구단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수원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하루 종일 걸었지만 재미있는 여행이었나 봅니다.
준기가 휴양림 여행을 가지 않는 주말에는 서울 일대의 역사유적을 답사하자고 합니다.

자기 직계 조상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부끄럼을 많이 타는 분들이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부지런히 다니며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