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숲여행

남해편백유람기(1)-노량 앞바다에 서다

by 연우아빠. 2006. 12. 27.

남해편백유람기(1)-노량 앞바다에 서다

2006.12.23~12.25(2박3일)

지난 12월17일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지 408년째 되는 날입니다.(
1598년 11월19일(양력 12월 17일) 노량해전)
우연히도 전사하신 날에 즈음하여 12월23일부터 25일까지 남해편백휴양림을 여행하였는데 역사이야기를 먼저 쓰는 후기를 올려 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대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광수는 그 외에도 <단종애사> <대수양> 등 역사소설을 몇편 썼는데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한 뒤에 쓴 글이라 조선민족의 열등성, 당파성, 조정의 무능함, 미개성 등에 촛점을 맞춘 글들입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일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알려져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순신과 선조의 이야기가 보편화 되었습니다. 최근에 KBS에서 방송한 <불멸의 이순신>도 이광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조선정부의 무능함과 이순신 혼자만의 영웅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그리고 정조임금의 명으로 사후 2백주년에 즈음하여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폴투갈 신부 프로이스가 기록한 <일본사(Historia de Japam)>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과 다른 당사자와 목격자의 역사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는 휴양림 후기에 너무 무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도 들지만 수업시간도 아니니 재미삼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좀 길어 질 수도 있어 몇 번에 나누어 쓰겠습니다. 먼저 이순신 장군의 전사후에 조정과 지역주민들이 보인 반응이 조선왕조실록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 11월27일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린(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린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린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丙申年 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노량에서 관음포 쪽으로 바라본 노량 앞바다의 노을.
400여 년 전 양쪽에서 공격해 오는 5백척의 적선을 격파한 용감한 조선 수군의 열정인 듯 붉게 빛납니다.


선조실록 31년 11월24일
진 도독(陳都督)-진린(陳璘)의 게첩(揭帖)은 다음과 같다.
“9일과 10일 진시(辰時)부터 사시(巳時)까지 부산·사천(泗川) 등지의 적선(賊船)과 노량도(露梁島)에서 대대적으로 싸울 때 모든 장수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것은 귀방에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니 굳이 번거롭게 덧붙여 말할 것이 없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운명하였습니다. 본관의 충성은 전하께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통제사의 직책은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이순신(李純信)으로 승보(陞補)하는 것이 귀방의 전형(銓衡)에 부합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유념하여 조속히 결단하여 자나깨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하소서. 간절히 빕니다.”

선조실록 31년 11월30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순신에게 증직(贈職)하고 치부(致賻)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우라. 또 그의 아들이 몇 명인가? 상(喪)이 끝난 뒤에 모두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옳다. 해상(海上)에도 사우(祠宇)를 세워야 하니 이 한 조항은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그 밖에 전사(戰死)한 장수들에게도 모두 휼전(恤典)을 거행하고 혹 증직할 만한 자에게는 증직하되 차례대로 거행하라.”


선조 31년 12월 1일 / 비변사가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지난날 한산도에서 승첩을 거두어 큰 공을 세웠고, 주사가 패몰된 뒤에는 잔파된 나머지를 수습하여 기계와 군량을 전날과 다름없이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의 괴수를 불에 태워 죽이고 전함 2백여 척을 포획하기까지 하여 의기를 동남지역에 크게 떨치자 적추(소서행장)는 혼비백산하여 밤에 도망쳤으니, 국가를 회복시킨 공에 있어서 이 사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숨을 거두면서도 조용히 처치하였으니 옛날 명장의 풍도를 지녔다고 이를 만하였습니다. 이제 성교를 받들어 관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자식들도 모두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충의를 격려함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이 되었습니다. 해변에 사당을 세우는 일은 좌수영 본진에 설립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전사한 장사들에게 휼전(恤典)을 내리는 일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렬사 앞에서

선조 31년 12월 7일 /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수정실록 31년 11월 1일 /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서 적의 구원병을 패퇴시키고 전사하다
유정(劉綎)이 순천(順天)의 적영(賊營)을 다시 공격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행장(行將)이 순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하고, 순신은 진린(陳璘)과 해구(海口)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泗川)의 적 심안돈오(沈安頓吾)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賊船) 2백여 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南海) 경계까지 추격해 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左右)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린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兵營)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 현재 남해군에 있는 忠烈祠)라 불렀다.


 
이순신 장군의 가묘를 모신 충렬사(옛 충민사)에서 바라다 본 노량해협

* 이 글은 다유네(
http://www.dayune.com/)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