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 문경여행.
2009.9.5~9.6
국립자연휴양림 가족여행 완주. 대야산 휴양림만 남겼는데 이 좋은 계절에 야영장이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 몹시 아쉬웠다. 6인실 85,000원이라는 숙박비 역시 선뜻 내 놓기에는 부담스럽다. 뒤늦게 대기를 걸어 놓았는데 6인실은 금방 취소분이 2개가 나와서 204호와 201호를 놓고 고민하다가 201호 갈참나무 방을 선택했다. 방을 예약했으니 아버지를 모시고 가려고 여행 일정을 아버지께 알려드리고, 영주 사는 막내 동생과 누나에게 연락했더니 야간근무와 주말근무 때문에 갈 수 없다는 연락. 게다가 아버지는 목요일날 감기 걸렸다면서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감기가 손자들에게 옮겨지면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에 걸릴 위험이 있으니 안가는 게 좋겠다는 지나친 걱정을 하신다.
금요일 퇴근 무렵에 주말마다 덤비는 철야예산 주말귀신이 또 덤빈다. 이미 낼 자료는 모조리 다 냈고 더 이상 논쟁이 될만한 사안도 없는데 또 덤비는 이 주말귀신을 이번에는 정과장이 맡기로 했다. 지난 주에 가족들과 함께 대관령 양떼목장 다녀오라고 하고 나 혼자 금토일을 철야했더니 선수교체 하자는 의미. 미안했지만 이제와서 위약금 물어가며 취소하기도 그렇고... 일이 생기면 전화달라고 하고 떠나기로 했다. 시간에 쫒겨 산적처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자르러 이발소에 들렀다.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휴식시간을 빼앗긴다면 그 선진국 반납하고 싶다.
9월 5일(토)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렀더니 나한테도 감기 옮길까봐 멀찍이 떨어져 계신다. 참으로 지나친 조심. 기꺼운 상태가 아닐 때 여행에 동행하는 것이 아버지께 불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처지라 할 수 없이 우리만 가기로 했다.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은 법. 아내가 준비해 준 인삼, 도라지, 대추 차를 한 주전자 드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엔지오일을 갈기 위해 단골 카센터에 들렀는데 엔진 주변에 오일이 흥건하다. 연료가 새는 모양이다. 경유차는 부품값이 휘발유 차에 비해 엄청 비싼 편인데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갈 모양이다. 하긴 이 차를 가지고 61번이나 전국 휴양림을 싸돌아 다녔으니..지금 당장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월요일날 입고시켜 달라는 말을 듣고 간단한 정비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와 아이들 하교시간을 기다렸다.
문경 도자기박물관 야외전시장. 복원해 놓은 문경 전통 망댕이가마
오랜만에 방을 예약해 가기로 해 놓으니 준비할 짐이 너무나 간단하다. 오후 12시 반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문경 관광지도를 챙겨 1시 반쯤 출발했다. 길은 용인 근처에서만 잠시 막혔을 뿐 100km/h 이상을 유지하며 계속 달렸다. 처음 목적지인 문경새재 입구에 도착해 도자기 박물관을 구경했다. 연우는 도자기 만들기 체험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주말에는 하지 않는다고. 도자기 박물관은 내부촬영 금지, 그 옆에 있는 유교문화박물관도 내부촬영 금지. 두 군데 모두 관람료 무료.
아이들이 제법 책을 읽었는지 질문이 구체적이다. 도자기 발전 순서, 우리나라는 왜 유럽의 마이센 도자기 같은 채색도자기가 없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본다. 청동기시대의 토기, 삼국시대 경질토기, 유약을 바른 도자기 등장, 청자, 청화백자, 백자로 발전하는 순서를 설명해 줬다. 일본인들은 도공(陶工)이라 부르지만 조선에서는 사기장(沙器匠)이라 부르며 전문가를 장인(匠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라 설명해 주고 나라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만드는 관요와 백성들이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민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줬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처음 개발한 사람들은 중국인들이고 단일색으로 은은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에 주력해 우리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 갔는데, 도자기 제작 기술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 첨단기술이라 외부 유출을 엄격하게 막았다. 임진왜란 때 잡혀간 수많은 사기장들이 살기 위해 일본인에게 도자기를 만들어주었는데 화려한 꽃무늬와 색상을 좋아했던 일본인들이 기존의 청자나 백자가 아닌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를 요구해 중국-조선과 다른 아름다운 채색도자기가 탄생했고 이 제품은 비싼 값에 유럽에 수출하게 되었다. 조선 백자를 바탕에 깔고 붉고 푸른 원색을 사용한 현대적 감각을 갖춘 도자기는 단숨에 유럽의 왕실과 귀족에게 주목을 받았고 이런 아름다운 동양의 도자기로 식탁을 꾸미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마이센에 도자기 문양을 디자인하는 학교를 세우고 도자기 굽는 기술을 연구해 마침내 유럽최고의 명품 도자기인 마이센 도자기가 탄생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왕실에서도 경쟁적으로 이런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을 중국제품이라 생각한 유럽인들이 차이나(chin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제품은 각 나라의 문화적 특징 때문에 우리처럼 단일 색상으로 은은한 무늬를 새기거나 일본이나 유럽처럼 화려한 도안을 넣어 만드는 형태로 발전했다.
잘 꾸며놓은 도자기 박물관에서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니, 사발 또는 막사발이라 부르는 그릇을 일본식 이름인 다완(茶碗)이라 이름붙여 놓은 것이다. 본디 우리나라 찻잔은 작은 종지 정도 크기이다. 임진왜란 전후 일본은 평민은 나무나 대나무 그릇을 귀족들은 금속그릇이나 외국에서 수입한 도자기그릇을 사용했는데 조선에 흔하게 널려있던 사발을 가져다가 귀하게 여겨 차를 마실 때 사용했다. 헌데 일본도 아닌 우리나라 도자기 박물관에서 어찌 일본인이 쓰던 다완이란 용어를 달아 놓은 것인가? 엄연히 사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릇을....
문경 옛길박물관
유교문화전시관에는 영남 사림의 거두 김종직을 비롯한 이 지역 출신 선비들의 생활모습과 학문적 성과를 모아 놓았다. 조선 초기 한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자료를 전시해 놓아 아이들에게 좋은 공부재료가 됐다. 아래아, △ 같은 지금은 사라진 글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나 보다. 내가 읽어 주었더니 요즘 말과 조금 다른 것 같아 재미있단다.
4시쯤 문경새재 앞에 도착했다. 차를 대고 올라가니 2003년에 부모님 모시고 왔을 때랑 좀 달라졌다. 뭐랄까? 유원지 같은 분위기는 많이 사라지고 역사유적관광 같은 모습이 예전보다는 보기 좋다. 옛길박물관에 먼저 들렀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어린이 8백원. 책에서만 본 옛날 지도를 직접 볼 수 있어서 더 재미있었던 듯. 박물관 외관은 시멘트를 발라 만든 국적 불명의 모습이라 조금 어색한데 내부는 잘 만들어 놓았다. 역시나 촬영금지. 산맥과 산경표는 옛 조상들이 우리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철학적 지리관을 잘 보여주었고 산경표를 따라 가면서 우리가 올라가 산, 가 본 곳이 눈에 보이니 여기있다, 여기있다를 연발하며 몰입한다. 과거급제를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올라갔다가 낙방거사가 되어 내려오면 남긴 시도 있고 건강 치료를 위해 한달간 온천여행을 갔다온 기록도 소개해 놓아 옛날 생활모습과 길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를 높여 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산경표, 그리고 국도 모습이 옛날 지리개념과 지금 지리개념에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준다.
문경 새재 제1관문 주흘관 가는 길
다섯시 넘어서 주흘관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는 지방 특산물인 사과나무도 여럿 있고 아이들 관심을 끌 토끼도 키우고 있어서 가족들 발길을 잡는다. 주흘관 복원공사는 성벽 하단과 상단 모습이 시대적으로 서로 몇백년 편차가 있는 모습이다. 이왕 돈들여 복원하는 것이라면 언제적 모습을 기본으로 복원했다는 안내판이라도 잘 보이는 곳에 해 주면 좋겠다. 시골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한 출세길로서 역할도 있지만,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을 방비한다는 역할도 잘 부각되었으면 좋겠다. 2003년에 왔을 때도 문경의 독특한 지리적 특성이 인상 깊었는데 내륙산악 지방인데도 평지는 마치 저지대 같고 주변 산은 웅장한 장수처럼 버티고 있다. 저 길을 따라 깃발만 꽂아 두었어도 왜적이 감히 지나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신립이 자기 주특기만 고집해 탄금대에 진을 친 일이 두고 두고 아쉽다. 신립이 이 새재를 한번이라도 보았더라면 다른 판단을 내렸을 텐데.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차이라면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나라 곳곳을 샅샅이 훝고 다녀서 지형지물에 익숙한 반면 조선은 그것을 너무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제3관문까지 6.5km. 이번에는 거기까지 가 보고 싶었지만 점심 간단하게 먹고 여기까지 오느라 제법 먼길을 걸은 때문인지 아이들이 성화가 심하다. 주흘관 안쪽에 발씻는 곳에서 잠시 고민하다 되돌아오기로 했다.
주흘관 뒤쪽,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6.5km를 맨발로 걸어서 왕복한 사람들이 발을 씻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물이 매우 차다.
6시에 휴양림으로 출발했다. 네비게이션을 휴양림을 찍어놓고 찾지를 못한다. 이강년 선생 유적지를 지나 용추계곡을 끝으로 길 표시가 없다. 역시나 아주 최근에 도로를 새로 개설한 듯. 휴양림 같지 않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타고 안내소에 도착했다. 키를 받고 보니 카드 키. 휴양관으로 올라가면서 보니 2007년 이후 신설한 국립자연휴양림 대부분이 규모와 배치구조, 건물구조까지 비슷비슷하다. ’70년대 스러운 획일형이라 좀 아쉬운 대목. 야영장은 없고 새로 숲속의 집을 3동을 짓고 있는데 연립형 숲속의 집이다. 201호 갈참나무 방에 짐을 내리고 아내는 채소랑 밥을 준비했다. 휴양관 뒤쪽에 있는 식탁에 자리를 잡고 숯불 준비를 하는데 옆에 온 가족이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한다. 신문지에 불을 붙여 착화탄을 사용한다. 마트용 착화탄, 싼 것도 좋지만 폐목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겠지. 큰 방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여러 가족이 함께 온 사람들이 있는 듯.
방태산에서 버려놓은 일회용 고기구이철망으로 간단하게 만든 것을 이용해 저렴하게(?) 불을 붙였다. 토치로 불붙이는 것을 처음 보신 듯 다들 놀래서 쳐다본다. 방안에서 냄새제거용으로 진열해 놓은 것을 걷어 온 터라 베란다에서 몇일 말렸지만 그래도 튈지 몰라 숯 위에도 철망을 덮었다. 5분정도 지난 다음 불을 끄고 기다리니 불이 서서히 올라온다. 가지고 있는 숯을 왕창 넣었는데 아이들이 배 고프다고 아우성이다. 밥이 준비되었길래 웨버에다 숯을 부어 넣었다. 헉! 생각보다 많은 듯, 웨버가 터질 것 같이 숯이 꽉 찼다. 준비해 온 투터운 목살을 넣고 훈연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고....10분쯤 지났을까? 고기가 깔끔하게 잘 익었다. 가위가 부드럽게 들어가고 참나무 숯 향기를 쐰 고기가 정말 먹음직 하다. 아이들이 오랜만에 숯불구이에 목메단 사람마냥 “맛있다!”를 연발하며 저녁을 먹었다. 아내가 채소를 많이 가져왔는데 천천히 이야기도 하고 많이 먹었다. 식탁을 너무 높게 만들어 놓아 계속 서서 먹어야 했다. 이런 것은 만들 때 조금 신경을 쓰면 좋을 것을. 1kg을 모두 굽는 동안 웨버는 훌륭한 요리사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600g으로 네가족이 충분했는데 오늘은 1kg을 거의 다 먹었다.
문경 대야산자연휴양림 휴양관. 보름이 조금 지난 때라 달이 아주 밝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동안 웨버로 숯불구이를 성공했던 때와 실패했던 때에 차이가 있다. 숯을 충분히 넣었던 때는 오늘처럼 맛있는 구이를 먹었고, 숯을 많이 넣지 않았던 때는 제대로 구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웨버는 숯을 넣고 뚜껑을 덮으면 숯불은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충분히 훈연한 고기를 얻으려면 숯을 최대한 넣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고구마와 감자를 호일에 싸서 숯 사이에 집어넣고 웨버의 모든 구멍을 막았다. 달콤한 고구마 냄새가 날 때 뚜껑을 열어보니 불이 거의다 사그라졌다. 감자가 익을 때까지 다시 덮어 놓았는데 감자가 다 익은 다음에 불은 완전히 꺼졌다. 숯은 조금 밖에 줄지 않았다. 웨버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경험치가 쌓인 것 같다.
설거지를 해 놓고 마침 휴양관 위로 뜬 보름달을 보고 삼각대를 꺼내 사진을 찍어 봤다. 바람이 서늘한 것이 이제 가을로 넘어왔음을 느꼈다. 방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상쾌한 샤워를 했다. 역시 물이 좋은 지역이라 그런지 피부가 매끈해지는 느낌이 좋다. 내일 등산을 하자고 얘기하고 11시쯤 잠을 청했다.
9월6일(일)
후텁지근하다. 한밤중에 잠이 깨서 물을 한번 마셨다. 휴양림 숙소는 바닥이 너무 뜨거운 것이 불만이다. 아내는 예전에는 좋아하더니 이번에는 조금 더웠나 보다. 잠을 설친다. 난방을 끄고 잠을 다시 청했다. 깊은 잠을 잔 뒤라서 그런지 눈이 자동으로 떨어진다. 아침 6시. 땀이 흥건하다. 방이 너무 덥다.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와 산책로를 걸었다. 다람쥐도 보이고 오색 딱따구리도 보인다. 아래위로 다 보아도 야영장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쉽다. 접근성이나 주변 구경꺼리를 생각하면 최적의 휴양림인데 야영장이 없다니....
휴양관 뒷마당. 숯불구이용 화로대와 식탁이 있고 음식물 쓰레기는 따로 분리 수거합니다.
아침을 먹고 대야산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왕복 4시간 걸린다는데 아무래도 짐을 치워놓고 열쇠도 반납하고 갔다오는게 좋을 것 같았는데 아내가 갔다와서 샤워도 해야 하니 그냥 가잔다.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길은 정말 좋다. 자연이 만든 수영장도 보이고 방태산 휴양림 같은 마당바위가 넓직해서 돗자리 깔기도 좋다. 한여름이라면 물이 너무 차갑지도 않아 아이들 놀기에도 아주 좋겠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10여명 있다. 연우가 휴대폰 얘기를 한다. 자기 반 친구들 반 이상 가지고 있는데다가 친한 친구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을 왜 자기는 대학갈 때 사 준다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얼떨결에 앞으로 네가 1,000m급 산을 10개만 오르면 휴대폰 사주마 라고 했더니 전에 올라간 산 중에서 1,000m급 산을 세 보더니 예전 것도 쳐달라고 요구한다. 앞으로 가는 것만 쳐주겠다고 했더니 등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 같다. 지난번 검봉산 오를 때 엄마아빠가 새벽에 같이가자고 깨울까봐 자는 척했는데 아침밥먹고 함께 올라가는 것으로 해서 망했다고 일기에 써 놓은 것을 봤는데 이젠 휴대폰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설 것 같은 분위기다.
휴양림에 새로 짓고 있는 연립동 숲속의 집 3동.
밀재에서 휴식하려고 잠시 멈췄는데 산악회 모임에서 오신 분들 7~8명이 앉아 쉬고 있다.
한 분이 담배를 피우며 “거, 짐꾼이 영 부실한 것 아니오? 카메라만 메고 먹을거는 별로 안메고 온 것 같은데?!”하며 농을 건넨다.
준기는 담배 피우는 분에게 “아저씨 산에서 담배 피우면 안되는데?” 한다.
“아기야. 나무가 뭘 좋아하냐?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내 놓는단다. 그래서 아저씨가 지금 이산화탄소 만드는 중이야.”라고 농을 친다.
“어, 준기야. 산에서 담배 피우면 벌금이 30만원이다” 라고 웃으며 그 분을 바라본다.
“아이다. 아저씨는 나무 먹이 만드는 중이다”
그러자 같은 일행 한 분이 웃으며 거든다.
“야야, 이 아저씨 나쁜 사람이다. 이거 일산화탄소 만드는 거다. 나무가 싫어하는 거다. 나쁜 아저씨 말 듣고 속으면 안된다”
“아이다. 그거 다 같은 탄소다”
그러나 준기는 속지 않는다.
“아저씨, 산에서 담배 피우면 산불나요!”
대야산 등산길, 입구 근처에 고목이 쓰러져 새로운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리에서 왔다는 산악회 사람들이랑 올라가는데 그 분들이 갖고 있는 GPS에서 해발 900m를 가르키는 곳까지 왔다. 건너편 산은 마치 백운대 같다. 산만 찍어 놓고 인수봉이라고 해도 그냥 믿을만큼 북한산과 참 많이 닮았다. 전망은 좋았지만 남은 길이 아찔한 수직바위 길이다. 밧줄로 묶어 놓았지만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연우와 준기는 이미 밧줄암릉을 세군데나 넘어갔다. 아이들 뒤에 바짝 따라가던 아내가 바위 너머에서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안 그래도 발 아래 수직절벽이 내심 꺼림칙했던 나는 아이들에게 도로 넘어 오라고 얘기했다. 두 사람이 겨우 발을 디디고 설 수 있을 만큼 좁은 길 아래는 수십길 낭떠러지. 미끄러지거나 밧줄을 놓치면 그대로 자유낙하.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도 여길 처음 왔다고 한다. 이런 무모한 일을. 둔덕산이 고도가 더 높아 이리로 왔더니 완전히 선택을 잘못한 꼴. 사람들은 그래도 계속 올라온다. 구리 산악회에서 오신 분이 길을 막고 연우와 준기가 내려오도록 해 주었다. 아무도 두 녀석을 도와 줄 수 없는 상황. 그 분은 “얘들아, 너희들은 산을 아주 잘 탄다. 밧줄 두손으로 꼭 잡고, 몸을 바위와 수직으로 세우고 천천히 양손을 엇갈려 잡고 내려오너라. 아무도 너희를 도와 줄 수 없다. 너희들 혼자서 해야 돼”라고 아이들을 격려한다. 올라갔던 길이라 내려가는 것도 쉽게 생각했던 준기는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느꼈나 보다. 그래도 아빠보다 대범해서 그런지 별 어려움 없이 어른들 격려를 받으며 내려갔다. 뒤이어 운동신경이 발달한 연우도 쉽게 내려가고 나와 아내도 내려왔다. 발 아래 깎아지른 절벽은 올라갈 때 본 것 보다 더 위협적이다.
금강산 부럽지 않는 자연이 만든 수영장.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것 같습니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내려가는데 하산길에 단체 등산객이 왔는지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부분 산악회 모임으로 왔는데 가족이나 부부가 온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 우리 가족을 보더니 신기해한다.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데 와 볼 생각을 못했다는 분도 있고, 부럽다는 분도 있고, 아이들이 기특하다며 보는 사람마다 칭찬한다. 연우는 이 산은 1,000m급 산에 포함시켜 줘야 한다고 계속 조른다. 방태산도 한라산도 이 산에 비하면 산도 아니란다. 하긴 그저 걷기만 하면 되는 산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수직암벽을 어떻게 같은 반열에 놓겠는가? 내려오는 길도 몹시 힘들다. 미끄럽고 심한 경사이고 올라오는 사람들은 끝없이 밀려오고....다들 처음 오는 분들인 듯. 바위길 직벽을 모르고 있다. 약주를 하신 듯 술냄새를 풍기며 올라오는 분들도 있고. 바위벽을 타실 분들은 아닌 듯하다. 연우가 계속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최근 등산을 거의 안한데다가 바윗길을 계속 걸었기 때문인 듯. 월영대에서 바닥에 무질러 앉으라 하고 감자와 사과로 점심대신 간식을 했다. 오후 1시가 넘었다. 안내소에 전화를 해서 퇴실이 늦어짐을 알리고 마스터 키로 열고 들어가 청소를 하시라고 했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제일 짜증나는 일인데 역시나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근심꺼리가 생긴다는 스타일이다. 오늘 숙박 손님이 예약돼 있다는 말에 맘이 더 급하다. 밀재 아래에 도착해서 아이들에게 탁족을 하며 천천히 내려 오라고 하고 혼자서 먼저 뜀박질을 했다. 2시까지는 도착해야 할텐데.... 뜀박질하다시피 하며 내려오면서 문득 무릎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고, 내 체력이 무척 좋아졌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랬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주차장까지 뛰었다. “내 다시는 마누라 말 듣나 봐라” 이런 등산을 하고 나면 시원한 계곡에서 탁족을 하며 무릎과 발목을 식혀야 하는데 이렇게 뜀박질을 하고 있으니...
하산하는 길. 점심으로 감자를 먹고....여기서 정상까지 1시간 쯤 가면 됩니다.
차를 끌고 휴양관에 올라가니 다들 퇴실하고 한창 청소중이다. 201호로 뛰어올라갔는데 카드키가 먹질 않는다. 오후 1시가 되면 자동으로 키락이 걸리는 시스템. 다행히 직원 분이 마스터 키로 열어 주셨다. 짐을 얼른 챙겨 밖으로 나오니 2시 40분. 안내소로 달려 내려가 카드키를 반납하고 수건이랑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계곡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이미 출구 쪽에 거의 다 온 상황. 나도 적극적으로 짐을 먼저 빼놓고 가자고 하지 않았으니 아내에게 짜증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고 아이들 마중을 나갔다. 휴양관으로 데리고 올라가 야외식탁에서 라면을 끓였다. 버너를 가지고 다녀서 다행이었다. 아까 그 직원분이 오셔서 라면을 끓이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가족이 함께 국립자연휴양림 일주를 하고 있다고 했더니 감탄을 하시며 청주 상당산성 근처에 금년 10월경에 국립휴양림 하나를 더 개장한단다. 2007년 운악산 이후 문을 여는 휴양림 마다 규모나 포맷이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야영장도 거의 없고 또 대부분 큰 방 위주로 구성하여 가족단위 여행객들에게 부담스러운 곳으로 변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산림청에서는 사람들이 큰 아파트를 선호하는 추세에 따라 4인 가족이 오면서도 큰 평수를 선호해 이런 휴양림 숙소를 계속 짓고 있다고 한다. 내가 야영장 부지일 거라고 짐작했던 곳도 모두 숲속의 집을 지을 거라고 한다. 실망.
대야산은 너무 험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정상을 등산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한다. 둔덕산이 높이는 더 높지만 휴양관에서 정상까지 거리도 훨씬 가깝고 별 무리없이 오를만하다고 다음에 오면 둔덕산을 올라가 보라고 하신다.(돌아와서 인터넷에 있는 산행기를 보니 그 지점에서 되돌아 온 것이 천만번 잘한 선택이었다.) 라면을 먹고 방문자 안내소에서 세수를 하고 시내 구경을 나왔다.
항일전쟁의 선봉에 섰던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관에 있는 선생의 사당 의충사.
휴양림 앞 이강년 선생 생가터와 기념관을 들렀다. 대한제국 말기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선비들이 제천의 유인석을 중심으로 13도 창의군을 조직 일본군과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지역 출신 이강년 선생은 무관을 지낸 전력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국사교과서에도 실린 이 무장항일전쟁은 대장인 유인석이 부친의 사망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유인석 선생을 중심으로 한 선열들은 서울진공작전을 펼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통신이 제대로 된 시절이 아니라 선봉에 섰던 왕산 허위 선생의 부대는 동대문 밖에서 고립 포위되었고 이강년 선생이 이끄는 부대는 패퇴하여 이 지역으로 밀려 왔다. 고종황제 퇴위,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의 와중에서 4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이강년 선생은 1908년 6월 제천 작성전투 중 적의 총탄에 발목을 맞아 사로잡혀 3개월 만인 1908년 10월 처형을 당했다. 이런 사실을 설명해주는 동안 이상하게 콧날이 시큰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왜 이런지 모르겠는데 4~5년 전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이 있었소>라는 만주지역 항일무장전투 기록을 읽으면서부터 이런 경우를 자주 겪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데, 제 목숨만 소중히 하는 대부분 사람들과 달리 목숨을 던져가며 대의를 이루려고 한 충의열사들 이야기는 어렸을 때와 달리 진한 감정의 울림을 전한다. 기념관 왼쪽에 자리잡은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의사(義忠祠). 향을 피우고 준기와 함께 묵념을 올렸다.
<감옥에서>
탄환이여, 자못 무정하여라.
복사뼈만 상하게 하여 불행하구나.
만약 심장을 뚫었더라면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 것을
<재판을 앞두고>
50평생 목숨을 아껴 본 일이 없거늘
죽음을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해도
혼이야 쉬이 사라지랴
<사형장에서>
우리나라 이천만 겨레가
장차 나와 같이 죽음을 당할 것이니
이것이 제일 원통하도다.
지난번 유명산 근처에서 찾았던 이항로 선생을 필두로 그의 제자들이 유인석, 이강년, 허위 같은 충의 열사를 배출했고 퇴계 선생의 후예들은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일제를 상대로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무장항쟁을 계속했던 것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비록 자기 자신은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진정한 충의열사들을 존경하고 기억하는 것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문경 석탄박물관
어느덧 5시가 넘었다. 다음은 석탄박물관. 예전 태백에 갔던 것은 너무 어려서였는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다만 사진을 본 기억뿐. 석탄을 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보여주고 그 당시 사용하던 장비나 생활모습을 박제된 모습이나마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세대를 넘어 공유할만한 가치가 있다. 작은 일상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것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 분들이 살았는 지 설명해 주지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삼척 해신당에서 본 바닷가 사람들 이상으로 절박한 생활이었음을 이해할까? 짧지만 정말 많이도 변한 우리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옛날 탄광갱도를 박물관으로 만든 것인데다 갱도 체험 때 사람이 근처에 가면 갑자기 말소리가 나와서 깜짝 놀라게 한다.
견훤왕 탄생지 금하굴
석탄박물관을 나와 준기가 보고 싶어했던 견훤유적지(금하굴)를 찾았다. 후백제왕 견훤. 우리역사상 유일하게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왕까지 된 사람. 그러나 역사의 승자가 되지 못했기에 그가 태어난 유적은 너무나 초라하다. 역사 속에는 상주 가은(지금은 문경 가은)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그가 지렁이가 환생한 젊은이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왜 용과 같은 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힘없는 지렁의의 후손이었을까? 어렸을 때 견훤 탄생 설화를 처음 듣고 가졌던 의문이다. 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을까? 왜 완산에 묻혔을까? 어차피 고려땅이 된 다음인데 그는 왜 고향이 아닌 완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을까? 살아서 아버지 아자개와 화목하지 못했고 아들 신검과 화목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가족간 불화가 결국 삼한통일의 영광을 왕건에게 넘겨준 셈. 넘어가는 저녁 해 때문인지 그가 태어난 마을의 넓은 논은 더 화려하다.
고모산성 성황당과 당산나무
마지막으로 들리기로 한 곳은 성영아빠께서 얘기한 적이 있는 진남교반. 문경 안내지도에는 경북팔경 중 제1경이라 했는데 네비게이션은 진남교반을 찾지 못한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고모산성이 있어서 고모산성에 올라가 진남교반의 노을을 보자고 정하고 고모산성을 찾아 갔다. 준기가 “고모가 있는 산이야? 왜 이름이 고모산성이지?”하고 물었을 때는 웃었는데 성 안내문을 보니 정말 ‘고모’산성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서기 156년) 때 쌓은 성을 후대에 계속 증축, 수리 하여 사용했다고 하는데 과연 위치는 대단한 곳이다. 해발고도는 2~3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성벽 위에 오르자 낮은 성인데도 진남교반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등성이를 따라 자연 지형을 살려 쌓은 성은 최근에 복원을 한 듯, 옛맛은 없지만 복원하는 의미는 있을 듯하다. 산성 옆으로 옛날 국도였던 영남대로가 나 있다. 이 성 위치는 신라가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위치다. 경주에서 여기까지 만만한 거리가 아님에도 AD2세기에 신라가 여기에 성을 쌓았다는 사실이 남쪽에서 일어났다는 신라건국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고모산성에서 바라본 진남교반 근처. 낮은 산이지만 가히 주변을 압도하는 곳에 있는 1800여년전 신라산성
문경은 정말 볼게 많은 곳이다. 역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지인 가운데 한 분의 종택이 여기에 있다. 황희 정승의 후손들로 지금도 황희 정승을 모시는 사당을 갖고 있다. 3박4일 정도 휴양림에 머물 기회가 있다면 이번에도 가보지 못한 제3관문까지 걸어가보고 싶고 이번 여행에서 부득이 가보지 못한 곳들을 찾아 자세히 보고 싶다. 아이들이 점점 역사와 지리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수준이 높아지니 이런 여행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뉴스를 듣고 최단거리를 선택해 국도로만 귀가길을 잡았는데 2시간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접근성, 볼거리 등을 고려한다면 문경은 분명 경쟁력 있는 지역이다. 휴양림에 야영장만 만들어 준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고모산성 진남문. 이 길 아래쪽에 진남교반, 철로자전거 가는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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