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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효창공원, 서대문독립공원..근현대사 유적 답사

by 연우아빠. 2011. 11. 7.

2011.11.5(토)

학교에서 돌아온 준기는 두 주 전부터 조르던 답사를 오늘은 꼭 가야한다고 아빠를 재촉한다.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잠들어 계시는 효창공원, 그리고 서대문 독립공원 관련 유적이다.



오후 2시가 돼서 출발을 했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다 돌아보기 쉽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일요일에는 비가 온다고 하니 오늘 꼭 가야한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오후 3시에 효창공원 앞에 도착했다.
근대적인 기상관측 이래 104년, 11월 기온으로는 최고 더웠다는 이날은 한여름처럼 더웠다.
일단 백범 기념관 앞에서 인증샷 한번.

이 기념관에는 김구 선생의 피묻은 옷을 비롯한 각종 유품,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전에 김구 선생과 맞바꿨던 회중시계, 
광복전쟁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담고 있다.
 


기념관 안에는 김구선생의 석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여기까지만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
유럽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대부분 후레쉬나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우린 대부분 금지사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길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 교육이 목적이고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유물 손상은 없을텐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묘.

 

70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졌고 가족마저 희생을 마다 하지 않았던 우리 겨레의 영웅. 
친일매국노와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질서에 걸림돌이 되어 그들의 음모 속에 1949.6.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거쳐 자신이 조성한 삼의사 묘역 옆인 이곳에 잠들게 되었다. 

그러나 친일무리들은 김구 주석이 돌아가신 뒤에도 이 묘자리에 계속적인 침탈을 감행했다. 
1950년에 이승만은 이곳에 운동장을 만들어 국립묘지에 준하던 이 곳의 이미지를 깎아 내렸고,
5.16 군사반란의 주범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뒤에 이곳에 골프장을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게다가 반공투사 위령탑을 세웠고, 12.12 반란의 주범 전두환은 노인회관을 짓기도 했다.


효창공원은 원래 조선 정조임금의 세자였던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는 효창원에서 유래한다. 
정조임금은 5살 어린나이에 죽은 아들 문효세자를 이곳에 안장하였는데 1944년 일제는 문효세자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해 버렸다.



이곳은 의열사 정문인 의열문
1945년 미국의 방해로 정부로서 인정받지 못한채 임시정부 인사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김구 주석은 이곳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를 세웠고 그들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의열사를 지었다.

태평양전쟁 때에는 한반도 진공작전에 이용했으면서 자기들의 세계지배 질서 입맛에 맞지 않게 되자 무시해버린
제국주의 국가행태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이런 행태를 예견한 김구 주석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우리 힘으로 국내 진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의 발언권이 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다고 한다.

미국은 1943~1945년 사이에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한반도와 제주도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과 함께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적으로 훈련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차대전 때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을 하였으며, 1943년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영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에 참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시아 정책의 필요에 따라 대한민국의 전승국 지위를 박탈하고 1951년 침략국인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되었고 민족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내 비록 38선을 베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북 분단은 막을 것이다. 분단은 곧 골육상잔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는 그의 예언은
불과 1년만에 4백만명이 죽고 다치는 6.25 사변으로 현실화 되었다.


김구 선생이 광복전쟁의 영웅 네분을 모신 곳. 삼의사 묘 올라가는 길
네 분을 모셨지만 안중근 선생의 유해를 모셔오지 못했기 때문에 삼의사 묘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일 왼쪽에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가묘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질녀인 안미생 여사는 김구 선생의 큰 며느리이다.
비석에는 안중근의 시신을 국내로 모셔오면 정식 묘로 쓸 계획임을 밝혀 놓았는데 1946년에 조성한 가묘이다.
일제는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의 시신 매장 위치를 아직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으며, 우리 정부와 중국 정부는
공동발굴까지 실시하였으나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히로히토를 저젹한 이봉창,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그리고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평생을 광복전쟁에 헌신하다 일본의 감옥에서 순국하신 백정기 의사.



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곳으로 산언덕에 자리잡고 있고 전망이 좋다.


삼의사를 모신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동녕 주석(가운데), 조성환 군무부장(국방장관)(왼쪽),
그리고 국무위원과 비서부장을 역임하신 차이석 선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차이석 선생은 광복을 맞은 뒤인 1945.9.9 병환으로
조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미국, 영국군과 함께 훈련 받으며 국내 진공을 준비했던 광복군 용사들이 불렀던 노래

<특전용사의 노래>

비가오나 눈이 오거나 거센 바람 휘몰아쳐도
바위같이 굳은 의지는 우리들의 기상이로다

어서 가자 특전용사야 조국 강산 다시 찾으러
정의로운 총칼을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가리라


대포 소리 땅을 울리고 원수 무리 쏟아져 와도
걸음마다 피를 흘린들 최후까지 싸워 이기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조국 땅을 밟는 그날에
원수들을 쫓아버리고 태극 깃발 높이 날리리



서대문 독립공원을 찾아가려고 효창공원역으로 내려왔는데 입구에서 이 표지석을 발견했다.
이 곳은 바로 이봉창 의사가 태어난 곳. 그러나 그의 집은 도로가 되고 말았다.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서대문 독립공원
우리집에서 이번 코스를 답사한다면 이곳으로 바로 와서 효창공원으로 가는 길이 더 효율적일 듯 하다.
짧은 가을해는 벌써 넘어가고 있다.



일제가 1908년 광복전쟁에 나선 우리 선열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곳. 서대문 형무소.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었고 아직도 보수와 복원공사를 계속하고 있다.
동절기라 오후 5시까지만 관람할 수 있는 관계로 아쉽게 들어가보지 못하고 둘레를 한바퀴를 걸었다.
북쪽면과 남쪽면은 담이 낮아서 바깥에서도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바퀴 도는데 걸린 시간이 15분 정도될만큼 감옥은 크고 넓었다.
 


언덕을 파서 평지로 만들고 그곳이 이렇게 커다란 감옥을 지어야 할 만큼 조선은 일제에게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왼쪽에 보이는 미루나무는 입감하는 선열들이 한번씩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나무.
일제는 수감된 사람들이 통방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마당에 나와 운동을 시킬 때도 격벽을 친 곳에 넣어 분리했다고 한다.



벽에는 이 곳에서 고초를 겪은 선열들의 사진을 군데군데 설치해 놓았다.
강우규, 이승만, 김구, 유관순, 한용운, 손병희....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그 가운데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신 분들도 있고, 변절하여 매국노가 된 이도 있다.

독립공원 아래쪽에는 서재필 등이 주도해서 세운 독립문과 독립관이 있다.
독립관은 원래 명나라나 청나라 사신이 오면 사신숙소로 쓰던 건물이라고 한다.

천자국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영은문. 그 문은 초석만 양쪽에 남아 있고 젊은 친일파들이 세운 독립문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21세기인 지금도 그 천자국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학교에서는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개화파나 서재필 같은 독립운동가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많은 의문이 있다.

역대 독립협회 회장을 맡았던 이들은 하나같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외국문물의 세례를 받고 유학을 다녀온 자들이지만

모두 친일매국노가 된 자들이다. 그들이 남긴 글을 보면 일제에 나라를 넘기는 것이야말로 조선의 영원한 안전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망발을 늘어놓은 자들이다.


미국 언론에는 이승만과 윤병구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한 사실이 남아 있는데 이승만이 대표적인 매국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대표로 루즈벨트를 면담했다는 내용인데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길 바라며,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는 망발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보훈처에서 지원해 재 출판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란 책에는

이승만의 노골적 매국행위와 친일고백을 가리는 말도 안되는 짓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1904년 이승만이 저술한 것인데 <어두운 이웃나라를 극력 깨우쳐서 협력하고 보전하고자 함은 우리나라 신민들이 일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라는 망발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런 원문의 내용을 교묘히 감춘 채 책을 낸 것이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에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것을 기실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이 하는 모든 행위는 청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의 문화적 세례를 받고 일본의 서구화 수준에 충격을

받은 개화당 젊은이들이 대부분 친일파로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 또는 속국이 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결론에 도달하는 시발점이다.


독립문의 <독립>이란 용어 역시 그 과정에서 사용한 말이며, 이 개화파들은 대부분 적극적인 친일파였고 대부분 매국노가 되었다.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 역시 조선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결국에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으로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을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이 땅으로 옮겨와 국립묘지에 묻은 것도 지나친 일이며, 이 문 옆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 역시 역사에 대한 왜곡작업이다.


고대사가 현재 우리의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근현대사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학교의

역사교육은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거나 입시철에 걸려 깊이있게 배우지 못한다. 이것은 조속히 바로잡아야 할 병폐이다.
 


4시간 넘게 답사를 마치고 공원 건너편에 있는 돈가스 집에서 맛있는 돈가스를 먹었다.
아들! 오늘 답사는 어땠니?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김구 선생님의 나의소원 중에서

*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D-day는 1945.8.29일  
http://impeter.tistory.com/1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