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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지리산 5박6일(6) - 함양

by 연우아빠. 2014. 8. 26.

지리산 5박6일(6) - 함양 / 8.14일



비가 올 것을 대비해 몇년전 유진아빠에게 얻은 비닐하우스용 대형 비닐을 발코니에 설치해 야전침대를 완전히 덮었다.

새벽에 큰 비가 오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화장실에 갔다오면서 다시 제대로 덮었는데, 뜻하지 않게 처마와 숙소본체 사이의 이음매 부근에서 비가 새기 시작했다.

비닐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커서 한번 깬 잠을 다시 청하기 어려웠다.


곤히 자는 아내를 깨워 방에서 잠을 자도록 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코니 바닥에 물이 튀어서 야전침대 아랫부분에 빗방울이 튀었다.

숲속의 집 안에서 자는 것보다 여름에는 역시 바깥 공기가 더 좋은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조금 들긴 했으나 5박6일간 지리산을 충분히 즐겼으므로 집에 올라가는 길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함양은 2008년 지리산에 처음 왔을 때도 들렀던 곳인데

아이들이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무효라고 하여 올라오는 길에 함양 구경을 하기로 했다.



첫번째 목적지인 학사루에 도착했다.

학사루는 아들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사건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학사루는 의외로 함양군청 바로 앞에 시내 한 가운데에 있었다.

길 건너에 군청과 항교가 있었는데, 이 학사루 자리에 일제가 함양초등학교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학사루는 조선시대 간신으로 악명을 남긴 유자광과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 사이에 얽힌 역사가 있다.

유자광은 서자 출신이어서 높은 벼슬을 하기 어려웠지만 타고난 담력과 무예를 기반으로 노력하여 이시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족인 남이, 구성군 이준 등만 큰 포상을 받고 정작 큰 공을 세운 유자광은 신분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


유자광이 이 학사루에 시를 써서 붙인 적이 있는데

김종직이 이곳 군수를 지낼 때 유자광이 쓴 시를 떼어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유자광은 이것에 앙심을 품고 훗날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사림파를 공격하여 부관침시를 당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학사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물어 보았다.


"김종직의 처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뇨?"

"글쎄요......"


"무릇 글을 읽고 대의를 밝히고 백성을 위한다는 식자들 가운데는 속이 옹졸하기 그지 없는 자들이 많다.

교과서에서는 사람의 후예들이 정권을 잡아서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그들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인간성이 결여된 정신질환자들도 있단다. 


그의 지식, 그의 지위, 그의 업적 따위에 존경심을 갖지 마라.

그의 인격은 행동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김종직과 사림은 그 잘난 지식 나부랭이로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한 바보 같은 자들이다.

물론 유자광도 잘한 짓은 아니겠지. 하지만 정치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해야 세상에 도움이 된다.

김종직 같은 사림들은 작은 지식으로 자기 목숨을 재촉한 자들이고, 크게는 나라와 민족의 목숨을 재촉한 자들이다."

  


함양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 물론 처음 지은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김종직과 조광조는 옹졸한 지식인이지 결코 경세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등용했던 조선의 왕들이 받았을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학사루에 얽힌 사림과 유자광의 역사는 지식, 시험점수가 결코 사람의 됨됨이를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비 내리는 함양 시내는 참 아름다웠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사실은 함양상림이 군청 바로 옆에 붙어 있다시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안내 전광판에는 이런 멋진 터치스크린 시설이 있어서 맛있는 집을 찾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림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연못에는 부레옥잠과 각종 연들이 자라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은 연잎에 통통 튀며 모였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연잎이 고개를 숙이면 도르르 굴러 떨어졌다.

아내는 어릴 적 비내리는 날의 놀이를 보여주었고, 두 녀석은 한동안 옛날 놀이를 반복했다.



많은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서 상림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울창한 상림을 걷다가 상림 끝에 다다랐다.

이 지역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을 모아 흉상을 제작해 놓은 곳이다.




그 사이에 이 지역에 있던 비석들을 모두 모아 놓은 비림도 있다.

여기에 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공덕비들 가운데 사악한 자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바로 갑오농민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에게 강요해 스스로 세운 자기 공덕비이다.



조병갑은 함양군수로 재직하면서 그 전에 함양군수를 지낸 자기 아비 조규순의 공덕비도 백성들을 갈취해서 세웠다.

조병갑은 이런 탐학질도 모자라 전라도 고부군수로 가서는 거기서도 전임이었던 자기 아비 조규순의 공덕비를 세웠다.

물론 백성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갈취해서 세운 것이다.


이런 탐학질에 항의하던 전봉준 선생의 아버지를 때려 죽인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격발장치가 되었다.


이런 정치가 1세기 동안 방치된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법칙이 아닐 것이다.

조선은 바로 이런 자들이 결국 힘을 모아 나라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헐값에 팔아 넘긴 것이다.


유사 이래 조선처럼 이렇게 지저분하게 망한 나라가 없었다.


지금도 우리 가문을 포함해 명문거족이라고 자랑질 하는 족보에 수록된 조상들 가운데는

이렇게 더럽고 추잡스러운 인간 군상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본다.

조상과 가문을 자랑하기 전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6년전에 왔을 때는 논이었던 땅이 모두 군청에서 매입해 공원의 일부로 조성해버린 모양이다.

차라리 6년전 개구리가 보이고 왜가리와 해오라기가 먹이 사냥을 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때가 더 자연스럽고 좋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차라리 하림이었던 부분을 매입해 

최치원이 처음 조성했던 상림과 하림 모두를 복원시키는 방향으로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들었다.

상림 근처에 있는 박물관도 시간이 있으면 들러 보고 싶었으나 올라갈 길도 멀고 배도 고프고 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귀가하기로 했다.



어떤 집에 갈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맛과 멋"이라는 상호를 건 집으로 정했다.

실내는 나무로 만들어 아늑했고, 얕으막한 창문은 비오는 풍경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음식 또한 MSG의 맛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주인장의 친절함에 이 집이 오래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음식점 입구 돌확 안에 예쁜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 먼 곳을 언제 다시 여행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 그친 뒤에 높은 산자락에 걸려 있는 안개구름 때문일까?

여행의 끝이 센치멘탈해지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