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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창덕궁과 후원

by 연우아빠. 2013. 11. 18.

11월 15일(금) 회사 행사 때문에 창덕궁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아이폰으로만 찍었는데

5월달에 창덕궁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어서 함께 엮어 포스팅을 합니다.


기온은 낮고 해가 나지 않아서 좀 추웠지만, 궁궐을 찾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임금의 명으로 건축한 궁궐입니다.

선조임금은 이 궁궐에서 피난길에 올랐다고 하네요.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가 광해군 때인 1610년 중건하여 법궁으로 삼았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전각 대부분이 불타버렸고,  1803년에도 인정전이 불타기도 했습니다.

1917년에도 큰 불로 소실되기도 했었습니다.

궁궐이 목재로 되어 있는데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 자리를 잡아서 그랬던 것일까요?

조선왕궁은 큰 화재를 여러차례 겪었습니다.


국사책에 나오는 임오군란, 갑신정변(창덕궁 관물헌)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1910.8.22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한일병탄조약문에 서명한 곳도 창덕궁이었다고 합니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년)에 완성되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돈하문은 1609년(광해군 즉위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중용에 대덕돈화(大德敦化 : 백성을 가르쳐 감화시키고 덕을 도탑게 한다)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돈화문으로 출입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임금님, 외국사신, 사헌부 대사헌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돈화문 왼쪽 담장을 끼고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금호문(서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가 8그루 서 있습니다.

창덕궁 돈화문 주변은 궁궐의 삼조 중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 공간으로

'궐내각사'라고 부르던 집무관청이 있는 곳이다.

즉 규장각, 홍문관, 예문관 등 주요 행정부서가 있는데 <주례>에 따라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주례>에 궁굴 안뜰에 회화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정사를 논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1820년 경에 그린 동궐도에도 등장하며 수령은 3~4백년 정도라고 합니다.

아마도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 때 돈화문을 복원하면서 심은 나무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돈화문을 지나면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금천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금천교를 만나지요.

1411년에 완성했으니 돈화문보다 1년 먼저 지은 것이네요.

서울에 남아 있는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합니다.

멀리 보이는 진선문은 1996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남쪽을 바라보는 바닥에는 해태가 앉아 있습니다. 북쪽에는 거북을 설치했습니다.

아래에 흐르는 개천은 비단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금천인데 지금 금천을 되살리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궁궐답게 천연기념물이 된 노거목이 많습니다.

궐 안에 느티나무 고목이 30여그루 있다고 합니다.



호위청

원래 서인들의 쿠데타(인조반정) 때 사사로이 모집한 군대를 반정이 끝난 뒤에 왕궁 호위를 구실로 호위청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쿠데타 핵심세력들의 친위세력으로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훗날 정조 임금 때 왕의 직할부대로 바뀌어 왕권 강화에 활용했다고 합니다.



인정문

경복궁 근정전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정전의 정문입니다.

어진 정치를 하겠다는 뜻도 있지만 유교에서 인(仁)의 본뜻은 대의(大義)를 상징하는 글자입니다.

국익 같은 이익을 따지는 게 아니라 천하의 바른 뜻을 펼친다는 의미입니다.

용마루에 오얏꽃 장식은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왕실을 능멸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왕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킨 상징물입니다.



인정전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국가대사를 논의하던 정전입니다.

정전 뜰에는 품계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종을 비롯한 8명의 왕이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조선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품계



정전 앞에는 행사 때 해나 비를 가리는 차일을 칠 수 있는 고리가 박혀 있습니다.

요즘 캠핑 때 사용하는 스티링을 거는 고정식 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불이 났을 때 사용하기 위한 소방수를 담아 놓았던 드무.

청동으로 만든 드무는 전각 곳곳에 있습니다.



인정전 앞에 서면 사람의 말소리가 공명이 잘 되는 느낌이 듭니다.

대전 뜰에서 말을 하면 마당에 서 있는 신하들에게도 잘 들렸을 것 같습니다.



인정전 닫집.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왕의 옥좌가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황제를 선포한 다음에 다시 만든 것일까요?

계단이 황제국을 상징하는 9계단입니다.



닫집 좌우에는 1908년에 설치한 전등이 있습니다.

황제를 상징하는 누런색 커튼도 설치가 되어 있구요.


커튼의 문양은 화려합니다.



인정전 오른쪽에 선정전이 있습니다.

역시 정사를 논하던 편전입니다. 이 건물은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입니다.



선정전 안,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 잡으며 

쪽에는 사관(史官)이 앉아 발언 내용을 세세히 기록하였다가 실록을 작성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안내하는 해설사를 따라 후원으로 들어갑니다.


부용지부터는 후원이라고 부릅니다.

궁원(宮苑), 금원(禁苑), 북원(北苑), 후원(後園) 이라고 불렀는데 

궁궐의 정원, 일반 백성은 갈 수 없기에 금원, 궁궐 북쪽에 있다고 북원, 궁궐 뒤쪽에 있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비원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일본침략자들이 부르던 이름입니다.


부용지 북쪽에는 주합루가 있습니다.

정조임금 때 만든 규장각과 함께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던 곳입니다.

이 곳에서 임금은 서얼 차별제도를 무시하고 서자였던 실학자들까지 불러 들여 학문을 논했습니다.

어수문 현판은 남쪽을 향해 세로로 세워 놓았는데 아마도 화마를 막기 위한 풍수였던 모양입니다.


남쪽 맞은 편에는 부용정이 있습니다. 실록에는 왕께서 신하들과 부용지에서 낚시도 즐겼다고 합니다.



숙종 무렵부터 있었다는 불로문(不老門). 늙고 싶지 않은게 인지상정이겠지요?

불로문은 통 돌 하나를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이 문을 통해 안쪽으로 주욱 들어가면 사대부 집을 본 뜬 연경당과 연결됩니다.



존덕정. 1644년 인조 22년에 세운 건물입니다. 특이하게 2층 지붕에 6각형 건물입니다.


건물 안쪽에도 2중으로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건물 안에 정조 임금이 직접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건물 건너편에 폄우사라는 건물이 있는데

할아버지인 정조 임금을 꼭 빼닮은 영특한 효명세자를 위해 순조임금이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효명세자는 폄우사에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는데 1827년 순조임금이 그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효명세자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를 누르고 조선을 중흥시킬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으나

불과 4년도 채우지 못한 1830년 22살의 나이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죽음에 낙심한 순조임금도 병이 악화되어 1834년 4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둡니다.


사후에 효명세자의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여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6촌인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익종의 대통을 이어 고종황제로 등극합니다.


순조 이후 철종까지 왕과 세자의 단명은 왕권의 약화, 세도정치 발호 등의 문제로 조선의 명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연지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생긴 관람정이라는 특이한 정자가 있습니다.


관람정 건너편 위에는 승재정(勝在亭)이 있습니다. 1830년대 이후 건축물로 추정합니다.



청의정. 1636년 인조 때 지은 건물로 임금께서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여기에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추수를 하는 행사를 하던 곳입니다.

궁궐 안에 유일하게 기와 지붕이 아닌 초가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옥류천 소요암

후원에는 부용지, 애련지, 춘당지, 반도지 등의 연못이 있는데 모두 옥류천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이용해 만든 듯 합니다.


1636년(인조 14년) 소요암을 깎아 물이 바위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신하들과 함께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 해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입니다.

수구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망친 사례로 후손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에는 여러 정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직접 옥류천이라는 글자를 써서 석각을 했으며 숙종임금의 오언절구를 새겨 놓았다.


그 당시에 지은 태극전입니다.



후원을 돌아본 뒤 단청이 없는 사대부 집을 본 따 지은 연경당을 마지막으로 돌아봅니다.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된 건물인데 왼쪽은 안채, 오른쪽을 사랑채입니다.

갈 때마다 사진을 찍지 않았네요.


연경당을 보고 아래로 내려오면 궐내각사 근처에 8백년된 향나무가 서 있습니다.

돈화문 북쪽에 있는 규장각 북쪽 담장 근처에 있습니다.


창덕궁 남쪽에 있는 종묘에 제향을 할 때 이 향나무 가지를 이용해 향을 피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연세가 많아서 지팡의를 짚은 채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데 아마도 7~8백년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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