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일고에서 만나는 항일투쟁의 역사

 

5.18일 새벽

일찍 잠든 덕분인지 새벽에 눈을 떴다. 아침을 먹으려면 일찍 일어나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가족들은 평소 주말과 다름없이 늦잠을 잔다. 

9시쯤 숙소를 나와 시내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5.18 국립묘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 같아 참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은 광주 시내 쪽으로 가기로 했다. 

숙소를 나오니 5.18 행사 때문인지 사복 경찰과 정복 경찰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오늘은 양동시장에서 정율성 선생 생가까지 이어진 구간을 돌아보는 일정. 

양동시장은 5.18 항쟁당시 시장상인들이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해 먹였던 곳이며 호남에서 제일 큰 전통시장이다. 


국립묘지에서 큰 행사가 있기 때문인지 시내는 아주 조용했다. 

양동시장을 찾아가는 길에 한참동안 점집이 이어진 길이 나타났다. 

암울한 세상을 겪으며 희망을 얻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문일까?

 

광주천 복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양동시장으로 들어갔다. 

오전이라서 그런지 시장은 조용했다. 

시장 구경을 하면서 두어가지 물건을 사고 아침 먹을 곳을 찾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식사를 했다는 식당을 발견했다. 


마침 그 분이 식사를 했다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쉬움을 많이 남기고 역사적 인물이 되어 버린 분이라 그 분이 남긴 흔적이 반가워 그 분이 앉은 자리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으며 전체 구간을 다 걷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할 것 같아서 선이 아닌 점을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가까운 곳에 광주일고가 있다. 아내가 주차 안내원에게 광주일고 가는 길을 묻길래, 내가 얼른 말을 잡아 챘다.

“일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길을 확인한 뒤 아내가 묻는다.

“일고는 무슨 얘기야?”

“응, 여기 사람들은 광주일고라 부르는 것보다 ‘일고’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 

호남 제일의 명문 광주서중, 광주고보를 이은 자부심이랄까, 

항일투쟁의 상징이기도 하고 선동렬의 모교이기도 하고 

유일하게 메이저리거를 3명이나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고..그걸 존중해 줘야지”

 

“와! 대단한 학교다” 아들이 한마디 거든다.

 

광주일고를 찾은 이유는 여기에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투쟁에 대한 흔적을 찾으려는 것. 

일고 안에는 이 날의 투쟁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다니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중학 3학년생이던 후쿠다 슈조(福田修三)를 비롯한 3명이 광주여고보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학생을 희롱하는 일이 있었다. 

현장에서 이 모습을 본 사촌 동생 박준채가 후쿠다와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고, 

한일 학생들의 집단 싸움으로 번졌다. 


일본 경찰, 차장, 신문사는 일방적으로 일본인 편을 들었고 

결국 전국적인 항일투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싸움에는 전국에서 194개 학교에 54,0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하였다.

(자세한 전말은 나주문화원의 자료 참조 http://www.najuculture.or.kr/docu/html/menu200/sub02_6_2_1.asp)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차별’이었다. 

민족차별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 끝끝내 광복을 위한 항쟁을 하게 만들었다. 

작은 시비가 전국적인 항일투쟁으로 번졌던 이유는 일제의 차별을 의식했던 송홍 선생님 같은 훌륭한 교사와 

우리 청소년들이 평소 ‘독서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다듬는 활동을 한 것이 바탕이 된 것이다.

 

경내에 세워 놓은 “광주학생의거기념탑”은 친일했던 부끄러운 인간들의 면죄부인지도 모르겠다. 

친일 했던 군상들은 11월 3일 학생의날 마다 일어나는 반독재 시위에 학생의 날을 국가기념일에서 제외하는 쪼잔한 보복을 가했다.

 

친일 했던 한 문인은 이 탑에 이런 가당치도 않은 문구를 새겼다.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가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면 

친일했던 그 자신이 부끄러워서라도 이 기념탑에 자신이 글을 새기는 짓은 사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호남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양동시장 입구. 5.18 행사가 있는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의외로 조용했다.


양동시장 안에 있는 국밥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투쟁 당시 학생들을 가르쳤던 송홍 선생님

그의 자손들이 월북을 하는 바람에 역사에서 묻혀 버렸지만, 이분의 민족의식 교육이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기념비가 있는 입구 왼쪽에 있는 선생님의 흉상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초등학생 때 배운 이 문구는 감동을 주었지만, 이 글을 쓴 자가 친일 매국노였다는 사실을 알고 구역질이 났다.

글을 배운 자라면 어찌 자신의 행적이 부끄러워서라도 이런 기념물에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당시 동맹휴학에 참가한 학교들의 깃발


1959년 항쟁 30주년 기념일에 당시 동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모여서 쓴 서명


학생독립운동 당시 전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놓은 전시관 내부



 

□ 중국 현대 음악의 거장, 정율성

 

광주일고를 나와 정율성 선생 생가를 찾아 갔다. 

정율성 거리 근처에 차를 대고 시원한 것을 먹으러 갔다. 

우연히 고든 어비슨 기념관을 발견했는데 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피폐해진 한국 농촌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한 캐나다계 미국인 선교사라고 한다.

기념관 안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것을 먹고 아픈 다리를 잠시 쉬었다.

 

광주시내 여행 구간의 마지막에 있는 정율성 거리. 

우리나라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생가를 찾는 중국 관광객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현대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거장이다. 

1933년 중국에 망명을 해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에 몸을 바쳤다. 

1937년부터 항일가요들을 작곡하기 시작해 유격전가, 전투부녀가 등을 작곡하였으며, 

지금도 전체 중국인민들이 알고 있다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연안송을 비롯한 36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지금도 중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을 받고 있다. 

1976년 베이징에서 숨을 거둔 그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베이징 팔보산 혁명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가족사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이 망한 뒤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큰형인 정효룡은 3.1 항쟁에 가담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고국에 잠입해 비밀공작을 수행하다 1934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으며,

둘째 형인 정인제는 국민혁명군 제24군 참모로 복무하다 중국 무한 전투에서 전사했고, 

셋째 형인 정의은 역시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일했다고 한다.

 

해방 뒤 그는 북한을 위해 조선인민군행진곡(지금의 조선인민군가)을 지었는데 

이것이 남북 이념대립으로 인해 항일투쟁의 업적이 묻히게 되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서 연주한 곡이 바로 이 조선인민군가라고 한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문화혁명 와중에 반당분자, 간첩으로 투옥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는데 

모택동이 죽은 1976년 사면 복권되었으나 그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무덤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국 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를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설했다.”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하지만 열렬하게 살다간 한 인간의 역사에 표현할 수 없는 처연한 감상이 묻어나온다.

정율성 거리에는 그의 대표작품 6개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는데, 그가 작곡한 노래는 경쾌한 느낌을 준다. 

암울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힘차게 전진하려는 그의 의지가 배어 있는 듯하다.



광주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선생 생가. 자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골목 끝에 있다.


생가 근처에 있는 정율성거리. 그에 일생에 대한 안내판


그가 작곡한 360여개 곡 가운데 6개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장치.


정율성 거리 끝에 있는 정율성 동상.


그리고 바닥에 있는 물고기 그림. 누가 그렸지?



 

□ 2천년전의 세계, 광주 신창동 유적

 

1992년 광주시내를 관통하는 영산강변에서 대단한 유적을 발굴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광주 신창동 유적,

이 유적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직물, 현악기, 벼농사 유적, 재배식물의 씨앗, 농사도구, 칠기를 비롯한 유적 유물은 물론 

멀리 중국과 일본과 교역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이 유물은 보러 국립광주박물관에 들렀다. 

시멘트로 지은 기와건물이 눈에 거슬렸지만 볼만한 유물이 많은 박물관이었다.

 

1800년전 토기에 새겨진 서역인의 얼굴, 그리고 나주 영산강 일대에 넓게 퍼진 불꽃 장식의 금동관과

이 지역을 대표하던 조선 지식인들의 계보와 활동내역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주었다.

 

아침에 고기국밥을 먹어서 그런지 점심 생각이 별로 없는데다 날씨도 더워서 광주에서 유명한 팥빙수를 먹으로 갔다. 

장억떡집(예다손떡)이라는 가게인데 떡집으로 빌딩을 세운 집이다. 

1층에 떡을 넣은 팥빙수를 파는데 그림처럼 예쁘고 맛있는 떡과 함께 팥빙수를 시켜 남도의 더위를 식혔다.



국립광주박물관


1992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한 2천년전 유적,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유물들


3세기 경, 서역인의 모습이 완연한 돌에 새긴 얼굴


달처럼 아름다운 달항아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연못. 광주박물관 본관 올라가는 길에 길게 물길과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 문무를 겸비한 선비, 김덕령

 

이럭저럭 5시가 다 되가는 시간.

광주가면 꼭 가봐야 한다고 준기가 노래 부르던 충장사를 향해 달렸다. 

임진왜란 당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장 가운데 호남을 대표하는 이가 있다면 충장 김덕령을 꼽을 수 있다. 

지금 광주의 중심가인 충장로는 이 분의 호를 딴 것이다. 

무등산 고개를 넘고 계곡을 달려 충장사에 도착한 시간은 5시 20분쯤. 6시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진 준기가 달려간다.

 

선조 즉위년에 태어난 충장공은 담양에서 의병 5천을 모집했는데 

분조를 이끌며 전주에 내려와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익호장군이라는 군호 때문인지 그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선조 28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왜군을 격퇴해 선조임금에게 충용군의 군호를 받았고 

이 충무공, 곽재우 등과 함께 협력 작전으로 남해안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선조 29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였으나 이몽학과 내통한 충청도 순찰사의 모함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 숨을 거두었다.

 

숨진 지 65년만에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 되었고, 

역대 왕들이 그에게 벼슬을 추존하다가 정조 12년(1788년)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강력한 외적이 침략을 당하고,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했던 왕과 달리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킨 때문인지 

스스로 정통성에 자신이 없었던 임금 때문인지 선조임금은 참 많은 선비와 관리들을 죽인 못난 임금이었다. 

김덕령은 그런 시대였기에 33살의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삼족은 큰 타격을 입어 본관을 바꾸고 신분을 속여 후손을 이어갔다고 한다.

 

공자와 맹자는 인, 의, 예, 지, 신을 주저하거나 왜곡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의 가르침을 본받는다는 조선의 위정자는 결코 그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왜 솔직하지 못했을까? 

솔직했더라면 더 멋진 왕, 더 멋진 나라가 되었을 것을...

겉모습만 어른이지 아이들만도 못한 정신적 미성숙이 몹시 아쉬운 대목이다.

 

6시까지라던 관람시간은 5시 45분이 되자 문을 닫아버렸다. 

전시관을 보지 못했는데....

 

다음에 다시 오면 멋진 무등산을 한번 올라보기로 하고 어제 못 먹은 ‘담양애꽃’ 식당을 찾아 갔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었을뿐인데 오늘도 저녁식사 손님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안내에 허탈했다. 

광주에 사는 입사 동기에게 전화를 해서 예전에 그 친구과 같이 갔던 퓨전 한정식 집(들풀)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일 다시 도전하리라! 아내는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지 꼭 맛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무등산 안쪽에 있는 충장사


선조 임금에게서 받은 군호. 충용군을 딴 충용문

충장공을 모신 사당


충장사 뒷편 언덕에 충장공이 신원이 된 뒤 그의 부인과 함께 묻힌 부부합장묘.

사후 65년만에 신원이 된 그를 선영으로 모시기 위해 무덤을 팠을 때 그의 시신은 썩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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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우아빠.

2010.5.21~23 지리산자연휴양림


아버지의 희망, “지리산에 올라보고 싶다. 그리고 이 참에 노무현 대통령 생가에도 가보자.”


2008년 5월 칠순 때를 맞춰 지리산자연휴양림에서 가족이 함께했지만 정작 그 전날 회문산에서 무리한 등산을 하신 아버지는 노고단 가족 등산에는 가지 못하시고 휴양림에서 쉴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생각이 나서 아버지께서 지리산 가실 생각이 있으신지 여쭈어 보았더니 올해는 꼭 가보자고 하신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도 한번 가보고 싶으시단다. 작년 이맘때 뜻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살아계실 때 한번 생가를 방문하겠다던 뜻을 이루지 못하셨지만 1주기 행사만은 참여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망.

그러나 4월1일 회의 때문에 예약사이트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주은아빠께 대신 부탁드렸으나 주은아빠도 외근 중. 결국 대기를 걸어 놓았다가 출발하기 이틀 전에야 숙소를 얻을 수 있었다. 부산 사는 동생과 만나기로 하고 출발하는 날, 3일 연휴 때문에 많이 막힐 것 같아서 일찍 출발해야 했지만 마음과 달리 가족들은 역시나 늦다. 그래도 8시에 출발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 늦은 출발 탓에 대전까지 느릿느릿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점심은 전주 왱이콩나물국밥 집에서 먹고 성삼재로 향했다. 노인의 몸 상태는 언제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몸 상태가 좋으신 것 같아 내려가는 길에 바로 등산을 하고 휴양림에 들어가 푹 쉬기로 했다. 또, 내일과 모레는 계속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오늘 오르지 못하면 기회를 다시 잡기가 쉽지 않을 듯.


2년만에 다시 찾은 노고단

거의 오후 3시가 돼서야 성삼재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휴게소 바로 앞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재작년에 해보고 싶었던 대피소에서 라면 끓여먹기 대신 컵라면을 준비해 길을 재촉했다. 2년전 길을 단장하던 공사를 했었는데 아주 깔끔하게 잘 정비가 되었다. 계단을 피해 쉬엄쉬엄 오르는 길을 따라 가노라니 철쭉이 드문드문 피어 있고, 이팝나무 꽃 향기가 온 산을 덮었다. 아주 편안한 길이라 쉽게 올랐지만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노고단 출입시간이 끝났다고 한다. 노고단 정상 표지가 저 앞에 보이는데 아쉽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여기까지 올라 오신 것에 아주 만족하셨고, 지리산의 장관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흡족해 하신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대피소에 들어가 미니버너를 꺼내 물을 끓였다. 재작년에 못해본 대피소에서 컵라면 맛보기. 지리산 물로 끓여서 그런지 같은 인스턴트 식품인데도 맛이 다르다. 미니 주전자라 물이 조금 모자라 더 끓이려고 했더니 옆에 물을 끓이신 분이 남은 물을 나누어 주신다. 3일 연휴를 맞아 종주여행을 오신 분이 많나보다. 침낭에 완전하게 장비를 갖춘 분들이 제법 많다.


휴양림에 들어가 먼저 도착한 동생을 만났다. 연우와 희원이는 간만에 만난 것을 반가워하며 곧 자기들만의 휴대폰 장난에 빠져들고, 준기는 준기는 사촌 여동생 둘을 데리고 제법 잘 놀아준다. 숯불을 금지하는 휴양림이라 베란다에서 전기그릴에 고기를 구워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에 비를 머금고 있다. 오늘 노고단을 다녀온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아버지는 등산을 피곤함과 지리산을 올랐다는 만족감으로 일찍 잠에 드셨다.


구례 화엄사, 날아갈 듯한 일주문

5월 22일 새벽, 바람소리에 잠을 깼다. 정부행사준비에 2주간 파견 나갔다가 밤샘 일을 한 탓에 생겼던 감기몸살 휴유증으로 일주일 동안 계속 밤마다 기침이 심했는데 거짓말처럼 나았다. 몸은 너무 가뿐하고 머리는 상쾌하다. 아버지와 함께 계곡 안에 있는 나무 구경을 했다. 바람을 타고 이팝나무와 층층나무 꽃향기가 휴양림에 진동한다. 아침을 먹고 동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마이산과 남원 광한루로 구경을 나가고 우리는 지리산에서 내려다봤던 구례 화엄사로 해서 하동 쌍계사를 가보기로 했다. 생각 같아선 지리산을 한바퀴 돌아보고 싶은데 쌍계사 이후에는 길이 좋지 않다. 성삼재를 지나 구례로 내려와 화엄사에 도착했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 화엄종을 대표하는 종찰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사찰과는 구조가 조금 달랐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 구조가 특이하다. 벽암각성 대선사가 이 절을 중창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시선을 끈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거북좌대는 마치 용과 같은 모습이다. 사자탑, 서오층석탑, 석등 그리고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화려한 장식들은 비오는 풍경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절의 추녀는 직선적인 힘을 자랑한다. 마침 12시에 맞춰 범종각을 타종하는 소리가 사바세계의 모든 마음을 종 속으로 녹여들이는 듯 모든 이의 시선을 끈다.


비내리는 구례 화엄사. 직선적인 지붕선의 힘찬 모습

하동 쌍계사 가는 길에 대통밥으로 점심을 먹고 준기가 좋아하는 민물고기를 찾았다. 섬진강변에 서 있는 섬진강어류전시장은 큰 외관에 비해 내부시설이 좀 실망스러웠다. 바람이 몹시 불고 비도 더 굵어져 서둘러 하동 쌍계사를 찾았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 원성이 높아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쌍계사를 보지 않고 가는 것은 안될 말. 벚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습은 이미 사라졌지만 쌍계사 들어가는 10리길 숲터널은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다니. 어렸을 때 시골길 신작로 땡볕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며 지친 다리를 쉬게 해 주던 그 가로수 터널이 너무 정겹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마주치는 석탑은 고려시대 경천사지 10층석탑처럼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비신은 이 절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잘린 모습이 너무 선명한 탑. 전율을 느낀다. 그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은 천년 세월을 버틴 힘이 있다. 신라시대의 조각물과 건축물, 고려시대 인물상 같은 마애불, 조선시대에 중창한 건물이 조화롭게 서 있고 맛배지붕의 힘찬 직선이 법력의 힘을 보여주는 듯 빗속에서 더욱 힘차 보인다.


규모에 비해 내부가 조금 실망스러웠던 섬진강 어류생태관.

비가 더 심하게 내리고 바람도 거세져서 이만 휴양림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는 도중 천*사 절이 있는 표지 근처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달리는 차를 향해 몸을 던지듯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 이 도로가 천*사 사유지를 가로지른다며 돈을 내고 가란다. 지리산을 가로지르는 이 길이 자기네 땅이란다. 이런, 21세기에 대한민국에 산적이 있었다니. 워낙 어이없는 일이라 흥분해서 제대로 따져 묻지를 못하고 등기부등본만 확인해봤다. 토지대장을 내 놓으라고 했어야 하는데. 웃기는 것은 성삼재에서 구례로 내려오는 길을 그냥 통과인데 올라가는 길은 돈을 내놓으란다.

내가 알기로 우리 역사에 사람이 다니는 공로를 막은 자들이 두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산적이고, 둘째는 이숙번이다. 이숙번은 조선 태종의 모사로 왕자의 난에 혁혁한 공을 세운 덕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마침내 사람들이 다니는 공로를 막고 집을 짓는 패악질로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태종은 그 원성이 오를대로 오르도록 놔 두었다가 이숙번의 권력이 커지자 공로를 막은 일을 문제삼아 내치고 말았다. 이제 그런 자를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열이 하늘 끝까지 뻗친다. 설령 이 길이 자기들 사유지라하더라도 입구 아래에 그걸 밝혀 놓고 여기에 돈을 보태주기 싫은 사람들은 올라오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아무런 문구도 없이 올라온 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내놓으라니 이런 산적질이 어디 있는가? 도로 통행료도 아니고 문화재 관람료란다. 문화재인 천*사는 길에서 보이지도 않으며 길에서 보이는 건물은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 아니다. 이런 똘중들에게 돈을 보태줄 일이 없으므로 차를 돌려 운봉으로 돌아 휴양림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15km 정도 더 돌아가지만 길이 좋아서 시간은 덜 걸렸다. 이후 내가 ‘부처님’이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의 종교 가운데 존경스런 자들이 하나도 없구나.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패악질에 대해 지금 소송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하동 쌍계사 팔영루와 이웃 전각들

저녁을 먹고 준기가 꼭 해야겠다고 하던 숲속교실에 데리고 갔다. 2년전 애벌레 선생님이 하시던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려다 늦게 들어와서 못했던 그 일. 애벌레 선생님은 여기를 그만두고 떠나셨다고 한다. 아쉽다. 숲속교실을 끝내고 일찍 잠을 자기로 했다. 내일 봉하마을에 들러 서울을 갈려면 일찍 자고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을 자려고 하는데 정말 쌍퉁맞은 인간들을 만났다. 휴양관 방 2개를 빌린 사람들이 휴양관이 떠나갈 듯 노래부르고 쿵쾅거리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술판을 벌였다. 밤 10시가 넘었는데 더 크고 요란하게 떠든다. 참다못해 휴양림 사무소에 전화를 했는데 그 때마다 인터폰으로 경고를 하는 것으로 마는 듯. 결국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랑곳 없이 더 떠들어대는 한심한 사람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휴양림에서 휴양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바로 쫒아내도록 규정이 있는데 왜 집행을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지키지 않을 규정을 왜 만들었냐고. 집행하지 않는 규칙 때문에 저 사람들이 휴양을 온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방해하는데 왜 놔두냐고 따졌다. 심하게 싫은 소리를 해대자 마지못해 직접 가보겠다는 뜨뜻미지근한 답을 한다. 휴양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을 왜 그냥 놔두는 것인지. 왜 저런 사람들이 즐거움을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야 하나? 밤 12시쯤 돼서야 자기들끼리 싸움을 하는 지 시끌시끌하다가 잠잠해졌다. 결국 휴양림의 규정은 말짱 공염불.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5월 23일, 휴양림 마지막날. 기분좋게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면 산림청에 민원을 넣어 따지겠다는 어젯밤의 다짐은 사그러졌다. 아침을 먹기전 비오는 휴양림을 산책했다. 꼭대기 연립동 쪽에는 이틀간 계속 오는 비에 아랑곳없이 캠핑을 하는 가족이 있다. 밤새 내린 비로 계곡물은 더욱 힘이 넘친다. 아침을 먹고 휴양림을 떠났다. 주말에 다시 오기는 참으로 먼 길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비만 아니었어도. 이제 오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봉하마을로 길을 잡았다. 주말에 내린 많은 비 때문인지 남해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덜 막혔다. 40km를 남겨 놓고 길이 막혔다.

다행히 산인 IC바로 앞이라 주저 없이 국도로 나왔다. 동생 가족은 부산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국도를 따라 봉하마을을 향해 갔다. 사저 6km를 앞두고 길이 완전히 막혔다. 비가 오는데도 엄청난 인파와 차량이 몰려들었다. 완전히 막혀버린 길. 간신히 2km쯤 더 가서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길 옆 갓길에 차를 줄지어 세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12시. 아버지도 조바심이 나시는 지 얼른 걸어가자고 하신다. 아이들에게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걸어서 가는게 훨씬 빠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들이 걱정스러웠으나 잘 걸어가서 다행이었다. 중간에 간이 음식점에서 촌국수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준 것에 하늘에 계신 노 대통령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끝없이 끝없이 이어진 사람들 행렬이 보인다. 인간이 만들어낸 장엄한 모습에 경건함이 스민다.




올라가는 모습과 내려오는 모습.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거기 계단이 있고 연등이 달려 있다는 사실

다행히 행사시작 30분 전에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김제동 사회,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등등 추도사, 빗속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참석자들. 그리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잘 보려고 그랬을까? 사자바위, 부엉이바위, 그리고 언덕과 산 등성이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분의 육성, 그리고 비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의 엄숙함이 주는 감동. 모두들 상록수를 목을 놓아 불렀다. 장엄한 노래소리는 봉하마을을 가득채우고 화포천을 따라 넓은 들판에 퍼졌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함께 외쳤다.

“노무현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대통령님, 잊지 않겠습니다!”


지리산 계곡의 폭포. 작은 여울이지만 비가 모이면 장관을 이룬다.

행사가 끝나고 박석을 따라 걸어가 묘소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국화를 들고 노 대통령님 묘소에 모여와 그분의 소박한 묘 위에 올려 놓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들여다 보며 사진 두어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일. 다음을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걸어나오며 이 자리에 온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먼 길을 금방 돌아 왔다. 도중에도 사람들이 끝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4시 30분, 봉하마을을 떠나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막히지 않아서 밤 10시 조금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힘든 기색이 없이 만족하시니 다행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인데도 끊없이 이어진 방문자들의 행렬


산과 들에 사람들이 가득했던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국화꽃에 덮혀버린 노무현 대통령님의 낮은 무덤. 심한 비 때문에 렌즈에 김이 서렸다.
하늘의 눈물인듯, 사람들의 눈물인듯


노무현 대통령님! 이제 눈물 흘리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당신의 뜻을 지키겠습니다.
반칙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한 당신의 뜻을 다음 세대에도 꼭 전하겠습니다.

Posted by 연우아빠.

그 분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눈물을 보이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차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28일 저녁, 사무실을 나와 마지막 가시는 길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국민을 위해 일했던 분이
가시는 마지막 길은
그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수만 시민들은 묵묵히 5시간 가까이 걸리는
그 길을

한마디 불평없이 엄숙하게 따라갔습니다.
그 길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5월28일 회사를 마치고 광화문 전철역에 도착해 찾아간 덕수궁 분향소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추모객으로 길을 건너
반대편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20분만에 겨우 끝에 도착해 줄을 섰습니다. 저녁 8시 20분.


길 반대편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보이는 저 줄이 덕수궁 방향으로 가는 조문객 줄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가 시청역에 도착합니다.

 


서울시와 정부는 이날까지도 시청광장을 점거한 채 시민들에게 내 주지 않고 있었고 도로 양쪽에는 전경들과
경찰버스로 바리케이트처럼 줄세워 놓았습니다. 이제 조문객의 줄이 시청역 안으로 이어져내려갑니다.

 


시청역 안에는 다시 끝없이 구불구불 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오가는 시민들 불편하지 않게 넓은 곳에서는 4줄로 좁은 곳에서는 2줄로 이어갑니다.
곳곳에 2인1조로 자원봉사자들이 자리잡고 물, 과자, 초, 근조휘장 등을 시민들에게 전해 줍니다.

 


줄을 선지 1시간 쯤 지났을 때 시청역 기둥을 지나갑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차분하게 줄을 지어 갑니다.
예상과 달리 20대 젊은이가 너무 많아서 놀랬습니다.

 


오가는 시민들이 지하철 역사 벽에 사람들이 붙여놓은 글과 사진을 읽고 있습니다.

 


그 속에 우리 대통령은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인자한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습니다.

 


행사를 알리는 대자보도 있고

 


추모하는 글을 적어 매달아 둔 사람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다시 지상으로 줄이 올라옵니다.

 


누군가 국화꽃을 물병에 꽃아 가로수 옆에 모셔놓았습니다.

 


당신은 갔지만 당신의 뜻은 살아 있는 우리가 계속 이어나갈 것입니다.
성공회대학교에서 내건 글이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줄 서서 기다린 시간이 2시간이 지났건만 누구하나 짜증내는 사람이 없고,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립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나 연세 드신 어르신들은 먼저 분향할 수 있도록 주최측에서 세심하게 배려를
해 주고 있었습니다.

 


다시 행렬이 덕수궁 지하보도로 이어집니다. 들어가는 줄과 나오는 줄입니다.
지하도로 안쪽에는 또 끝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더위에 지치는 사람들이 없도록 차가운 물을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고 있었고,
제 앞에 서 있던 부부는 신랑되시는 분이 직장을 마치고 뒤늦게 합류하였는데
신랑되시는 분이 얼린 생수를 10여병 사오셔서 주변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시더군요.
참 멋진 분입니다.

 


다시 지하도를 나와 서울시의회 건물앞으로 행렬이 이어집니다.

 


줄서서 걷기 시작한 지 2시간 반쯤 지났을 때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이렇게 걷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제 뒤에 서 있는 젊은 부부가 얘기하더군요.

 


덕수궁 안쪽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돌아 나가는 줄입니다.
곳곳에 아주 훌륭한 이동식 화장실을 배치해 놓아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보고
세상이 많이 세밀해졌음을 느낍니다.

거리에는 쓰레기 하나 없을만큼 깨끗하게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높은 시민의식을 느껴봅니다.

 


작은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시대의 희망이었고,
빛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자정무렵 풍등날리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모두 '상록수'를 부르기로 했었지만 제가 있었던 곳까지는 음향시설이 없어 전달이 되지 못해 아쉽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에 빼곡히 붙어 있는 노무현 대통령님에 대한 추모의 글은 보는 사람들을 모두 숙연하게 만듭니다.

 


드디어 시청광장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제 차례가 멀지 않았네요.

 

 

 


마침내 분향소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분향소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밝혀 놓았습니다.

 


저기가 대한문 앞,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놓은 분향소입니다.

 


오른쪽에 희망나무가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글을 적고 종이학을 접어 장식을 해 놓았습니다.
줄서기 시작한 지 4시간 반이 지난 2009.5.29 00:47 노무현 대통령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절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분향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차례를 기다리며 들어가는 사람과 나름의 방식대로 이날의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청 역 벽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벽을 이렇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제 아이들에게도 전달해 아름다운 세상을 꼭 만들겠습니다.

 


제가 줄서기 시작했을 때 보다 더 길어진 것 같은 끝없는 추모행렬이 이어집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을 던져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당신이 있어 희망이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하늘에서 편안히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연우아빠.

제 맘 속에 유일한 대통령, 우리 노무현 대통령님! 
인간이 만든 필설로 어찌 이 맘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지지하고 앞으로도 지지할 것입니다.
존경했고 사랑하고 제가 살아있는 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부디 편안히 쉬십시요.

제 맘 속에 유일한 우리 대통령님!
눈물이 나서 더 못쓰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원칙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당신의 영전에 이 꽃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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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림 계곡을 아름답게 수 놓고 있는 꽃사진 


이름 모릅니다. 가르쳐 주시면 수정해 넣지요. ^^;;
유진맘님 힌트를 가지고 찾아보니 쇠별꽃이 제일 비슷하게 생긴 것 같네요.


쪽동백꽃, 마치 아카시아 꽃처럼 화사하고, 향기는 행운목 같은데 훨씬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납니다.


삼각대가 없어서 손각대로 찍었는데 역시 저속셔터는 무리(셔터 속도 1.3초)


함박꽃(일명 산목련)


층층나무 꽃이 이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줄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요?


휴양림 순환산책로의 작은 계곡. 작년 수해 피해가 굉장히 컸던 모양입니다.
아직도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식당동 옆에와서 뭔가 먹고 있던 다람쥐.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나와서 찍었는데 한참을 기다려 주더군요.


광각이 아니라서 싱그러운 녹음을 시원하게 담지 못하겠네요. 수련관에서 아래쪽으로 본 모습


이름 잊어버렸습니다. 졸방제비꽃과 비슷한데 흰색 꽃잎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색깔은 태백제비꽃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등산로 중턱 쯤에 사진 찍으라고 장승 10여개를 세워 놓았습니다.

 


수련관 앞에 핀 붓꽃


고기 구워 공급하느라 바깥에서 식사 중인 두 동생


1,700원 주고 산 일회용 석쇠와 남들이 한번 사용하고 버린 일회용 석쇠를 구부려 만든 숯망.
여기에 모닥불을 붙여 밤늦게까지 3형제 부부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


준기맘과 준기 사촌 여동생. 맑디 맑은 계곡에 꽃 배를 띄워놓고 어서 흘러 가라고 물을 뿌립니다. 



통고산자연휴양림 여행(2009.5.23~24)

아버지 생신을 맞이하여 4남매 가족이 모두 모여서 휴양림 나들이 하는 것은 어떠냐는 아내의 말에 뒤늦게 경북지역 휴양림을 뒤져 봤지만, 빈방은 없다. 대기를 몇 개 걸어 놓고 당일까지 빈방이 나오지 않을 경우 타프 들고 낮에 휴양림에 들어가 가족끼리 놀다가 밤에 돌아오는 것으로 일단 정하고 누나와 동생들에게 알렸다. 누나는 주말근무 때문에 못온다 하여 3형제만 모이기로 했다. 21일 밤 11시쯤 확인해 보니 1순위 대기가 4개가 걸려있다.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금요일 오전에 다시 체크해보러 들어갔더니 대기가 모두 자동취소로 되어 있다. 휴양림관리사무소에 알아보니 어이없게도 예약시스템은 하루 전날 대기는 모두 자동취소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단다. 어처구니가 없다. 해당일이 지난 다음에 자동취소되도록 프로그램 수정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홈페이지에 민원글과 답을 남기도록 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없다. 금요일 오후, 퇴근 시각이 됨과 동시에 인사를 남기고 용수철처럼 사무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집에 도착하니 7시 20분.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8시에 출발했다. 준기는 키우던 사마귀가 지난번 도룡뇽처럼 죽을 것이 걱정되었는지 출발하기 전에 숲속에다 사마귀를 풀어주고 왔다. 고속도로에 차는 많았지만 생각처럼 속도는 줄지 않고 잘 나간다. 밤 11시 조금 넘어서 셋째네 집에 도착했다. 평일과 별반 차이가 없는 속도.

23일 아침, 눈을 뜨니 하늘이 우중충하다. 비도 약간 뿌리고 연무인지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황사인지 암튼 뿌옇다. 막내동생이 수련관이 비어 있으니 수련관을 예약하자고 한다. 낮에 비가 올지도 모르고 부산에서 동생도 오는데 거기까지 몇시간을 달려와서 하룻밤 자지도 않고 나온다면 너무 힘들지 않겠냐면서....13명이 자기에는 너무 크지 않냐 싶었지만 오가는 번거로움보다 그게 낫겠다 싶어 예약을 했다. 출발 준비를 끝내고 여자들이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10:37분 (시민광장 모임에서)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이게 무슨 소리야? (곧이어 노사모에서도 같은 문자가 날아왔다) 라디오를 켜니 청천벽력 같은 자살 소식. 헉! 순간 속이 메스껍고 기운이 빠지면서 눈앞이 흐릿해진다. 이럴 수가...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순간만큼 충격이었다. 온갖 상념이 순식간에 머리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고 11시가 넘어서야 출발했다. 아버지도 충격이 크셨던 듯,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면 오늘 진영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신다.

12시 조금 지나 통고산에 도착해 눈이 시원하고 마음이 상쾌한 녹색향연 속으로 들어갔다. 슬픔, 기쁨, 고통....희로애락애오욕, 4단 7정 모두 녹여버리는 이 아름다움은 진정 내 인생의 복이다. 이 아름다운 날에 몸을 던져버린 그 분의 명복을 빌어본다. 평생 기억하겠노라고. 

아이들과 함께 5년만에 다시 찾은 통고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아이들은 올챙이 잡으러 개울에 들어가서 그들 방식대로 신록을 즐기고, 어른들은 아버지를 따라 천천히 등산길을 오르며 그 동안은 눈으로 보았으되 알지 못했던 많은 꽃들을 챙겨본다. 층층나무 꽃이 이토록 아름다운 줄 몰랐다. 너무나 확실한 층층나무 꽃과 산목련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에게 여러번 듣지만 금방 잊어버린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하얀 꽃들이 저마다 천상의 향기를 흩날린다. 단순한 녹색향연이 아니라 그 속에는 별보다 아름다운 꽃들이 저마다 빛을 낸다. 텅 빈방인데도 3시가 되어서야 열쇠를 받을 수 있으니 이용자 개인은 좀 짜증나는데 관리하는 사람들은 열쇠가 다 모여야 내 줄 수 있으니 그들도 짜증나리라. 열쇠를 받아 들어간 수련관 숙소는 축구장만한 방이 2개에 거실이 하나. 각 방마다 20~30명은 거뜬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이부자리가 군용담요 비스므리 한 것이라 좀 황당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건물은 제일 위쪽에 있는데 한 테이블에 8명이 앉을 수 있고 모두 식탁 6개나 있다. 작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전세 낸 것 같은 규모다. 주변에 달리 놀러갈 곳을 정하지 못한 분들이 있으면 모두 불러오고 싶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둘째는 도착하는데 무려 6시간이 걸렸다. 점심을 간단하게 때우고 기다렸던 관계로 둘째가 도착하자마자 저녁밥을 안치고 바로 숯불을 붙였다. 숯은 집안에서 냄새 제거용으로 두세달 진열해 놓았던 것이라 그런지 습기 때문에 탁탁튀면서 불이 잘 붙지 않는다. 10여분 쯤 고생해서 겨우 불을 붙였다. 돼지고기 직화는 고기가 딱딱해지는데 웨버에서 훈제를 만든 돼지고기는 너무 부드럽고 맛이 좋다. 부드러운 것은 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께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아이들 주고...오랫만에 만난 사촌들이 예전과 달리 밥도 잘먹고 잘 어울려 논다. 초록 숲에는 생명력을 끌어 올리는 뭔가가 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오후 6시, 아직 해는 한참 남았다. 은주네, 상린이네도 대공원 야영장에 있겠지 생각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은주아빠와 유진아빠에게 배운 게 있어서 굴러다니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잠깐 사이에 꽤 많은 양을 모았다. 남자들이 모두 설거지를 마친 다음 마당에 둘러 앉아 모닥불을 붙여 놓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모이긴 했지만 애들 돌보랴 정신없어서 제대로 우리끼리 얘기해 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모닥불 주변에 둘러 앉아 가져간 포도주 한 병으로 2시간 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8시가 넘어서 아버지와 함께 생신 케이크를 자르고 아이들은 제각각 방안으로 몰려 들어가서 놀기 바쁘고 어른들은 계속 불놀이를 했다. 우리에게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하며 작은 행복을 느껴본다. 11시쯤 자리를 파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수련관에는 아쉽게도 온수샤워를 할 수가 없다.



24일 아침, 시간이 제법 된 듯하여 눈을 떴는데 겨우 5시. 차가운 물이지만 샤워를 간단하게 하고 낙엽송이 내뿜는 청량한 느낌을 온 몸으로 받는다. 새벽부터 날씨가 영 종잡을 수 없다. 심한 바람과 먹구름이 몰려와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큰 비가 올 듯 하다가는 금방 햇볕이 쨍한다. 그러더니 금방 또 빗방울이 떨어지고 어디선가 확성기 왕왕대는 소리와 시끄러운 노래 소리가 귀를 거슬린다. 아침을 먹고 다시 등산로를 따라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요일 아침 이 고요한 숲 제1야영장 데크와 떼로 몰려와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 그 확성기 소리는 바로 교회에서 몰려와 예배를 보는 소리였다.

아이들은 개울가로 우르르 몰려 내려가 그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고 물속에 사는 작은 생물들을 쫒아 다닌다. 그들을 뒤로 하고 아버지, 부산 동생부부와 함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니 통고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곳이다. 다시 되짚어 내려오는데 정말 큰 비가 올 듯이 바람과 먹구름이 몰려온다. 12시 조금 넘어 남은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 휴양림을 나서려니 아이들이 너무 싫단다. 계속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하지만 어쩌랴. 너희들도 이젠 조금씩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걸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서는 너희들에게 힘든 나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손바닥에 티눈이 생긴 준기는 시멘트 바닥에 몇일 문지르면 티눈이 사라진다고 했더니 외가에서 발견한 작은 시멘트 조각을 들고서 열심히 티눈을 문지르고 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처가에 잠깐 들러 장모님을 뵙고 30분쯤 눈을 붙인 뒤 4시에 귀가 길에 올랐다. / 쫑

Posted by 연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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