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9(토)
유명산 휴양림 오토캠핑장을 예약해 놓았다가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토요일 11시쯤 취소를 하고 말았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취소한 데크는 10초도 안되서 누군가 줏어가버리고...
오랫동안 여행을 못갔더니 준기가 어디라도 함 가자고 조른다.
해서, 딸래미 숙제에 도움을 줄 겸 충남 홍성을 다녀오기로 했다.
홍성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선열들을 배출한 곳.
오늘 방문할 곳은 백야 김좌진, 만해 한용운 두 분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먼저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찾아갔다.
너무나도 유명한 청산리 대첩을 지휘한 북로군정서 사령관.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북로군정서), 홍범도(대한독립군) 두 지휘관이 함께 청산리 일대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차례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를 이르는 말이다. <저기에 용감한 조선군인이 있었소!>라는 책이 있다. 대한매일신문이 2001년에 광복전쟁의 무대였던 4개 나라를 답사해 펴낸 책이 있는데 얇지만 읽어볼만한 책이다.
홍성에 있는 김좌진장군 기념관 현관에 있는 장군의 흉상과 청산리 전투 직전에 연설하고 있는 모습을 새긴 동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 김좌진.
그는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호명학교를 세웠다.
안동김씨 종택을 학교로 내 놓아 호명학교를 만들고 지금의 생가터로 이사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 분이 직접 만들어서 가르쳤던 산술책이 전시되어 있는데, 정말 글씨가 인쇄한 듯 반듯반듯하다.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에 대항해 일어났던 의병들과 광복전쟁에 참여했던 우리 선열들은 이런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체코제 소총도 있다.
아흔칸이 넘는 큰 종택을 호명학교를 여는데 내 놓고 나서
지금 생가터로 지정된 여기에 옮겨와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대문 오른쪽에 김좌진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작은 기와집이 있고 장군의 영정이 있다.
백야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 직전에 무관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장군의 호를 딴 사당. 백야사. 생가터 왼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의 기념관과 생가터가 있다.
김좌진 장군과 달리 작은 초가집이다.
기념관 안에 만해 선생의 시 <님의 침묵>과 초상화가 있다.
만해 선생이 남긴 붓글씨.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죽는 순간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분.
일제의 지배가 싫어 자녀들의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
일제가 전쟁말기에 실시했던 식량배급도 식민지 교육도 거부하려고 했던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심우장에서 선생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고 망우리에서 화장되어 공동묘지에 묻혔다.
기념관을 나와 생가터를 지나면 왼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 아래에 있는 생가터
다시 길을 나와서 김좌진 장군이 묻힌 곳으로 왔다.
1921년 일제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집결한 광복무장단체들은 상하이공산당파와 고려공산당파 사이에 통수권 다툼을 벌였고, 볼세비키 러시아와 일본제국 사이의 전투 와중에 무장해제를 당하거나 수백명이 죽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김좌진은 자유시 참변 직전에 자유시를 탈출해 만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집요한 민족 이간책으로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결국 1930년 1월 24일 일본 고등계 형사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이라는 청년은 그를 일제의 앞잡이라고 하여 암살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였다고 한다.
만주에서 사회장을 치뤘으나, 1934년 국내에 있던 부인(오숙근)께서 만주로 가서 그의 시신을 몰래 이 땅에 들여와 매장을 했다고 한다.
뒤에는 선친이 묻혀 있고, 현재 그의 무덤은 부인(오숙근)과 합장한 무덤이다.
역시 남자는 아내를 잘 만나야 한다. 대갓집 전 재산을 개인의 행복을 위해 쓰지 않고 평생 고생만 시켰지만 부인 역시 훌륭하신 분이다.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무덤은 왼쪽에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문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지금은 갈산중학교와 갈산고등학교가 있는 이 곳이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집이 있던 곳이다.
안동김씨 종택으로 90칸이 넘는 큰 집이었는데, 17살 때 집안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마저 인재양성을 위해 호명학교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 학교라기 보다 기업으로 변모한 사립학교 재단들이 크게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갈산 중학교 앞에 이 학교를 세운 유래를 설명하는 비문이 서 있다.
이 글을 읽고 자란 학생들은 선열의 크신 뜻에 큰 감명을 받겠다.
교실 앞은 이렇게 아름답다.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 책 읽기 좋고 친구들과 이야기 하기도 좋은 돌받침이 있다.
수 많은 세월동안 여기를 거쳐간 많은 학생들을 지켜 보았을 낙랑장송이 뿜어내는 포스
존경스러운 선열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 땅에서 세상에 빛을 더할 훌륭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나왔으면 좋겠다.
힘찬 달리기로 오늘 여행을 마무리 한다.
청산리 전투를 앞두고 만들었다는 기전사가
(祈戰死歌 : 전사를 기원하는 노래)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민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무리를
삼천리 강산에서 열혈히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산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에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전해 오는 피비린 냄새
분하고 원통하다 우리 동포들
물어 보자 동포들아 내 죄뿐이냐
네 죄도 있으려니 같이 나가자
정의의 손과 칼을 손에다 들고
동족을 구하려면 목숨 바쳐라
겁 많고 창자 썩은 어리석은 놈
자유를 찾겠다는 표적만으로
죽기는 싫어 해도 행복만 위해
우리가 죽거든 뒤나 이어라
(후렴)한배님 저희들은 이후에라도
천만대 자손들의 행복을 위해
맹세코 이 한목숨 바치겠으니
성결한 전사를 하게 하소서
* 이 노래는 북로군정서 부대의 군가로 사용했다고 한다.
광복전쟁에 참전했던 선열들 가운데는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이 노래의 후렴은 한배검(단군)에게 맹세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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