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숲여행

남해편백휴양림(2)-이순신과 선조임금

by 연우아빠. 2006. 12. 27.
1. 이순신은 과연 선조임금과 대립했는가?

이순신의 이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576년 2월 무과 합격, 12월 함경도 권관(종9품)
1579년 훈련원봉사(종8품)
1579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부관
1580년 발포만호(종4품) 부임
1582년 1월, 정기감사에서 軍器보수 미비로 파직
1582년 5월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재임용
1583년 야인토벌의 공으로 훈련원 참군(정7품), 아버지 사망으로 사직
1586년 1월 사복시 주부(종6품), 조산보 만호(종4품)
1587년 녹둔도 둔전관 겸임. 이일의 무고로 파직. 무고함을 입증하는 항의 공문 제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음
1589년 2월 전라감사 이광 휘하의 조방장으로 재임용
1589년 12월 정읍현감(태인현감 겸임) 종6품
1591년 1월 진도군수로 승진, 진도군수 부임 전 가리포(완도)첨사로 승진(종4품), 다시 열흘 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승진(정3품)
          * 불과 1개월 사이에 7단계 승진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23일) 임진왜란 발발
  5월 7일 옥포해전(26척 격파), 합포(4척 격파)
  5월 8일 적진포해전(11척 격파) 승리. 가선대부(종2품下)로 승진(1계급 승진)
  5월 29일 사천해전(13척 격파)
  6월 2일 당포해전(21척 격파),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4계급 승진)
  6월 5일 당항포해전(44척 격파)
  6월 7일 율포해전(3척 격파, 4척 노획)
  7월 8일 한산도해전, 정헌대부(정2품上)로 승진(1계급 승진)
  7월12일 안골포 해전
  9월 1일 부산포 해전

1593년 8월 경상전라충청 3도수군통제사 임명

1594년
  3월 4일~5일 당항포해전
  9월29일 장문포해전
  10월 1일 영등포해전

1597년 정유재란
  1월 27일 조정의 출동명령 거부로 3도 수군통제사 파직
  2월 24일 한양으로 압송, 3월 4일 투옥
  4월 1일 투옥 27일 만에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
  4월 11일 어머니 사망
  7월 15일 원균 칠천량(거제도)에서 대패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9월16일 명량해전

1598년 7월 명나라 수군과 합류
  11월 19일 노량에서 대승, 전사, 우의정 제수

1599년 2월11일 충청도 아산 금성산 아래 안장
1604년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 좌의정 추증
1614년 아산 어라산 아래로 이장
1643년 충무공 시호 하사
1706년 아산 현충사 건립
1793년 영의정 추증
1795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 완간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89년 1월부터 종6품에서 불과 1년 만에 4등급이 오른 종4품에 임명되고 다시 열흘만에 3등급이 뛰어오른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됩니다.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파격에 파격을 거듭한 승진에 대한 조정의 반대가 극심했음에도 선조는 류성룡의 천거를 받아들여 초고속으로 그를 승진시킵니다.

또한 해전에서 승전하자 두달만에 다섯계급(가선대부 - 자헌대부 - 정헌대부)이 뛰는 승차를 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이런 초고속 승차는 유례가 없습니다.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선조는 무시해버렸습니다. 이순신을 그만큼 믿음직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이순신 장군의 이력을 보면 선조임금이 이순신을 중용하는데 얼마나 큰 모험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대통령이 저런 이력을 가진 사람을 친구인 류성룡의 추천만 믿고 7단계나 승차시켜 해군사령관으로 발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렇듯 이순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중용했지만 이순신은 원리원칙주의자였던지 임금의 위신 세우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융통성 있는 사람이었다면 선조의 위신을 위해 출항을 했다가 견내량 앞에서 적의 군세가 너무 강해 중과부적이라는 핑계를 대고 회군했었더라면 선조가 그토록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왜군의 방어진이 견고한 것을 알고 출진을 계속 미루었다가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습니다. 결국 고지식한 원균은 견내량을 넘어 왜군 진영으로 들어섰다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 전체를 잃는 패전을 맞았습니다.

2. 조선은 지리멸렬 했는가?

조선의 국가조직은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고 임진왜란 기간 중에도 정상적으로 가동됩니다. 물론 겁을 먹고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도망을 친 관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승방략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공문의 전달과 처리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 남해안을 지키던 4명의 장수는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게 전선을 준비하고 병사를 조련하고 둔전을 경영하면서 전쟁을 준비했고, 4월13일 왜군이 대마도에서 전선을 띄우자 절영도에서 대마도에서 넘어오는 왜선을 관측하여 봉화를 올려 조정에 침략사실을 알렸습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4백척이 넘는 적선에 겁을 집어먹고 싸우지도 못하고 동래로 도주하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그대로 북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이순신에게는 적이 부산포 건너편에 상륙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4월15일에 이순신에게 보낸 원균과 박홍의 공문이 도착합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정리한 제승방략이 매우 높게 평가하였지만 조선의 관료와 장수들이 실전 경험이 없어 국가적 위기를 제대로 막지 못했습니다.

원균은 박홍의 패퇴와 적의 기세에 눌려 전선 수십척을 자침시키고, 병장기와 식량을 바다에 던진 다음 거제도로 후퇴합니다. 겁을 집어먹은 행동이 분명하지만 후퇴 절차는 아군의 군수물자를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퇴각하게 한 제승방략 지시대로 합니다.

훗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함대가 전멸할 때도 경상우수사 배설은 13척의 배를 빼돌려 한산도로 철군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배설이 적전도주를 한 것처럼 비난 받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배설은 한산도 본영으로 철군하여 백성들을 전라도 쪽으로 피난시키고, 배에 실을 수 있는 병장기와 각종문서 군량 등은 싣고 나머지는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바다에 침수시킨 다음 전라도 쪽으로 도주합니다. 역시 제승방략에 따른 절차를 수행한 것입니다.

3. 이순신은 어떻게 연전연승할 수 있었는가?

잘 아시다시피 근대식 함포전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고려말 최무선입니다. 육전에서만 사용하던 대포를 판옥선에 장착해 진포에서 왜선 5백척을 완파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뇌물을 밝히는 부패관료였지만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받아 조선 초기 수군전함과 함포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킵니다.

비록 2백년 평화시대 동안 조선의 전투력은 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왜란 발발 1년전부터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들어간 조선수군은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 충청 수군절도사들이 중심이 되어 40~70척의 전선을 각기 보유합니다. 물론 함포를 장착한 판옥선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머물렀던 폴투갈 신부 프라이스의 기록을 보면 조선수군의 판옥선과 함포는 일본배들을 압도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프라이스는 일본이 원양항해 능력이 없어 명나라를 직격하지 못하고 조선을 거쳐가는 전략을 채택한 것을 두고 일본은 결코 조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경상좌도 수군(좌수사 박홍)은 개전 첫날 실전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왜선 4백척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고 바로 인근에 있던 경상우도 수군(우수사 원균)은 전투의욕을 상실한 채 각지로 왜의 침략사실을 문서통보한 뒤 후퇴해 버렸습니다. 왜의 선단이 계속 수백척씩 대마도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전라좌도 수군(좌수사 이순신)은 적의 주력이 모두 상륙해 한양에 도달했던 시점부터 서서히 움직입니다. 이순신은 우선 적의 소규모 함대를 상대로 3~4배 많은 전선을 동원해 실전연습을 합니다. 서너차례 소규모 적을 상대로 실전의 승리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병사들에게 아군의 압도적 화력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극대화 시켰습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도록 주변 여건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승리를 거두는 치밀한 전략을 씁니다.

임진왜란 1년 전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위경련, 위통, 토사곽란 같은 신경성 질환증세를 비롯해 자주 아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이 매우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쳇말로 아주 쪼잔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입니다. 아마도 이런 상사를 만났다면 거의 대부분 꽁무니를 뺄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3번째 전투에서 왜군의 작전과 수군편제를 상세히 알 수 있는 문서를 노획하는데 이를 통해 보다 확실하게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점도 승리의 원동력으로 생각합니다.

조선의 판옥선은 삼나무로 만든 일본 전선에 비해 크기가 3배 이상 컸고 탄탄하여 당파전술(적의 배를 아군의 배로 들이받아 박살내는 전술)로 왜선을 격침시키는 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화포를 12문~24문을 장착할 수 있었는데, 왜 수군이 고작 화포 2문만 장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압도적인 화력우위를 보입니다.

4. 이순신은 왜 원균을 싫어했는가?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은 주색잡기와 허세가 심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거나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원균을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난중일기 곳곳에 원균의 경우없는 행동을 비난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원균의 아들, 부하장수들에 대해서도 원균을 닮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마땅찮게 생각합니다.

왜란 당시 조정에서 전과를 인정하는 방법은 적의 수급을 얼마나 많이 베었는가 였는데...이순신은 왜군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공을 인정받는 것 보다는 적의 배를 많이 파괴하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반면 원균은 전통적인 논공행상 방식인 수급확보에 혈안이 된 행동을 많이 합니다. 이순신은 이점을 아주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