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영화 <안시성>

2018.10.09


 

잘 만든 전쟁 영화 <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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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고증오류 ... 역사를 영화로 만들거나 드라마로 만들면 빠지지 않는 비판이다. 나도 소싯적에는 그랬다. 그래도 비판을 하면서도 가급적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다음에 더 멋진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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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안시성 전투(645년) 이후 23년 뒤에 망했고, 안시성은 26년 뒤인 671년에 함락됐다. 해서 남아 있는 기록은 적이 남긴 기록이거나 전해들은 이야기를 옮긴 것이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진정 역사의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각을 빌려와서 자기 역사를 기록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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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중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둘 담고 있는데, 하나는 추모성왕의 활과 화살이 요동성을 지키는 신물이었다는 것과 양만춘이 화살로 이세민을 쏘아 한쪽 눈을 다치게 했다는 전설이다. 하긴 양만춘이라는 이름도 당시 사서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김부식도 삼국사기를 기록하며 이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구당서 열전에는 이세민이 패배한 뒤 안시성을 떠나면서 비단 백필을 선물로 주었다고 하는데, 누군지 적장의 이름도 모르고 주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해서, 영화의 설정처럼 고구려 군이 퇴로를 처단하러 나오자 정신없이 도주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요택의 진창길을 지나 임유관까지 가는 길은 이세민의 수명을 무척 단축시킨 고생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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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공방전만 안시성 전투로 생각하지만, 당시 사서의 기록에는 주필산 전투가 안시성 전투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시성에서 발진한 고구려군이 당군과 주필산에서 싸운 것이 안시성 전투의 시작이다. 주필산 전투 개전은 음력 6월20일, 이로부터 9월18일 당군이 후퇴할 때까지 석달 정도 전투가 있었고 그 가운데 안시성 공방전이 60여일 이상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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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은 주필산 전투부터 다뤘는데 이는 제목에 부합되는 장면이다. 안악 3호분 대행렬도의 보무당당한 고구려의 개마부대(갑주를 입힌 말을 탄 창병)를 3차원 공간에 재현한 것은 압권이다. 말과 병사 모두 찰갑옷을 장착해 고증에도 매우 충실한 장면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고구려 기병의 압도적 돌파력을 보여주는 멋진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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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옥에 티라면 전투가 음력 6월 중순, 한여름이었는데 벌판의 배경이 늦가을이며 당나라 수뇌부의 야외 회의장면에서 입김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살아남은 태학생도가 안시성까지 달려가는 사이 계절이 늦가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 버렸다. 전투를 기록한 사료에는 두 지점까지 거리는 멀어야 40리(16km) 가까우면 8리(3.2km)다. 사전 제작을 하면서 계절을 간과한 것은 안타깝다. 또 태학생도는 차라리 경당생도로 그리는 편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태학은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귀족 대상 행정관료 양성 대학이고, 경당은 송경습사(경전을 읽고 활쏘기 같은 무예를 가르침)를 하는 고구려에 널리 퍼진 일반 교육기관이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화랑 비슷한 무사집단인 조의선인(皂衣先人)이 있었다. 고구려는 기마민족이 아니라 농경민족이었다. 해서 말을 타는 무사집단은 어렸을 때부터 다르게 훈련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파르티안 샷(수렵총 벽화에 나오는 몸을 반대로 돌려 활을 쏘는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유교 경전 읽던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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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무기와 방어무기 모두 지금까지 어떤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장쾌한 장면이었다. 감독의 말처럼 고대 전투의 모든 병장기를 동원했다 할 만큼 압도적인 스케일을 보여줬다. 예전 <불멸의 이순신> 해전 장면에서 맛봤던 것 이상으로 멋진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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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공성무기인 운제를 격파하는 장면을 양만춘의 원맨쇼로 그린 부분은 극의 몰입도를 떨어뜨렸다. 설현의 단기돌파 역시 잘 만든 영화에서 뜬금없는 씬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남친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삭이며 석궁부대를 잘 지휘해 승리한 뒤 무덤에 가서 우는 장면을 만들던지 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주 이하 기계처럼 팀웍을 딱딱 맞춰 전투하는 고구려 군에게 성주의 명령도 없이 개인적 분노를 풀기 위해 단기필마로 당태종을 향해 질주하는 석궁부대장은 뜬금없지 않은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헬름협곡 전투나 펠렌노르 평원 전투를 생각해보면, 이 장면 때문에 안시성 전투는 성주의 군대 장악능력과 전투지휘 능력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군령도 제대로 못 세우는 ‘이웃집 아저씨’로 만든 게 몹시 아쉽다. 설현 혼자 띄워주려고 씬을 만들었다면 할 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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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성곽 역시 아쉽다. 특히 감독이 만주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들을 답사했었다는 인터뷰를 봤는데 좀 의아하다. 중국의 사서들에는 “고구려는 성을 쌓고 방어하는 기술이 탁월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성에 의지해 싸우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데, 이번에 나오는 성곽에는 세계유일의 고구려성이 갖춘 특징이 생략됐다. 고구려 성의 특징이자 강점은 치와 옹성이 그것인데 적이 일렬로 서서 돌격해 오지 못하게 돌출된 치성 구조가 있고, 성문을 충차로 격파하지 못하게 옹성으로 성문을 둘러싸고 있으며 옹성 안으로 충차를 끌고 오면 포위가 되어 고슴도치를 만들 수 있는구조물이다. 고구려를 침략했던 적들은 이런 구조 때문에 곤욕을 치렀는데 영화 속에는 허술한 목책 방어장치를 동원해 많이 아쉬웠다. 목책 방어장치는 적의 발석거 공격에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는 장치였다는 기록이 명백한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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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오호!라고 감탄한 장면이 있었는데, 토산이 무너졌을 때 고구려군에 잽싸게 성밖으로 튀어 나가 토산을 점령해 버린 부분이었다. 사서에는 토산이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 설명이 없는데, 영화는 “아, 저랬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토산이 무너졌을 때 당군은 당황했는데 고구려군은 예상하고 있었던 듯 준비하고 있다가 바로 기병을 동원해 토산을 점령하고 참호를 파버렸다. 이는 충분히 영화처럼 고구려의 굴자군이 토산을 무너뜨렸을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기둥을 불태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설정하더라도 굳이 사람을 희생시키는 장면을 만든 것은 한국 영화의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아쉬웠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토산과 성벽은 매우 가까웠다. 그랬다면 기둥마다 동앗줄을 묶어 말과 소를 이용해 충분히 기둥을 쓰러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장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비장한 희생을 설정하는 것은 여전한 과거 파시스트 시대의 국가관이나 희생정신의 잔영인 것 같아 다음 영화에는 이런 부분들이 사라졌으면 한다. 사람 한명 한명이 매우 필요한 고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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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의 고구려 군은 하루 2~3천명의 적을 살상하며 석달간 버텼고 당군이 60일 동안 쌓은 토성을 점령한 뒤에도 사흘간 적 3만을 살상했다고 한다. 단순 계산으로 석달간 전투에서 무려 20만명 정도를 살상한 것이다. 중국 역사서들의 평가처럼 고구려는 성곽 방어전투에서는 가히 세계 최강이라 할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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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중국 왕조들이 제압하지 못했던 북방 유목민을 완전히 제압하고 그들에게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받은 이세민을 상대로, 3만명 정도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적을 궤멸시킨 안시성 전투는 가히 중국 왕조들과 30년 동안 치른 동아시아 세계대전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일 것이다. 특히 주필산의 엄청난 피해를 목격하고서 치른 전투에서 이긴 것은 자랑할만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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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은 한국 제작진이 만든 역대 고대 전쟁 영화 가운데 최고라고 꼽아주고 싶다. 영화가 끝난 뒤에 나올 때 어린아이와 청년 세대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걸 보니 스토리도 재미있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개선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것은 주인공들도 투구를 쓰라는 것이다. 투구를 쓰지 않은 장수가 장수인가? 배우의 얼굴은 영화가 유명해지면 저절로 널리 알려지는데, 투구를 쓰지 않은 것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장수들이 입은 갑주는 고구려의 갑주가 아니다. 화살도 튕겨 나가고 칼도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고구려 찰갑옷인데, 주필산 전투 때 찰갑옷을 입은 고구려군이 왜 갑자기 안시성에선 시대불명한 애매한 갑주를 입고 나오는지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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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본 고대 전투 영화나 드라마 중 국내에서는 가장 잘 만든 것으로 칭찬해 주고 싶다. 환두대도 허리걸이, 궁시 착용법, 말타는 법, 등장무기 등등 장족의 발전을 이룬 영화로 평가해 주고 싶다. 앞으로 더욱 발전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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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용 자체는 이미 너무 유명해서 스포일러 아닌가?
“고구려가 이겨!” ㅋㅋ


황제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했다성을 포위한지 오래되어, 성 안에는 밥짓는 연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니, 이는 틀림없이 군사들을 잘 먹인 후에 야습하려는 것이다. 군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하라.” 이날 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사진은 영화 홈페이지)


삼국사기에 나오는 저 기록을 바탕으로 엄태구가 분한 멋진 고구려 돌격대가 등장한다. 

투구를 쓰시라. 투구를....ㅋㅋ


황해도 안악 지방에서 발견한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

고구려 군의 무장과 편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벽화다.

문관과 함께, 장창수, 도부수, 개마무사, 궁수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의 요하 방어선 개념도.

안시성은 만리장성 출구인 임유관에서 요택을 지나 요하를 넘으면 당도한다.

중요한 성곽이었기에 고구려는 15만의 대군을 동원해 안시성 앞 주필산에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 성은 고구려가 망한 668년보다 3년이나 더 당군과 싸우다가 671년에 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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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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