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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가을 빛이 예뻐서 무작정 떠난 야영

by 연우아빠. 2010. 10. 26.

가을하늘이 예뻐서 무작정 떠난 야영...선열의 자취를 찾아서

2010.10.23 ~ 10.24 용현자연휴양림


긍정적이고 쾌활한 모습으로 변한 준기. 어딜가나 즐겁습니다.
용현 휴양림은 주변에 구경할만한 곳이 많은 곳에 있고 수도권에서 가까워 다니기 좋습니다.


2008년 1월에 이 휴양림에서 묵었는데 오랫만에 찾아왔습니다. 용현휴양림 휴양관.


전망대 올라가는 길



전망대 올라가는 길. 이게 구절초인가요? 벌개미취인가요? 아직도 헷갈려요.



밤에 구름이 없었다면 이 넓은 오토캠핑장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모습을 봤을텐데...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상
가운데는 석가여래, 오른쪽은 미륵보살, 왼쪽은 제화갈라보살.



매헌 윤봉길을 기념하는 충의사 입구. 이 사당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다.
먼저 충의문 현판 글씨는 광복전쟁의 영웅이었고 훗날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선생이 쓴 것이다.
이 분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투사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5.16 반란에 반대해 국회의원직을 내 놓았으나
훗날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에게 협력하는 훼절을 하고 말았다.


충의문을 지나면 충의사 사당이 나오는데 이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가 썼다.
윤봉길 의사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 광복을 위해 가족과 고향을 떠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어 홍구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반면 현판의 글씨를 쓴 박정희는 만주괴뢰국과 일본제국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중국침략에 종군하였으며, 5.16 군사반란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군사독재를 자행한 자이다.


이 거사를 두고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 2억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해냈다"는 말로 격찬하였으며, 사분오열되어 패배감에 젖어있던 중국 인민들을 단결하게 만든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중국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고 훗날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승국 지위를 갖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사당 왼쪽 언덕에는 윤봉길 의사의 산화 이후 20대에 홀로되어 윤봉길 의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신 배용순 여사의 묘가 있다.


윤봉길 기념관 안에 있는 윤봉글 의사의 친필



광현당.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이곳에서 태어나 4살 때까지 살았다.


저한당. 1911년에 이사와서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사시던 곳으로 여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셨다.




피끓는 청년 윤봉길의 동상



예산 가야산 언덕에 있는 남연군의 묘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무작정 떠난 가을 야영

2010.10.23~10.24 용현자연휴양림

월요일(25일)에 본사에서 회의가 잡혀 이번 일요일은 대구에 내려가지 않아도 되자 이 좋은 가을을 그냥 낭비하면 안될 것 같아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휴양림 방은 보이지 않는다. 금요일 밤 늦게 집에 도착해 이것저것 하다가 늦게 잠들었는데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아직 7시가 되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여행을 부르는 듯 손짓을 한다. 야영을 한다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조금은 덜 추울 것 같아 용현휴양림에 전화를 하니 야영장 데크가 많이 비어 있다는 대답. 얼른 아이들을 깨우고 손에 잡히는대로 짐을 싸는데 준기는 서산 주변 지도를 얼른 챙겨 자기 배낭에 넣는데 책을 끼고 있던 연우가 안가겠다고 버틴다.

“밥도 없고 반찬도 없고 라면도 없다”
“그럼 해 먹지 뭐”
“밥 할 줄 알아?”
“아니”

이렇게 시작한 설득 작업은 나중에는 따라나서지 않으면 3년뒤 스페인 여행은 없다라고 했는데도 안가겠단다. 지난번 중미산에서 이슬이 너무 많았던데다 밤에 냉두드러기가 얼굴에 돋았던지라 그게 싫었던 것일까? 결국 12시 반이 넘어서 설득을 포기하고 연우만 남겨두고 떠나기로 했다. 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고속도로에 차가 너무 밀린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3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발안에서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라갔다. 데크가 언제 가득찰지 모르는 상황이라 우선 용현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여러개가 비어 있어서 사이트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옆 데크에 준기와 동갑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는데 준기 먹으라고 어묵한사발을 준다. 사이트 구축하는 동안 준기가 배고프다고 계속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노라고 웃으면서. 하긴 점심을 차 안에서 빵으로 대충 때우고 내려왔으니 배 고플만 한 상황이었다.

사이트 구축을 마치고 서산동부시장으로 장을 보러 나섰다. 뭘 먹어야 좋을지 몰라서 상린아빠님께 전화로 도움을 받았다. 큰새우는 너무 비싸고 중미산에서 먹었다고 준기를 설득했더니 엄마가 먹자는 대로 넙치회에 동의해 준다. 대합을 포함해 조개 3종류를 섞어서 더 사고 땅거미가 내린 휴양림으로 달렸다. 아까보다 더 많은 야영객들이 들어왔다. 오토캠핑장을 수놓은 아름다운 텐트와 불빛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보니 이번에는 헤드렌턴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재료를 찾고 숯에 불을 붙였다. 불을 대충 붙이고 토치를 회수하려다가 거꾸로 드는 순간 가스액이 새어 나와 가스통 바깥에 불이 붙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검마산에서 유니맘님이 하던 모습이 떠올라 침착하게 다시 가스통을 주워 입김으로 불어 가스통 바깥의 불을 끄고 토치를 잠궜다. 아찔한 순간 대형 사고 날 뻔 했다. 용현은 산들바람이 살살 부는 곳이라 그런지 웨버 안에서도 잘탄다. 조개를 올려 구워 먹는 맛이 색다르다. 셋이서 좀 많이 산 게 아닌가 싶었는데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적당했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밥을 먹고 나자 졸린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서 별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오토캠핑장은 하늘의 별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곳인데 정말 아쉬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아내도 몹시 피곤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벌써 침낭 속에서 졸고 있다. 아내를 깨워 사계절용 침낭을 겨울침낭 속에 넣어 사용하도록 했다. 겨울 침낭도 3년 가까이 사용했더니 바닥부분은 처음같은 성능이 아니어서 사계절용 침낭을 내피처럼 사용해야 밤에 춥지 않을 것 같다. 아내와 준기는 “좋은데!!” 하고는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네명이 자던 텐트 속에 세명이 들어가니 조금 썰렁하다. 매주 오르내리는 생활에 매일 수영을 해서 그런지 바로 잠에 떨어져 다음날 새벽까지 세상 모르고 잘 잤다.

일요일 아침,
수건을 꺼내들고 어슬렁 어슬렁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세수를 했다. 상쾌한 느낌. 밤새 구름이 낀데다 바람이 조금씩 부는 곳이라 그런지 텐트 안팎이 뽀송뽀송하다. 준기가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생가, 남연군 묘에 가겠다고 해서 아침을 먹고 바로 텐트를 접었다. 휴양림을 그냥 떠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 임도를 따라 산책을 했다. 2008년 1월에 은주, 상린, 우리 세가족이 함께 왔던 길. 그 땐 한겨울이었는데... 용현 계곡은 생각보다 단풍이 아름답진 않았다. 준기가 예산에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해서 중간에 내려와 남은 음식으로 점심을 마치고 휴양림을 나섰다. 서산 마애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아내의 말을 따라 다시 보러 갔는데 3년전에 비해 주변을 많이 다듬어서 보기에 더 좋았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지에 도착했다. 충의사(忠義祠). 한국 현대사의 문제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당이다. 충의문 현판은 광복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분으로서는 드물게 광복 이후 국회의장까지 지낸 분으로 5.16 반란을 질타하며 국회의원직도 버린 분이 쓰셨다. 그러나 그분은 훗날 소위 유신세력들에게 협력하는 변절을 하고 말았다. 충의문을 지나 충의사 사당 앞에 현판은 윤봉길 의사와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이 썼다. 일본제국군 장교,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5.16 반란 수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현판 충의사. 충(忠)도 의(義)도 충의(忠義)도 느낄 수 없는 현판들. 그리고 껍데기만 한옥을 베껴 만든 국적불명 콘크리트 사당 건물. 그 안에 있는 우리 초상화 양식이 아닌 윤봉길 의사의 빛바랜 초상화. 오직 의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놓고 상하이까지 망명해 간 선열께서 목숨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광복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 분의 초상 앞에 고개를 숙일수도 분향을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의 기념관 안에 몰려온 한떼의 노인들이 친일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이승만을 찬양하는 망발을 늘어 놓을 때는 정말이지 왜 저들이 여기에 왔는지 화가 났다. 머리가 깨지는 수는 있어도 지혜가 머릿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화가 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그 숫자의 크고 작음은 존중과 하대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길 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고향을 남겨두고 조국광복을 위해 상해로 망명해 “중화민국 2억 인민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젊은이가 해냈다”는 장개석 총통의 격찬을 받았던 홍구공원 의거를 이룬 윤봉길. 그와 그의 가족에게 조국이 해 준 것은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증 1장이라는 사실이 너무 미안한 일이다. 그 분은 젊은 혈기만으로 광복전쟁에 투신한 것이 아니었다. 선대에서 빈농을 벗어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작은 부를 쌓았고 그 작은 부를 이웃 농민을 위해 사용했다. 고향에서 야학을 운영하고 책을 만들어 농민계몽에 노력했다는 사실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혜안과 실천력을 느낄 수 있다. 사형집행대에서 적의 총 앞에서도 당당했던 청년 윤봉길. 그에게 최상의 경의를 바친다.

선열의 기념관을 나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찾았다. 준기가 궁금해 했던 곳인데 가야산 도립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연군 기념비 앞에 차를 두고 왼쪽 언덕길을 올라가니 가야사 터 안내문이 나온다. 작은 동산처럼 생긴 언덕을 오르자 사방이 탁트인 장소에 남연군의 묘가 있다. 남연군의 묘와 관련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두어 개 전해온다. 

첫 번째는 안동 김씨 집안으로부터 왕권을 되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던 흥선군이 왕이 2명이 날 자리라 하여 경기도 연천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1847년(또는 1848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 이장지에 가야사가 있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절에 불을 질러 절을 폐사 시켰다고 한다. 묘를 옮길 때 지나는 지역마다 지역민들이 동원되어 상여를 옮겼는데 이 지역 토착민들은 협조하지 않아서 직전 마을인 광천리 사람들이 여기까지 운구하게 되어 상여를 광천 사람들에게 하사했고 남은 길을 끝까지 옮겼다하여 ‘남은들’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남연군은 왕의 직계도 아니고 철종임금의 방계 친족에 불과한 종친 중에 한명일 뿐이었는데, 파락호 취급을 받던 흥선군이 이만한 위세를 안동김씨 세도가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부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당시 안동 김씨들은 왕재의 자질이 보인다 하여 경원군 이하전에게 누명을 씌워 사사했던 시절이다. “왕실의 중흥”을 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인데 몰락한 왕가의 종친이 아버지의 묘를 연천에서 이곳 예산까지 이장한다는 일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왕재가 있는 자들을 제거하려고 하던 시절에 명당으로 소문난 곳을 이렇게 요란한 방법으로 불지르고 백성을 징발해 이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시 흥선군은 27~8세였고 안동 김씨들의 감시를 받고 있던 몰락한 왕실종친에 불과했는데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과연 벼루 한 개로 무사할 수 있었을까? 남연군을 이장할 때 사용했다는 상여는 왕이나 황제가 사용할 수 있는 상여장식이 달렸다. 이 이야기는 대원군을 폭군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꾸민 이야기가 아닐까? 묘를 이장했다는 시점과 고종황제가 태어난 시점 사이에는 지금 전해오는 말들과 같은 연계성이 없다.

두 번째로 남연군 묘를 도굴을 대비해 구리를 녹여 부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인질로 삼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려고 이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가례에 따라 회곽묘를 사용했는데 요즘 발굴하는 조선시대 무덤은 포크레인으로 깨뜨려도 쉽게 깨지지 않을만큼 단단하다고 한다. 언덕에서 굴려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곡괭이로 내리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고고학을 하는 분들에게 들었다. 삽이나 괭이만 가지고 왔을 오페르트 일행이 회곽을 깨뜨릴 수가 없었을 건 당연한 일. 이 사건이 구리 무덤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남연군 묘의 좋은 경치를 감상하고 짧은 가을 해를 아쉬워하며 귀가 길에 올랐다.

준기는 다음에는 김좌진, 한용운, 신채호 선생님의 유적을 꼭 가보자고 한다. 오서산에서 야영을 했더라면 세 분 유적을 보고 올라오는 길에 윤봉길 의사의 유적을 볼 수 있었을텐데...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