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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세 번째 한민족 통일에 대하여

by 연우아빠. 2000. 7. 2.
다가오는 세 번째 한민족 통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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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제 게시판에 한 학생이 삼국통일과 김춘추, 연개소문에 관련된 질문을 올렸고, 
한국상고사학회 토론과 질문방에서 왈가왈부가 있었습니다.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마지막 잔영인 남북분단을 해결하기 위한 남북한의 노력이 가시적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는 이 때 
우리 역사에서 민족통일 사례를 되집어보면서 우리가 어떤 통일을 맞이해야 할 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글을 올립니다.


▶ 들어가는 말

2000. 6. 13일 오전 10시 47분 평양 순안 공항에서 남쪽(한)과 북쪽(조선)의 정상이 제국주의의 유산에 의해 갈라진지 55년만에 손을 잡았다. 
남쪽 사람 거의 대부분은 이 감격적인 순간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냉전사고와 파시스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극소수는 남북 정상에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고 
50년전 전쟁의 책임론과 국군포로문제 등을 들먹이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번에 우리 민족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룬다면 
이것은 역사상 3번째 통일이 될 것이며 전쟁이 아닌 대화로 이룬 첫 번째 통일이 될 것이다.

과연 우리 민족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역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고,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역사를 통해 지나간 2번의 통일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통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부자가 주도한 제 1 통일

신라가 이룩한 제 1 통일에 대해 "통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많다. 
삼국영토의 2/3을 상실했고, 수십만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심지어 돌궐과 거란으로 망명해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는 사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벼슬아치들을 2등급~6등급 정도 하향 대우하는 차별정책을 쓰는 등 
민족의 통합에 부정적인 정책을 시행한 점 등은 오늘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규철 교수(경성대 사학과, 발해사 전공)가 그의 저서 "발해의 대외 관계사 연구"에서 언급했듯이 
신라는 어쨌든 668년부터 698년까지 30년 동안 이 땅, 이 겨레의 유일한 국가였기에 제 1 통일이라 부르기로 한다.

서기 660년 백제는 신라·당 연합군에 의자왕과 태자 융이 무릎을 꿇고, 
이어 668년 고구려가 멸망당함으로써 번성하던 제국들은 지도에서 사라져 역사가 되었다.

삼국은 서로 동족이란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부여-고구려-백제는 분명 각종 역사기록에 근원이 같은 부여계라 되어 있었고 
동명묘를 배향하는 풍습을 가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동족이란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부여는 중국의 진, 한 대부터 있었고 고구려 역시 진, 한 대부터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던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에서 파생된 나라였을 것이다.

신라 또한 조선유민들이었으므로 같은 동족의식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백제와는 수백년간 군사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천번째 통일의 불행은 직접적 계기가 원대한 목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심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신라 선덕(여)왕 본기 11년조, 김유신 열전, 죽죽 열전을 보면 김춘추에게는 품석이란 사위가 있었다. 
그는 신라의 주요한 성인 대야성을 지키도록 임명되었는데 그는 매우 부도덕한 공직자였던 것 같다.

아내 고타소랑(김춘추의 딸)과 함께 부임한 그는 부하였던 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탐하여 이를 빼앗았는데 검일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던 중 백제 의자왕이 윤충을 시켜 대야성을 공격하였는데 검일은 백제와 내통하여 곡식 창고에 불을 질렀다. 
품석은 죽죽이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자기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윤충의 말을 듣고 성을 열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내보낸 군사들을 살해하자 자기 처자들을 찔러 죽이고 자신은 자살했다.

대야성을 빼앗김으로서 신라는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품석의 행적을 보면 그는 결코 뛰어난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라기 보다 선덕여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김춘추의 사위라는 이유 때문에 임명된 것 같다.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여왕은 품석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죽죽과 용석의 전사에 대해서는 후한 상을 내렸던 것만 보아도 왕의 심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춘추는 분노로 온종일 기둥에 기대어서서 눈을 부릅뜬 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백제를 쓰러뜨리지 않고서 어찌 대장부라 하겠느냐?"라고 하며 
여왕에게 나아가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군을 끌어 오겠노라고 말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도중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김춘추는 고구려 군을 빌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군대 출병 조건으로 수나라와 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빼앗아간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마침내 당 고종을 설득하여 출병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김춘추는 진덕여왕을 시켜 태평송을 지어 바치고, 
당의 복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마침내 문무왕 때는 여자의 의복까지 당나라 식으로 고치게 해, 
마침내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옷과 우리 옷이 구별이 되지 않아 누가 고려사신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되 버렸다.

집요한 김춘추의 원한은 결국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김법민(훗날 문무왕)은 백제 태자 융이 항복했을 때,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일로 인해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이어 김법민은 전승기념식에서 윗자리에 앉아 늙은 의자왕과 태자 융을 마루에 앉힌 뒤 
늙은 의자왕에게 가끔씩 술을 따르게 하니 울지 않는 신하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날 김법민은 대야성 함락 때 
백제와 내응한 검일과 모척 등을 찾아내 그 원한을 낱낱이 쏟아낸 뒤 갈갈이 찟어 죽인 다음 강물에 버리는 짓을 했다.

김부식은 이 사실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다. 
김법민에게는 20년이나 지났건만, 그리고 원래 품석의 악행이 자초한 일이며, 
부패한 귀족 품석이 스스로 아내인 고타소랑을 죽이고 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한을 모두 타인에게 쏟아 부었다.

이런 악행과 신라, 당나라 군의 약탈은 결국 백제사람들의 항쟁을 불러왔고 3년간 피로 피를 씻는 전란을 다시 초래하였다. 
3년 전쟁 도중 김춘추는 죽었고(전사했다는 설이 있음) 두 나라는 영원히 씻지 못할 원한을 쌓았다.

또한 애초부터 평양 이남에 대해서만 영유하기로 당과 합의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동아시아의 소국으로 전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부자의 이런 정책들은 한민족으로 통합되었다는 교과서의 삼국통일 의의가 무색할 지경이다. 
이런 원한들은 백제유민, 고구려 유민, 신라가 계속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농락당하는 결과를 빚었고 
대진(大振 - 세칭 발해) 관계에서도 당나라에 계속 농락당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무대는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백제유민의 원한으로 말미암아 결국 평양 이남에만 머무르게 되었고, 
민족적 계통을 같이하는 대진국보다는 당나라에게 접근함으로써 멸망할 때까지 남북이 대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결국 개인적 원한으로 촉발된 첫 번째 통합은 우리 민족이 한 민족으로 통합되어 단일 역사를 쓰게 되었다는 의의는 매우 높지만, 
통합을 주도한 세력들이 아량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훗날까지 두고두고 짐이 되었다.


▶ 고려 태조가 주도한 제 2통일

송악의 상인 집단이 완성한 두 번째 통일은 첫 번째 통일과는 다른 면으로 전개되었다. 
전쟁을 최소화하고 평화적으로 후삼국 영토의 2/3을 얻을 수 있었다.

궁예를 대신해 고려왕으로 추대된 태조(왕건, 이하 태조)는 
백제와는 해상전투를 통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했고 
신라와는 화친책을 써서 천년왕조의 법통을 평화적으로 인수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는 목숨을 잃을 뻔했던 팔공산 전투에도 불구하고 항복해온 견훤을 상부로 높여 불렀으며, 
마지막까지 일전을 벌였던 견훤의 아들 신검마저도 우대해 주었다. 
경순왕을 사위로 삼고, 지방의 호족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중앙귀족으로 서서히 편입시키는 등 꾸준한 통합정책을 폈다.

거기다가 대진국 태자 대광현을 귀족으로 편입시키고 
10만에 가까운 대진국 유민들을 수용하여 훗날 대광현의 아들 대도수가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고려는 비록 영토적으로는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해외 백제유민, 후백제, 신라, 대진 등 혈통을 같이하는 겨레를 모두 자연스럽게 흡수함으로써 이들을 통한 국제화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큰 희생없이 삼한을 통합함으로써 가장 성공한 통일을 이루어 냈다. 
물론 거란으로 인해 북방영토를 회복할 기회를 놓치긴 했으나 바다를 통한 해상제국을 만들어 냄으로써 
바다라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고 팔관회를 통해 민족문화의 통합을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성과는 고려의 자주성으로 나타났다. 
송나라와 요나라에 대해 등거리 외교정책을 씀으로써 이이제이 정책에 휘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송과 요를 적절히 이용하여 고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황제국 체제(중국황제와 같은 묘호 사용, 3성 6부제 등)를 유지하였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들만 수용하였다. 
비록 물려받은 유산은 미약했으나 이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우리민족 최초의 통합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 장차 다가올 제 3통일

역사상 있었던 2번의 통합을 돌이켜 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어떤 것인지 자명하다. 
우리는 4강의 힘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자주적인 내부역량을 확보하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과거의 원한을 잊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주적이지 못했고, 과거의 원한을 앞세웠을 때 만들어낸 통일은 민족사의 크나큰 불행을 초래했다. 
통일이란 큰 것을 얻었지만 그 통일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갖게 할 만큼 가혹한 대가를 지불했던 것이다.

이제 양쪽이 진정 민족의 통합을 바라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과거의 원한을 잊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갈라섰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원해서 전쟁을 치뤘던 것도 아니다.

1,340년전 신라를 돕겠다고 이 땅에 왔던 당나라 군은 그 대가로 엄청난 약탈을 했으며, 
408년전에 조선을 구한답시고 온 명나라 군은 평양성 탈환 후 엄청난 약탈을 자행해 왜군들보다 더한 원성을 들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개인적 원한, 전쟁으로 인한 원한을 앞세운다면 우리 민족의 통합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4대 강국을 잘 조정해 더 늦기 전에 민족의 통합을 다시 이루어야 할 시대적 책임이 있다.

이런 역사적 책무를 소소한 일들로 인해 지체하거나 실패한다면 우리는 민족역사에 다시없는 죄인이 될 것이다.

129년전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 조미 수호조약을 지키지 않고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도록 지원한 미국,
"조선이 일본제국의 영원히 식민지가 되어야만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영원한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고 일본제국과 밀약을 체결한 
미국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는 잊고 살면서 북한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통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북한을 도와 100만 대군으로 우리를 침략하고 통일을 방해한 중국을 용서하고 
국교를 틀고 무역을 하면서 동족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강대국에게 휘둘리는 소국으로 남을 것이다.

55년전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고자 획책하고 수백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일본에게는
제 주장을 펴지 못하면서 50년전 동족의 침략에 대한 원한으로 이를 갈고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남들의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340년전 김춘추 부자가 저지른 잘못을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긴 자가 베푸는 작은 아량은 패한 자를 마음으로부터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세계최초, 세계제일이 아니라 이런 정신적 성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000. 7. 2 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