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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천년왕국의 수도 경주여행 (1)

by 연우아빠. 2009. 6. 4.
2009.5.29~ 6.1


5월 29일 밤늦게 도착한 경주 토함산자연휴양림 휴양관 내부.
필름 카메라에서 쓰던 광각렌즈(18~28mm)빌려서 처음 써 봅니다.


5월30일 새벽 산림휴양관 겉모습. 전혀 서라벌스럽지 않습니다. 낙안민속휴양림 휴양관 같은 겉모습.


새벽에 토함산 전망대를 올라갑니다. 연우는 아직도 꿈나라에서....너무 추워서 복장이 좀 복잡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안개가 심해서 시계가 좋지 못합니다.


광각렌즈를 가져갔더니 바로 턱밑에서도 이렇게 찍을 수 있네요. 전망대.


내려오는 길에 질경이로 풀끊어먹기 놀이...엄마를 이기고야 말겠다는 집념 때문에 이길 때까지 하자고 떼를 씁니다.

아! 정말 집요한 승부욕.



새로 짓고 있는 숲속의 집. 여기 저기 공사를 좀 하더군요.


휴양관 뒤쪽. 어린이 놀이터


석굴암 주차장. 불국대종각. 왼쪽으로 내려가면 불국사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내려다 본 경주 시내.


석굴암 복원 공사 중에 용도를 알수 없어서 결국 복원에 사용하지 못하고 여기 남게 된 석재들.
설계도면이 남아 있지 않아 이들이 들어갈 자리를 알 수가 없고 지금 보고 있는 석굴암은 일본인들이 복원해 놓은 것을
동국대학교 황수영 교수팀이 최선을 다해 원형에 근접하게 다시 복원작업을 하였음.
그러나 이렇게 많은 석재가 다시 남았으니 도면이 사라진 안타까움은 다시는 원형을 볼 수 없는 씁쓸함으로 남았습니다.


아래쪽에서 본 석굴암. 앞에 없던 건물을 붙여 놓아 본존불은 건물안에 갇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본 감포로 나가는 길


국립경주박물관 노천에 진열해 놓은 숭복사 쌍거북 좌대. 비석은 사라지고 좌대만 남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원성왕을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문은 최치원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 쌍거북 좌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왕궁이 있었던 창림사터,
그리고 무열왕과 관련있는 무장사 등 세군데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모두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라 금속주조기술의 정수 성덕대왕 신종. 화려하고 정교한 무늬는 성덕대왕 신종이 과학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미술적인 가치도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고관 전시실. 시대별로 각종 다양한 토기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지금의 지중해 지역과 제작기법이 같은 유리제품들. 천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세공이 신라시대 것이라는
안내판이 없다면 요즘 것과 구별할 수가 없다.


금관 앞부분을 장식한 날개. 신라인은 사람의 영혼이 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현기증 날 정도로 정교한 신라토기 문양.


사천왕사 특별전에서 본 작품. 대리석 재질에 새긴 듯, 화강암과 달리 세밀한 묘사가 가능해 보는 이의 탄복을 자아냅니다.


발견한 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유물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개구리를 노리는 뱀, 적나라한 성생활을 묘사한 남녀 토우 등 다양한 모습과 문양을 담고 있는 신라 토기


신라인의 수레. 쇠테를 두르고 도로를 달렸습니다.
신라시대 도로는 얼마전 경주문화재연구소를 지을 때 터파기 공사중에 발견했는데
 그 귀한 유적을 뭉개고 그 위에 연구소를 그대로 지었다는 뉴스가 나와서 크게 분개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문무왕 비문. 1/3 ~ 1/4정도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비문에는 지금도 판독 가능한 글자가 많습니다.
신라 김씨의 조상이 중국 삼황오제 전설에 나오는 소호금천씨이고, BC2세기 전한시대 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왕자 김일제일지
모른다는 설이 나오게 만든 투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보다 더 훌륭한 수막새가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기와


사천왕사 지붕 끝을 장식했던 치미


황룡사 지붕을 장식했던 웅장한 치미


너무나 아름다움 보상화 무늬를 담고 있는 기와. 이토록 정교한 기와를 구워냈던 신라 기술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안압지관 내부


미술관에서 본 짐승 상. 보통 사자라고 소개하는데 사찰을 지키는 오수견(사자 개라고도 하는 티벳산 털복숭이 개)일 가능성
이 많다는 얘기를 예전 역사 사이트 운영할 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티벳에는 오수견이 있는데 정말 사자처럼 생겼습니다.


고슴도치 청년 이차돈 순교비. 각 면마다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법흥왕의 왕권 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지요.
신라는 523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때까지 토착 신앙세력이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황룡사 터에서 나온 옥과 유리 제품들. 대개 왕이나 귀족들의 장신구 였던 것인데 저렇게 흘리고 다녔나 봅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것은 곡옥이라고 하는데 왕관이나 옥대끝에 장식으로 달았습니다.
그 왼쪽에 것은 목걸이나 가슴장식으로 사용하던 것이지요.


높이 88m를 자랑했던 황룡사 9층 목탑과 금당 축소모형.
몽골 침략 때 불타지 않았다면 경주의 모습은 지금과 또 달랐을 것 같습니다.
저 탑은 신라 주변 9개 국가를 모두 굴복시키려고 했던 웅지를 담고 있고
건축한 기술자는 백제사람 아비지입니다.


어린이 박물관 입구.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가면 좋습니다.
1시간 반정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2시간 간격으로 하루 4번 진행합니다.


부모님 출입금지. 아이들이 집중력을 가지고 진지하게 신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


강의가 끝나고 이제 부모와 함께 어울려 같이 할 수 있는 시간. 첨성대도 조립해보고...


매점에서 미리 사간 준비물로 탁본도 떠보고


마음에 드는 와당 문양을 골라 기와도 찍어 봅니다.


성덕대왕신종 축소모형을 보며 프로타주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이런 모양, 저런 모양 기와도 열심히 찍어 봅니다.


역시 연우 작품은 준기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용머리(또는 도깨비)라고 하는 신라 기와


터치 스크린을 통해 유물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도 얻습니다.


어린이 박물관과 미술관 모습. 광각렌즈 좋습니다.


안내판 밖에 없는 나정. 여기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연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입니다.
2002~2005년 사이에 발굴을 통해 나정임을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시작할 때까지 임시로 메워 놓았습니다.


오릉 입구에 있는 신라 첫번째 왕비 알영부인의 탄생지 알영정.


오릉. 여기에 박혁거세, 알영부인,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탈해이사금 이렇게 다섯분의 릉이 있습니다.

 
대학시절, 내 인생에 말할 수 없는 신선함을 가져다 준 한 인물을 TV에서 접했다. 그 분은 늘 Cool했고 ‘독재타도’와 ‘민주쟁취’라는 대의를 실현시켜 줄 희망이었다. 그 분은 대통령이 되었고, 200년간 이 사회를 공고히 지배해 온 기득권과 몸이 부서져라 싸웠다. 그 분이 몸을 던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나를 어지럽게 했다. 그 분의 홈페이지 들어가 조문의 글을 남기는 것도 눈물이 나서 힘들만큼 충격이었다.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고, 전쟁터에 그 분만 내 보내놓고 후방에서 여유 있게 지냈다는 자책에 분향소에 가 볼 자신이 없었다. 한 달 전부터 준비해왔던 경주로 출발하기로 한 날은 그 분의 국민장과 겹쳤다. 평생의 후회를 남기지 않아야겠기에 28일 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그 분을 만나러 나섰다. 예상은 했었지만 엄청난 인파에 덕수궁을 향해 가는 조문객의 꼬리를 찾는데만 20분 가까이 걸렸다. 그 꼬리에 서서 분향소까지 가는데 다섯시간 가까이 걸렸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그 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은 더 자세히 알 것 같다. 그 분에게 다 맡겨놓고 가끔 생각만 했으니 국민의 직무유기라해도 할 말이 없다. 오후에 아이들이 학교 다녀오면 경주까지 가야하는데 그래도 그 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29일 새벽 1시에 덕수궁 앞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를 탔다.

눈을 뜨니 아침 6시. 태극기를 꺼내 베란다에 조기를 걸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아버지는 일보러 나가시고 아내는 후배 생일에 갔다. 나만 혼자 남아 TV를 통해 영결식을 봤다. 대학시절,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목청껏 불렀던 “상록수”는 그 분을 기리는 조가가 되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니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내가 뽑은 대통령을 하늘로 떠나 보낸,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청년은
가족의 여행을 준비하는 40대 가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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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휴양림에 전화를 했더니 야영장에서도 숯불구이는 안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오후 3시가 넘어야 돌아오는데 그 때 출발하면 토함산까지 350km가 넘는 길이라 5시간은 걸릴 거 같은데, 아내는 휴양관이라도 빈방이 있으면 들어가는게 낫지 않겠냐고 한다. 휴양관은 빈방이 좀 있다고 한다. 1개를 예약하고 아이들이 돌아온 다음 3시 50분에 출발했다. 선산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잠깐 TV를 보니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추모행렬로 인해 노 대통령의 유해는 수원에 예정보다 3시간 늦게 도착해 이제야 연화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갈 길을 멈추고 그 분의 영혼을 위해 묵념했다. 늦은 밤, 무사히 봉하마을에 도착하시길 기원하며....

경주 IC를 나오니 8시가 넘었다. 토함산까지 남은 거리는 25km 남짓이었지만 불국사를 지나면서부터 심하게 구불구불한 길은 시속 30km 이상 내기 어렵다. 속도를 높이면 중앙선을 바로 넘어간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마치 태풍이 부는 것 같다. 야영을 했다면 밤새 비행기 소리 들을 것 같은 그런 바람이다. 토함산에 도착하니 8시 30분쯤 되었는데 마치 초겨울처럼 을씨년스런 기운이 돈다. 낮에는 여름 같더니 밤에는 겨울...마치 사막 같은 일교차. 캄캄한 길을 따라 올라가서 휴양관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다섯시간 동안 서서 조문하고 새벽 2시가 넘어 잠들었던 탓에 휴양림에서 처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에는 눈이 저절로 떨어진다. 새벽 5시.

아침 밥을 할 준비를 해 놓고 산책 나가려고 하는데 준기와 아내가 눈을 뜬다. 같이 가자고 나섰는데 바깥에 싸늘한 기운이 돈다. 연우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데 우리는 긴 옷을 챙겨입고 토함산 전망대로 산책길을 올라갔다. 전망대에 서니 사방이 아스라한데 바람이 심해서 오래 있지 못하겠다. 서둘러 내려와 밥을 지어 먹고 길을 재촉했지만 굼벵이 가족은 역시나 11시가 다 돼서야 길을 나섰다.

답사 첫날(5월30일)

석굴암>국립경주박물관>나정>알영정>오릉

경주 답사의 전체적인 구도는 건국기, 번성기, 멸망기로 나누어 대표적인 유적 유물을 보기로 했다. 먼저 토함산에 있으니 석굴암을 갔다. 1975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본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 때와 일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석굴암 본존불 앞에는 그 때 없었던 건물을 덧대어 지어 놓아 부처님을 그 안에 가두어 놓은 격이 되었다. 놀기 좋아하던 진골 귀족 김대성이 전생에 모량리의 대성으로 살 때를 기억하고 전생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석굴암. 젊었을 때 사냥하면서 죽인 곰이 밤에 꿈에 나타나 김대성을 꾸짖자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지었는데 훗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한 절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 만든 도면이 남아 있지 않아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석굴암. 일본 사람들이 추측해서 복원했으나 현대 기술로도 해결이 안되는 습기 때문에 아직도 복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수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 기록물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민족의 침략으로 경주 전체가 불탈 때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복원과정에서 발굴한 수많은 석재들은 용도와 용처를 몰라 지금도 석굴암 좌우에 따로 전시해 놓았다. 석굴암은 산 아래에 있는 불국사와 한 쌍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국사를 돌아보고 2km 정도 걸어서 석굴암으로 올라온다. 34년 전 수학여행 때도 그랬던 것 같다. 토함산 위에서 내려다 본 경주는 전성기에 17만호, 100만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었던 천년 수도로서 손색이 없다. 내륙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평야와 강이 흐르니 이 지역과 감포, 울산을 아우르면 한 나라로서 나무랄데가 없는 고대왕국이다.

본존불 앞에 서서 준기를 안고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돔형 지붕 가운데 마무리로 사용한 둥근 돌은 세 조각으로 깨진 상태인데 전설에 따르면 마지막 천장 돌을 만들 때마다 세 조각으로 깨졌다고 한다. 이 일로 완공이 늦어지자 김대성은 상심이 컸는데 꿈에 용이 나타나 그 깨진 돌을 들어 지붕 가운데에 끼워넣었다고 한다. 돌을 다듬어 둥근 돔으로 쌓아 올리는 것은 그 만큼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원래 화려한 색깔을 입힌 불상이었다. 지금은 색이 거의 다 사라지고 입술부분을 비롯한 몇 곳에 색채의 잔영이 남아 있지만 그래픽으로 복원한 본존불은 입체 탱화 그 자체였다. 서 있는 사람이 올려다 봤을 때 부처님의 광배는 마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만들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통해 김대성의 눈 높이가 약 170cm였다는 것을 계산하기도 했다. 이 본존불의 머리 위에는 원래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마에 박힌 보석이 아침 해를 받아 석굴암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장엄함을 연출해 불심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었다. 또한 이 부처님은 동해 감포 바다에 있는 대왕암을 바라보도록 설계를 했다.

점심때가 되었지만 3시 30분에 어린이박물관을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식사는 뒤로 미루고 경주박물관에 먼저 갔다. 마당에는 성덕대왕신종이 장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1,300년 정도 된 이 종은 이제 내부에 금이 가서 예전처럼 타종을 하기 어렵다. 녹음해 놓은 소리지만 장엄한 종소리는 다른 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종은 무게가 19톤으로 정교한 비천문과 함께 주조에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다. 고대 기술이지만 현미경적 기포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현대 주조기술을 무색하게 만든 신라 주조기술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이 종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종각을 새로 짓고 거기에 종을 거는 장치를 새로 포항제철에서 만들어 달았다고 한다. 1,300년전에 만든 고리가 종을 버티지 못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리는 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현대기술로 만든 종 고리가 휘어져 버렸다. 결국 1,300년전 신라인이 만든 종 고리를 다시 가져와 이 종을 걸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흔들릴 때 무게가 45톤이 넘는 이 종을 튼튼하게 매달고 있는 고리 제련 기술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경내에는 불상도 여럿 있는데 목이 잘린 불상이 많다. 조선의 선비들이 불교의 씨를 말리려고 전국에 있는 수많은 불상의 목을 자르고, 돌을 가져다 주춧돌로 썼다.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만행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악행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가 있는 만행이다. 사람들은 왜 산에 절이 많으냐고 묻는다. 하지만 원래 절은 시내 한 가운데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정부에서 탄압을 했기 때문에 시내에 있는 절은 훼손되어 사라지고 탄압이 미치기 힘든 깊은 산속에 절들이 많이 남아 있게 되어 마치 절은 원래 산에 있었던 것처럼 후대 사람들이 착각하게 된 것이다. 경주 남산에는 1,000기가 넘는 불상이 있지만 선비들의 만행을 피한 불상은 그리 많지 않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하리라.

고고관>특별전시관(사천왕사)>미술관 순으로 관람을 했다. 경주박물관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일 큰 것은 플래시를 터트리거나 삼각대를 쓰지 않는 한 유물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도 카메라를 쓸 때 오토포커싱 기능 대신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게 유물 보호에 바람직한 것. 오토포커싱 기능에서 작동하는 적외선 불빛 역시 유물에 별반 좋을 것은 없을 듯하다.

 

1,600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화려한 유리 세공품, 한반도 토착문화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5세기의 대릉원 출토유물들, 적나라한 진흙인형들, 그리고 토기들. 하늘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에서 이 땅으로 흘러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천년왕국을 만든 건국신화들. 지극히 폐쇄적인 제도와 또한 지극히 개방적인 체계를 가졌던 신라. 유교와 외세의 침략이 없었다면 아마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못지 않은 길고 긴 장편 역사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유물에 대해 아는대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지만 10살짜리 준기는 몽골군이 불태워버린 황룡사 이야기를 끝으로 미술관 관람부터는 몸을 비틀기 시작한다. 박물관 안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박물과 체험용 준비물을 사서 예약해 놓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갔다. 학교가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의외로 10여명 남짓만 예약해 놓은 상태.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들은 시각보다는 촉각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손으로 만지는 체험이 없으면 오래 기억하거나 집중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린이 박물관을 만든 목적을 설명해 준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설명시간에는 부모님은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먼발치에서 보니 열심히 설명도 하고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는 모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신라 건국시조들에 대한 설화, 전설, 대표적인 유물들에 대해 설명을 들은 모양이다. 준기는 기상천외한 질문을 해서 강사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강사 선생님께 답을 듣지 못해서 내가 대신 해 줬다. 강의가 끝나고 탁본뜨기, 형틀로 신라기와 뜨기, 성덕대왕 신종 프로타주 작업, 불상 손가락 모양에 대해 배우기, 유물 퀴즈 등 다양한 배울 거리를 섭렵했다. 그제서야 신이 나서 박물관에 몰입을 한다.

5시가 넘어 박물관에서 나와 처음 임금이었던 혁거세 거서간의 탄생지인 나정을 찾아갔다. 나정 옆에는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세운 6부 촌장들을 기리는 양산재라는 사당이 있다. 오랫동안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정은 전설로만 치부해 왔지만 2002년 경작지 한 가운데 나정으로 추정하는 결정적 유적을 찾아 3년에 걸친 지표발굴을 했다. 그 후 이 땅을 매입해 나정 복원 공사를 하기 위해 지금 준비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발굴지 항공사진에 보이는 나정은 지금은 중요 유물을 발굴한 다음에 임시로 메워 놓은 상태. 이로서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의 탄생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함으로써 석씨의 시조인 탈해 이사금의 도래지(감포항), 김알지의 탄생지(계림)까지 모두 확인이 되어 일본인이나 일본인을 스승으로 두고 있는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이제 상당히 약화되었다. 박혁거세는 몽골에서는 흉노족의 일부가 분파해 나간 것으로 믿고 있다. 그가 묻혀 있다는 오릉으로 길을 잡았다. 이미 6시가 거의 다 돼가는 시간이라 문을 닫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7시까지 문을 연다고 한다. 오릉 경내로 들어가 알영정을 먼저 찾았다. 혁거세 거서간의 왕비인 알영부인(고대 왕국 초기에는 왕비를 ‘夫人’이라고 불렀다)의 탄생지 알영정. 왕과 왕비가 모두 우물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알영부인은 새의 부리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북천에 가서 씻기자 새의 부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그와 혁거세 거서간은 북방에서 내려온 사람들인 모양이다. 삼국사기에는 서라벌의 6부는 모두 만리장성의 노역을 피해 한반도로 도피해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알영정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넓은 평지에 거대한 무덤 5개가 있다. 박혁거세, 알영부인,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탈해이사금 이렇게 다섯 사람의 릉이 자리잡고 있다. 준기는 신라는 건물은 없고 무덤만 있다고 투덜거린다. 수많은 전란 때문에 그리고 나무로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힘들지 않느냐고 설명해 주었는데 돌로 건물을 세우지 왜 나무로만 세웠냐고 물어본다. 돌로 건물을 세우면 많은 돈과 인력을 동원해야 하니 백성들의 고통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얘기해 주었다. 내친 김에 대릉원엘 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다. 저녁도 되었고 해서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대릉원 주변에는 쌈밥집들과 황남빵, 경주 찰보리빵, 경주빵 같은 지역 특산품을 파는 가게가 몰려 있다. 저녁을 먹고 내일 대릉원에 올 것을 기약하고 숙소인 대명콘도로 갔다. 오랜만에 들어가 본 콘도를 보고 아이들은 아파트 같단다. 사는 집과 별반 다를게 없는 콘도. 보문호와 반대쪽에 배정된 방은 창문을 열면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러우니 감옥 같다. 짐을 풀고 호수가를 산책하러 나갔지만 시끄럽고 바람이 너무 차서 30분만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