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여행 (1) 경주와 포항
2015.10.09~2015.10.11
10월, 사흘간 연휴를 맞아 아들이 그동안 가보지 못한 영남지역의 남은 땅을 여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경산까지 오가는 경험을 해 보고 싶단다. 중간고사 준비하느라 하룻밤 사이에 대충 가보고 싶은 곳을 정리해서는 아버지와 함께 경북 동부(경주, 포항, 영천)의 유적지, 경남(양산, 마산)의 유적지, 경북 서부(구미, 왜관, 대구)의 유적과 문화공간을 찾아보고 싶단다.
고등학생인 딸은 수학여행을 가서 10월 8일에 돌아오는데 아내는 딸과 함께 집에서 지내겠다고 한다. 유진네 부부가 대관령과 선자령 트래킹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아들이 경험치를 높이기 위해 혼자 기차를 타고 경산까지 왕복하겠다는 계획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항의에 깨끗하게 포기를 하고 7일날 저녁부터 사흘간 지낼 음식을 준비했다. 소고기 불고기를 재워놓고 소고기 구이, 꽁치 구이, 콩나물국, 두부 조림, 오징어 찌개 등 두 사람이 몇 일 간 지낼 음식을 준비했다.
8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수원에서 기차를 탄 아들이 9시 조금 넘어 경산역에 도착했다. 4시간 가까이 걸린 기차여행이 몹시 지루했다고 한다. 숙소로 아들을 데리고 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내일 경주 포항 지역 여행계획을 얘기했다. 경주에서 가보지 못한 가운데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 그리고 소지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서출지를 목록에 넣었다. 포항에 가서는 맛있는 포항물회를 먹고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호미곶, 등대박물관 등을 돌아본 뒤 돌아오는 길에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을 들르기로 했다.
10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복통과 설사가 밀려왔다. 어어 하는 사이에 상태가 더욱 나빠져서 밤 사이에 20~30분 간격으로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잠도 못자고 탈진 상태에 빠졌다. 아들은 자고 있는데 걱정이 밀려온다. 수도권처럼 길이 막히지는 않으니 천천히 다닐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 길을 나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저녁에 먹은 것을 곰곰이 되짚어 보니 아들은 먹지 않고 나만 먹은 음식은 오징어 찌개뿐인데 아무래도 그 찌개가 상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난 아들은 아프다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 절반, 모처럼 벼른 여행을 못 갈까하는 걱정 절반이 섞여 난감한 표정. 아들에게 아침밥을 주고 나는 사과 1개만 먹었다.
운전을 못할까 걱정스러웠는데 느즈막히 10시쯤 길을 나서서 경주 용담정을 향해 갔다. 용담정 가는 길에는 차도 거의 없고 누런 벼가 익은 들판에 추수하는 사람만 간간히 보였다. 호젓하다 못해 쓸쓸한 느낌이 드는 용담정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경내로 올라갔다. 예배시간인지 경전을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용담유사는 이 곳에서 동학을 창시한 최재우 선생이 남긴 경전이라고 한다. 어려운 문자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용담유사를, 글을 많이 배운 사람에게는 동경대전을 남겼다고 하는데 천도교 신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천도교에도 묻어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더 움츠러든다. 따뜻한 햇볕이 주차장에 가득하다. 차 안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20분쯤 눈을 붙여 어젯밤에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몸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
용담정에서 서출지 가는 길은 경주에서 한 달 간 하는 실크로드 축제 때문인지 시내로 들어가는 차가 끝없이 이어져있다. 우리는 반대 방향이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서출지까지 쉽게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출지를 찾았으나 안내표지판을 발견하지 못해 서출지 주변을 뱅뱅 돌다가 뒤늦게 서출지라는 것을 알았다.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서출지 풍경.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서출지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서스펜스 추리극이라 불러도 좋은 내용인데 정작 문화컨텐츠를 찾는다는 현대의 관광정책이 이 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독일 브레멘에 갔을 때 <브레멘 동물음악대> 동화 하나를 테마로 해서 관광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연극공연을 하고, 숙소나 골목에 동물음악대 캐릭터를 조성해 놓아서 많은 사람에게 재미를 주었던 장면이 생각났다.
서유럽이라면 이 서출지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서출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지왕, 까마귀, 돼지, 생쥐, 바람난 왕비, 왕을 암살하려고 거문고 갑에 숨어 있는 중 등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관광 컨텐츠를 만들었을까? 신라 때 복장을 입어보고 소지왕이 거문고 갑을 쏘는 장면을 위해 당시의 활과 화살도 재현해 관광객들에게 직접 쏴보게도 하고, 서출지 이야기를 아이들을 위한 그림자극으로 상설 공연을 하고, 어른들을 위해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을 하고, 캐릭터를 기념품으로 만들어 팔 수도 있을텐데. 또 박제화된 판소리 12마당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이런 드라마틱한 소재를 창작 판소리로 만들어 이 근처에서 상설 공연하는 것도 충분히 해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아들과 나누었다. 우리 아들 많이 여행을 하더니 이제 이런 생각도 한다. 기특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포항 환여횟집. 3년 전에 이 집에서 먹었던 포항물회가 정말 맛있었는데 아들이 포항물회를 먹자고 해서 이 곳으로 점심 장소를 정했다. 그러나 속으로 걱정스러웠다. 배탈이 난 상태에서 찬 것을 먹어도 괜찮을까?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손님은 여전히 많다. 주문을 해 놓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뜨거운 물을 두어잔 마셨다. 따뜻한 밥을 반 공기 정도 미리 먹어서 속을 다독인 다음 조금씩 물회를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맛있다. 유명해지면 손님이 많아지고 불친절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여전히 친절하다. 옆자리에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6인상에 앉으려 하자 종업원이 4인 상으로 옮겨달라고 한다. 사장님이 얼른 그렇게 할 필요 없다고, 편안하게 6인상에 앉아 어린 아이를 누일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런 마음이 참 훌륭하다.
점심 먹은 뒤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찾았다. 안내문에 오타도 있었고, 얕은 역사의식과 낮은 인권의식을 듬뿍 담고 있어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1949년에 체결된 제네바 협약, 그리고 1998년에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 <아동의 무력충돌 참여에 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선택의정서> 등은 만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전쟁에 징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포항시에서 세운 안내문에 기록된 것처럼 화랑이 아니라 문명국이라면 전쟁에 투입해서는 안되는 학생들이었다. 군번도 계급도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총을 쥐여 적과 싸우게 한 것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일이다. 이 포항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포화 속으로>에는 당시의 무책임한 군 지휘부의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도 국군의 도움없이 71명의 학생이 포항전투에 단독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 할 어른이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들이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다 해도 2002년 7월에 건립했다는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는 적어도 “얘들아 미안하다” 라는 글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념관을 돌아보는 내내 피어보지 못하고 죽은 그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똑 같은 희생을 부추기는 듯한 기념관 내부 전시물을 돌아보며 역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죽였다고 자책하고 어머니께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는 고 이우근 학생의 메모가 짠하게 다가온다.
기념관을 나와 동해 호랑이 꼬리를 찾아 시원한 바닷가로 달렸다. 티없이 맑은 하늘과 햇살 때문인지 동해는 더 짙푸르다. 매년 1월1일 TV에서 보는 그런 아수라장이 아니라 빛 고운 가을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금빛 햇살이 바다 풍경과 잘 어울린다.
고래를 닮은 조형물에 앉아 멋진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고 연을 날리며 연휴를 즐기는 아이들도 많다. 공원 근처에 있는 등대박물관은 바닷길을 밝히는 등대의 역사에 대해 흥미 있는 지식을 전해 준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영천의 임고서원은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곳이다. 짧은 가을해가 아쉬운 시간. 해는 넘어갔지만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임고서원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은 완전히 해가 넘어간 길. 예상치 못한 배탈에 몸은 힘들었지만 아들과 함께 한 오늘 여행은 그런대로 좋은 느낌이다. 숙소로 돌아와 아들에겐 소고기를 구워주고 나는 따뜻한 콩나물 국을 끓여 탈진한 몸을 추스렸다.
용담정 입구
동학혁명의 정신적인 기반이 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
옛날 용담정이 있었던 곳에 새롭게 한옥을 지었다
소지왕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경주 서출지
서출지에서 나온 노인이 소지왕에게 전했다는 글.
이 봉투를 열어 글을 읽으면 두명이 죽고 읽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는 글
6.25 당시 포항전투에 참전해 희생된 학생들의 행적을 전하는 기념관.
호랑이 꼬리에 있는 고래모양의 조형물
맑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호미곶 공원의 햇살이 아름답다
커다란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날리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날 구해 주!는 아니고 바닷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청동 손
호미곶 공원에 있는 등대박물관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 고려말 삼은 가운데 한 분인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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