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부석사 / 2017.10. 6

 

 

경북 영주 부석사, 안양문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삼층석탑

 

 

안개와 비구름을 소백산 능선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긴 연휴 덕분에 비가 오는 날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부석사를 찾았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자리에서 나무가 자란다고...

내가 어렸을 때는 철망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나무를 만지고 꺾어서 철망을 쳤다고 한다.

 

 

 

 

 

 

 

 

 

 

문화해설사를 따라 절을 관람하는 여행객들

 

 

순흥에 있는 순흥묵밥집. 비가 오는 날인데도 손님이 끊일 날이 없다.

 

 

Posted by 연우아빠.
견훤과 신검 부자의 이야기가 있는 금산사


백정기 의사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서 정읍을 가로질러 산외면 한우마을에 갔다.
매년 소고기를 사러 갔던 거북정육점이 도산을 했나보다.
맛있게 먹던 단골집이 사라진 것을 보니 지역 경제가 어려운 것 같아 씁쓸하다.


새 거래처를 찾아서 소고기를 사서 맛있게 구워먹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아내와 딸을 위해 소고기를 사서 택배로 부쳤다.

남자 삼대만 나선 길
소고기를 잘 먹고 북쪽으로 금산사를 향했다.


후백제 견훤왕과 그 맏아들 신검의 역사적 갈등 이야기가 남아 있는 금산사

새로운 세상을 꿈꾼 시대에 맞게 미래불인 미륵을 모시는 성지라는 돌비석이 있다.

절까지 올라가는 길은 이 지역 절 대부분이 그러하듯 정말 아름다운 공원 산책로 같았다.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이 보인다.

기둥은 몇백년 된 나무로 만든 듯 엄청나게 굵었다.

울진 황장목 금봉지에서 본 5백년 된 소나무보다 더 굵은 듯하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천왕문이 나타났다.



천왕문 다음에는 선제루



서기 599년 백제 법왕 때 처음 창건한 절이다.

백제 멸망 후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모시기 시작했고,

법상종 종찰로 미륵신앙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전한다.

국보 62호 미륵전 건물 앞에는 부처님 오신날 준비가 한참이었고

건물 내부는 3층을 통건물로 해 거대한 부처님을 모셔 놓고 있었다.



오래된 절 답게 국보와 많은 보물 등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절이다.



대적광전



이런 모양을 한 탑은 처음 보았다.

육각다층석탑으로 보물 제27호.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으로 만든 탑으로 인근 봉천원 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나한전







방등계단 사리탑





토속 신앙과 결합한 흔적 삼성각




화엄종찰에 있는 명부전



고려시대 석등



그리고 부처님이 득도했다는 보리수 나무



이 절에 유폐되었다는 견훤왕.

늙은 아비의 지나친 욕심이 결국 아들을 망치고 나라를 망쳤다.


역사 교과서에서 신검이 금산사에 견훤을 유배했다고 배웠을 때,

금산사의 이미지는 높고 깊은 고립된 절이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드나들기 쉬운 평평하고 넓은 절이었다.


Posted by 연우아빠.

2016. 5. 7. 전북 정읍




[유언]

나는 몇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설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례의 영예를 위하여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위에 놓아 주기 바랍니다.


- 백정기 의사가 이시하마 감옥에서 운명하기 며칠전 같은 감옥에 있던 동지인 이강훈, 원심창 의사에게 남긴 유언.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죽이려고 준비하던

백정기 의사는 동료였던 일본인 아나키스트 오키의 배신으로

함께 거사를 준비 중이던 이강훈, 원심창 의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4살때부터 이 곳 정읍에서 자랐다.


1934년 6월 5일 39살 나이로 순국할 때까지

아나키스트로서 멋진 남자로서 무장 광복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백정기 의사를 기념하는 의열사 정문이 저 멀리 보인다.



들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백정기 의사의 말씀 비석(1937. 3.17 거사 준비 중에 동료들에게 한 말)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 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백정기 의사는 1932년 상하이 홍구 공원 거사를 준비했으나 입장권을 구해주기로 한 중국인이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홍구 공원 앞에서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만큼 백 의사는 열정적인 광복 전사였다.


들어가는 오른쪽 편에는 백정기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뒷편에는 백정기 의사가 한 말이 새겨 놓았다.

그는 열렬한 무장 광복투쟁가였다.

의열단, 흑색공포단 등 그가 주로 활동한 영역은 일본과 무력 항쟁 쪽이었다.



문 앞 오른쪽에는 백정기 의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청의당(聽義堂) 건물이 있다.




왼쪽에는 전시실이 있는데 여기에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과 수류탄이 전시되어 있다.



육삼정 의거 준비 중에 체포된 이강훈, 원심정, 백정기 의사를 다룬 당시 기사에서

인물 사진과 사용했던 폭탄 사진을 발견했다고 한다. 백정기 의사의 눈빛이 살아있다.




존영을 모셔 놓은 전각 앞 의열문



의열문을 들어서면 백정기 의사 초상을 모신 전각이 있다.



초상을 모신 의열사 전각



참배를 마치고 뒤를 돌아 정문 쪽을 바라본 모습

이 곳은 평지라서 위압적인 느낌이 없어서 좋다.



아들은 방명록에 서명을 남겼다.

정읍에 내려 올 때마다 들르고 싶었는데 매번 올라가는 시간에 쫒겨 참배하지 못했던 죄스러움을 조금 벗었다.

Posted by 연우아빠.

영남 여행 (3) 구미, 왜관, 대구


2015.10.09~2015.10.11


10월11일 연휴 마지막 날.

오늘 아들의 여행 계획은 구미, 왜관 그리도 대구 쪽이다. 먼저 구미에 있는 허위 선생 기념관을 향해 길을 나섰다.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차가 많았다. 재물을 탐하고 경제적 이익만 우선하는 시대라 그런가? 도로 표지에는 박정희가 살았던 집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가 계속 보이고 같은 방향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의 유적에 관한 표지는 근처에 가서야 나온다. 경기도 이천에서 허위 선생의 이야기를 많이 봐서 그쪽 분인줄 알았는데 선산(지금의 구미)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고 한다.

 

왕산 허위 선생의 기념관은 구미IC와 멀지 않은 얕으막한 언덕 위에 있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념관 앞에는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고, 아파트를 지나면 그를 기리기 위해 생가터에 만들어 놓은 기념공원이 보인다.

 

허위 선생에 대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너무 강렬해 지금도 그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처형 직전에 일본 승려가 극락왕생을 비는 독경을 하려고 하자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마룻바닥을 발로 차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충의가 있는 사람은 저절로 극락에 갈 것이다. 설령 지옥에 간다한들 어찌 원수 놈의 힘을 빌려 극락에 가겠느냐!”

 

소설일까? 실재였을까? 그 분이 남긴 유언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겠나.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하고,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어서 어이 눈을 감으랴.”

 

왕산 선생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13도 창의군 선봉장으로 1907년 동대문 30리 지점까지 의병부대를 이끌고 들어가 일본침략군과 전투를 벌였던 분이다.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은 전투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르겠다고 대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허위 선생은 같은 일을 당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보다 나라를 되찾는데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 전투에 임했다.

 

이런 자세는 그의 집안과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일가친척과 후손은 중국, 러시아 등지로 흩어져 대를 이어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허위 선생의 형제들, 아들, 조카, 손자, 며느리까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을 위해 싸웠다. 러시아에서 일본군에게 처형당한 분도 있고 중국에서 항일동북연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전사한 분도 있다. 살아남은 후손들은 타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100여년 지나서야 조상의 나라에서 다시 상봉하였으니 이보다 기막힌 일이 어디 있는가 싶다. 이런 훌륭한 분과 박정희 같은 인간이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대조적이다. 그러나 둘 다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니 어찌하겠나, 잘한 사람을 따라 배우고 잘못한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악비와 진회의 고사도 있지 않은가?

 

기념관 옆에 있는 허위 선생의 묘 앞에서 아들과 함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큰 절을 두 번 올렸다. 이런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분의 기념관을 이렇게 박제를 해서 모셔 놓지 말고 기념관이나 공원에 소극장이라도 만들어 드라마틱한 일생을 연극이나 뮤지컬 또는 오페라, 인형극 같은 형태로 제작을 해서 공연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유럽 배낭여행 중에 작은 시골마을이라도 이런 이야기와 역사를 가진 곳에는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체험거리들이 있어서 기억이 오래 남고 다시 찾게 만들었는데 우리도 성역화만 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구현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구름이 짙게 몰려와 기온은 떨어지고 싸늘한 바람이 분다. 길 가에서 우연히 고려말 삼은 가운데 한 분인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를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했다. 그런데 길이 끝나는 곳까지 올라갔지만 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마을 골목을 헤매다가 되돌아 나와 다시 마을 끝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길로 천천히 올라가며 살펴보았다. 진입 방향으로 11시 방향 길 끝에 있던 집의 뒤편 언덕에 묘가 보였다. 맨 처음에 도착했던 막다른 곳에 있는 집 바로 위에 길재 선생의 묘가 있었는데 찾지 못했던 것이다. 차를 세우고 3m쯤 오르자 바로 길재 선생의 묘가 보였다.

 

봉분 오른편 바닥에 오래된 비석 두 개가 표면만 드러낸 채 묻혀있다. 숭정 후 98년(1725년) 새로 고쳐 세웠다는 글씨가 선명하다. 더 오른쪽에 있는 비문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만든 듯, 글씨가 많이 흐려진 상태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이 섭섭하게도 조선이 안정된 뒤에 선비들은 죄다 조선에 협력을 거부한 정몽주, 길재, 원천석 같은 선비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사표로 삼았으니 인간에겐 이익을 초월해 보편적인 정의감이 있다는 맹자의 말이 맞는 모양이다.

 

길재 선생의 묘를 떠나 찾아 간 곳은 왜관 철교. 6.25사변 당시 낙동강 방어를 위해 미군이 폭파했던 옛날 다리는 지금은 새로 만든 다리 옆에 조형물로 남아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와 달리 미군은 다리를 비운 다음에 폭파시킨 것은 대조적이다. 옛 역사를 담은 안내문이 있고 다리 위에는 당시 유엔군으로 전투부대를 보낸 나라와 의료지원을 한 나라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바람도 많이 불고 기온도 상당히 떨어져 아들과 함께 다리 위에서 달리기를 했다. 키가 훌쩍 커버린 아들은 성큼성큼 달려서 다리 짧은 아빠를 쉽게 추월해 갔다. 우리가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본 다른 아이가 “우리도 달리기 하자”고 부모에게 얘기한다. 흐훗, 이런 것이 재미 아니겠어요? 이 강둑을 지키기 위해 죽거나 다친 그날의 병사들에게 감사해야지. 그리고 다시는 우리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바보짓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대구로 내려오려다 어제 이 근처에 신유장군 유적이 있다는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왜관철교와 가까운 곳 시묘산 자락에 있었다. 8월달에 신유장군이 러시아 군대를 격퇴했던 곳을 지나왔으니 안 가볼 수가 없지 않는가? 비록 청나라의 요구로 갔던 것이지만 멀고 먼 흑룡강까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시아 땅 깊숙이 밀고 들어온 러시아의 동진을 잠시나마 막은 세계사적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분이 아닌가. 그 분의 사당이 시묘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6.25 때 치열한 전투 때문이었는지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비석은 총포탄 자국이 선명한 채 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상태였지만 그 옆에 새로 복원한 비석이 나란히 서 있어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다. 사면에 새긴 비문에는 경인년 전란(6.25사변) 때 파손된 비석을 다시 새겼음을 기록해 두었다. 조선시대에 만든 비석에 비해 용의 조각이 경박스럽게 보여서 아쉽다. 북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선위문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숭무사 사당은 문을 걸어 잠궈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지났다. 이제 대구로 가야지.

팔공산 자락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사당은 시간이 부족할 듯하여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고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갔다. 점심에 김밥 한줄만 먹은 탓에 배가 고파서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었다.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해가 곧 질 것처럼 시내가 어둡다. 대략적인 지도를 보니 2.28 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출발해 약령시까지 걸어서 돌아보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여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복원의 첫단추부터 잘못 끼운 노욕의 화신 이승만의 독재질을 끝장내기 위해 일어선 대구 학생들의 2.28의거. 그들과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마산 의거.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이 몸담고 있는 정당에서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독재자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그 때 일어선 그 선열들은 뭐라고 할까? 문득 궁금하다.

 

약령시를 향해 걷는 동안 2% 부족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주말만이라도 이 골목에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게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 안을 살피며 걷는 동안 수시로 드나드는 자동차들을 보니 ‘골목투어’의 기본 취지에 맞지 않는 듯하다. 20여분 정도 걸으면 충분한 공간인만큼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다닐 수 있도록 한다면 좀더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듯 하다.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에서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로 있던 매국노 박중양이 조정을 무시하고 일본 상인들과 짬짜미를 하여 대구읍성 성벽을 부쉈다는 것이다. 과연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매국노답다. 이런 놈들이니 돈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짓을 서슴치 않고 했겠지.

 

한의약 박물관 주변에는 대구경북지역에 처음 세운 개신교회인 대구제일교회도 남아 있고, 계산성당과 이상화 시인의 집,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동했떤 서상돈 고택이 남아 있다. 이름하여 근대문화골목. 곳곳에 안내문과 도로표지가 잘 되어 있어 찾아 다니는 재미가 괜찮았다. 피맛골을 전부 파괴해버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탈레반스러운 행동에 비하면 그나마 참 다행이다.

 

우리나라 대도시도 유럽의 대도시처럼 낮은 건물로 도시 전체를 조화롭게 조성했더라면 얼마나 더 멋진 도시가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확인한 골목길 탐방이었다. 그깟 입시만 아니라면 온 가족이 함께 돌아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진다. 아이폰 배터리 충전을 깜빡 잊어버려서 돌아가는 길은 지도를 보며 찾아가느라 조금 헤맸다.



왕산 허위 선생이 남긴 유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경내에 있는 묘소.


왕산 허위 선생 생가 터에 조성한 기념공원에 있는 동상. 동상의 자세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보통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왼손에 격문을 들텐데 여기는 반대로 되어 있다.

광복 이후에 매국부역자들이 제작에 참여해 만든 동상, 기록화에 왼손잡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누가 제작한 동상인지....




 


아파트 쪽에서 올려다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고려말 삼은 가운데 한 사람인 야은 길재 선생의 묘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이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는 시조로 유명한 충의지사로 운곡 원천석 선생 아래에서 이방원과 동문수학을 한 사이지만

이방원의 회유를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영남 사림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묘지 오르쪽에 있는 땅에 묻힌 비석.

숭정 기원후 98년 을사년(1725년)에 만든 비석이라는 명문이 선명하다.



야은 선생 묘지 뒤에 원래 상석으로 썼던 듯한 오래된 판석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


165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200여명의 조선군 포수병을 이끌고 흑룡강(아무르강) 일대에서 러시아 군대를 섬멸했던 신유장군의 사당.


신유 장군은 근세 이전에 우리 역사상 가장 북쪽까지 올라가 전쟁을 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2차 나선파병 때 재물에 눈이 먼 청나라 장수 때문에 조선군 7명이 러시아 군에게 희생되었는데

신유 장군은 화장하라는 청나라 장수의 권고를 무시하고 흑룡강변에 매장했다고 한다.

"시신을 조선으로 운구하지도 못하는데 화장을 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신유 장군은 이 전투에서 노획한 러시아군의 소총이 조선의 조총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조선으로 가져오려고 했으나

청군의 방해로 단 1정만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가지고 온 총은 조선 무기 개선에 참고가 되었을까?



6.25 사변 중에 치열한 낙동강 방어전투 과정에서 신유장군의 전공비는 이렇게 큰 피해를 입어 조각이 났다.

후손들이 그 옆에 원래 내용을 담은 비석을 다시 세웠다.



6.25 사변 중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인 낙동강 방어 전투.

그 가운데서도 가장 처절했던 왜관 전투에서 미군은 북한군의 도하를 차단하기 위해 이 다리 한 구간을 폭파했다.

아치가 없는 부분이 그 당시 미군이 끊었던 부분이라고 한다.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대구 국채보상운동 공원. 답답한 도심에 숨쉴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금연을 해서 나라빚을 갚고자 시작한 운동을 기념하는 곳이니 만큼 절대 흡연은 안되는 것으로...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며 다양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60. 2.28. 대구 지역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를 학생들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요일인 이날 학생들에게 등교를 지시했다.

이에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저항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폭력으로 진압한 경북도지사와 경찰들에게

학생과 시민들이 저항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3.15 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 공원 한 블록 떨어진 곳에 2.28 기념공원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의 대구와는 너무나도 다른 민주주의와 주권수호의 성지 대구의 과거.



문화의 거리 골목 투어는 유럽 여행 중에 보았던 숨쉬는 대도시의 맛을 느낀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무시로 밀고 들어오는 자동차를 주말이나 공휴일만이라도 통행제한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편안한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까 싶다.

걸어서 20분이면 가로지를 수 있는 크지 않은 구역이니, 

승용차나 택시 같은 차량은 구역 외곽에만 접근하도록 한다면 더 좋은 여행지가 될 것이다.



약령시 골목과 관련 있는 책 조형물



대구 약령시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든 박물관

우리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30여명 쯤 되보이는 서양인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러 들어갔다.

세균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동서양의 의학은 거의 비슷한 발전과정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영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대구제일교회(근대문화유산)



일제 때 저항시인 이상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자 서상돈 등의 옛집이 남아 있는 골목

전 서울시장 오세훈이 피맛골 같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골목을 부수고 콘크리트 덩어리를 쌓아올린 바보짓을 

대구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으리으리한 빌딩보다 이런 골목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숨쉬는 거대도시의 자랑이 되는 것을 유럽 여행을 통해

많이 경험했다. 대구 골목투어는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한 관광상품이 되었는데, 원형을 오래오래 잘 유지했으면 한다.



이상화 선생의 집 내부. 안동의 양반가문 출신인 이상화는 대구에서 많은 시를 썼다.

여기에서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져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상화 시인의 집과 이상돈 선생의 집은 바로 이웃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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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우아빠.

영남 여행 (2) 양산과 마산


2015.10.09~2015.10.11


10월10일

아침에 일어나니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만 9년이 되는 날.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아쉬움이 남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새롭다. 아버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알고 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늘은 양산 통도사와 경남 마산 일대에 있는 3.15 의거 현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9시에 경산을 출발해 10시쯤 통도사에 도착했다. 화엄종의 격식을 제대로 갖춘 큰 절인데 불상을 보며 경배를 하고 들어가는 많은 불자들을 보니 이 지역의 불심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겠다. 전각마다 스님들이 독경을 하는 장면을 보여서 살아있는 절 같다. 규모도 크지만 구역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국화꽃과 밝은 가을햇살이 더 아름답게 빛난다.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통도사를 나와 웅천읍성을 찾아 간다. 작고 얕으막한 성곽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길 건너편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 관헌에게 죽음을 당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 평양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가 고향이라고 한다. 웅천읍성 안쪽을 돌아보니 성벽은 일부만 복원을 한 모양이다. 독일의 로텐부르크 성이 생각나서 비교가 된다. 유럽 사람들은 오래된 성도 살아있는 것처럼 그 당시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와 즐길꺼리를 갖추어 놓았는데 우리는 그런 문화적인 관리능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듯하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에도 들러 둘러 본 뒤에 오늘의 핵심 여행지인 마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마산에 도착해 아들이 꼽아놓은 50년된 화교 중식당을 찾아갔는데 하필이면 쉬는 날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화교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진해가 가까워서 그런지 해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많이들 점심을 먹고 있다. 외박을 나온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마산 3.15의거 기념관과 기념탑, 유해를 모셔 놓은 국립묘지에 들렀다. 이승만과 독재에 아부한 자들의 부정행위에 이들이 항거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북쪽의 김일성 왕조와 같은 변형된 군주국이 되지 않았을까? 3.15의거 기념관과 묘지를 둘러보며 3.15의거 희생자들에게 타도의 대상이었던 이승만 같은 인간을 “국부”로 삼겠다는 자들의 정신세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재와 불법에 항거하는 비무장 자국민에게 총질을 해 대는 인간이 어떻게 “국부” 따위가 될 수 있겠는가? 희생자 대부분이 10대 중고등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이 투표권을 가진 인간들보다는 100배 낫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어제 포항의 학도의용군 기념관에서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린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주열 열사의 가묘를 비롯한 희생자들의 묘역에서 그 분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지금도 국민의 안녕과 민주주의 발전을 불편해 하는 자들이 역사의 퇴행적 잘못을 반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희생자들에게 미안하고 기가 찰 일이다. 어리석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는 막아야 할 것이다. 범죄자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에 범죄자와 그 옹호세력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범죄를 반복하려고 시도한다고 본다. 국립묘지는 경사가 너무 심한 곳에 조성하여 오르내리는데 힘이 들었다. 언덕 아래에 커다란 소주공장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국립묘지에서 내려와 마산 합포구청(옛 마산시청)으로 갔다. 구청 안에 주차를 하고 지도를 보니 합포구청 일대는 3.15의거 현장이 반경 1km 안에 집중되어 있다.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떠 오른 마산 중앙부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마산병원. 시신을 감추고 시민의 접근을 무력으로 막던 독재의 친위대 경찰. 이런 나쁜 유습은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고 ’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학우들의 시신 탈취와 같은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3.15의거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작고한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숨진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시신이 마산항 중앙부두에 떠 올랐던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산 시청 건너편 마산의료원에 안치된 처참한 시신 사진을 본 시민들은 4월12일 다시 궐기했고 마침내 4.19혁명으로 연결됐다.

 

3.15의거 기념탑으로 가려다가 마산합포구청 길 건너편 성지여고 방향으로 언덕길을 올라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장장군 묘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도로 안내 표지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아들과 함께 찾아보았다. 장군이라는 지명과 가게 이름이 밀집되어 있는데 어디 숨어 있는지 정작 장장군의 묘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뱅뱅 돈 끝에 골목 어귀에서 축대 위에 조성해 놓은 무덤을 발견했다. 고려 때 왜구가 350척이나 되는 배를 나눠타고 마산을 침략한 적이 있는데 관군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다 전사한 청년이 있었다고 한다. 오직 장씨라는 성만 알려져서 장장군으로만 부르고 있다는데 마산시민들은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잊지 않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빗방울이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 3.15기념탑 근처에 차를 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을 찾아보았다. 3.15의거 당시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키라고 세금으로 사준 총을 비무장 시민들에게 쏜 것도 모자라 초등학교 안으로 도망가는 시민들을 쫓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만행 현장을 확인했다.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은 철거했다가 예전 총알자국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결국 5.18항쟁에 대한 학살극 역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적 연원이 있는 셈. 초등학교에다 총질을 해대는 일제 부역 매국 경찰 출신들의 악행을 확인하니 더러운 인간이 깨끗한 인간이 되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깨우쳐 준다. 이 더러운 인간들의 이름과 악행은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꼭 전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이 역사적 컨텐츠는 수십년간 수천만명의 관객을 끌어 모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수십만 수백만명이 계속 이 곳을 찾을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2.28대구 궐기부터 3.15의거, 4.12 궐기, 그리고 4.19로 이어지는 혁명의 스토리는 레미제라블처럼 장대한 컨텐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3.15 기념탑 건너편에는 쿠빌라이 칸의 명으로 일본 원정에 나선 몽골군이 마셨다는 몽고정이 있다. 그 우물 옆에는 이 물을 이용해 100년 역사를 이어온 <몽고간장> 회사가 있었다. 어렸을 때 TV광고에서 봤던 몽고간장이 아직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만약 고려-원 연합군이 일본 정복에 성공했더라면 우리의 근세사는 달라졌을까?

 

마산 중앙부두에는 특이한 사진이 트랙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연기 문신 선생(1923~1995)의 사진. 이 지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한다. 그의 경력에 걸맞는 독특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산-창원-진해를 하나로 합친 것이 의아하다. 세 도시가 각각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굳이 합쳐서 어떤 것을 기대한 것일까? “내 고향 남쪽바다” 마산은 이제 노랫말 속에서만 있는 것인가?

 

중앙부두 뒤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수도권과 달리 막히지 않아서 너무 편했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소고기 육전을 고명으로 얹은 교동냉면을 먹는 냉면 매니아 아들의 표정이 흐뭇하다. 길이 막히지 않으니 여행의 재미는 더 크고 피로도는 훨씬 낮다. 수도권이 아닌 곳에 살면 삶의 질은 분명 높아질 듯.



양산 통도사


통도사 영산전 벽화. 서역사람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웅천읍성. 임진왜란 이전 삼포왜란 때 왜구들의 습격이 있었다.


개신교의 대세였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숨진 주기철 목사 기념관


역사를 되돌리려고 하는 인간들이 "국부"로 떠받들고 싶어하는 이승만의 불법 부당한 독재에 항거했던 마산 시민들의 의거를

증언하고 있는 3.15의거 기념관



기념관 위에서서 내려다 본 마산의 모습



희생된 민주수호 영령들을 기리는 고은 시인의 시


일제에 부역했던 식민지 경찰 출신들이 무차별 발포한 총에 맞아 희생된 의인들



3.15 당시에 희생되었다가 4.11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과 당시 기록들

이 시신 사진이 보도된 다음날 마산시민들은 다시 궐기했고 마침내 일주일 뒤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언덕 높은 곳에 있는 3.15 의거 기념조형물


언덕이 가팔라 웅장한 모습을 주긴 하는데 접근하기는 힘든 구조


김주열 열사의 가묘.

당시 독재수호에 앞장 선 경찰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고향인 남원으로 빼돌려 매장하였다.



사당 앞에 서 내려다본 마산 전경


공민왕 때 마산을 침략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젊은 장수의 무덤



3.15의거 기념탑 옆에 있는 몽고정, 이 우물에서 일본 원정에 나선 몽골군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3.15 의거 기념탑


기념탑 오른쪽 아래에 있는 무학초등학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 오른 마산 중앙부두.

이 지역 출신의 세계적인 미술가 문신의 사진이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Posted by 연우아빠.

영남 여행 (1) 경주와 포항


2015.10.09~2015.10.11

 

10월, 사흘간 연휴를 맞아 아들이 그동안 가보지 못한 영남지역의 남은 땅을 여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경산까지 오가는 경험을 해 보고 싶단다. 중간고사 준비하느라 하룻밤 사이에 대충 가보고 싶은 곳을 정리해서는 아버지와 함께 경북 동부(경주, 포항, 영천)의 유적지, 경남(양산, 마산)의 유적지, 경북 서부(구미, 왜관, 대구)의 유적과 문화공간을 찾아보고 싶단다.

 

고등학생인 딸은 수학여행을 가서 10월 8일에 돌아오는데 아내는 딸과 함께 집에서 지내겠다고 한다. 유진네 부부가 대관령과 선자령 트래킹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아들이 경험치를 높이기 위해 혼자 기차를 타고 경산까지 왕복하겠다는 계획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항의에 깨끗하게 포기를 하고 7일날 저녁부터 사흘간 지낼 음식을 준비했다. 소고기 불고기를 재워놓고 소고기 구이, 꽁치 구이, 콩나물국, 두부 조림, 오징어 찌개 등 두 사람이 몇 일 간 지낼 음식을 준비했다.

 

8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수원에서 기차를 탄 아들이 9시 조금 넘어 경산역에 도착했다. 4시간 가까이 걸린 기차여행이 몹시 지루했다고 한다. 숙소로 아들을 데리고 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내일 경주 포항 지역 여행계획을 얘기했다. 경주에서 가보지 못한 가운데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 그리고 소지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서출지를 목록에 넣었다. 포항에 가서는 맛있는 포항물회를 먹고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호미곶, 등대박물관 등을 돌아본 뒤 돌아오는 길에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을 들르기로 했다.

 

10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복통과 설사가 밀려왔다. 어어 하는 사이에 상태가 더욱 나빠져서 밤 사이에 20~30분 간격으로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잠도 못자고 탈진 상태에 빠졌다. 아들은 자고 있는데 걱정이 밀려온다. 수도권처럼 길이 막히지는 않으니 천천히 다닐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 길을 나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저녁에 먹은 것을 곰곰이 되짚어 보니 아들은 먹지 않고 나만 먹은 음식은 오징어 찌개뿐인데 아무래도 그 찌개가 상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난 아들은 아프다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 절반, 모처럼 벼른 여행을 못 갈까하는 걱정 절반이 섞여 난감한 표정. 아들에게 아침밥을 주고 나는 사과 1개만 먹었다.

 

운전을 못할까 걱정스러웠는데 느즈막히 10시쯤 길을 나서서 경주 용담정을 향해 갔다. 용담정 가는 길에는 차도 거의 없고 누런 벼가 익은 들판에 추수하는 사람만 간간히 보였다. 호젓하다 못해 쓸쓸한 느낌이 드는 용담정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경내로 올라갔다. 예배시간인지 경전을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용담유사는 이 곳에서 동학을 창시한 최재우 선생이 남긴 경전이라고 한다. 어려운 문자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용담유사를, 글을 많이 배운 사람에게는 동경대전을 남겼다고 하는데 천도교 신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천도교에도 묻어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더 움츠러든다. 따뜻한 햇볕이 주차장에 가득하다. 차 안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20분쯤 눈을 붙여 어젯밤에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몸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

 

용담정에서 서출지 가는 길은 경주에서 한 달 간 하는 실크로드 축제 때문인지 시내로 들어가는 차가 끝없이 이어져있다. 우리는 반대 방향이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서출지까지 쉽게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출지를 찾았으나 안내표지판을 발견하지 못해 서출지 주변을 뱅뱅 돌다가 뒤늦게 서출지라는 것을 알았다.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서출지 풍경.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서출지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서스펜스 추리극이라 불러도 좋은 내용인데 정작 문화컨텐츠를 찾는다는 현대의 관광정책이 이 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독일 브레멘에 갔을 때 <브레멘 동물음악대> 동화 하나를 테마로 해서 관광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연극공연을 하고, 숙소나 골목에 동물음악대 캐릭터를 조성해 놓아서 많은 사람에게 재미를 주었던 장면이 생각났다.

 

서유럽이라면 이 서출지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서출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지왕, 까마귀, 돼지, 생쥐, 바람난 왕비, 왕을 암살하려고 거문고 갑에 숨어 있는 중 등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관광 컨텐츠를 만들었을까? 신라 때 복장을 입어보고 소지왕이 거문고 갑을 쏘는 장면을 위해 당시의 활과 화살도 재현해 관광객들에게 직접 쏴보게도 하고, 서출지 이야기를 아이들을 위한 그림자극으로 상설 공연을 하고, 어른들을 위해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을 하고, 캐릭터를 기념품으로 만들어 팔 수도 있을텐데. 또 박제화된 판소리 12마당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이런 드라마틱한 소재를 창작 판소리로 만들어 이 근처에서 상설 공연하는 것도 충분히 해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아들과 나누었다. 우리 아들 많이 여행을 하더니 이제 이런 생각도 한다. 기특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포항 환여횟집. 3년 전에 이 집에서 먹었던 포항물회가 정말 맛있었는데 아들이 포항물회를 먹자고 해서 이 곳으로 점심 장소를 정했다. 그러나 속으로 걱정스러웠다. 배탈이 난 상태에서 찬 것을 먹어도 괜찮을까?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손님은 여전히 많다. 주문을 해 놓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뜨거운 물을 두어잔 마셨다. 따뜻한 밥을 반 공기 정도 미리 먹어서 속을 다독인 다음 조금씩 물회를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맛있다. 유명해지면 손님이 많아지고 불친절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여전히 친절하다. 옆자리에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6인상에 앉으려 하자 종업원이 4인 상으로 옮겨달라고 한다. 사장님이 얼른 그렇게 할 필요 없다고, 편안하게 6인상에 앉아 어린 아이를 누일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런 마음이 참 훌륭하다.

 

점심 먹은 뒤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찾았다. 안내문에 오타도 있었고, 얕은 역사의식과 낮은 인권의식을 듬뿍 담고 있어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1949년에 체결된 제네바 협약, 그리고 1998년에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 <아동의 무력충돌 참여에 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선택의정서> 등은 만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전쟁에 징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포항시에서 세운 안내문에 기록된 것처럼 화랑이 아니라 문명국이라면 전쟁에 투입해서는 안되는 학생들이었다. 군번도 계급도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총을 쥐여 적과 싸우게 한 것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일이다. 이 포항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포화 속으로>에는 당시의 무책임한 군 지휘부의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도 국군의 도움없이 71명의 학생이 포항전투에 단독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 할 어른이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들이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다 해도 2002년 7월에 건립했다는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는 적어도 “얘들아 미안하다” 라는 글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념관을 돌아보는 내내 피어보지 못하고 죽은 그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똑 같은 희생을 부추기는 듯한 기념관 내부 전시물을 돌아보며 역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죽였다고 자책하고 어머니께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는 고 이우근 학생의 메모가 짠하게 다가온다.

 

기념관을 나와 동해 호랑이 꼬리를 찾아 시원한 바닷가로 달렸다. 티없이 맑은 하늘과 햇살 때문인지 동해는 더 짙푸르다. 매년 1월1일 TV에서 보는 그런 아수라장이 아니라 빛 고운 가을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금빛 햇살이 바다 풍경과 잘 어울린다.

 

고래를 닮은 조형물에 앉아 멋진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고 연을 날리며 연휴를 즐기는 아이들도 많다. 공원 근처에 있는 등대박물관은 바닷길을 밝히는 등대의 역사에 대해 흥미 있는 지식을 전해 준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영천의 임고서원은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곳이다. 짧은 가을해가 아쉬운 시간. 해는 넘어갔지만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임고서원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은 완전히 해가 넘어간 길. 예상치 못한 배탈에 몸은 힘들었지만 아들과 함께 한 오늘 여행은 그런대로 좋은 느낌이다. 숙소로 돌아와 아들에겐 소고기를 구워주고 나는 따뜻한 콩나물 국을 끓여 탈진한 몸을 추스렸다.



용담정 입구


동학혁명의 정신적인 기반이 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


옛날 용담정이 있었던 곳에 새롭게 한옥을 지었다


소지왕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경주 서출지


서출지에서 나온 노인이 소지왕에게 전했다는 글.

이 봉투를 열어 글을 읽으면 두명이 죽고 읽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는 글



6.25 당시 포항전투에 참전해 희생된 학생들의 행적을 전하는 기념관.



호랑이 꼬리에 있는 고래모양의 조형물



맑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호미곶 공원의 햇살이 아름답다



커다란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날리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날 구해 주!는 아니고 바닷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청동 손


호미곶 공원에 있는 등대박물관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 고려말 삼은 가운데 한 분인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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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우아빠.

부여 나들이

답사여행 2015.09.11 17:13

부여 나들이(2015. 8.15~16)


딸래미가 부여 쪽으로 1박2일 캠프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어

덕분에 우리는 오랜만에 부여를 가게 되었다.

갑작스런 캠프참가로 우리가 머물 숙소를 구하진 못했지만

현지에 가면 어쨌든 방 하나 정도야 구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역시나 늦은 출발 때문에 조마조마하게 길을 달려서

정시에 캠프 집결지에 딸을 내려주고

우리는 이 지역을 갈 때마다 들러야지 하고는 가보지 못한 마곡사를 찾아 가기로 했다.

 

 

17일에 아들과 함께 러시아 여행을 가기로 예약이 되어 있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아내의 걱정이 있었지만,

이 정도야 뭔 상관이랴? 하는 생각으로 마곡사로 달려갔다.

 

 

 

태화산 마곡사라고 일주문 앞에 멋진 글씨를 담은 현판이 걸려있다.

 

 

부처님 오신날도 지났는데 아름다운 연등이 절로 가는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백제 유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장식인 듯....

연등을 찍었는데 가족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함께 찍혔다.

 

 

 

의자왕 3년(서기 643년) 백제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옛 사람들의 안목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남아 있다.

 

 

법당 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깎아 장식했는데,

문살 안 쪽에 희미한 윤곽만 남아 있는 돋을새김 그림도 남아 있다.

아마도 창건 초기에는 화려한 채색이 있었을텐데 세월이 지나 색은 모두 벗겨진 듯 하다.

 

 

 

갈수기에는 이렇게 징검다리를 건너서 갈 수 있는 큰 개울이 절 앞에 있다.

계단을 내려가 개울을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

 

백범 선생님이 마곡사에 은거하며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장소가 있다.

지금은 전망대처럼 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이 개울을 바로보며 소년접주로 참가했던 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여기 숨어서 지냈던 그 분의 심정은 어땠을까?

 

 

늦은 시간이라 절을 샅샅이 돌지 못하고 중간에서 내려왔다.

 

 

절 안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어 더운 날씨도 식힐 겸 팥빙수를 시켜서 맛있게 먹고 부여로 향했다.

다행히 좋은 숙소를 구하게 되어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아들 녀석은 태어나서 처음 모텔에서 자 본 것이 아닐까?

 

 

아침을 먹고 정림사지박물관을 찾았다.

여러번 온 곳이지만 몇년사이에 주변이 많이 바뀌었다.

 

 

정림사 옛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5층 석탑.

예술적인 완성도, 그리고 당시 몇백년간 한반도 지역의 석탑의 모델이 된 이 아름다운 탑은

소정방이 남겨놓은 낙서 때문에 백제멸망의 비극을 혼자 떠 안고 있다.

 

 

가까이에 당나라 침략군의 지휘관 가운데 한명인 유인원이 남긴 공적 자랑용 기공비가 있다.

 

 

딸과 다시 만나기 전, 몇년만에 다시 부여박물관에 들러 늦더위를 식히기로 했다.

 

 

도자기 발명 전에 최고로 세련된 토기의 모습

 

그리고 백제 사람의 얼굴을 담고 있는 불상의 머리.

 

지붕을 장식했던 대형 치미(용꼬리) 등등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본 뒤에 부여 외곽에서 캠프를 마치고 나온

딸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강원도에만 있는 줄 알았던 <장원막국수>집이 부여 근교에도 있었다.

길고 긴 줄을 서서 이 근처에서 제일 맛있다는 막국수를 먹었는데,

다행히 막국수 단일 품목만 하는 집이라 회전속도는 놀랍게 빨라서 예상보다 빨리 나올 수 있었다.

 

딸래미 덕분에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이었지만 괜찮은 여행이었다.

Posted by 연우아빠.

이슬람 중앙성원(2015. 5.24.)


12시가 넘은 시간, 

운현궁에서 가까운 냉면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 게 어떻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준기는 이태원 이슬람 성원 근처에 가서 색다른 음식을 찾아보자고 한다.


전철을 타고 이태원 역으로 갔다.

다리에 힘을 키우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는 내려가는 것만 타고, 올라갈 때는 모두 계단으로만 다녔더니 조금 피곤했다.


이태원 역에 내려서 이슬람 중앙성원 자리를 확인한 뒤 길을 올라갔다.

파샤(Pasha)라는 음식점이 보였는데 <할랄>이라는 표시가 보였다.

그리고 유럽여행 중에 여러번 맛보았던 케밥이 보였다.


이 집에 들어가 먹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주문과 계산을 먼저 하고 자리를 잡으러 들어가는 특이한 시스템으로 운영을 한다.


안에는 자리가 몇개 되지 않아 13명 정도 앉을 자리가 있을 뿐.

계산서를 보니 상호는 (주)아나톨리아, 대표자는 알리라고 되어 있다.


우리 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주문과 받고,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이 홀 서빙을 담당하고 있는 듯.


'파샤'라는 왠지 페르시아를 지칭하는 한자어 파사와 닮은 듯하여 서빙을 하는 터키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파샤'는 터키를 뜻하는 옛날 말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케말 퍄샤에도 쓰인 저 파샤는 페르시아의 영어식 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홀 안에 우리 집에 걸려 있는 이 기념품과 똑 같은 그림이 보여서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나자르 본주' 액운을 막는 <시선의 유리구슬>이라고 한다.


나는 구운 닭이 주 메뉴인 음식을 주문했고, 준기는 양고기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는데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맛있었다. 향신료와 음식은 매우 잘 어울렸고 양고기와 닭고기 모두 부드럽고 맛있었다.

음식을 남김없이 비우고 나오는데 주방에서 "맛이 어때요?"하고 물어본다.


"너무 너무 맛있어요. 혹시 터키에 가도 이 음식을 맛볼 수 있나요?' 라고 물었더니

"여기 메뉴는 모두 터키 전통음식입니다. 물론이죠."라고 대답한다.

엄지를 치켜 주고 밖으로 나와 중앙성원으로 가는 언덕길을 찾았다.

  


잠시 길을 착각해 반대쪽으로 건너왔는데 길 건너편을 보니 온통 이국적인 음식점이다.

특히 왼쪽 아래 케밥을 파는 가게 앞에서 재미있는 쇼맨쉽을 보여주는 터키 아이스크림 판매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저 멀리 이슬람 모스크의 미나레트가 보인다.

이 거리는 대부분 무슬림과 관계 있는 가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엣날에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입니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알라가 하나님이라는 개신교식 명칭으로 바뀌어서 낯설었다.

입구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성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더니 문제없다고 하면서

아들과 나에게 각각 시원한 얼음물 한 병씩 선물로 준다. 순간 당황했다.



그들의 친절함에 입구에 들어서서 한글 안내판을 들여다 보았다.

여기 금지 사항만 어기지 않으면 무슬림 성원을 구경하러 들어가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성원 왼쪽으로 화살표가 있어서 따라 갔더니 무슬림들이 천막을 치고 가득히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왠지 들어가면 안될 것 같다 다시 내려와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바로 모스크가 보이는 마당이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을 계단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건너편에 있는 이쪽으로 모이게 안내한다.

그리고 또 시원한 캔 음료를 한개씩 마시라고 준다.(이거 너무 미안한데....)


나중에 사연을 알아 보니

오늘은 무슬림 신자들만 모아서 가르침을 전하는 <이스테마>일이라고 한다.

이스테마는 1년에 3번 있는데, 이 날만은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성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올해는 5월23~25일이 이스테마 기간이며, 이 날이 지나면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도 저 계단 위 모스크 입구에서

모스크 안쪽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내부 구경을 할 수 없어서 몹시 아쉬웠지만 서울에서 무슬림의 세계를 구경하는 경험을 했으니 그리 나쁘진 않다.



되돌아 내려오면서 성원 입구에 있는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도자기를 촬영했다.

청화색 도자기는 중앙아시아에서 수입한 안료를 써서 만든 조선 청화백자에서도 볼 수 있다.



다시 아까 보았던 케밥집 앞에서 터키식 아이스크림인 돈두르마를 파는 곳으로 왔다.

온갖 현란한 손재주로 재미있게 돈두르마를 담아서 파는 터키 사람이 신기해 많은 사람이 발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가만히 보니 손님의 나이에 따라 보여주는 묘기가 다르다.



준기와 나도 한개씩 바닐라, 멜론, 딸기, 초코가 섞인 돈두르마를 샀다.

찰기가 강한 듯 아이스크림을 퍼 담는 도구에 매달아 놓아도 떨어지지 않아 순간 깜짝 놀랐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은 로마에서 맛 보았던 젤라또를 연상하게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종교시설마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우리 이웃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 양식을 조금 맛보고 온 하루가 산뜻한 즐거움을 준다.

Posted by 연우아빠.

운현궁

답사여행 2015.05.25 00:01

운현궁(2015. 5.24.)


조선역사 518년을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있었던 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그는 세도정치로 망가진 조선의 왕권을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던 중농주의자였다.


<천하장안>으로 불렸던 심복 4사람을 이용해 세도정치를 무너뜨렸지만

뿌리 깊은 조선왕조의 고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민황후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수운회관 길 건너편에 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가 살았던 운현궁이 남아 있다.

고종황제는 여기에서 태어났다.



운현궁의 건물배치는 이렇게 생겼다.

그런데 건물이름이 매우 이상하다.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



출입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수직사 건물이 있다.

현직 임금의 부모가 거처하는 집을 지키는 일이 어찌 소홀했겠는가?

수직사에는 많은 병사들과 사람들이 거처했던 듯, 옷과 베개, 화로, 등잔, 장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락당. 여기에서 고종과 민황후가 대례를 올렸다고 한다.

우연인지 여기에서 진짜 결혼식이 있었다. 한국인 신랑과 일본인 신부.

조선시대의 차일을 치고 옛날 방식의 혼례였다.



이로당을 따라 제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노락당 북행각에서 전통염색 체험을 하는 모양이다.



북행각을 뒤로 돌아 이로당 뒷편까지 가 보았다.

원래 있던 추녀 끝에 나무판을 덧댄 지붕이 보인다.

댓돌 아래에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공간을 띄어 놓은 것이 보인다.

여름에 앞 뒷문을 열어 놓으면 맛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이로당 앞 마당.



파노라마로 찍은 이로당



마지막으로 제일 앞에 있는 노안당으로 왔다.

여기 처마에 올라서 비로서 드나드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노안당 서행각을 통해 들어오는 문은 솟을대문이다.

남자가 드나드는 문. 즉 이 노안당은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이다.



그리고 노안당에서 노락당으로 드나드는 문은 여자가 드나드는 문이었다.

담 바깥쪽에는 남자가 드나드는 솟을대문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이로(二老)는 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를 지칭하는 용어이며,

논어 가운데 '노자를 안지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왠지 민황후와 고종이 두 노친네가 여기서 즐겁게 지내는데 만족하고, 이제 정사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지척에 있는 경복궁과 대원군의 사저.

그리고 주변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들이 이제는 햇살 따뜻한 도심이 고요한 정원 같다.

Posted by 연우아빠.

천도교 중앙 교당을 찾아서(2015. 5.24.)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자에 맞선 종교는 쇠퇴하거나 사라졌고

권력자와 협력했던 종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권세를 누렸다.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는 거의 모든 신도가 열렬한 광복전쟁 수행자로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은 서학에 맞서 이 나라 사람들을 살리려는 사회변혁운동을 거세게 일으켰다.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후천 개벽을 실현하려하다 좌절을 맛보았으며,

그 탓에 동비라 불리며 집권세력인 사대부의 가혹한 탄압에 직면했다.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창시자와 2대 교주는 모두 참수되었다.

더구나 최시형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악질적인 부패관리 조병갑이 고등법관으로 앉아있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그 생을 마감했다. 그 분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후천 개벽 세상을 보았을까?


3대 교령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한 탓에 천도교는 교세를 키우기 힘든 상황이었다.



종로3가역에 내려 안국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자 현대식 건물인 천도교 수운회관이 큰 길 옆에 보였다.

길 건너 편에는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이 있고, 길 아래쪽에는 낙원상가가 있다.


대각선 건너편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천도교 회관 앞에는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표지석이 있다.

어린이날을 처음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이 곳에서 사람대접 제대로 못 받던 아이들을 소중하게 키우자는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고,

천도교는 어린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발상지 표지석 뒤에는 방정환 선생의 말을 새겨 높은 비석이 있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 1930년 7월 어린이 인권 운동가 방정환 -


비석 너머에 빨간 건물이 중앙교당이다.



중앙 교당 입구에는 천도교에서 편찬한 잡지 <개벽>을 발간하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오래 전 국사교과서에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던 천도교 중앙교당이 장중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마침 예배시간이라 예배당 안을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어린이와 어른이 서로 존중해야 할 행동에 대한 표어가 걸려있다.



정면에서 본 모습.

19세기말~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빨간벽돌과 아치형 출입문.




교당 정면에서 작은 쪽문으로 나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룡(1898~1943) 선생이 설계한 민병옥 한옥이 있다.

이 집은 민영휘의 손자 민병옥과 민병완의 집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민영휘는 민황후의 먼 친척으로 축재에 능했던 사람이었다.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을 세웠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받았던 은사금도 받았으며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



1919년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선언문은 여기에서 바로 길 아래에 있는 파고다공원으로 배포되었다고 한다.


매국으로 자손대대에 영화를 누리고

이민족의 침략과 권세에 맞서 싸웠던 사람과 종교는 비참한 현실에서 좀체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

그게 우리 가까이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Posted by 연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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