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21~23 지리산자연휴양림
아버지의 희망, “지리산에 올라보고 싶다. 그리고 이 참에 노무현 대통령 생가에도 가보자.”
2008년 5월 칠순 때를 맞춰 지리산자연휴양림에서 가족이 함께했지만 정작 그 전날 회문산에서 무리한 등산을 하신 아버지는 노고단 가족 등산에는 가지 못하시고 휴양림에서 쉴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생각이 나서 아버지께서 지리산 가실 생각이 있으신지 여쭈어 보았더니 올해는 꼭 가보자고 하신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도 한번 가보고 싶으시단다. 작년 이맘때 뜻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살아계실 때 한번 생가를 방문하겠다던 뜻을 이루지 못하셨지만 1주기 행사만은 참여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망.
그러나 4월1일 회의 때문에 예약사이트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주은아빠께 대신 부탁드렸으나 주은아빠도 외근 중. 결국 대기를 걸어 놓았다가 출발하기 이틀 전에야 숙소를 얻을 수 있었다. 부산 사는 동생과 만나기로 하고 출발하는 날, 3일 연휴 때문에 많이 막힐 것 같아서 일찍 출발해야 했지만 마음과 달리 가족들은 역시나 늦다. 그래도 8시에 출발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 늦은 출발 탓에 대전까지 느릿느릿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점심은 전주 왱이콩나물국밥 집에서 먹고 성삼재로 향했다. 노인의 몸 상태는 언제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몸 상태가 좋으신 것 같아 내려가는 길에 바로 등산을 하고 휴양림에 들어가 푹 쉬기로 했다. 또, 내일과 모레는 계속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오늘 오르지 못하면 기회를 다시 잡기가 쉽지 않을 듯.
2년만에 다시 찾은 노고단
거의 오후 3시가 돼서야 성삼재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휴게소 바로 앞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재작년에 해보고 싶었던 대피소에서 라면 끓여먹기 대신 컵라면을 준비해 길을 재촉했다. 2년전 길을 단장하던 공사를 했었는데 아주 깔끔하게 잘 정비가 되었다. 계단을 피해 쉬엄쉬엄 오르는 길을 따라 가노라니 철쭉이 드문드문 피어 있고, 이팝나무 꽃 향기가 온 산을 덮었다. 아주 편안한 길이라 쉽게 올랐지만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노고단 출입시간이 끝났다고 한다. 노고단 정상 표지가 저 앞에 보이는데 아쉽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여기까지 올라 오신 것에 아주 만족하셨고, 지리산의 장관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흡족해 하신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대피소에 들어가 미니버너를 꺼내 물을 끓였다. 재작년에 못해본 대피소에서 컵라면 맛보기. 지리산 물로 끓여서 그런지 같은 인스턴트 식품인데도 맛이 다르다. 미니 주전자라 물이 조금 모자라 더 끓이려고 했더니 옆에 물을 끓이신 분이 남은 물을 나누어 주신다. 3일 연휴를 맞아 종주여행을 오신 분이 많나보다. 침낭에 완전하게 장비를 갖춘 분들이 제법 많다.
휴양림에 들어가 먼저 도착한 동생을 만났다. 연우와 희원이는 간만에 만난 것을 반가워하며 곧 자기들만의 휴대폰 장난에 빠져들고, 준기는 준기는 사촌 여동생 둘을 데리고 제법 잘 놀아준다. 숯불을 금지하는 휴양림이라 베란다에서 전기그릴에 고기를 구워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에 비를 머금고 있다. 오늘 노고단을 다녀온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아버지는 등산을 피곤함과 지리산을 올랐다는 만족감으로 일찍 잠에 드셨다.
구례 화엄사, 날아갈 듯한 일주문
5월 22일 새벽, 바람소리에 잠을 깼다. 정부행사준비에 2주간 파견 나갔다가 밤샘 일을 한 탓에 생겼던 감기몸살 휴유증으로 일주일 동안 계속 밤마다 기침이 심했는데 거짓말처럼 나았다. 몸은 너무 가뿐하고 머리는 상쾌하다. 아버지와 함께 계곡 안에 있는 나무 구경을 했다. 바람을 타고 이팝나무와 층층나무 꽃향기가 휴양림에 진동한다. 아침을 먹고 동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마이산과 남원 광한루로 구경을 나가고 우리는 지리산에서 내려다봤던 구례 화엄사로 해서 하동 쌍계사를 가보기로 했다. 생각 같아선 지리산을 한바퀴 돌아보고 싶은데 쌍계사 이후에는 길이 좋지 않다. 성삼재를 지나 구례로 내려와 화엄사에 도착했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 화엄종을 대표하는 종찰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사찰과는 구조가 조금 달랐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 구조가 특이하다. 벽암각성 대선사가 이 절을 중창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시선을 끈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거북좌대는 마치 용과 같은 모습이다. 사자탑, 서오층석탑, 석등 그리고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화려한 장식들은 비오는 풍경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절의 추녀는 직선적인 힘을 자랑한다. 마침 12시에 맞춰 범종각을 타종하는 소리가 사바세계의 모든 마음을 종 속으로 녹여들이는 듯 모든 이의 시선을 끈다.
비내리는 구례 화엄사. 직선적인 지붕선의 힘찬 모습
하동 쌍계사 가는 길에 대통밥으로 점심을 먹고 준기가 좋아하는 민물고기를 찾았다. 섬진강변에 서 있는 섬진강어류전시장은 큰 외관에 비해 내부시설이 좀 실망스러웠다. 바람이 몹시 불고 비도 더 굵어져 서둘러 하동 쌍계사를 찾았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 원성이 높아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쌍계사를 보지 않고 가는 것은 안될 말. 벚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습은 이미 사라졌지만 쌍계사 들어가는 10리길 숲터널은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다니. 어렸을 때 시골길 신작로 땡볕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며 지친 다리를 쉬게 해 주던 그 가로수 터널이 너무 정겹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마주치는 석탑은 고려시대 경천사지 10층석탑처럼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비신은 이 절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잘린 모습이 너무 선명한 탑. 전율을 느낀다. 그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은 천년 세월을 버틴 힘이 있다. 신라시대의 조각물과 건축물, 고려시대 인물상 같은 마애불, 조선시대에 중창한 건물이 조화롭게 서 있고 맛배지붕의 힘찬 직선이 법력의 힘을 보여주는 듯 빗속에서 더욱 힘차 보인다.
규모에 비해 내부가 조금 실망스러웠던 섬진강 어류생태관.
비가 더 심하게 내리고 바람도 거세져서 이만 휴양림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는 도중 천*사 절이 있는 표지 근처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달리는 차를 향해 몸을 던지듯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 이 도로가 천*사 사유지를 가로지른다며 돈을 내고 가란다. 지리산을 가로지르는 이 길이 자기네 땅이란다. 이런, 21세기에 대한민국에 산적이 있었다니. 워낙 어이없는 일이라 흥분해서 제대로 따져 묻지를 못하고 등기부등본만 확인해봤다. 토지대장을 내 놓으라고 했어야 하는데. 웃기는 것은 성삼재에서 구례로 내려오는 길을 그냥 통과인데 올라가는 길은 돈을 내놓으란다.
내가 알기로 우리 역사에 사람이 다니는 공로를 막은 자들이 두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산적이고, 둘째는 이숙번이다. 이숙번은 조선 태종의 모사로 왕자의 난에 혁혁한 공을 세운 덕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마침내 사람들이 다니는 공로를 막고 집을 짓는 패악질로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태종은 그 원성이 오를대로 오르도록 놔 두었다가 이숙번의 권력이 커지자 공로를 막은 일을 문제삼아 내치고 말았다. 이제 그런 자를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열이 하늘 끝까지 뻗친다. 설령 이 길이 자기들 사유지라하더라도 입구 아래에 그걸 밝혀 놓고 여기에 돈을 보태주기 싫은 사람들은 올라오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아무런 문구도 없이 올라온 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내놓으라니 이런 산적질이 어디 있는가? 도로 통행료도 아니고 문화재 관람료란다. 문화재인 천*사는 길에서 보이지도 않으며 길에서 보이는 건물은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 아니다. 이런 똘중들에게 돈을 보태줄 일이 없으므로 차를 돌려 운봉으로 돌아 휴양림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15km 정도 더 돌아가지만 길이 좋아서 시간은 덜 걸렸다. 이후 내가 ‘부처님’이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의 종교 가운데 존경스런 자들이 하나도 없구나.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패악질에 대해 지금 소송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하동 쌍계사 팔영루와 이웃 전각들
저녁을 먹고 준기가 꼭 해야겠다고 하던 숲속교실에 데리고 갔다. 2년전 애벌레 선생님이 하시던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려다 늦게 들어와서 못했던 그 일. 애벌레 선생님은 여기를 그만두고 떠나셨다고 한다. 아쉽다. 숲속교실을 끝내고 일찍 잠을 자기로 했다. 내일 봉하마을에 들러 서울을 갈려면 일찍 자고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을 자려고 하는데 정말 쌍퉁맞은 인간들을 만났다. 휴양관 방 2개를 빌린 사람들이 휴양관이 떠나갈 듯 노래부르고 쿵쾅거리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술판을 벌였다. 밤 10시가 넘었는데 더 크고 요란하게 떠든다. 참다못해 휴양림 사무소에 전화를 했는데 그 때마다 인터폰으로 경고를 하는 것으로 마는 듯. 결국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랑곳 없이 더 떠들어대는 한심한 사람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휴양림에서 휴양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바로 쫒아내도록 규정이 있는데 왜 집행을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지키지 않을 규정을 왜 만들었냐고. 집행하지 않는 규칙 때문에 저 사람들이 휴양을 온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방해하는데 왜 놔두냐고 따졌다. 심하게 싫은 소리를 해대자 마지못해 직접 가보겠다는 뜨뜻미지근한 답을 한다. 휴양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을 왜 그냥 놔두는 것인지. 왜 저런 사람들이 즐거움을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야 하나? 밤 12시쯤 돼서야 자기들끼리 싸움을 하는 지 시끌시끌하다가 잠잠해졌다. 결국 휴양림의 규정은 말짱 공염불.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5월 23일, 휴양림 마지막날. 기분좋게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면 산림청에 민원을 넣어 따지겠다는 어젯밤의 다짐은 사그러졌다. 아침을 먹기전 비오는 휴양림을 산책했다. 꼭대기 연립동 쪽에는 이틀간 계속 오는 비에 아랑곳없이 캠핑을 하는 가족이 있다. 밤새 내린 비로 계곡물은 더욱 힘이 넘친다. 아침을 먹고 휴양림을 떠났다. 주말에 다시 오기는 참으로 먼 길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비만 아니었어도. 이제 오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봉하마을로 길을 잡았다. 주말에 내린 많은 비 때문인지 남해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덜 막혔다. 40km를 남겨 놓고 길이 막혔다.
다행히 산인 IC바로 앞이라 주저 없이 국도로 나왔다. 동생 가족은 부산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국도를 따라 봉하마을을 향해 갔다. 사저 6km를 앞두고 길이 완전히 막혔다. 비가 오는데도 엄청난 인파와 차량이 몰려들었다. 완전히 막혀버린 길. 간신히 2km쯤 더 가서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길 옆 갓길에 차를 줄지어 세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12시. 아버지도 조바심이 나시는 지 얼른 걸어가자고 하신다. 아이들에게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걸어서 가는게 훨씬 빠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들이 걱정스러웠으나 잘 걸어가서 다행이었다. 중간에 간이 음식점에서 촌국수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준 것에 하늘에 계신 노 대통령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끝없이 끝없이 이어진 사람들 행렬이 보인다. 인간이 만들어낸 장엄한 모습에 경건함이 스민다.
올라가는 모습과 내려오는 모습.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거기 계단이 있고 연등이 달려 있다는 사실
다행히 행사시작 30분 전에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김제동 사회,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등등 추도사, 빗속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참석자들. 그리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잘 보려고 그랬을까? 사자바위, 부엉이바위, 그리고 언덕과 산 등성이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분의 육성, 그리고 비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의 엄숙함이 주는 감동. 모두들 상록수를 목을 놓아 불렀다. 장엄한 노래소리는 봉하마을을 가득채우고 화포천을 따라 넓은 들판에 퍼졌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함께 외쳤다.
“노무현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대통령님, 잊지 않겠습니다!”
지리산 계곡의 폭포. 작은 여울이지만 비가 모이면 장관을 이룬다.
행사가 끝나고 박석을 따라 걸어가 묘소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국화를 들고 노 대통령님 묘소에 모여와 그분의 소박한 묘 위에 올려 놓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들여다 보며 사진 두어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일. 다음을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걸어나오며 이 자리에 온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먼 길을 금방 돌아 왔다. 도중에도 사람들이 끝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4시 30분, 봉하마을을 떠나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막히지 않아서 밤 10시 조금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힘든 기색이 없이 만족하시니 다행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인데도 끊없이 이어진 방문자들의 행렬
산과 들에 사람들이 가득했던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국화꽃에 덮혀버린 노무현 대통령님의 낮은 무덤. 심한 비 때문에 렌즈에 김이 서렸다.
하늘의 눈물인듯, 사람들의 눈물인듯
노무현 대통령님! 이제 눈물 흘리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당신의 뜻을 지키겠습니다.
반칙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한 당신의 뜻을 다음 세대에도 꼭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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