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9~6.10 서산 용현자연휴양림


우리 모임 대장 주은아빠가 소집한 캠핑 번개

이제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버려서 여행에 따라 나서지 않는 세 남자와 그들의 발이 되 주어야 할 나는

텐트와 간단한 장비만 챙겨 동참하기로 했다.



6.9 서산 용현 국립자연휴양림 캠핑장에는 야외 교실로 쓰는 멋진 데크가 있었다.

동호회 가족들은 가족모임을 가지도록 하고 솔캠을 떠난 네 남자는 여기서 조용히 먹고 마시기로 했는데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우리 동호회 사람들이 모두 짐을 챙겨 이리로 합류했다.


아이들 나이이 따라 여행 패턴이 결정되는 가족여행

우리가 처음 캠핑을 시작했을 때에 비해 몇년 지나지 않은 듯 한데

가지고 다니는 장비는 많이 늘었다. 그래도 일반 캠핑장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무지 무지 가벼운 장비들...


식탁에 쌓인 엄청난 채소는 수람아빠가 주말농장 텃밭에서 뜯어온 것으로

이틀 동안 열심히 먹고도 한참이 남아 싸가지고 돌아와야 할 정도였다.



5학년 전후가 되자 다들 돼지고기는 부담스러워 하고

서산 동부시장에 가서 소금구이용 장어 3kg을 사고, 국물용으로 이 지역 특산 음식인 우럭젓국을 끓이려고 말린 우럭을 사 왔다.

이미 점심 때부터 막걸리를 반주 삼아 조금씩 했으니 우럭 젓국은 인기를 끌지 못했다.


2~3마리를 한꺼번에 넣어 끓여서 그랬는지 너무 짰다.

다음에 끓인다면 물에 좀 불려서 소금기를 뺀 다음에 한마리씩 끓이는 게 좋을 듯 하다.



밤 10시에 얌전하게 잠에 들었는데

새벽부터 울어대는 새 소리에 잠을 더 잘 수가 없다.


시계를 보니 5시.

설렁설렁 걸어 나와 상쾌한 휴양림의 새벽공기를 오랫만에 만끽했다.



임도와 산책로를 무척 많이 만들어 가족과 연인이 손을 잡고 산책하기 참 좋은 휴양림이 되었다.

한가지 더 욕심을 낸다면 샤워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11시 조금 넘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1시간 만에 집에 도착하니 너무 싱겁긴하다.

다음에 중미산에서 모이기로 하고 거의 10여년만에 가족과 떨어져 아빠들만 동참한 캠핑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을 더 가지고 싶어하는 아들을 위해서도

다음에는 아들을 데리고 다녀야겠다.

아들 녀석이 원하는 때까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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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우아빠.

가을하늘이 예뻐서 무작정 떠난 야영...선열의 자취를 찾아서

2010.10.23 ~ 10.24 용현자연휴양림


긍정적이고 쾌활한 모습으로 변한 준기. 어딜가나 즐겁습니다.
용현 휴양림은 주변에 구경할만한 곳이 많은 곳에 있고 수도권에서 가까워 다니기 좋습니다.


2008년 1월에 이 휴양림에서 묵었는데 오랫만에 찾아왔습니다. 용현휴양림 휴양관.


전망대 올라가는 길



전망대 올라가는 길. 이게 구절초인가요? 벌개미취인가요? 아직도 헷갈려요.



밤에 구름이 없었다면 이 넓은 오토캠핑장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모습을 봤을텐데...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상
가운데는 석가여래, 오른쪽은 미륵보살, 왼쪽은 제화갈라보살.



매헌 윤봉길을 기념하는 충의사 입구. 이 사당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다.
먼저 충의문 현판 글씨는 광복전쟁의 영웅이었고 훗날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선생이 쓴 것이다.
이 분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투사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5.16 반란에 반대해 국회의원직을 내 놓았으나
훗날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에게 협력하는 훼절을 하고 말았다.


충의문을 지나면 충의사 사당이 나오는데 이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가 썼다.
윤봉길 의사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 광복을 위해 가족과 고향을 떠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어 홍구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반면 현판의 글씨를 쓴 박정희는 만주괴뢰국과 일본제국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중국침략에 종군하였으며, 5.16 군사반란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군사독재를 자행한 자이다.


이 거사를 두고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 2억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해냈다"는 말로 격찬하였으며, 사분오열되어 패배감에 젖어있던 중국 인민들을 단결하게 만든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중국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고 훗날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승국 지위를 갖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사당 왼쪽 언덕에는 윤봉길 의사의 산화 이후 20대에 홀로되어 윤봉길 의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신 배용순 여사의 묘가 있다.


윤봉길 기념관 안에 있는 윤봉글 의사의 친필



광현당.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이곳에서 태어나 4살 때까지 살았다.


저한당. 1911년에 이사와서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사시던 곳으로 여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셨다.




피끓는 청년 윤봉길의 동상



예산 가야산 언덕에 있는 남연군의 묘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무작정 떠난 가을 야영

2010.10.23~10.24 용현자연휴양림

월요일(25일)에 본사에서 회의가 잡혀 이번 일요일은 대구에 내려가지 않아도 되자 이 좋은 가을을 그냥 낭비하면 안될 것 같아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휴양림 방은 보이지 않는다. 금요일 밤 늦게 집에 도착해 이것저것 하다가 늦게 잠들었는데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아직 7시가 되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여행을 부르는 듯 손짓을 한다. 야영을 한다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조금은 덜 추울 것 같아 용현휴양림에 전화를 하니 야영장 데크가 많이 비어 있다는 대답. 얼른 아이들을 깨우고 손에 잡히는대로 짐을 싸는데 준기는 서산 주변 지도를 얼른 챙겨 자기 배낭에 넣는데 책을 끼고 있던 연우가 안가겠다고 버틴다.

“밥도 없고 반찬도 없고 라면도 없다”
“그럼 해 먹지 뭐”
“밥 할 줄 알아?”
“아니”

이렇게 시작한 설득 작업은 나중에는 따라나서지 않으면 3년뒤 스페인 여행은 없다라고 했는데도 안가겠단다. 지난번 중미산에서 이슬이 너무 많았던데다 밤에 냉두드러기가 얼굴에 돋았던지라 그게 싫었던 것일까? 결국 12시 반이 넘어서 설득을 포기하고 연우만 남겨두고 떠나기로 했다. 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고속도로에 차가 너무 밀린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3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발안에서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라갔다. 데크가 언제 가득찰지 모르는 상황이라 우선 용현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여러개가 비어 있어서 사이트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옆 데크에 준기와 동갑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는데 준기 먹으라고 어묵한사발을 준다. 사이트 구축하는 동안 준기가 배고프다고 계속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노라고 웃으면서. 하긴 점심을 차 안에서 빵으로 대충 때우고 내려왔으니 배 고플만 한 상황이었다.

사이트 구축을 마치고 서산동부시장으로 장을 보러 나섰다. 뭘 먹어야 좋을지 몰라서 상린아빠님께 전화로 도움을 받았다. 큰새우는 너무 비싸고 중미산에서 먹었다고 준기를 설득했더니 엄마가 먹자는 대로 넙치회에 동의해 준다. 대합을 포함해 조개 3종류를 섞어서 더 사고 땅거미가 내린 휴양림으로 달렸다. 아까보다 더 많은 야영객들이 들어왔다. 오토캠핑장을 수놓은 아름다운 텐트와 불빛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보니 이번에는 헤드렌턴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재료를 찾고 숯에 불을 붙였다. 불을 대충 붙이고 토치를 회수하려다가 거꾸로 드는 순간 가스액이 새어 나와 가스통 바깥에 불이 붙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검마산에서 유니맘님이 하던 모습이 떠올라 침착하게 다시 가스통을 주워 입김으로 불어 가스통 바깥의 불을 끄고 토치를 잠궜다. 아찔한 순간 대형 사고 날 뻔 했다. 용현은 산들바람이 살살 부는 곳이라 그런지 웨버 안에서도 잘탄다. 조개를 올려 구워 먹는 맛이 색다르다. 셋이서 좀 많이 산 게 아닌가 싶었는데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적당했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밥을 먹고 나자 졸린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서 별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오토캠핑장은 하늘의 별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곳인데 정말 아쉬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아내도 몹시 피곤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벌써 침낭 속에서 졸고 있다. 아내를 깨워 사계절용 침낭을 겨울침낭 속에 넣어 사용하도록 했다. 겨울 침낭도 3년 가까이 사용했더니 바닥부분은 처음같은 성능이 아니어서 사계절용 침낭을 내피처럼 사용해야 밤에 춥지 않을 것 같다. 아내와 준기는 “좋은데!!” 하고는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네명이 자던 텐트 속에 세명이 들어가니 조금 썰렁하다. 매주 오르내리는 생활에 매일 수영을 해서 그런지 바로 잠에 떨어져 다음날 새벽까지 세상 모르고 잘 잤다.

일요일 아침,
수건을 꺼내들고 어슬렁 어슬렁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세수를 했다. 상쾌한 느낌. 밤새 구름이 낀데다 바람이 조금씩 부는 곳이라 그런지 텐트 안팎이 뽀송뽀송하다. 준기가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생가, 남연군 묘에 가겠다고 해서 아침을 먹고 바로 텐트를 접었다. 휴양림을 그냥 떠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 임도를 따라 산책을 했다. 2008년 1월에 은주, 상린, 우리 세가족이 함께 왔던 길. 그 땐 한겨울이었는데... 용현 계곡은 생각보다 단풍이 아름답진 않았다. 준기가 예산에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해서 중간에 내려와 남은 음식으로 점심을 마치고 휴양림을 나섰다. 서산 마애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아내의 말을 따라 다시 보러 갔는데 3년전에 비해 주변을 많이 다듬어서 보기에 더 좋았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지에 도착했다. 충의사(忠義祠). 한국 현대사의 문제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당이다. 충의문 현판은 광복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분으로서는 드물게 광복 이후 국회의장까지 지낸 분으로 5.16 반란을 질타하며 국회의원직도 버린 분이 쓰셨다. 그러나 그분은 훗날 소위 유신세력들에게 협력하는 변절을 하고 말았다. 충의문을 지나 충의사 사당 앞에 현판은 윤봉길 의사와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이 썼다. 일본제국군 장교,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5.16 반란 수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현판 충의사. 충(忠)도 의(義)도 충의(忠義)도 느낄 수 없는 현판들. 그리고 껍데기만 한옥을 베껴 만든 국적불명 콘크리트 사당 건물. 그 안에 있는 우리 초상화 양식이 아닌 윤봉길 의사의 빛바랜 초상화. 오직 의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놓고 상하이까지 망명해 간 선열께서 목숨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광복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 분의 초상 앞에 고개를 숙일수도 분향을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의 기념관 안에 몰려온 한떼의 노인들이 친일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이승만을 찬양하는 망발을 늘어 놓을 때는 정말이지 왜 저들이 여기에 왔는지 화가 났다. 머리가 깨지는 수는 있어도 지혜가 머릿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화가 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그 숫자의 크고 작음은 존중과 하대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길 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고향을 남겨두고 조국광복을 위해 상해로 망명해 “중화민국 2억 인민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젊은이가 해냈다”는 장개석 총통의 격찬을 받았던 홍구공원 의거를 이룬 윤봉길. 그와 그의 가족에게 조국이 해 준 것은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증 1장이라는 사실이 너무 미안한 일이다. 그 분은 젊은 혈기만으로 광복전쟁에 투신한 것이 아니었다. 선대에서 빈농을 벗어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작은 부를 쌓았고 그 작은 부를 이웃 농민을 위해 사용했다. 고향에서 야학을 운영하고 책을 만들어 농민계몽에 노력했다는 사실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혜안과 실천력을 느낄 수 있다. 사형집행대에서 적의 총 앞에서도 당당했던 청년 윤봉길. 그에게 최상의 경의를 바친다.

선열의 기념관을 나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찾았다. 준기가 궁금해 했던 곳인데 가야산 도립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연군 기념비 앞에 차를 두고 왼쪽 언덕길을 올라가니 가야사 터 안내문이 나온다. 작은 동산처럼 생긴 언덕을 오르자 사방이 탁트인 장소에 남연군의 묘가 있다. 남연군의 묘와 관련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두어 개 전해온다. 

첫 번째는 안동 김씨 집안으로부터 왕권을 되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던 흥선군이 왕이 2명이 날 자리라 하여 경기도 연천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1847년(또는 1848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 이장지에 가야사가 있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절에 불을 질러 절을 폐사 시켰다고 한다. 묘를 옮길 때 지나는 지역마다 지역민들이 동원되어 상여를 옮겼는데 이 지역 토착민들은 협조하지 않아서 직전 마을인 광천리 사람들이 여기까지 운구하게 되어 상여를 광천 사람들에게 하사했고 남은 길을 끝까지 옮겼다하여 ‘남은들’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남연군은 왕의 직계도 아니고 철종임금의 방계 친족에 불과한 종친 중에 한명일 뿐이었는데, 파락호 취급을 받던 흥선군이 이만한 위세를 안동김씨 세도가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부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당시 안동 김씨들은 왕재의 자질이 보인다 하여 경원군 이하전에게 누명을 씌워 사사했던 시절이다. “왕실의 중흥”을 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인데 몰락한 왕가의 종친이 아버지의 묘를 연천에서 이곳 예산까지 이장한다는 일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왕재가 있는 자들을 제거하려고 하던 시절에 명당으로 소문난 곳을 이렇게 요란한 방법으로 불지르고 백성을 징발해 이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시 흥선군은 27~8세였고 안동 김씨들의 감시를 받고 있던 몰락한 왕실종친에 불과했는데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과연 벼루 한 개로 무사할 수 있었을까? 남연군을 이장할 때 사용했다는 상여는 왕이나 황제가 사용할 수 있는 상여장식이 달렸다. 이 이야기는 대원군을 폭군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꾸민 이야기가 아닐까? 묘를 이장했다는 시점과 고종황제가 태어난 시점 사이에는 지금 전해오는 말들과 같은 연계성이 없다.

두 번째로 남연군 묘를 도굴을 대비해 구리를 녹여 부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인질로 삼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려고 이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가례에 따라 회곽묘를 사용했는데 요즘 발굴하는 조선시대 무덤은 포크레인으로 깨뜨려도 쉽게 깨지지 않을만큼 단단하다고 한다. 언덕에서 굴려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곡괭이로 내리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고고학을 하는 분들에게 들었다. 삽이나 괭이만 가지고 왔을 오페르트 일행이 회곽을 깨뜨릴 수가 없었을 건 당연한 일. 이 사건이 구리 무덤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남연군 묘의 좋은 경치를 감상하고 짧은 가을 해를 아쉬워하며 귀가 길에 올랐다.

준기는 다음에는 김좌진, 한용운, 신채호 선생님의 유적을 꼭 가보자고 한다. 오서산에서 야영을 했더라면 세 분 유적을 보고 올라오는 길에 윤봉길 의사의 유적을 볼 수 있었을텐데...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Posted by 연우아빠.

감기 몸살보다 강한 휴양림의 유혹

2008.1.12~13(1박2일)

유럽 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한 뒤, 시차 적응도 하기 전에 1월1일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만만치 않을 1년을 가늠해 봅니다.

1월 첫째주, 상린아빠께서 둘째주말에 함께 산음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만 새해 첫날부터 출근했던 터라 주말에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요즘 상황 때문에 어쩔 수없이 못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7일날 아침, 은주아빠 전화를 받았습니다. 상린아빠께 산음 포기하시고 함께 용현을 가자고 하셨다고...저희 가족도 초대하셨습니다. 회사 사정 봐 가면서 참여 여부를 결정해 알려드리겠다고 하고 대충 눈치를 보다가 목요일 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준기가 너무 기뻐합니다. 철새 탐조 예약도 취소하고 무조건 휴양림 간답니다.

“아빠 때문에 휴양림을 너무 오랫동안 못 갔어요”




해미읍성

금요일 저녁까지 정신없이 바빠서 야근을 하고 준비도 하나도 못하고....눈은 펑펑 쏟아지고... 이거 어찌해야 하나? 비장의 카드, 라파엘아빠와 유니맘님 후기를 프린트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은주아빠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신다고 해서 너무 편하게 몸만 가는 여행이라 너무 미안스럽고...우리는 일요일 아침 대구탕을 할 재료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토요일 새벽, 갑자기 허리가 아파 깼습니다. 목 안이 칼칼한 것이 전형적인 감기몸살 증상입니다. 다시 잠들었는데 아침에 늦게 일어났어도 뼈마디가 쑤시고 목이 아픈 것이 미치겠습니다. 유럽연수 기간 중에 추위에 너무 시달린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하필이면 이 때 감기몸살이 뭡니까?



해미읍성 안에 옛날 놀이를 하는 마당이 있습니다. 투호놀이

식은 땀이 나고 힘이 들어 끙끙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났습니다. 그래도 휴양림에는 가고 싶어서 아침을 먹고 차 내부를 청소하고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은주네는 벌써 수덕사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음식재료를 모두 준비했다는 은주아빠 말씀에 너무 미안했는데 이렇게 늦게 가서 구경이나 제대로 할런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속도로건 국도건 차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준기맘이 약을 지어먹고 가야하지 않느냐고 해서 병원에 가서 시간 낭비하기는 싫어 동네 약국에서 간단하게 감기약 지어서 먹고 11시30분쯤 출발했습니다. 39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해고속도로에 올라서니 정말 차들이 잘도 달립니다. 가는 도중에 산목련님이 준기맘에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유진이네는 청태산에 눈썰매를 타러 간답니다. 눈이 엄청 많이와서 제대로 썰매를 즐길 것 같습니다. 금년에는 2~3가족 함께 놀러가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룰 것 같은 예감입니다. 불과 1시간도 되지 않아 해미읍성에 도착해 구경을 하다가 은주네와 만났습니다. 아, 너무도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해미읍성은 볼 만한 것이 많았고 몸 상태만 허락한다면 개심사나 수덕사 같은 곳도 가 보고 싶었는데 약을 먹었음에도 뼛속이 쑤시는 것이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해미읍성 안에 있는 언덕에 말타기 놀이에 좋은 소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은주아빠가 주신 강정을 간식삼아 열심히 먹고 점심은 휴양림에 들어가 컵라면으로 때우기로 하고 용현으로 출발. 2시쯤 휴양림에 도착했습니다. 안내소에는 서산, 예산, 당진 지도를 비치해 놓고 방문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좋을 수가... 모름지기 모든 휴양림 안내소에는 주변 지도를 잘 비치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주변 경제를 같이 살리는 길이거든요. 은주아빠께서 예약한 숲속의 집(느티나무)은 전기수리 관계로 그 옆에 있는 산림문화경영실을 대신 내 주었습니다. 느티나무 집보다는 조금 작지만 널찍하고 난방이 들어오는 다락이 있어 아이들은 잽싸게 거기에 터를 잡고 내려오지 않습니다.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해미읍성 동헌과 호서좌영문이 보입니다.


물을 끓여서 은주아빠가 가져오신 맛있는 컵라면을 점심대신 잘 먹고 있는 동안 상린채린네 가족도 도착했습니다. 아이들끼리 너무 잘 놀고 있었지만 휴양림에 와서 산을 거닐지 않는게 말이나 됩니까? 산책가자고 했지만 예상대로 아이들은 싫답니다. 아이들에게 왕따당한 어른들만 전망대까지 산책에 나섰습니다.

사진을 찍었건만 거의 다 흔들렸습니다. 구름이 많이 낀 데다 해질 무렵이라 영 아닙니다. 다행히 부부만 찍어 준 사진은 잘 나왔네요.^^ 몸살 기운 때문에 추위가 뼛속을 파고 듭니다. 벙거지 모자를 썼건만 몸이 으슬으슬합니다.




용현자연휴양림에서 함께한 가족들과 산책삼아 전망대에 올라갑니다.  

5시30분 산책길에서 내려와 저녁을 준비하고, 숯불구이를 위해 은주아빠가 숯에 불을 붙입니다. 여러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예술입니다. 은주아빠 차 안에서는 마술상자 같은 모습으로 휴양림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작 제품이 계속 나옵니다. 등을 걸고 숯에 불을 붙이고 목살과 삼겹살을 차례로 굽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제 허리뼈를 감도는 통증 때문에 따뜻한 방안에 들어와 등을 지집니다. 휴양림의 뜨거운 방바닥이 이렇게 좋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거 큰일입니다.^^;;


 


전망대 올라가는 길에 눈을 쓰고 있는 소나무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다락으로 모두 몰려 올라가고 어른들은 아이들교육이야기, 결혼 비하인드 스토리, 세상이야기를 하며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숯불구이 끝낸 불에 은주네 가족이 해남에서 받아오신 설탕같은 고구마를 구워먹고, 아이들을 위해 불장난도 했습니다. 배가 아파 나가기 싫다던 상린이는 혼자서 1시간 이상을 불장난에 열중합니다. 덕분에 배 아픈것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역시나 은주아빠님은 아이들을 재미있게 하는데는 정말 탁월한 재주를 가진 분이십니다.




낮에 녹았던 눈이 저녁이 되자 다시 얼어 붙습니다.

상린채린아빠님은 늘 정해진 시간에 잠을 청하러 가시고 남은 우리는 새벽3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잠을 청했습니다만 아이들은 새벽 4시 반에도 잠자기를 거부하며 정열적으로 놉니다. 반 강제로 아이들을 재우고 잠을 청했습니다. 가져간 침낭속에서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지지니 세상에 이런 좋은 병원이 없습니다. 몸이 낫는 것은 느낍니다. 상린아빠는 아침일찍 일어나셔서 산책나가고 은주아빠도 일어나시고 맨 마지막까지 침낭속에서 뒹굴던 저도 마지못해 일어났습니다. 몸은 한결 나았지만 그래도 목이 아픕니다. 준기맘이 끊인 시원한 대구탕을 먹으니 훨씬 살만합니다. 아이들이랑 제일 잘 놀아주는 아빠 은주아빠와 함께 꼬마야꼬마야 놀이를 하고 모두들 개울가로 몰려 갔습니다. 눈이 많이 왔던 터라 다들 눈썰매랑 눈에서 뒹굴 준비를 단단히 해 가지고 갔는데 용현 근처에 눈은 하나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산목련님네가 너무 부럽습니다. 거긴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텐데....




숯불바베큐를 위해 한방에 불을 붙이는 은주아빠.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은주아빠님을 화신(火神)이라 부르지요.



꼬마야 꼬마야 놀이

살얼음을 깨서 놀다가 단단하게 언 개울가에서 얼음지치기를 하다가 철호동건네 가족을 만났습니다. 휴양관에서 묵었다고 합니다. 다유네 일정표를 확인했더라면 함께 만나서 맛있는 숯불구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을텐데....뒤늦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한겨울 얼음이 꽝꽝 얼었습니다.


늦은 아침 탓에 점심은 건너뛰기로 하고 퇴실시간에 맞춰 휴양림을 나섰습니다. 은주아빠께서 겨울에 휴양림 바깥에 나가 추위에 떠는 것보다 일요일 숙박까지 예약해 놓으면 절반 가격에 퇴실시간에 쫓기지 않고 놀 수 있겠다고 해서 다들 좋은 아이디어라 감탄하면서... 다음에 한번 해 봐야겠습니다. 보원사터 구경을 하고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불을 구경했습니다. 보원사 터를 보니 발굴현장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려 노력하는 문화재청의  정책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발굴현장을 공개해 관심있는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저도 사진으로만 봤었지 이렇게 트렌치를 해 놓은 것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대웅전 바닥의 기초석 아래 잔 자갈로 기초공사 해 놓은 형태까지 볼 수 있어서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발굴중인 보원사터. 앞에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마애삼존불은 정말 빛의 방향에 따라 미소의 모습이 바뀝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부처님의 얼굴 모습과 인상이 달라집니다. 도톰한 볼에 온화하고 넉넉한 웃음 속에서 백제 석공의 여유가 묻어 납니다. 12월 유럽연수 때 서양의 대리석 조각작품들의 정교함에 감탄을 했었는데 미술을 전공한 한국인 가이드가 이런 말을 하데요. “대리석은 부드러운 돌이라 사포로 밀어서 세세한 표정까지 묘사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화강암은 정으로 쪼아서 만들어야 하는 세공이 어려운 재질입니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조각을 감상하면서 엉뚱한 사대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화강암에 새긴 부처님의 미소는 정말 예술입니다.”  이 얘기를 들은 다음에 봐서 그런지 서산마애불의 미소는 예술입니다. 마애삼존불상의 미소와 부처님의 광배, 그리고 옷의 모습은 대리석 작품과는 다른 중후한 멋을 풍깁니다.

석가여래불의 광배는 다시 회복한 백제의 힘을 내외에 과시했던 무령왕의 릉에서 발굴한 관장식과 같은 화염문이라 힘이 넘칩니다. 백제가 힘의 여유를 갖고 너그럽게 웃는 시대에 조성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마애불 뒷쪽에서 스며드는 물과 얼음이 마애불을 위협하는 것 같아 안타깝고 오른쪽에 모신 불상의 팔 부분이 깨져 나간 것이 안스러웠습니다.




천년의 아름다움, 서산 백제마애삼존불상의 덕이 넘치는 미소

30분쯤 차를 몰아 합덕수리민속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에겐 정말 신나는 곳입니다. 널뛰기, 윷놀이, 씨름, 그네, 디딜방아, 사물놀이, 줄타기...게다가 지금은 보기 어려운 리어카 몰아보기, 수차, 용두레... 만져보고 직접 움직여보고 이렇게 좋은 곳이 무료라니.....
 



합덕수리박물관 연못. 엄청난 추위를 실감케하는 고드름


합덕방죽을 쌓아 올린 방법이 풍납토성 판축토성 축성법과 같은 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돌을 다루는 기술도 대단하지만 흙을 다루는 기술 역시 옛사람의 지혜가 남다르다는 사실에 존경을 표하며 헤어지기 아쉬운 다유네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오는 길도 너무나 편해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집에 도착하니 휴양림 오가는 길이 너무나 싱겁습니다. 비수기 때 용현휴양림 자주 가고 싶네요.

아, 이제 병이 도질려고 합니다. 1월 말에는 청태산에 가서 눈썰매를 타고 싶습니다.
이거 정말 병이지요? ^^



추운 날씨에도 비단잉어들이 노닙니다.



가물 때 논에 물을 퍼올리던 용두레



세종임금이 전국에 보급했던 수차. 가물 때 논에 물을 퍼올리던 기구인데 목제가 아니라 쇠로 만든 전시물을 해 놓았네요.



곡식을 거둬 디딜방아를 찧는 곳



줄타기 놀이. 떨어져도 자꾸 해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Posted by 연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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