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그리고 맛이 있는 서남해안 여행
일시 : 2011.2.26~3.1(3박4일)
여행지 :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이번 여행지는 우리가 사는데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쉽게 갈 수 없는 곳, 멀고 먼 남도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회사 사정 때문에 2월28일 생각지도 않게 하루 휴가가 생겨 어디를 갈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아내는 강진, 해남을 가자고 한다. 2008년 8월에는 천관산휴양림에 머물면서 강진과 목포를 돌아보았고 2009년 5월에는 공룡유적을 찾아 남해안을 여행했을 때 들렀지만 이번에는 그때 못 본 곳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내와 나는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어려운 세대니까.
숙소 예약을 위해 검색을 하던 중, 자주 갔던 천관산은 아무래도 드나드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이번 여행에서는 다른 곳을 찾았는데 한옥 여관인 유선관을 아내가 원했지만 아무래도 <1박2일> 방송의 영향으로 복잡할 것 같아 망설였다. 휴양림 지도를 찾다가 우연찮게 주작산 자연휴양림이 눈에 들어왔다. 두륜산 도립공원에 잇닿아 있어 숲도 풍성할 것 같고 무엇보다 강진과 해남의 경계에 있어 이번 여행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맘에 들었다. 다행히 빈 방이 있어서 2월 26일(토)은 노각나무방, 2월27일(일)~3월1일(화) 사이는 대나무방을 예약했다. 한달을 기다리는 동안 하필 따뜻하던 봄 날씨가 여행 출발일부터 추워지기 시작해 전국적으로 비가 계속 온다는 예보였다. 포기할까 했는데 도전정신 충만한 준기가 절대 안된단다. 비가 온다니 부침개 만들 재료를 가져가야 한단다. 허~ 참!
금요일 저녁 근무를 마치고 대구에서 KTX로 집으로 올라가보니 아내가 웬만한 짐은 다 챙겨놨다. 야외에서 숯불구이를 할 수 없다는 건 아쉬웠지만 짐은 무척 간단했다. 아내가 “오랫만에 짐이 아주 간단하네”한다. 운전을 하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이상하게 잠을 자기가 싫다. 주말부부가 된 다음에 생긴 버릇.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을 청했다.
□ 영암 여행(2.26)
아차! 휴대폰 알람소리에 깼다. 주밀인데 아침 일찍 울리는 알람을 그대로 두고 잤었구나. 다시 1시간 더 잠을 청했다. 늦으면 늦는대로 이르면 이른대로. 어차피 주말 내내 날씨가 좋지 않다는 예보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그리 많이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아내가 일어나 서두른다고 짐을 챙겼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 출발시간은 11시 근처다. 하늘은 기가 막히게 깔끔하다.
지난 한주 동안 여행일정을 짜보라고 했는데 출발하는 차 안에서 준기와 아내가 여전히 의견이 갈린다. 준기는 식객에서 본 전주의 유명한 비빔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왕인 유적지에 먼저 가자는 것이고, 아내는 월출산 도갑사를 먼저 가자는 의견. 400km 가까운 길을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5시간은 걸릴듯하니 점심은 차안에서 대충해결하기로 하고 해 지기 전에 월출산에 도착해야 할 것 같아 왕인박사 유적지를 먼저 가기로 했다.
예상대로 길에는 차가 그닥 많지 않았다. 3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비봉 나들목에서 15번 고속도로에 올랐다. 쏜살처럼 달려 오후 4시쯤 월출산 근처 왕인박사 유적지에 도착했다. 월출산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왕인박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전해온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달리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 왕인은 의문에 휩싸인 인물이다. 백제출신으로 일본에 학문과 기술을 전해준 사람으로는 왕인, 아직기, 노리사치계 등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백제출신이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직 일본쪽 기록인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에만 등장하는데, 오랜 전란으로 인해 옛날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은 대륙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라진 고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 중국에서 사라진 고서가 일본에는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라남도 영암, 일본 아스카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왕인박사가 탄생한 마을이 있는 성기동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림같은 월출산 국립공원을 병풍삼아 넓은 땅에 자리잡은 이 유적지는 걸어다니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왕인 박사의 기념관 영월관입니다. 영암과 월출산에서 한글자씩 따서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내부는 촬영금지입니다. 왕인박사가 살았던 시대와 관련한 유물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탄생과 성장,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과 학자로 살았던 일생을 그림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답니다. 태자의 스승으로 일본 학문의 시조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경내가 정말 넓습니다. 저 멀리 왕인박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월출산을 병품삼아 서 있는 왕인박사 동상.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우리나라 역사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 같은 일본 역사서에는 그 행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고대문화교류사에 큰 업적을 납겼지요.
오랫만에 길을 나선 준기는 하늘을 날고 싶은가 봅니다.
"아들아, 아스카(飛鳥)는 날아가는 새를 말하는게 아니란다."
삼국사기에 금강 이남에 대한 기록은 백제 동성왕 때에 처음 등장하고, 영산강 일대 전남북 지역의 고대 유적이 같은 시대 일본 큐슈와 유사한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한반도 서남해안과 일본 큐슈를 지배하는 독자적인 고대 왕국이 있었다는 주장하기도 한다. 이 지역은 고대일본의 대표적인 묘제인 전방후원분과 닮은 장고분, 하니와 토기장식, 금동관과 관모, 다리미 등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런 유물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백제와 다른 고대 왕국이나 강력한 정치권력이 있었다는 증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찌됐건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일본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일본역사기록에 남게 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왕인은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지금은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과 전설이 후대의 기억제작과 함께 섞인 일본의 역사기록과 이 지역에 전해오는 왕인에 대한 전설을 바탕으로 조성한 이 기념관 주변에는 왕인의 탄생지, 공부한 곳, 마셨다는 샘이 있다. 널찍한 공간은 완벽한 평지라서 시야가 시원하다. 남도라서 그런지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았지만 초록색이 풍성한 것도 보기 좋다. 일본 학문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서 그런 것일까? 왕인사당(왕인묘) 방명록에는 일본인이 이름이 한쪽당 1/3 정도 될 만큼 많다.
뒤로 더 들어가면 작은 숲이 나옵니다. 이 숲길 끝에는 성스러운 샘물이 있습니다.
왕인 박사도 그분의 어머니도 이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3월3일 삼짓날에 이 물을 마시고 소원을 빌면 왕인박사 같은 성인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내려오는 길도 멋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호젓한 길이라 더 편안합니다.
여기는 영암입니다. 신령스러운 바위지요.
바로 왕인박사가 탄생한 자리라고 합니다.
왕인 박사의 영정을 모신 왕인묘. 임금님과 같은 등급입니다.
참배객 가운데는 일본에서 오신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방명록을 넘겨 보니 각 페이지 마다 1/3 정도는 일본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왕인박사 유물관(영월관) 옆에 재미있는 비석이 있다.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왕인박사의 고사를 따라 천인천자문 비석을 세운 것. 천인천자문은 옛날 풍습이다. 아이가 태어나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배울 때 쯤 이웃에 학문을 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한글자씩 받아 천자문을 엮어 아이에게 주는 풍습인데 자연스럽게 아이를 세상에 알리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도록 유도한 것. 한글자를 배워도 스승이라 하였으니 아이는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1천명의 스승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비석에는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놓았다. 퇴임하신 김대중 대통령께 첫 글자인 천지(天地)를 써 주시기를 부탁드렸는데 김 대통령께서 첫 글자는 현직인 노무현 대통령께서 쓰는 게 좋겠다고 하시면서 당신은 지(地)자를 쓰셨다고 한다. 영암군은 첫 글자를 노 대통령께 부탁해 놓고 다른 글자를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한 글자씩 받아 999자를 완성했지만 정작 노 대통령은 너무 바쁜 관계로 한 글자를 쓰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김 대통령께 첫 번째 글자를 부탁드렸지만 김 대통령께서 끝내 사양해서 결국 왕인박사의 고향 영암군의 수장인 군수께서 첫 글자를 써서 천인천자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비석에 새긴 글씨를 들여다 보니 스님도 있고, 정치인도 있고, 일본사람도 있다. 직업도 다양해서 직업별로 글씨 모양이 다들 독특하다. 서예를 하신 분들의 글씨는 미술작품 같다.
천인 천자문.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천사람에게 글씨를 받아 천자문을 엮어 서당에 갈 때 교재로 쓰라고 주었습니다.
한글자만 배워도 스승이라고 했답니다. 아이를 세상에 알리고 스승 1천명을 얻는 재미있는 풍습이지요.
천인 천자문 비석을 만들 때 있었던 김대중 노무현 두분 대통령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이 이야기도 전설이 되겠지요.
천사람이 쓴 글씨는 미술 작품처럼 독특한 조화를 드러냅니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고 하네요.
첫글자를 현직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쓰시라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두번째 글자를 쓰셨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첫글자를 끝내 쓰시지 못해서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의 군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첫글자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군수께서 김 대통령님 글씨 앞에 쓰시는 일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일생을 민주화를 위해 사셨던 올곧은 선비답게 김 대통령님 글씨는 굳센 의지가 드러납니다.
땅이 저리 튼튼하니 세상 사람들이 안심하고 땅을 밟고 다닐 수 있겠지요.
노무현 대통령께서 김 대통령의 뜻을 따라 첫글자를 썼다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왕인 박사를 기리는 천인천자문 답게 일본사람이 쓴 글씨도 상당히 많습니다.
서예를 하신 분 글씨 답게 글씨 하나가 예술입니다.
준기는 우주인 같다고 하고 아내는 머리를 땋은 사람처럼 보인답니다.
왕인박사 유적지를 나와서 아내가 보자고 하는 구림전통마을에 들렀다. 마을 안에는 도기 박물관이 있어서 더 반가웠다. 왕인 박사가 태어나 자란 마을로 2,2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비록 긴 세월을 모두 증명해 줄 유적은 거의 없지만 전통 한옥과 황토 담장, 그리고 정겨운 골목이 남아 있는 마을이라는 게 너무 반가웠다. 이 마을은 왕인박사, 왕건의 아버지 왕륭에게 만월산 금돼지터에 자리를 잡으면 삼한의 왕을 낳을 거라고 알려주었다는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 도선대사, 왕건을 비롯해 여섯임금을 도와 고려를 반석에 올려놓은 천재 최지몽이 태어난 곳이며, 500여년간 대동계를 이어온 마을로도 유명하다.
왕인 박사가 태어나서 살았다는 마을 구림전통마을입니다.
무려 2,200년이나 된 마을이라고 합니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것 같아 먼저 도기 박물관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겉모습은 그저 그런 모습이었지만 안에는 정말 멋진 도기를 아기자기하게 진열해 놓았다. 잔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기는 바라보는 것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해 자기를 개발할 때까지 거의 만년 가까운 세월동안 도기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음식그릇은 물론 탁자, 의자, 제기 그리고 생명이 다한 다음에는 시신을 담은 관으로도 사용했던 도기. 유약을 발명하기 전까지 인류가 만들 수 있는 최상급 기술을 발휘했던 남도의 도기는 아직도 숨쉬는 항아리로 우리 생활 가까이 남아 있다.
마을 안에는 보기 드문 도기박물관이 있습니다.
토기에 유약을 한번 발라 구운 것을 도기라고 합니다.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은 토기를 사용했는데 유약을 두번 발라 굽는 자기를 개발하기 전까지 도기는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했고 지금도 숨쉬는 항아리로 우리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
한때는 왕이나 귀족 같은 권력자들의 무덤으로도 도기를 사용했죠. 이걸 옹관이라고 합니다.
서남해안 지방에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크기도 무척 다양합니다. 때로는 가족을 묻은 합장묘도 있습니다.
도기를 만드는 공방모습을 재현해 놓았네요.
편안한 느낌을 주는 색깔이 보기 좋습니다. 응접실에 놓아두면 정말 멋있는 탁자와 의자겠죠?
옹기 탁자 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장식이 있습니다. 아내가 갖고 싶다고 하네요.
이런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면 정말 운치있겠죠?
작은 박물관이지만 큐레이터의 솜씨와 콘텐츠가 꽉 차있는 멋진 박물관입니다.
주발과 대접, 그리고 작은 병들.
이런 식탁을 받아 음식을 먹으면 저절로 건강해질 것 같은 옹기그릇입니다.
전라도는 확실히 멋을 아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랜 문화유산이 이런 토양을 만든 기반이겠죠.
이런 작은 시골 박물관에 뭐 볼게 있겠어 하는 생각을 뒤집는 훌륭한 박물관입니다.
직접 도기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있어서 이 마을에서 하루쯤 숙박하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마을을 천천히 돌아 보았다. 통영 동피리 마을, 그리고 유럽여행 중에 보았던 여러 나라의 골목도 멋있었지만 천년이 넘은 구림마을의 황토색 골목은 또 다른 정다움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대도시에서 이런 골목을 볼 수 없는 게 너무나 아쉽단다. 아파트와 빌딩 천지보다 이렇게 아늑한 골목이 있다면 대도시가 얼마나 정겨울까? 비 정상적으로 많은 사람을 좁은 지역에 몰아 넣는 국토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양계장 닭장의 닭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겠지? 인간은 똑똑한 듯 하지만 어쩌면 사육당하는 닭 같은 신세인줄도 모르고 지내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아빠 엄마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 이런 골목이 있는 곳에서 살았지. “누구야! 놀자”라고 집 앞에서 부르면 뛰어나와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공차고, 다방구 놀이하고, 숨바꼭질 하며 놀던 시대가 있었지.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학원이랑 컴퓨터에 붙들려서 사는구나.
마을 앞 개천변에 작은 정자와 함께 우뚝 선 고만고만한 비석하나가 있다. 무엇일까 들여다봤더니 의사 박규상 선생의 기적비. 1919년 27살 젊은 나이에 이 지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선도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받은 광복투쟁의 유공자이다. 아! 이 마을은 정말 뼈대 있는 마을이구나. 옛날 마을인데도 골목길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마을을 다니다 보니 고죽 선생 기념관이 보인다. 국어 시간에 배운 홍랑의 시. 신분의 벽을 넘어 문학적인 교유와 사랑을 나눴던 고죽 최경창와 기생 홍랑. 바로 최경창의 생가가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문이 닫혀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나지막한 담장 너머 두 사람의 시가 나란히 새겨진 비석이 보인다. 조금 길어진 해가 이제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하는 시간, 마을을 나와 내려올 때부터 아이들이 노래 부르던 독천시장 안에 독천식당을 찾았다.
마을 개천가에 이렇게 멋진 정자가 있습니다. 500년이나 된 대동계가 있는 마을 답습니다.
정자 옆에는 1919년 3.1 독립선언과 만세투쟁에 앞장섰던 박규상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
27살 젊은 나이에 이 마을에서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죄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법정에 섰던 분입니다.
역사와 전통은 오래도록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개천을 건너 오래된 기와집들을 돌아 봅니다.
골목과 돌담길, 토담길이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오른쪽에 현대식 집도 담은 옛날식입니다.
이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예전에는 "준기야! 놀자" 이렇게 골목에서 친구가 부르면 아이들이 몰려 나와 뛰어 놀던 곳이었는데 말입니다.
덜 녹은 눈이 남아 있네요.
보일듯 말듯한 담장이 참 예쁩니다.
고죽 최경창의 기념관을 발견했습니다.
기생 홍랑과 아름다운 시를 주고 받으며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남겨서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어떤 집인지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곳이네요.
늦은 시간이라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담이 낮아서 안에 있는 비석이 보입니다.
홍랑과 최경창의 시를 새겨 놓았네요.
2,200년 된 마을에 서 있는 커다른 나무입니다.
짧은 2월달 해가 넘어가고 있네요.
여긴 양반들이 살았던 곳 같습니다. 담도 아까 본 것과 좀 다릅니다.
이 길은 국사암 가는 길입니다.
국사암입니다. 왕건의 탄생과 고려왕조의 수명을 예언했던 도선 국사가 태어나 버려졌던 바위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여기에 버렸다는데 새들이 나타나 도선국사를 보호했다고 합니다.
도선국사는 단순히 복을 비는 풍수지리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용도에 맞게 땅을 찾고 다듬는 비보풍수를 지향한 분입니다.
복지길처를 찾는게 아니라 조금 모자라는 땅을 복지길처로 만드는 방법을 찾았던 분입니다.
이 식당에 들렀던 것이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서빙하던 아주머니들이 어린 아그들이 산낙지를 찾는다고 웃으셨는데 녀석들은 자리에 앉자마다 산낙지 먼저 찾는다. 산낙지와 낙지구이 작은 것, 그리고 연포탕 2개를 주문해 맛있게 먹었다. 이 집 음식은 왜 이렇게 맛있는 것일까?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이 고소하고 향긋한 맛. 시원한 국물. 이 맛있는 음식을 1년에 한번 먹어보기 힘들다는게 좀 아쉽다. 현실로 돌아와 이렇게 먹은 음식이 물경 85,000원이다. 음식값이 60유로 쯤 된다고 했더니 준기가 “타켓식당은 2인분에 50유로였는데 그걸 가지고..” 한다. 이놈들이 여행 다니면서 간만 커졌나?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캄캄해졌다. 숙소를 찾아 차를 달려 8시쯤 주작산휴양림에 도착했다. 지자체 휴양림은 국립휴양림에 비해 숲이 빈약한 경우가 많은데 여긴 두륜산 도립공원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숲도 풍성하고 숙소시설은 최근에 지었는지 아주 좋았다. 우풍도 없어 아늑하다. 훌륭한 시설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따끈한 방바닥에 누우니 천리 길을 달려온 피로가 봄눈 녹듯 사라진다.
영암 독천시장 안에 있는 독천식당입니다.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서 맛있게 먹다가 아이폰으로 찍었습니다.
산낙지는 반쯤 먹었을 때였네요. 반찬 하나하나가 너무 맛있는 식당이죠.
산낙지랑 낙지구이를 먹고 난 다음 연포탕 2인분을 시켜 넷으로 나누었더니 이렇군요.
너무 맛있는데 너무 먼 곳에 있어서 1년에 한번 먹기도 힘드니 더 맛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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