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중앙 교당을 찾아서(2015. 5.24.)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자에 맞선 종교는 쇠퇴하거나 사라졌고
권력자와 협력했던 종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권세를 누렸다.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는 거의 모든 신도가 열렬한 광복전쟁 수행자로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은 서학에 맞서 이 나라 사람들을 살리려는 사회변혁운동을 거세게 일으켰다.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후천 개벽을 실현하려하다 좌절을 맛보았으며,
그 탓에 동비라 불리며 집권세력인 사대부의 가혹한 탄압에 직면했다.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창시자와 2대 교주는 모두 참수되었다.
더구나 최시형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악질적인 부패관리 조병갑이 고등법관으로 앉아있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그 생을 마감했다. 그 분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후천 개벽 세상을 보았을까?
3대 교령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한 탓에 천도교는 교세를 키우기 힘든 상황이었다.
종로3가역에 내려 안국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자 현대식 건물인 천도교 수운회관이 큰 길 옆에 보였다.
길 건너 편에는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이 있고, 길 아래쪽에는 낙원상가가 있다.
대각선 건너편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천도교 회관 앞에는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표지석이 있다.
어린이날을 처음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이 곳에서 사람대접 제대로 못 받던 아이들을 소중하게 키우자는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고,
천도교는 어린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발상지 표지석 뒤에는 방정환 선생의 말을 새겨 높은 비석이 있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 1930년 7월 어린이 인권 운동가 방정환 -
비석 너머에 빨간 건물이 중앙교당이다.
중앙 교당 입구에는 천도교에서 편찬한 잡지 <개벽>을 발간하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오래 전 국사교과서에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던 천도교 중앙교당이 장중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마침 예배시간이라 예배당 안을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어린이와 어른이 서로 존중해야 할 행동에 대한 표어가 걸려있다.
정면에서 본 모습.
19세기말~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빨간벽돌과 아치형 출입문.
교당 정면에서 작은 쪽문으로 나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룡(1898~1943) 선생이 설계한 민병옥 한옥이 있다.
이 집은 민영휘의 손자 민병옥과 민병완의 집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민영휘는 민황후의 먼 친척으로 축재에 능했던 사람이었다.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을 세웠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받았던 은사금도 받았으며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
1919년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선언문은 여기에서 바로 길 아래에 있는 파고다공원으로 배포되었다고 한다.
매국으로 자손대대에 영화를 누리고
이민족의 침략과 권세에 맞서 싸웠던 사람과 종교는 비참한 현실에서 좀체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
그게 우리 가까이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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