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과 서오릉
2013.11.7 (목)
수능일에
준기가 중학생은 이 날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능일에 "뭘 할거니?"라고 물어 봤더니
역삼동에 있는 선릉과 정릉을 혼자서 가 보겠다고 했다.
사무실에 고삼 아빠가 두 명이나 있는데
중1 아빠는 휴가를 내고 아들을 데리고 왕릉 답사를 하기로 했다.
고삼 자녀들의 건투를 빌면서....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말은 개뿔,
수면 부족으로 매일 아침에 일어나기가 귀찮은데
아니나 다를까? 목요일 아침 일어나기가 싫을 정도로 힘들다.
하룻동안 선정릉만 다녀오긴 아깝고
더 갈만한 곳을 꼽아보니 서오릉이 눈에 들어왔다.
서오릉 근처에 서삼릉도 보이고...행주산성도 눈에 들어왔지만
머리가 아파서 그냥 선정릉 찍고 서오릉 가는 것으로 정했다.
얼핏 서오릉 근처에 맛있는 갈비집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들과 둘이서만 나서니 출발시간은 매우(?) 빨라졌지만,
출발하기 직전 아내가 불러서 올라갔더니.....
PC 모니터에 전원이 꺼진 것을 모르고 모니터 고장 났다고 날 부른 것.
5시까지는 돌아오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 하고 10분 늦게 다시 출발...
바람이 불어 기온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선정릉은 근처에서 5년 넘게 살았는데 사는 동안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선릉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연산군의 계모)를 모신 곳이고
정릉은 중종임금을 모신 곳이다.
역사적 가치는 논외로 하고,
서울에 왕릉이 없었다면 서울은 얼마나 심한 콘크리트 사막이 되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녹지 보전지로서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면적만 23만 제곱미터 정도이니...
이 동네에 살 때 있었던 산과 언덕은 돈에 환장한 사람들 덕분에 거의 모두 사라졌다.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느꼈던 상쾌한 공기를 선정릉에서 맛본다.
왕릉은 동남향인데 왕비릉은 서남향이다. 왜 그럴까?
산책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사방에서 공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불쌍한 서울 시민들...별로 가치도 없는 돈을 헤아리며 삶의 질이 낮은데도 순응하며 산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해도 역삼도 일대에 녹지가 많아서 공기가 참 좋았는데
이제 그 많던 녹지를 다 갉아 먹었다.
공원을 나와 서오릉을 향했다.
거리는 얼마되지 않는데 강변도로까지 나오는데 30분 가까이 걸렸다.
평일 낮인데도.....
한시간 정도 걸려 서오릉에 도착했다.
어렵게 주차장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고 먼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돼지갈비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서오릉에 들어섰다.
서오릉은 55만 제곱미터가 넘는 면적에 묻힌 이는 다음과 같다.
(경릉)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왕 덕종, 성종 임금의 아버지)와 부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창릉)둘째아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예종이 한 일은 딱 두 가지, 남이장군을 처형한 것과 권력자의 집에 들락 거리며 청탁하는 분경을 금지한 것
(명릉) 숙종과 두번째 왕비 인현왕후, 세번째 왕비 인원왕후
(익릉) 숙종의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
(홍릉) 영조임금의 첫번째 왕비 정성왕후
그리고 왕이나 왕비가 아닌 인물로 순창원(명종임금의 아들 순회세자),
수경원(사도세자 장조의 어머니 영빈이씨)이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에 들어서 1969년에 이 자리로 옮겨온 대빈묘(장희빈, 경종의 어머니) 등이 있다.
이 곳도 현대의 방위개념과 다르게 산줄기를 따라 좌향을 잡은 듯 동남쪽, 서남쪽 등 제각각이다.
숙종 임금은 인현왕후와 나란히 묻혀 있는데
원비였던 인경왕후와는 산줄기를 달리하여 멀리 묻혀 있는 반면
세번째 왕비였던 인원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란히 묻혀있는 곳에서 북서쪽 대각선 방향으로 70m쯤 떨어져 있다.
살아 생전에 인현왕후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줬던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파간의 세력싸움의 결과였을까?
주변에 물이 잘 빠져서인지 다녀본 왕릉 가운데 습기도 적은 편이고,
면적이 넓어서 돌아보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행주산성이나 서삼릉도 가 보고 싶었지만 돌아가야할 시간 때문에 다음을 기약했다.
선정릉에 있는 오백년된 은행나무.
나무가 너무 커서 18mm 렌즈에 들어오지 않아서 나무 안에 들어가 찍은 사진
선정릉 재실. 참봉 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가 능을 지키는 능참봉이라고 했던가?
조선왕릉이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왕릉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막혔다.
능상 아래에서는 왕릉이 보이지 않는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강남의 빌딩.
왕릉은 빌딩에 땅을 빼앗기고 겨우 숨을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왕릉이 없었다면 서울은 정말 답답한 콘크리트 숲만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정현왕후릉을 알리는 비각
뒷면에는 왕비의 이력이 새겨져 있다.
서울의 경계선을 넘자마자 고양 서오릉이 있다.
서오릉 입구에 조성왕릉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세워 놓았다.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익릉
서오릉은 50만 제곱미터가 넘는 면적이라 산책로를 따라 돌아보는 것도 2시간 정도 걸렸다.
영조의 왕비였던 정성왕후릉(홍릉). 66세까지 살았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영조가 묻히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영조는 지금의 동구릉 원릉에 묻혔다.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능상 위에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는 명릉
왼쪽은 숙종의 세번째 왕비인 인원왕후릉, 오른쪽 정자각 뒤에 있는 것은 숙종과 두번째 왕비 인현왕후릉
숙종과 인현왕후릉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에는 이렇게 귀여운 도깨비 모양을 새겨 놓았다.
홀로 떨어져 있는 인원왕후릉
능을 둘러싼 곡장을 바라보며 양석과 호석이 서 있다. 무엄하게도(?) 왕비에게 엉덩이를 보이고 있다니...
왕비의 무덤이라 망주석의 문양과 장식이 섬세하다. 인원왕후릉 역시 고석에 귀여운 도깨비 상이 있다.
인원왕후릉에서 본 숙종과 인현왕후릉.
영혼이 있다면 인원왕후는 매우 기분이 나쁠 듯.....
정자각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손행자 상
손행자는 이승을 어지럽히던 어처구니 5명 가운데 하나이다.
옥황상제에게 잡혀갔다가 "손"을 잡아오면 용서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어처구니들이 손을 잡으러 갔다고 한다.
손을 묶으려면 엄나무 밧줄이 필요한데 손행자는 엄나무 밧줄 만드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밧줄을 만들던 중 재료가 부족하자 손행자는 비슷하게 생긴 두릅나무를 섞어 만들었는데
결국 하늘로 잡아 보낸 손이 두릅나무 밧줄을 끊고 탈출을 하자
그 벌로 이렇게 지붕에서 손을 막는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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