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자연휴양림과 제주남부 2007.5.23~5.26(3박4일)
5.24일 비바람과 안개를 뚫고 서귀포를 유람하다
눈을 뜨니 바람소리가 엄청나다. 시계를 보니 5시10분. 아버지는 이미 산책을 나가셨는지 자리가 비어있다. 옷을 입고 밖에 나가보니 10미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안개가 끼었고, 울창한 숲 위로 바람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까마귀 떼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 뒤로 간다. 마치 태풍을 보는 듯하다. 산 아래에서 보면 구름이 가득 낀 것으로 보이겠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밥을 안쳐놓고 함께 등산화를 챙겨 신고 카메라를 들고 숲탐방로를 산책하러 나섰다. 연우엄마와 아이들은 아직 곤히 자고 있다. 2.2km 산책로와 3.8km 산책로가 있었는데 2.2km 산책로를 택했다. 오른쪽으로 포장된 길을 돌아 올라가니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숲 속은 조용하다. 위쪽에는 나무가 흔들리고 안개가 날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아래에는 바람 한 점 없다. 울창한 원시림의 위력인가. 숲 속에는 육지에서 보기 어려운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주서귀포자연휴양림 휴양관(녹나무동)
울창한 원시림이 가득한 숲 탐방로. 안개가 끼어서 마치 환타지 영화 장면 같습니다
강건한 근육미가 넘치는 서어나무, 극상림에서 나타나는 나무입니다.
숲 탐방로 나무 데크를 따라 내려오니 연우엄마와 아이들이 깨서 아침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죽림횟집에서 싸 온 생선구이와 지리탕 그리고 김치를 반찬으로 아침을 맛있게 먹고 산책에 나섰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은 심하고 안개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끼고 숲속은 원시림이 빽빽이 자리잡아 컴컴합니다만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즐겁습니다. 10시에 숲탐방로로 들어갔는데 출발하자마자 열심히 나무를 기어 올라가는 달팽이를 발견했습니다. 준기는 돋보기를 들이대고 관찰하더니 수첩에 열심히 적습니다.
나름 쏜살같이(?) 나무를 기어오르는 달팽이
안개에 싸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인 어린이 놀이터
숲은 점점 어두워지고 놀이터에 도착한 연우와 준기는 비가 오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놀이터를 독차지하고 잘 놉니다.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포장된 임도를 따라 휴양관으로 내려갔습니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몇몇 가족은 아기들까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뛰어 내려 가고 남자들이 차를 몰고 맞이하러 올라옵니다. 과일과 빵, 음료수를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비가 심하게 오니 야외 구경은 틀렸고 오늘은 실내관람 위주로 가야겠네요. 알뜨르 비행장을 가보려고 했는데 포기했습니다(알뜨르 비행장은 일제말 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알뜨르 비행장 노역징용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아버지의 인생이 바뀐 계기가 되기도 한 인연이 있습니다) 서쪽에서 서귀포 쪽으로 들어오는 코스로 정하고 초콜릿박물관에 먼저 들렀습니다만 역시 여러사람들 의견처럼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아이들이 초콜릿에 혹해서 부모들 괴롭히기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초콜릿박물관 관람은 오늘 ‘준기 소원’이었습니다. 준기는 소원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초콜렛박물관
오설록에 가보려고 했는데 마눌님이 비도 많이 오는데 야외관광은 좀... 반응이 영 별로입니다. 연우가 테디베어박물관에 가자고 합니다. 가는 도중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배지가 있어서 들리기로 했습니다. 조선후기의 석학인 김정희는 여기에서 제주도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도에서 아주 깔끔하게 관리를 잘 해 놓았습니다. 김정희 선생의 가계도를 보니 사도세자를 죽이고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세도 정치의 길을 닦은 정순왕후와 가까운 친척이더군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도에 유배와서 머무르던 곳(적거지)
유배지 관람을 마치고 테디베어 박물관으로 길을 잡아 출발했는데 엄청난 폭우 때문인지 관람객이 넘쳐나고 박물관 주변은 자동차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간신히 차를 대고 들어가니 박물관 안은 사람이 넘쳐나서 습기와 함께 후텁지근합니다. 비싼 입장료에다 연우가 테디베어 인형 사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아주 곤욕을 치뤘습니다. 하지만 사주지 않았습니다. 늘 안고 자는 곰 인형이 있거든요. 여기도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가족에게 비추입니다.
간절한 표정으로 곰인형을 보고 있는 연우(테디베어박물관)
울고불고 난리치는 연우를 데리고 차에 탔습니다. 준비한 요깃거리로 시장기를 대충 때우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소리섬박물관에 갔습니다. 강릉 참소리박물관에 비해 잘 만들어 놓은 박물관은 관람료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특히 3층에 있는 체험마당은 온갖 신기한 악기들을 직접 만져보고 연주해보고 할 수 있습니다. 곰인형에 눈물범벅이 되어 있던 연우도 북치고 장구치고 드럼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나게 놉니다. 손으로 연주하는 악기, 발로 연주하는 악기, 국악기, 세계각국의 다양한 악기들을 직접 두들겨 보고 불어보고 어른들도 참 재미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장소로 아주 좋은 곳입니다. 사흘뒤에 여기에 간 동생네 가족들은 2시간 동안 아주 신나게 두들기고 불고 잘 놀았답니다.
드럼 치는 준기(소리섬박물관)
북 치는 준기(소리섬박물관)
발로 연주하는 피아노(소리섬박물관)
기분전환을 하고 닥종이인형박물관 구경을 나섰습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뿌렸고 바람도 거세졌습니다. 이런 날은 9인승 차량이면 해변가에 주차해 놓고 몰아치는 비바람과 파도를 구경하는 것도 멋있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준기가 잠시도 가만있질 않으니 운전하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닥종이인형박물관은 서귀포월드컵경기장안에 있습니다. 주차장에는 차가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이 비 맞는 바깥에 차를 대고 걸어 들어갔습니다. CGV 영화관을 가로질러 끝에 가서야 박물관 입구가 나옵니다.
기분이 좋아진 연우가 엄마 머리에 뿔을 만듭니다(닥종이인형박물관)
전시실에는 인형도 많고 인형마다 표정도 다양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인형이 참 귀엽고 편안합니다. 인형전시실 다음에는 60~70년대 물품을 전시해 놓은 곳입니다. 대한뉘우스 어나운서도 해보고 뮤직박스에서 DJ도 해보고 기상캐스터도 해 봅니다. 옛날 교실도 있어서 부천에 있는 교육박물관과 아주 흡사합니다.
뮤직박스 속에 준기 DJ(닥종이인형박물관)
제주도 날씨는 어디 갔어?(닥종이인형박물관)
5시 반쯤 인형박물관을 나오니 하늘은 컴컴하고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대에 해안에 있는 주상절리를 보러 가기도 그렇고 다른 박물관 가기도 그렇고 해서 대충 때운 점심도 벌충할 겸 쉬는팡가든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다른 관광객들도 궂은 날씨에 시장기가 일찍 돌았는지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때부터 엄청난 손님이 밀어닥칩니다. 줄선 사람이 점점 늘어나네요. 200g에 1만원씩 하는 흑돼지 소금구이 3인분 시켜서 맛있게 먹고 밥에다가 동치미 국수까지 먹었습니다. 이집 동치미 김치와 동치미 국수가 참 맛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밀려드는 손님은 점점 더 많아지네요. 31,000원으로 다섯식구가 잘 먹고 굵은 소금을 조금 얻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내일 간식거리에 필요해서요. 점심을 차안에서 해결해야 더 많은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돌아오는 길에 서귀포 이마트에 들러 과일, 달걀, 라면, 빵을 푸짐하게 샀습니다.
“아빠, 맛있는라면은 왜 샀어?”(라면 이름이 ‘맛있는라면’입니다)
“응, 있다가 저녁 때 출출하면 아빠가 라면 끓여줄게”
탐라대학교 천문관에서 별관측하는 것은 아예 틀린 것 같다. 탐라대학교 앞을 지나오면서 준기가 별 관측 투정을 하지만 하늘이 받쳐주지 않으니 어쩌랴? 휴양림구조는 문제가 있네요. 제주도는 비바람이 심하고 잦은 편일텐데 휴양관 앞에 차를 대서 사람이 내리고 짐을 내리고 하고나서 주차장으로 돌아나오도록 구조를 만들었으면 좋으련만 휴양관 앞에 가족들을 내려주면 좁은 길을 뒤를 보며 차를 끌고 내려와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비바람이 잦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가 아닌지....우산도 소용없고 1~3천원 하는 우비가 있으면 딱 좋은 그런 날씨입니다.
9시쯤 되자 준기가 아빠를 부릅니다.
“아빠! 맛있는라면 언제 먹어. 나 지금 배고픈데”
“저녁먹고 과일먹은 지 얼마 됐다고 배고프다고 그러냐?”
“아빠, 나 배가 무지 고파”
엄청 많이 먹어서 배가 고프기는 커녕 배가 꺼져야 잠을 잘 것 같은데 준기는 라면먹고 싶어서 배고프다고 투정을 합니다. 연우도 거듭니다. 아이들 투정에 맛있는라면 1개는 꺼내서 끓였습니다. 쉬는팡에서 얻어온 소금을 살짝치고 달걀 9개를 내일 간식용으로 삶았습니다. 라면을 두 녀석에게 나눠주고 제가 조금 먹었지요. 그런데 다 먹고난 연우가 라면이 너무 적다고 더 끓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준기는 자러가고...달래고 달래서 빵하나 더 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내일 일정을 고민했습니다. 아버지는 은근히 한라산을 꼭 올라가서 백록담을 보고 싶어 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성판악코스로 올라가기에 제가 자신이 없습니다. 왕복 8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도중에 아이들이 업어달라라고 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데...날씨도 갤 것 같지 않고...
11시쯤 잠을 청했습니다. 큰 나무숲이 둘러싸고 있는 휴양관은 바람소리가 겨울 같습니다. 역시 바람많은 제주도입니다.
* 이 글은 다유네(http://www.dayune.com/)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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