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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서남해안 여행(2) - 해남

by 연우아빠. 2011. 3. 11.

□ 해남 여행(2.27)

 

따뜻한 방바닥을 지고 잠을 자서 그런지 아주 개운합니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옵니다. 지짐 부치는 소리 같은 빗소리가 들립니다. 정확한 일기예보입니다. 일기 예보가 없던 시절이라면 어제 같은 날 바다로 나갔다가 오늘 같은 날 위험에 빠질 수도 있겠네요.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어부들에게 일기예보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부들에겐 천문을 볼 줄 아는 선비가 꽤 쓸만했겠지요?

 

준비해간 곰탕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휴양림을 나섰습니다. 야영장에는 비바람이 심한데도 2가족이 대형 캐슬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고 있습니다. 야영데크마다 전기시설이 되어 있어서 고급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아늑하게 야영을 즐기기에 충분합니다. 비바람이 심한 날씨라서 멀리는 못가겠네요. 이미 천리길을 내려 왔는데 백리길을 가는 게 불편한 날씨입니다. 그래도 여행경험이 많아서 크게 개의치는 않습니다. 휴양림을 떠나기 전 차안에서 아내와 준기가 행선지를 두고 옥신각신 합니다. 아내가 가고 싶어하는 길을 택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윤선도 선생의 유적과 녹우당, 그리고 두륜산 대흥사를 먼저 보고 준기가 가겠다는 땅끝마을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녹우당 가는 길가에서 만난 만인총


 

녹우당을 향해 가는데 길가에 지나치게 커다란 무덤이 보였습니다. 혹시 장고형 고분인가 해서 차를 멈췄습니다.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대교뜰에 있는 이 무덤은 전하는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합장해 놓은 무덤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이 처음 전라도 땅으로 넘어 들어와 곳곳에 이런 사연을 가진 거대한 무덤이 생겼습니다. 전북 남원에도 이 비슷한 전설을 가진 무덤이 있다죠. 여기서 가까운 강진 마량항 건너편에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직전에 잠시 둔영을 했던 고금도도 있지요. 잠시 명복을 빌며 윤선도의 유적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납니다.


윤선도 유물전시관 앞에 아주 멋진 연못

   
    

윤선도 유물관 앞에서 만난 선비와 부인의 화장실 표지



녹우당 근처에 있는 윤선도 기념유적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 앞에는 범상치 않은 형상을 한 연못이 있습니다. 남녀 화장실 표지도 재미있네요. 선비와 조선 아낙네의 실루엣으로 만들었군요. 이 유적에는 효종임금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다는 녹우당을 중심으로 윤선도의 선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묘와 사당 그리고 윤선도와 그 후손들이 남긴 유물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우산이 휠 정도로 비바람이 심해서 우선 유물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물전시관 윗층


유물전시관 아래층 내려가는 길


윤두서가 남긴 목기깎는사람 그림 목판본 만들기

저 남자분이 왜 아들 사진만 찍어 주느냐고 물으시길래,
딸이 요즘 모델 되기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래층에 있는 윤선도의 유물전시관

여기서부터 사진촬영금지랍니다. 물론 안찍었습니다.


유물관을 나와 녹우당으로 올라가면서 찍은 유물관 뒷모습입니다.

기와집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참 많이 봤습니다.


 

2층이지만 1층 같은 독특한 설계 때문에 이 유물관은 환해 보이기도 하고 아늑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이들이 목판을 찍어 볼 수 있네요. 많이 해 본 일이지만 그래도 연우랑 준기는 한번씩 목판을 찍어 봅니다. 윤선도의 유물전시관은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그의 생애와 시문학 작품, 그림, 그리고 후손들이 남긴 멋진 글과 그림을 아기자기하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해남 윤씨 가문은 전성기에 엄청나게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있었네요.

 

해남윤씨 족보를 인쇄한 목판이 남아 있는데 자손을 남녀 구분없이 출생 순서대로 기록했으며, 외손까지 기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안동김씨 족보와 구성이 닮았습니다. 남인들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네요. 재산을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도 남아 있는데 윤두서와 윤선도의 자녀 분재기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윤선도 자녀 분재기에는 토지는 남녀와 출가 여부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분배했고, 노비는 제사를 모시는 후손에게 배분했으며 종가 주변에 있는 노비는 아들에게 분배했습니다. 아무래도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 것을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소유하고 있던 노비는 사위에게 분배하였습니다. 노비는 무려 500여명, 토지는 600마지기가 넘는 엄청난 재산입니다. 이런 재산 분배 역시 안동 하회유씨들의 재산 분배기와 비슷한데 남인들의 특징인 모양입니다. 순조 이후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던 서인들과 상당히 다른 풍습입니다.

 

종가음식으로 생선만두, 다식, 비자강정, 감단자, 고기만두 등을 소개해 놓았는데 음식디미방과 같이 종가마다 독특한 음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것이 지금도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면 우리의 문화를 더 풍성하게 했겠지요. 1834년 3월에 작성한 규환록이라는 두루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해남 윤씨 가문을 중흥시킨 윤광호의 부인 광주 이씨가 시어머니에게 보낸 종가 며느리의 애환을 담은 두루마리인데 조선시대 후기에 양반가문의 풍습을 연구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조용한 유물관 안에서 익숙한 글과 그림을 보다가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1668~1715)의 작품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염 한올한올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상세하게 그려놓은 자화상으로 너무 유명한 이 선비는 일반적인 선비와 달리 밀레 못지 않은 자연주의 화가였던 모양입니다. 목기깎는 사람, 나물 캐는 아낙네, 짚신 삼는 노인, 밭을 가는 노인과 소, 밀레보다 앞선 시대에 우리의 자연과 인물을 담은 수묵작품을 많이 남긴 분인데 저는 고작 자화상만 알고 있었네요. 그러고보니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처럼 이 시대는 조선의 것, 조선의 일상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시대였던 모양입니다. 윤두서의 그림은 그의 후손과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네요. 그분의 후손과 제자들이 남긴 그림도 상당히 많습니다. 남도에는 이런 아름답고 오래된 문화콘텐츠가 가득하니 천리길을 달려온들 수고롭지가 않네요.


녹우당 앞에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시를 새긴 비석이 있고 담장 뒤에 수백년된 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유물 전시관을 나와 녹우당이 있는 해남윤씨 마을로 올라갔습니다. 초록색 비가 내리는 녹우당. 이름에 딱 어울리는 날씨였습니다. 이날은 녹우당은 일반관람을 허락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부 수리중인지 아니면 살고 계시는 분이 너무 많은 방문객 때문에 지친 것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녹우당은 효종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수원에 집을 하사했는데 그 집을 1668년에 배에 싣고 이리로 옮겨와 사랑채로 썼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 녹우당 사랑채라고 하네요.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자리를 잡은 이 집은 이후 수백년간 해남윤씨의 종가로 번성했습니다. 마을 뒤에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난대림인 비자나무 숲이 울창합니다. 마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명당이라는 뜻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이 탁 트입니다. 마을 앞을 지키는 수백년된 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마을 뒤편 비자나무 숲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수백년된 해송이 우뚝 솟았습니다. 골목은 어제 영암 구림마을에서 보았던 양반집 흙돌담 길을 닮았습니다. 이 마을에 해남윤씨의 터를 닦은 어초은 선생의 사당인 추원당은 대문 가로대와 손잡이에도 단정한 거북모양 나무장식이 있었습니다. 후손들의 장수를 기원했던 걸까요? 해남 윤씨 가운데는 장수한 사람들이 많네요.

 

녹우당 옆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입니다.

부자들이 살았다는 표시가 나지요?


윤선도의 조상인 어초은 선생 무덤이 있는 곳에 제주도에서나 자라는 줄 알았던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초은 선생을 모신 추원당입니다.

대문 안쪽에 가로대를 잡아주는 거북장식이 재미있어서 찍었습니다.

장수를 비는 마음을 담은 것일까요?



묵향으로 몸과 마음을 가득채우고 이번에는 가까운 두륜산 대흥사로 길을 잡았습니다. “또 절에 가는 거야?” 준기의 볼멘 소리. “유럽에 가면 성당을 순례하듯이 한국에서는 당연히 절이지” 라고 답하며 대흥사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대흥사 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이 절은 우리나라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 그리고 승장 서산대사의 유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대낮이지만 비가 오락가락 하는 때문에 저녁나절 같은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31호로 유명한 탱화장 고재석 선생이 2005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젠 전통 탱화을 제작하는 전통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고 하는 안타까운 안내문도 붙어 있네요.



두륜산 대흥사 가는 길은 이렇게 멋집니다.

봄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초록색이 참 많습니다.



대흥사 올라가는 길은 아직 새순이 돋지 않는 2월달인데도 초록이 참 싱그럽습니다. 앙상한 활엽수와 비를 머금은 초록 침엽수가 잘 어울려보입니다. 대흥사 올라가는 길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건물이 보입니다. 그렇군요. 방송에 나와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유선관입니다. 방송 덕분인가요? 아니면 원래 유명한 여관이라서 그런가요? 손님이 꽉 찬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여관에서 하룻밤 묵어 보고 싶다는 아내의 바램이 있었지만 아직 겨울 한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때라 우풍을 염려해 예약을 하지 않았거든요. 주차장도 가까이 있어서 좋은 숙박지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1박2일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유선관입니다.


 

절 입구 부도들을 모아 놓은 곳에 서산대사의 부도가 있습니다. 정말 남북을 오가며 종횡하신 분 답습니다. 작은 개울을 건너며 사바세계의 속진을 털고 피안의 대흥사 경내에 들어서면 두륜산이 자비롭게 둘러싸고 있는 터에 아름다운 가람들이 찾아 오는 이들을 반겨줍니다. 다듬지 않은 듯 다듬은 듯 그런 편안한 느낌을 주는 가람들은 주룩주룩 내리는 봄비와 어울려 아주 평화로운 풍경을 선사합니다. 대웅전 앞을 장식한 독특한 토기 등잔, 그리고 대웅전 옆에 있는 티벳불교에서 불 수 있는 독특한 나무구조물이 있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밀면 빙글빙글 돌아 갑니다.


서산대사의 부도가 있다는 곳입니다.


수행하는 곳은 왼쪽 개울 건너편에, 사람이 기거하는 곳은 오른쪽 가운데에 있는 재미있는 절입니다.


사바세계의 풍진을 털고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집 같습니다.


대웅전 앞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토기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안에는 등불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티벳불교에서나 볼 법한 재미있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밀면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탑의 모양을 보니 8세기 무렵에 세운 신라탑을 닮았습니다.

아니 석가탑을 세운 사람은 백제사람 아사달이니 백제양식이라고 해야겠네요.


거세게 내리는 비 때문에 다들 처마 안에서 하늘만 쳐다봅니다.



조용히 내리던 비가 갑자기 세찬 폭우로 돌변합니다. 한여름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해 처마에 올라갔습니다. 기와 지붕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보니 어렸을 때 떨어지는 빗물에 손을 대며 장난을 치면 ‘사마귀 난다’고 야던치던 어른들이 생각납니다. 아내도 옛날 생각이 났는지 손을 뻗어 낙숫물에 손을 대 봅니다. 건물 사이로 빠른 바람이 지나가자 마당에 떨어지던 빗물들도 파도처럼 물결을 만들어 냅니다. 쉽게 그칠 비 같지가 않습니다. 잠시 잦아드는 틈에 주차장을 향해 얼른 내려갔지만 도중에 우산대가 휘어질 만큼 강한 비바람을 맞으며 애를 좀 먹었습니다. 잦아들었던 비가 너무 심하게 내려 유선관 대문에서 잠시 피했다가 다시 주차장을 향해 잰걸음을 놓습니다. 습도가 높아지니 추위가 몸을 파고 듭니다.

 

바람이 세차게 빗물을 휩쓸고 지나가니 마당에는 마치 저수지처럼 물살이 쏜살처럼 지나갑니다.



그래도 여행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죠? 오늘 마지막 일정으로 준기가 오매불망하던 땅끝마을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안개도 심하고 비바람도 강해서 아마 전망대에 올라가보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번쯤을 가 볼만한 곳 아니겠습니까? 생각보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선착장에는 청산도를 향해 떠나는 페리호가 정박해 있습니다. 땅끝마을 기념비 앞에서 사진도 찍고 청산도를 향해 떠나는 배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찍어 달라는 준기를 쫒아가며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수평선을 향해 사라지는 배를 본 준기는 섬 여행을 해보고 싶답니다. “들어 갈 때는 네 자유지만 섬에서 나오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라. 날씨가 맞지 않으면 섬에서 며칠을 지내야 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답니다. 야영이 가능한 날씨가 되면 올해는 섬 야영에 한번 도전해 봐야겠네요.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떠나는 페리선 장보고호.

준기는 저 배를 타고 섬에 가보고 싶다는군요.


 

하늘이 어두워져서 아쉽지만 오늘은 더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아 숙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주작산 휴양림에서 오늘부터 2박 3일을 지낼 방은 대나무방입니다. 헐! 여긴 더블침대에다가 대리석으로 내부 마감을 했군요. 게다가 욕실 바닥은 난방까지 들어옵니다. 게다가 천정에는 시스템 에어컨도 있고 벽걸이 TV에 안나오는 방송이 없네요. 어제 노각나무 방보다 더 럭셔리합니다. 저녁을 일찍 먹고 터키 여행을 해 볼까 하며 읽고 있는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과 김태님의 만화 <십자군 이야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내일도 여전히 비가 많이 올 거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