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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자연으로 돌아가리..황정산휴양림과 귀농이야기

by 연우아빠. 2010. 9. 23.

자연에 가깝게 사는 생활을 꿈꾸다


(황정산 자연휴양림 여행)

2010.9.11~12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뒤 8월부터 대구에서 근무하라는 인사발령을 받았다. 아직 가족들과 휴양림 여행을 더 해야 하는데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상황. 유진아빠는 떠나기 전에 야영이라도 함께 하자고 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나질 않아 함께 하지 못했다. 이제는 멀리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대야산 휴양림을 예약했다. 방 2개를 잡았다가 1개는 취소했는데 뒤늦게 동생 가족들이 모두 참여하겠다고 해서 다시 대기를 걸었다.

대구에서 이럭저럭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현지아빠께서 예천에서 편집회의를 하자고 연락하셨다. 성영아빠께서 9월11일에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단다. 워낙 바쁜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다른 날을 다시 잡는 것은 더 어려울 것 같아 밤에 숙소에서 예천을 다녀오면 될 것 같아서 그날을 회의 날짜로 정했다. 회의장소는 현지맘께서 기거하시는 곳인데 작년부터 거기 한번 가보자고 하다가 이리저리 날을 맞출 수 없어서 미뤘던 곳. 현지맘님의 건강은 요즘 어떠실까? 사시는 곳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다.

출발 몇일 전 막내 동생이 회사 근무 때문에 11일에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금요일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유진이네 가족도 형님네와 함께 황정산휴양림을 잡았다는 카페 글을 보고 나서 아무래도 밤에 대야산에서 예천까지 가는 산길이 부담스러워 위약금을 조금 내고 대야산을 취소한 뒤 예천과 가까운 황정산휴양림의 빈방을 잡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9월처럼 비가 몇날 몇일 내린다. 처서 지나서 비가 오면 곳간에 쌀이 줄어든다는 속담도 있는데 올해 날씨는 정말 비도 많고 무덥다.


아내가 낯설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챙겨보는 짐. 준기는 지도 상자를 뒤져 충북과 단양 일대의 지도를 한 묶음 찾아서 배낭에 넣었다. 기특한 녀석. 연우는 요즘 배우기 시작한 기타를 가져가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습기 많은 날에 악기를 가지고 다니는 건 악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집에 두고 출발했다. 오랜 여행 경험으로 비가 오건 말건 여행은 나름대로 재미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버지의 걱정을 귀에 담으며 휴양림으로 출발했다. 주은아빠에게 맛있는 집을 문자로 받았는데 너무 늦게 출발한 탓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비가 오는 곳이랑 오지 않는 곳이 왔다갔다 한다.

황정산자연휴양림 연립동 숙소 앞에 산이 비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있다.


비 때문에 주변 구경은 아무래도 지장이 있다. 휴양림에 도착하니 처음 개장했을 때보다 많이 안정돼 보인다. 좁은 야영장에는 데크도 3~4개 만들어 놓은 듯. 휴양림에서 숯불구이 해 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니 우선 야외 탁자에 비를 막을 수 있게 타프를 쳤다. 오랜만에 쳐 보는 타프. 젖은 탁자를 덮을 돗자리를 가져 오지 않은 게 아쉽다. 현지아빠께 연락이 왔다. 7시 정도 돼야 성영아빠가 도착한다는 소식. 여기서 저녁을 먹고 들어간다고 답을 했다.

 

연우 담임 선생님이 내주신 “자녀를 격려하는 부모님 일기” 한편을 썼다. 쓰다보니 격려 내용보다 뭐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 쪽으로 자꾸 기운다. 동생이 도착할 무렵 숯불을 준비했다. 타프 위에 도르르 구르는 빗방울. 다행히 저녁을 시작할 무렵 비는 그쳤다. 오랜만에 맛보는 숯불구이의 맛. 저녁을 마치고 8시가 넘어 아내와 둘이서 예천으로 출발했다.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길, 다시 비가 내렸다. 예천으로 나가는 길에 자동차 앞으로 다람쥐만한 작은 동물이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 차를 얼른 세웠다. 새끼 너구리 같은데 우리차에 불빛에 놀랬는지 반쯤 건너던 길을 되돌아 숲으로 들어갔다. 저수령 못미쳐 언덕길에서 왼쪽 숲에서 노루가 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급하게 차를 세웠는데 불빛에 놀랬는지 노루가 길 건너기를 포기하고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가는 길에 개구리도 열심히 길을 가로질러 간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에 사람이 차를 끌고 다니니 얼마나 괴로울까.

저수령을 넘으면서 예전 죽령길 넘던 생각이 났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속도를 전해 낼 수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 네비게이션에만 의지해서 가다 보니 이상한 산골동네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한다. 올라가다 보니 아무래도 이건 잘못된 길인 것 같다. 차를 돌리기 어려운 좁은 산길에서 간신히 차를 돌려 네비게이션을 축소시켜 보니 가야할 곳보다 한참 지나쳐 온 것 같다. 다시 산길을 올라가는데 그제서야 입구 간판이 보였다. 저수령에서 산길을 조금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꺽으면 우리가 가야할 곳이 나오는데도 교통규칙을 준수하는 네비게이션은 U턴을 할 수 있는 곳까지 계속 내려가도록 안내한 것. 3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거의 한시간이나 걸렸다. 두메산장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오신 현지아빠님을 따라 저녁을 드시는 곳으로 갔다. 마당에는 허름하게 얽어 놓은 지붕을 갖춘 초막이 있었는데 빗소리를 들으며 정감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오는 도중에 길을 헤맨 일을 이야기 하며 노루랑 너구리를 보았다고 했더니 현지맘께서 그때는 자동차 불을 끄고 기다려줘야 동물들이 길을 건너간다고 한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그렇게 해야겠다. 성영이네는 올라오다가 차 앞으로 날아오는 부엉이(부엉이라고 하셨던가? 기억이 제대로 안나는군)를 봤다고 한다.

여섯 사람이 오붓하게 앉아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성영맘께서 가져오신 와인으로 분위기를 돋우니 무릉도원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시골생활에 익숙치않아 힘들거나 우리가 생각지 못한 어려움도 많겠지만 도시에서 느꼈던 스트레스가 확 줄어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 볼만한 생활인 것 같기도 하다. 이웃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먹을거리는 주변 텃밭과 산에 지천으로 있으니 사는게 너무 평온하다는 말씀. 현지맘님의 경험을 듣고 우리도 도시 생활을 떠나야 할 날이 그닥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찬찬히 준비해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40대 중반 이후에 갑자기 나타나는 노안, 신체의 변화를 서로 얘기하며 많은 공감을 했다. 사춘기를 맞는 아이들의 변화와 부모의 욕심이 부딪치는 상황이 예기치 못하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경험담. 그리고 직장에서 점점 의욕을 잃어가는 중년 아저씨들의 심리적 변화에 대해 서로 경험을 얘기하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공감대를 넓혀간다. 현지맘님은 여기를 떠나 새로 이사갈 집을 사진으로 보여 주셨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장독대와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 그리고 텃밭.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시골집이었다. 도시에서 오래 사셨음에도 시골에서 잘 적응하신 모습이 새삼 멋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멋스러움보다 식탁에 올려놓은 살림살이와 음식들이 자연을 닮아 편안하고 아름답다.

비가 줄기차게 왔건만 해발 7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 느끼는 편안함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나 정서가 비슷한 사람들이 만난 때문일까? 맘 속에 담고 있었던 자기 상태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을 했다. 명예욕이나 금전, 지위상승을 위한 노력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미묘한 변화. 설령 연봉을 몇억을 받은들 날밤을 지새우며 일을 해야 한다면 그 돈을 쓸 시간도 없으려니와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조차도 없으니 수억원짜리 연봉은 받을 의미가 없는 돈이 되고 만다. 효율적으로 일하려고 후세에서 누려야 할 것까지 모두 빼앗아 와서 다 써버리면 세상은 미래가 없다. 전산화, 자동화를 통해 생산은 향상되었다지만 사람이 행복을 눌릴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버리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 돈을 버는 목적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쓸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아닌가? 이제 가족과 함께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점을 맞았다.

현지아빠님은 내 몸을 상해가며,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빼앗겨 가며 일하고 싶지 않아 꼭 필요한 일만 맡으려고 했더니 오히려 전보다 더 주문이 늘어나더라는 얘기를 한다. 돈을 벌려고 애 쓸 때는 달아다더니 이제 없어도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휴식을 원할 때는 휴식을 빼앗으려고 일이 몰려드는 아이러니.

나이가 들수록 국가의 GDP보다는 개인의 행복지수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안식년을 준다면 몇 년이라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중학생 아이들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성영이네와 현지네가 번갈아 얘기를 해 준다. 아이가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려면 부모가 합리적으로 아이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단다. 아이가 부모와 신뢰관계를 계속 가지려면 아이에게 부정적으로 대해선 안된다고 얘기하신다. 필요한 것을 무조건 못하게 하면 아이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걸 하게 된다고 한다. 부모 자식간의 신뢰가 깨지는 악순환에 발을 들이게 된다는 것.

성영맘은 아빠들은 아이들에게 대개 부정적인 말로 물어본다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의 답도 대개 부정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알면서도 어떤 때는 모르는 척 해 주 는게 필요하단다. 아이들도 사춘기가 되면 부모님 없이 완벽한 자유를 잠시나마 느껴보고 싶어 한단다. 하긴 우리가 어렸을 때 다 겪은 일인데 마치 겪은 일이 없는 것처럼 잊어버리고 산다는게 안될 말이다. 아이들도 우리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 우리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지만, 내일을 위해 이젠 자야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현지아빠는 우리 카페 사람들의 여행기를 출판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성영아빠와 나 이렇게 두 사람이 만들어달라고 한다. 휴양림 가는 길과 주변에서 가 볼만한 곳을 정리해 붙일 계획이라고 한다. 우선 정리를 해서 어떤 것을 넣고 뺄지 선택하기로 정했다.

현지네는 주인집에서 내 준 빈방으로 자러 올라가고 성영이네 부모와 우리부부만 현지네 숙소에서 자기로 했다. 현지네가 기거하는 숙소는 겉모습은 양옥집이지만 내부는 황토로 만든 따뜻한 분위기였다. 한지를 발라 놓은 방안에는 사방으로 작은 창문을 내 놓아서 밝고 아담하다. 완벽한 어둠을 제공해 주는 잠자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얼마만에 느끼는 빗물소리인지. 새벽 1시가 넘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빛이 창문을 통해 우리 방으로 밀고 들어와 어슴프레 사물을 보여줄 때 눈이 저절로 떨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함. 오직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시골집. 성영아빠께서 커튼을 걷으며 “사방이 너무 멋있지 않나요?” 하신다. 창문에 보이는 풍경은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검은 빛을 띠고 있는 나무에 오랫동안 뿌린 비가 만든 안개가 걸려있다. 진경산수화는 이런 풍경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것일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풍경을 깨고 싶지 않아 우리는 방안에 불을 켜지 않았다. 다시 이어진 이야기들. 유럽의 균일한 지역분포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데... 부러운 모델을 우리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한시간쯤 흘렀을까? 현지아빠와 맘이 내려오셨다. 비에 젖은 호박잎과 애호박을 하나 들고서. 그래! 시골에 살던 시절에 아침에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서 우린 마당에 있는 호박을 땄었지. 호박잎을 데쳐서 쌈을 싸먹었지. 너무 익숙한 모습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구나.

아침을 바깥에서 먹자는데 공감을 한 우리는 세 여자분이 부엌에서 오물조물 음식을 만드는 동안 소박한 식탁보를 가져가 준비를 했다. 빗물에 젖은 탁자에서 물이 스미지 않도록 덮개를 덮었다. 황토를 닮은 소박한 도자기 그릇에 연두색 호박 볶음, 고추장에 버무린 감자볶음, 속새김치, 초록색 노랑색 파프리카, 초록색 브로콜리, 그리고 아삭한 맛이 너무 좋았던 고추, 쌈채소와 강된장, 현지맘님이 담그신 빨간 고추장, 호박잎 쌈, 짙은 초록색 오이. 소박한 식탁보와 자연색이 아름다운 반찬들이 먹기에 아까울만큼 아름답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사진을 찍어두고 싶군 하고 생각하는 사이 성영아빠께서 스냅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현지맘님이 가져오신 맛있는 현미밥을 나눠 자연과 함께 먹었다. 성영맘님이 가져오신 독특하고 귀한 커피(차가운 물을 한방울씩 떨어뜨려 한방울씩 커피를 우려낸다고 하는데 커피향이 아주 구수했다)로 아침을 마무리를 했다.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성영이네는 대구로 우리는 휴양림으로 돌아왔다.


단양적성비각.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다음 가야세력을 이용해 처음으로 죽령을 넘어 북쪽으로 진출한 기념비


단양적성비. 진흥왕은 이 비석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을 새겼다.
이 비석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방곡도예촌을 갈까? 온달산성을 갈까? 했지만 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랑 반대쪽인데다 지형상 먼 산길을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 동생가족은 온달산성 쪽으로 우리는 단양적성비를 찾아 헤어졌다. 도예촌을 가지 못하게 된 연우는 아쉬움에 입이 한참 나왔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녀석인데...단양 적성은 한글 뜻으로 보면 같은 말인 것 같다. 산길을 좀 올라가니 주차장이 나오고 거기부터 걸어 올라갔다. 가다가 보니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 바로 뒤였다. 휴게소에서 차를 대고 뒷문으로 걸어올라가도 되는 곳. 남쪽으로 내려갔던 신라가 가야를 합병한 다음 가야 세력과 함께 다시 죽령을 넘어 북쪽으로 세력을 넓힌 첫 번째 영토였던 것. 거기에 대한 기쁨이 컸던지 진흥왕은 여기에 적성비를 세우고 공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장차 이런 공을 세우는 사람들을 중용하겠다는 뜻은 밝혀놓았다. 그 인물 가운데는 이사부도 있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이자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의 이름도 있다. 단양 땅에 이르러 남한강 물줄기에 발을 들인 신라는 여기를 발판으로 지금의 충북 진천까지 세력을 넓혔고 그 자리에 가야 유민들을 이주시켜 고구려를 막는 전진기지로 삼았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진천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비가 많이 와서 시야는 그닥 좋지 않았지만 적성은 사방을 감시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교과서에서 박제처럼 보이던 단양적성비가 현장에 와서 보니 힘차게 신라의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3백여년 만에 죽령을 처음 넘어 여기에 섰던 진흥왕은 얼마나 기뻤을까?

준기가 단양수양개 유적을 보고 싶어 했지만 내가 저녁에 다시 대구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더 지체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강 건너편에서 수양개 유적이 있다는 표지도 보이고 구석기 시대 동굴 안내문도 보이는데 날씨도 좋지 않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사전에 지도를 살펴봤더라면 유적을 보면서 올라갈 수도 있었는데 여행을 준비하는데 점점 소홀해지는게 아쉽다. 도담삼봉을 지나가면서 초등학교 때 정말 비가 많이왔던 가을을 회상했다. 고모 환갑 때 서울에 올라가시던 아버지께서 제천에서 비 때문에 길이 끊겨 돌아와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단양의 도담삼봉도 물에 완전히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하긴 우리가 살던 동네의 큰 다리도 무너졌었으니까. 단양에서 장다리 유명한 장다리 식당(043-423-3960)에 들러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주인장의 말씀에 원주 청솔보리밥집으로 길을 떠났다. 늦은 점심에 아이들이 몹시 투덜대고 막히는 길을 피해 국도와 고속도로를 적절하게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반쯤. 이제 여행을 다니는 일이 쉽지 않음을 느꼈다.


단양적성비가 서 있는 적성을 등지고 바라본 모습.
여기에 서면 사방이 훤하게 보여 군사요충임을 알 수 있다.


단양적성. 신라가 쌓았다고 한다.
단양이나 적성이나 우리말로는 똑같이 붉은성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