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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영남 여행 (3) 구미, 왜관, 대구

by 연우아빠. 2015. 10. 26.

영남 여행 (3) 구미, 왜관, 대구


2015.10.09~2015.10.11


10월11일 연휴 마지막 날.

오늘 아들의 여행 계획은 구미, 왜관 그리도 대구 쪽이다. 먼저 구미에 있는 허위 선생 기념관을 향해 길을 나섰다.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차가 많았다. 재물을 탐하고 경제적 이익만 우선하는 시대라 그런가? 도로 표지에는 박정희가 살았던 집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가 계속 보이고 같은 방향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의 유적에 관한 표지는 근처에 가서야 나온다. 경기도 이천에서 허위 선생의 이야기를 많이 봐서 그쪽 분인줄 알았는데 선산(지금의 구미)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고 한다.

 

왕산 허위 선생의 기념관은 구미IC와 멀지 않은 얕으막한 언덕 위에 있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념관 앞에는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고, 아파트를 지나면 그를 기리기 위해 생가터에 만들어 놓은 기념공원이 보인다.

 

허위 선생에 대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너무 강렬해 지금도 그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처형 직전에 일본 승려가 극락왕생을 비는 독경을 하려고 하자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마룻바닥을 발로 차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충의가 있는 사람은 저절로 극락에 갈 것이다. 설령 지옥에 간다한들 어찌 원수 놈의 힘을 빌려 극락에 가겠느냐!”

 

소설일까? 실재였을까? 그 분이 남긴 유언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겠나.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하고,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어서 어이 눈을 감으랴.”

 

왕산 선생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13도 창의군 선봉장으로 1907년 동대문 30리 지점까지 의병부대를 이끌고 들어가 일본침략군과 전투를 벌였던 분이다.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은 전투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르겠다고 대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허위 선생은 같은 일을 당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보다 나라를 되찾는데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 전투에 임했다.

 

이런 자세는 그의 집안과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일가친척과 후손은 중국, 러시아 등지로 흩어져 대를 이어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허위 선생의 형제들, 아들, 조카, 손자, 며느리까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을 위해 싸웠다. 러시아에서 일본군에게 처형당한 분도 있고 중국에서 항일동북연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전사한 분도 있다. 살아남은 후손들은 타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100여년 지나서야 조상의 나라에서 다시 상봉하였으니 이보다 기막힌 일이 어디 있는가 싶다. 이런 훌륭한 분과 박정희 같은 인간이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대조적이다. 그러나 둘 다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니 어찌하겠나, 잘한 사람을 따라 배우고 잘못한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악비와 진회의 고사도 있지 않은가?

 

기념관 옆에 있는 허위 선생의 묘 앞에서 아들과 함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큰 절을 두 번 올렸다. 이런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분의 기념관을 이렇게 박제를 해서 모셔 놓지 말고 기념관이나 공원에 소극장이라도 만들어 드라마틱한 일생을 연극이나 뮤지컬 또는 오페라, 인형극 같은 형태로 제작을 해서 공연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유럽 배낭여행 중에 작은 시골마을이라도 이런 이야기와 역사를 가진 곳에는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체험거리들이 있어서 기억이 오래 남고 다시 찾게 만들었는데 우리도 성역화만 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구현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구름이 짙게 몰려와 기온은 떨어지고 싸늘한 바람이 분다. 길 가에서 우연히 고려말 삼은 가운데 한 분인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를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했다. 그런데 길이 끝나는 곳까지 올라갔지만 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마을 골목을 헤매다가 되돌아 나와 다시 마을 끝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길로 천천히 올라가며 살펴보았다. 진입 방향으로 11시 방향 길 끝에 있던 집의 뒤편 언덕에 묘가 보였다. 맨 처음에 도착했던 막다른 곳에 있는 집 바로 위에 길재 선생의 묘가 있었는데 찾지 못했던 것이다. 차를 세우고 3m쯤 오르자 바로 길재 선생의 묘가 보였다.

 

봉분 오른편 바닥에 오래된 비석 두 개가 표면만 드러낸 채 묻혀있다. 숭정 후 98년(1725년) 새로 고쳐 세웠다는 글씨가 선명하다. 더 오른쪽에 있는 비문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만든 듯, 글씨가 많이 흐려진 상태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이 섭섭하게도 조선이 안정된 뒤에 선비들은 죄다 조선에 협력을 거부한 정몽주, 길재, 원천석 같은 선비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사표로 삼았으니 인간에겐 이익을 초월해 보편적인 정의감이 있다는 맹자의 말이 맞는 모양이다.

 

길재 선생의 묘를 떠나 찾아 간 곳은 왜관 철교. 6.25사변 당시 낙동강 방어를 위해 미군이 폭파했던 옛날 다리는 지금은 새로 만든 다리 옆에 조형물로 남아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와 달리 미군은 다리를 비운 다음에 폭파시킨 것은 대조적이다. 옛 역사를 담은 안내문이 있고 다리 위에는 당시 유엔군으로 전투부대를 보낸 나라와 의료지원을 한 나라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바람도 많이 불고 기온도 상당히 떨어져 아들과 함께 다리 위에서 달리기를 했다. 키가 훌쩍 커버린 아들은 성큼성큼 달려서 다리 짧은 아빠를 쉽게 추월해 갔다. 우리가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본 다른 아이가 “우리도 달리기 하자”고 부모에게 얘기한다. 흐훗, 이런 것이 재미 아니겠어요? 이 강둑을 지키기 위해 죽거나 다친 그날의 병사들에게 감사해야지. 그리고 다시는 우리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바보짓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대구로 내려오려다 어제 이 근처에 신유장군 유적이 있다는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왜관철교와 가까운 곳 시묘산 자락에 있었다. 8월달에 신유장군이 러시아 군대를 격퇴했던 곳을 지나왔으니 안 가볼 수가 없지 않는가? 비록 청나라의 요구로 갔던 것이지만 멀고 먼 흑룡강까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시아 땅 깊숙이 밀고 들어온 러시아의 동진을 잠시나마 막은 세계사적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분이 아닌가. 그 분의 사당이 시묘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6.25 때 치열한 전투 때문이었는지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비석은 총포탄 자국이 선명한 채 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상태였지만 그 옆에 새로 복원한 비석이 나란히 서 있어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다. 사면에 새긴 비문에는 경인년 전란(6.25사변) 때 파손된 비석을 다시 새겼음을 기록해 두었다. 조선시대에 만든 비석에 비해 용의 조각이 경박스럽게 보여서 아쉽다. 북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선위문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숭무사 사당은 문을 걸어 잠궈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지났다. 이제 대구로 가야지.

팔공산 자락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사당은 시간이 부족할 듯하여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고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갔다. 점심에 김밥 한줄만 먹은 탓에 배가 고파서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었다.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해가 곧 질 것처럼 시내가 어둡다. 대략적인 지도를 보니 2.28 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출발해 약령시까지 걸어서 돌아보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여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복원의 첫단추부터 잘못 끼운 노욕의 화신 이승만의 독재질을 끝장내기 위해 일어선 대구 학생들의 2.28의거. 그들과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마산 의거.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이 몸담고 있는 정당에서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독재자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그 때 일어선 그 선열들은 뭐라고 할까? 문득 궁금하다.

 

약령시를 향해 걷는 동안 2% 부족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주말만이라도 이 골목에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게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 안을 살피며 걷는 동안 수시로 드나드는 자동차들을 보니 ‘골목투어’의 기본 취지에 맞지 않는 듯하다. 20여분 정도 걸으면 충분한 공간인만큼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다닐 수 있도록 한다면 좀더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듯 하다.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에서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로 있던 매국노 박중양이 조정을 무시하고 일본 상인들과 짬짜미를 하여 대구읍성 성벽을 부쉈다는 것이다. 과연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매국노답다. 이런 놈들이니 돈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짓을 서슴치 않고 했겠지.

 

한의약 박물관 주변에는 대구경북지역에 처음 세운 개신교회인 대구제일교회도 남아 있고, 계산성당과 이상화 시인의 집,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동했떤 서상돈 고택이 남아 있다. 이름하여 근대문화골목. 곳곳에 안내문과 도로표지가 잘 되어 있어 찾아 다니는 재미가 괜찮았다. 피맛골을 전부 파괴해버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탈레반스러운 행동에 비하면 그나마 참 다행이다.

 

우리나라 대도시도 유럽의 대도시처럼 낮은 건물로 도시 전체를 조화롭게 조성했더라면 얼마나 더 멋진 도시가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확인한 골목길 탐방이었다. 그깟 입시만 아니라면 온 가족이 함께 돌아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진다. 아이폰 배터리 충전을 깜빡 잊어버려서 돌아가는 길은 지도를 보며 찾아가느라 조금 헤맸다.



왕산 허위 선생이 남긴 유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경내에 있는 묘소.


왕산 허위 선생 생가 터에 조성한 기념공원에 있는 동상. 동상의 자세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보통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왼손에 격문을 들텐데 여기는 반대로 되어 있다.

광복 이후에 매국부역자들이 제작에 참여해 만든 동상, 기록화에 왼손잡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누가 제작한 동상인지....




 


아파트 쪽에서 올려다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고려말 삼은 가운데 한 사람인 야은 길재 선생의 묘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이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는 시조로 유명한 충의지사로 운곡 원천석 선생 아래에서 이방원과 동문수학을 한 사이지만

이방원의 회유를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영남 사림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묘지 오르쪽에 있는 땅에 묻힌 비석.

숭정 기원후 98년 을사년(1725년)에 만든 비석이라는 명문이 선명하다.



야은 선생 묘지 뒤에 원래 상석으로 썼던 듯한 오래된 판석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


165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200여명의 조선군 포수병을 이끌고 흑룡강(아무르강) 일대에서 러시아 군대를 섬멸했던 신유장군의 사당.


신유 장군은 근세 이전에 우리 역사상 가장 북쪽까지 올라가 전쟁을 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2차 나선파병 때 재물에 눈이 먼 청나라 장수 때문에 조선군 7명이 러시아 군에게 희생되었는데

신유 장군은 화장하라는 청나라 장수의 권고를 무시하고 흑룡강변에 매장했다고 한다.

"시신을 조선으로 운구하지도 못하는데 화장을 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신유 장군은 이 전투에서 노획한 러시아군의 소총이 조선의 조총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조선으로 가져오려고 했으나

청군의 방해로 단 1정만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가지고 온 총은 조선 무기 개선에 참고가 되었을까?



6.25 사변 중에 치열한 낙동강 방어전투 과정에서 신유장군의 전공비는 이렇게 큰 피해를 입어 조각이 났다.

후손들이 그 옆에 원래 내용을 담은 비석을 다시 세웠다.



6.25 사변 중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인 낙동강 방어 전투.

그 가운데서도 가장 처절했던 왜관 전투에서 미군은 북한군의 도하를 차단하기 위해 이 다리 한 구간을 폭파했다.

아치가 없는 부분이 그 당시 미군이 끊었던 부분이라고 한다.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대구 국채보상운동 공원. 답답한 도심에 숨쉴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금연을 해서 나라빚을 갚고자 시작한 운동을 기념하는 곳이니 만큼 절대 흡연은 안되는 것으로...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며 다양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60. 2.28. 대구 지역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를 학생들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요일인 이날 학생들에게 등교를 지시했다.

이에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저항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폭력으로 진압한 경북도지사와 경찰들에게

학생과 시민들이 저항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3.15 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 공원 한 블록 떨어진 곳에 2.28 기념공원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의 대구와는 너무나도 다른 민주주의와 주권수호의 성지 대구의 과거.



문화의 거리 골목 투어는 유럽 여행 중에 보았던 숨쉬는 대도시의 맛을 느낀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무시로 밀고 들어오는 자동차를 주말이나 공휴일만이라도 통행제한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편안한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까 싶다.

걸어서 20분이면 가로지를 수 있는 크지 않은 구역이니, 

승용차나 택시 같은 차량은 구역 외곽에만 접근하도록 한다면 더 좋은 여행지가 될 것이다.



약령시 골목과 관련 있는 책 조형물



대구 약령시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든 박물관

우리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30여명 쯤 되보이는 서양인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러 들어갔다.

세균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동서양의 의학은 거의 비슷한 발전과정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영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대구제일교회(근대문화유산)



일제 때 저항시인 이상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자 서상돈 등의 옛집이 남아 있는 골목

전 서울시장 오세훈이 피맛골 같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골목을 부수고 콘크리트 덩어리를 쌓아올린 바보짓을 

대구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으리으리한 빌딩보다 이런 골목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숨쉬는 거대도시의 자랑이 되는 것을 유럽 여행을 통해

많이 경험했다. 대구 골목투어는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한 관광상품이 되었는데, 원형을 오래오래 잘 유지했으면 한다.



이상화 선생의 집 내부. 안동의 양반가문 출신인 이상화는 대구에서 많은 시를 썼다.

여기에서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져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상화 시인의 집과 이상돈 선생의 집은 바로 이웃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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