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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한가람미술관과 동구릉 나들이

by 연우아빠. 2011. 9. 14.
2011.9.13

친척들이 다 내려가고 난 뒤에 심심하다고 몸살이 났던 준기를 데리고 서울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연우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해서 공부하라고 남겨두고 길을 나섰는데...

처음에 한가람미술관에서 몇일전에 유진이가 봤다던 오르세미술관 특별전만 보려고 나섰습니다.



가격이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만큼 비싸더군요.(어른 12,000원, 어린이 8,000원)

오르세는 어린이는 무료였는데....비행기 타고 온 그림들이라 몸값이 올라갔겠죠?


134점이나 되는 많은 그림이라 좋긴 했는데

1. 너무 좁은 공간에 많은 관람객을 들여놓아서 그림을 감상하는데 좀 문제가 많았습니다.

2. 오르세는 환한 공간에서 그림을 감상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한가람미술관은 어두컴컴한 분위기여서 졸린 분위기가...

3. 예술의 전당 경내에 있는 음식점들은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비해 너무 비쌉니다.


그래도 오디오 가이드도 있어서 그림 해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좋았습니다.

마네와 모네 같이 우리에게 낯익은 작품도 있었지만 유명세가 좀 떨어지는 화가들 작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 전시작품도 일정기간 순회게시를 하는 방식이니 다 보려면 몇년은 걸리겠죠?


늦게 길을 나선 탓에 2시가 넘어서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배가 고플 수 밖에요.

배 고프다고 아우성 치는 준기에게 "예술가는 배고프고 관람자는 배부른데 오늘은 어째 배가 고픈 관람자가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예술의 전당 바깥으로 나와 식당을 찾아 가려는데, 아내가 "준기가 가고 싶다는 동구릉도 가볼까?"하고 제안을 합니다.


동구릉 앞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대책없이 동구릉으로 갔습니다.

전철타고 오려다 교통카드를 잊어먹고 온 준기 때문에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차를 끌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가

이젠 동구릉까지...준비한 간식도 없고 물도 없고...암튼 대책없이 걍 동구릉으로 갔습니다.


헐! 유원지도 아니고, 오가는 사람들은 완전 유원지 분위기입니다. 돗자리 기본.

게다가 주차장은 아무도 못들어갑니다. 워낙 차가 많아서...해서 근처 구리문화원에 차를 대고 걸어갔습니다.


점심 먹고 입장하니 오후 4시. 한시간 동안 보고 집으로 출발해야 대구내려가는데 지장이 없을 듯...

총알같이 관람을 합니다.



전체 배치도입니다. 여기에는 왕과 왕비가 묻힌 곳으로 서울 동쪽에 모두 9곳에 릉이 있다고 하여 동구릉이라고 부릅니다.

추존왕인 문조의 수릉이 1890년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는데, 문조는 183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인 신정왕후는 1890년에 승하했기 때문에 이 때에 합장릉으로 조성했다고 합니다.(사진 출처 : 동구릉관리소 홈페이지)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역사문화관이 있는데 왕릉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줍니다.

조성방식, 능과 원, 그리고 묘의 차이 등등 시청각 자료가 잘 되어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받은 안내도를 들고 오른쪽으로 돌아봅니다.

준기가 그렇게 하자네요. 1시간쯤 걸린다고...


대학 2학년 때인가 한번 왔으니 무려 30여년 가까이 되었군요.

그때는 흐르는 물이 많아서 이런 곳에 왜 왕릉을 이렇게 많이 썼을까? 의하했었죠. 


생긴 모습이 비슷한데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난 다음에는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어서 사진으로 보면 거기가 거기 같습니다.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이죠. 정자각(丁字閣)이 정남 방향으로 있고, 그 위 언덕에 왕릉이 있고, 정자각 오른쪽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록해 놓은 비각이 있습니다. 왕릉을 볼 때마다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잔디로 조성해 놓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한가위 차례를 지낸 다음이라 왕릉에 제사를 올릴 때는 어떤 음식을 어떻게 진설하는지 궁금해서 한번 찍어봤습니다.

사대부가에서 사용하는 조, 율, 이, 시는 왕실에서는 고려 대상이 아닌가 봅니다.


현릉..문종임금과 왕비인 현덕왕후 권씨의 릉입니다.

왼쪽이 문종임금, 오른쪽이 현덕왕후의 릉입니다.


책일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면 좋지 않다는 사례로 제가 준기에게 가끔 얘기하는 왕입니다.

문종은 체격도 크고, 학문도 뛰어난 팔방미인이었습니다. 세종을 도와 한글을 창제하고 아악을 정리하고 아무튼 문학, 과학, 예술, 국방 등 못하는게 없는 그런 세자였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책읽기만 한 탓에 건강도 좋지 않았고 또 세자빈을 두번이나 갈아치울 만큼 아내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남자였습니다. 결국 28살이 되어서 단종을 낳았는데 그나마 왕후인 권씨는 사흘만엔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문종은 39살에 죽었는데 사실 성종보다 1년을 더 산 나이였고, 역대 조선왕들에 비해 수명이 짧은 편이 아니었지만 아들인 단종이 어린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어서 다들 문종임금이 단명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생인 세조에 의해 현덕왕후는 추폐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어 지금 자리로 옮겨 왔는데 그 당시에 양쪽 능 사이에 소나무가 많아서 두 능을 가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능을 조성하는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가운데 있던 소나무들의 말라 죽어 양쪽 능 사이에 시야가 트였다고 합니다. 문종은 세번째 맞은 현덕왕후를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원자를 낳자마자 세상을 떴기 때문에 더 애틋한 마음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에 문종은 새장가를 들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현덕왕후의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아는 삼봉휴양림에 있는 약수를 발견하시고 거기에 서당을 열어서 글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태조가 묻힌 건원릉입니다.

능 조성에 6천명이 넘는 장정이 한달 이상을 작업했다고 합니다.

무덤을 보면 봉분에 잔디가 아니라 억새를 심었습니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았던 태조는 불행하게도 왕자들이 골육상쟁을 벌이는 장면을 보게 된 불행한 왕이었죠.

세상이 싫어져 왕위를 내 놓고 고향인 함흥에 가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죽은 계비(신덕왕후, 방석과 방번의 생모)를 사랑해서 궁궐에서 가까운 곳에 릉을 쓰고 자주 행차를 했다고 합니다. 사랑했던 신덕왕후와 함께 고향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계모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던 태종은 이 희망을 묵살했죠.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신덕왕후의 릉을 파내 정릉으로 이장했습니다.

이 다음부터 능은 모두 4대문 밖에 조성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태조를 고향에 모실 경우 능행차의 부담이 너무 클 것을 고려해 태종은 함흥에서 억새를 옮겨와 건원릉 봉분에 심었습니다.

고향의 흙냄새를 맡게 해 드림으로써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염원과 관리의 어려움에 절묘한 타협점을 찾은 거죠.

게다가 억새가 울창해 평생을 활달한 무장으로 지낸 태조의 기상과 잘 어우러집니다.



9개 릉을 돌아보는데 1시간 남짓 걸리더군요.

제일 왼쪽에 있는 숭릉은 철새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고 있어서 8개 릉만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보면 1시간 30분쯤 걸리겠더군요.

여름에 돗자리 들고 와서 소풍온 기분으로 한나절 돌아볼만한 곳입니다.


동구릉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문화재청 동구릉 관리소(http://donggu.cha.go.kr/)를 찾아가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