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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러시아(2015년)

바이칼에 가다(1/8)

by 연우아빠. 2015. 9. 11.

광복 70년 한겨레 바이칼 평화 대장정(1/8)

(제5회 민족의 시원 바이칼을 향한 평화대장정)

 

기간 : 2015.08.17~2015.08.25

참가인원 : 73명

 

(1) 2015.08.17. : 우수리스크 항일 유적을 찾아서

 

1일차 : 8월17일(월) 맑음

 

1일차(8.17 월요일) 일정

공항 > 블라디보스톡 > 우수리스크 > 이상설 선생 유허비 > 발해성터 > 최재형 선생 생가 > 전로대한국민의회 결성지 >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고려인 문화센터) > 강좌(극동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와 고려인의 삶(김 발레리아 여사) > 숙소(우수리스크 호텔)

 

부여에서 돌아와 아들과 내가 가지고 갈 배낭을을 각각 1개씩 꾸렸다.

공항까지 제 시간에 가려면 월요일 05:20에 기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걱정스러웠으나

월요일 새벽 알람과 함께 쉽게 일어났다.

 

방학 중이라 조금 늦게 일어났던 아들은 내가 깨우자 바로 일어났다.

아침은 비행기에서 먹든지, 공항에서 먹을 생각을 하고 건너 뛰기로 했다.

 

06:15 공항리무진을 타고 출발해 인천공항에는 07:15 도착해 약속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73명으로 일본인 교수 부부를 비롯해 90을 바라보는 노인부터 5살 먹은 아이까지
국회의원, 대학교수, 학교 교사, 회계사, 세무사, 사업가 등등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직업으로 구성되었다.

 

값만 비싸고 친절하지도 않은 공항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우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가는 동안 요상스럽게도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 잡 생각이 나다니, 비행기를 너무 오랜만에 탔나보다.

 

비행기는 출발한 뒤에 동쪽으로 가지 않고 계속 서해 쪽으로 진행한다.

으잉!? 왜 블라디보스톡을 가는데 서쪽으로 계속 가는거지?

 

서쪽으로 계속 가던 비행기는 따렌>푸순>창춘>무단장>러시아 국경>블라디보스톡으로 멀리 돌아간다.

당연히 가까운 동해로 해서 갈 줄 알았던 비행기는 먼 길을 돌아 거의 3시간이나 걸리는 비행을 했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노무현 정부 때는 동해로 나가 울등도-독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진행하는 항로라서 1시간 45분정도 걸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통일비용에 대해 왈가왈부를 하는데, 이렇게 70년째 어마어마한 분단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경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는 동안 연해주 땅이 발 아래 보인다.

산과 들이 우리 땅이랑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블라디보스톡 공항은 작은 공항, 재작년인가 새로 지어서 깨끗하다.

출발하기 전에 익히려고 노력했던 키릴문자로 쓰인 공항 간판을 열심히 맞춰봤다. 

 

입국자가 100 여명 남짓한데도 입국심사에 1시간 정도 걸렸다.

내가 줄을 선 입국심사대는 엄청 꼼꼼하게 살피는 듯 다른 줄이 다 나간 다음에도 한참을 더 끌었다.

20명쯤 남았을 때 게이트 하나를 더 열어서 시간을 줄였지만 우리 줄은 여전히 하세월이다.

전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입국심사대의 공무원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무뚝뚝하고 무표정하다.

입국신고서에 사인을 하니 절반을 나눠준다.

출국할 때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고. 없으면 출국이 불가능하다고.

 

짐을 찾는데 아뿔싸!

비올 때를 대비해 가져온 우비 2개와 9,500mA짜리 배터리가 없다.

배낭 옆구리에 끼워 놓았는데 짐을 마구 던지면서 튀어 나간 모양이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공항 밖에는 우리를 이끌고 다닐 현지 여행사(BK투어, 대표 박대일)에서 버스 2대를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구성원은 대개 이르쿠츠크 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1인당 물 1병씩 나눠준다.

 

러시아는 추운나라인데다 에너지 대국이라 그런지 따뜻한 물은 공짜이나 찬물은 돈을 내고 사야한다고 한다.

또 탄산수가 대부분이어서 탄산 없는 물은 귀하다고 한다.

석회석이 많이 섞인 물이라서 자연상태의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공항을 나와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70km가 조금 넘는거리인데 도로 포장상태가 우리나라 보다 뒤떨어져서 그런지 약 1시간 30분쯤 걸린다.

 

우수리스크까지 가는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운전석 위치가 좌우 제각각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승용차는 대부분 일본제(토요다, 닛산)이고 버스는 대부분 한국산이다.

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풍경은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이다.

길 가에는 드문드문 <세계테마기행>에서 본 것처럼 과일을 놓고 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먼저 우수리스크 시내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에 들러

오늘 연해주 항일유적지를 따라 우리를 안내해 줄 문화센터장 김 발레리아 선생님을 만났다.

김 발레이아 선생을 모시고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항일유적지와 발해 유적을 찾아 떠났다.

 

 

우수리스크 외곽 니할로프카(?)라고 부르는 지역은 고려인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한다.

니할로프카는 뻔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고려인은 이국 땅에서 악착같이 살았기 때문에 러시아인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1864년 함경도에서 기근을 피해 14가구가 처음 이주한 것이 러시아 고려인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초기에 러시아인의 텃세 때문에 매일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 위에서 러시아인들과 주먹다짐을 벌였다.

 

러시아 총독은 고려인이 부지런하고 농사를 잘 짓기 때문에 지역개발이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이주를 늘려줄 것을 러시아 중앙정부에 보고했고, 

러시아 정부는 고려인에게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할 것을 요구했다.

정교회에 귀의한 고려인에게는 군 복무 면제와 함께 25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농사를 지을 땅을 제공했다.

 

러시아 인은 우리나라 맛배지붕과 같은 형태의 집을 짓지만 고려인들은 팔작지붕 모양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밖에서 봐도 구분이 되었다. 러시아인이 먹지 않는 가축의 내장을 손질해 음식을 만들고 술집을 운영했다.

 

도심을 통과해 비포장 도로가 있는 수이푼 강변에 도착했다.

강변에는 하얀 돌에 불꽃 같은 문양을 새긴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2001.10.18.건립)가 서 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의 유언은 비장감이 넘친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내분에 진절머리를 낸 선생은 “우리끼리 반목하고 싸우는 자는 제1의 공적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 악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의 유언대로 선생의 유해를 수이푼 강변에서 화장해 강물에 뿌렸다고 한다.

헤이그로 그리고 러시아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보재 이상설 선생의 혼백은 지금 고향에 돌아왔을까?

 

* 우리 일행 중에 눈썰미 좋은 분이 비석에 이상설 선생의 호가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지적했다.

(보재溥齋를 ‘보제’로 새겨 놓은 것), 동행한 한겨레신문 관계자 분께서 바로 잡겠다고 약속하였다.

 

 

수이푼 강변을 떠나 옛 발해 솔빈부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발해 성터는 얕으막한 토성 흔적만 남아 있다.

약간 움푹하면서 평평한 지형은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히 넓은 땅이다.

 

러시아는 영토문제가 거론될 것을 우려해 어떤 발굴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답사단이 오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고 한다.

1970년 중국과 소련이 아무르 국경분쟁을 치룬 후에 한자식 지명과 원주민식 지명을 모두 러시아 식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고구려 장수왕 때 합병한 명마의 산지로 이름 높던 실위라는 나라가 있던 곳이며,

후에 발해의 솔빈부가 자리한 곳으로 대를 이어 명마의 산지로 유명하다.

묘하게 지금도 많은 말을 키우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솔빈 땅에는 러시아의 신흥부자들이 좋은 집을 많이 짓고 있다고 한다.

차창 너머로 아주 허름한 집과 아주 고급스러워보이는 집이 뒤섞여 있는 풍경이 지나간다.

 

발해유적을 떠나 우수리스크 시내 공원(고로뜨스코이 공원, Городской парк)에 도착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족과 편안하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은 공원인데

한 구석에 지붕을 씌워 보호하고 있는 거대한 거북받침이 있다.

등에는 비석을 세워 놓은 듯한 자리가 있는데 비석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1864년 지금의 우수리스크 Haymarket 광장에 있었던 것을

러시아 시베리아 극동 탐험대가 발견해 이리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하는데 금나라 유물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이거, 윤관이 세웠다는 고려척경비 받침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해 수십군데에

선춘령, 선춘현, 수이빈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고

 

세종실록지리지 경원부에 대한 설명은 두만강을 건너 선춘현까지 지리기록과

윤관이 세운 척경비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공원을 나와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이다.

두터운 벽과 창문을 갖춘 러시아식 가옥인데 작년 정부에서 매입해 기념관으로 만들려고 추진 중이란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에서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858년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왔다.

부지런하고 똑똑한 최재형 선생을 눈여겨본 러시아인 선장 부부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군수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많은 서양학문을 배웠다.

최 선생님은 조선인을 대거 고용해 동포의 생활을 안정시켰고, 막대한 부를 모두 항일활동에 쏟아부었다.

그 덕분에 연해주의 항일무장대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을 할 수 있었고,

항일의병 통합 조직을 결성하였고, 안중근이 이토오를 사살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지원하는 한편,

지역신문과 학교 등의 문화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거사를 한 것은 당시 하얼빈이 러시아령이었기 때문에 체포되더라도 충분히 손을 써서

그를 구할 수 있다는 계산하에서 한 것이지만, 뜻하지 않게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을 일본제국에 넘겨버려서

최재형 선생은 그를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을 평생 한으로 여긴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의 순국 후에는 안 의사의 일가 친척을 돌보았다.

 

일본제국은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어 그를 간첩죄로 체포하도록 했으며, 그의 경제활동을 차단시켰다.

경제력을 상실한 선생은 1920년 적백내전 때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총살당하고 말았다.

최 선생님은 이 집에서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은 조국에서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노비 출신이었고,

막대한 재산으로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과 동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최 선생님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마지막에 살았던 집 마당에는 앵두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조선사람으로 살았던 그가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였다.

근현대사를 더 상세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런 분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결과이다.

 

 

최재형 선생 댁을 내와 우리가 들른 곳은 러시아에 거주하던 항일운동가들이 모여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한 곳이다.

1918년 6월13일부터 23일까지 그 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실업학교에서 제2회 특별 전 러시아 한민족 대표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민족의 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한 우리 동포들은 1919년 3월 이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해외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1년 앞선 것이다.

임시정부를 선포한 다음에는 이 회의를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현지시간으로 7시 정도 되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재중동포가 운영하는 듯한 퓨전 한식집(кафе = Cafe)인데 음식은 맛도 좋았고 양도 매우 많았다.

식탁마다 오늘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이 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은 관련된 서적도 많이 읽고 미리 공부를 많이 해 온 듯하다.

저녁을 먹고 마당으로 나오니 조명탑까지 갖춘 널찍한 축구장이 보였다.

젊은 사람들이 축구를 하고 있는데 천연잔디였다.

GNI가 우리보다 낮은 러시아 이 시골에도 천연잔디구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우리의 인프라가 새삼 서글퍼졌다.

이 곳 사람들도 고추를 많이 먹는 듯, 가늘게 자른 고추를 널어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을 먹은 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 도착했다.

2004년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화센터 안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었는데 발해 유적과 유물, 팔작지붕의 모습을 갖춘 초가집 모형,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초창기 사진기록, 연해주의 항일활동, 국권회복 투쟁 과정, 1920년 4월4일~5일 사이에 있었던 일제의 조선인 학살사건(최재형 선생도 이 때 사로잡혀 4월 7일 순국했다), 레닌과 연대한 한인사회당(고려 공산당)의 항일활동, 그리고 3,500여명의 무장항일조직이 궤멸된 자유시참변, 그리고 적백내전 중 일제와 연합한 백군에 맞서 볼세비키 군과 연합해 많은 전투를 치른 숨 가뿐 현대사가 펼쳐져 있었다.

 

일제는 집요하게 러시아와 소비에트 정부를 포섭해 연해주 일대 항일무장부대의 기반이 되는 동포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작을 했고, 그 결과 한인사회는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함께 동포사회 지도자 대부분이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돼 처형당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고려인 문화센터 전시관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수많은 선열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알려 주는 자료들이 가득했다.

 

나도 처음 보는 <고려의회정부>라는 깃발은 우리가 지금의 이념에 갇혀 급변하는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현지시간 저녁 8시부터 고려인문화센터(Корейский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Уссурийска) 대표이신 김 발레리아 여사의 강의를 들었다.

김 발레리아 여사는 고려인문화센터장으로 1950년 중앙아시아 출생했다.

소비에트 해체 후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의 박해를 피해 1990년 연해주 이주하였으며,

20여년 전부터 아기를 키우면서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이민 1세대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첫째,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부는 러시아인보다 더 잘해야 한다. 러시아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불이익이 크다고 생각해 그들보다 러시아어도 더 완벽하게 구사하려고 했다고 한다. 

 

둘째, 대학은 꼭 나와야 한다.

지금도 고려인 후손들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대학은 무조건 가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셋째, 평생 3개 잔치는 꼭 챙겨야 한다(돌, 결혼, 환갑).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교육을 받아 원동(遠東, 연해주)에 대한 신화, 기억, 향수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해 온 비결이 된 것 같다고 한다.

최근 고려인이 러시아인과 결혼하는 비중은 17% 정도 인데, 일본인들은 90%가 일본인과 결혼한다고 하여 우려가 된다고 한다.

 

연해주는 한국과 오랜기간 고립된 탓에 옛날 한국의 전통을 많이 가지고 있어 지금도 한국에서는 희미해진 음력명절을 꼭 지킨다고 한다.

 

1992년 러시아 정부는 “각 민족은 자신의 문화센터를 가질 수 있다”라고 발표했다. 연해주는 158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러시아 정부는 어느 소수민족도 도와주지 않는다. 소수민족 갈래가 너무 많아 재정부담 우려가 크다. 현재 아제르바이잔과 고려 두 민족만 자신들의 언어로 독자적인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우리 일행 가운데 민족교육은 어떤 상태인지 물어 본 사람이 있었다.

김 발레리아 선생은 민족학교는 스탈린 시대에 소멸됐다고 한다.

고려인 문화센터에서는 한글교육을 하고 있는데 수강자의 30%는 러시아인이고 70%가 고려인이다.

태권도 같은 한국문화도 가르치고 있다. 한국 드라마, K-POP 등 한국문화의 성장으로 인해 연해주 고려인은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요즘에는 본국 출신별 한국사투리가 남아 있었으나 점점 소멸돼 가고 있다고 설명하셨다.

 

고려인은 다른 고려인의 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으면 서로 돈을 보태 도와주며

단결력이 강해 러시아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지금 연해주 인구의 10%는 고려인인데, 1990년대 소비에트 정부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의 여파를 피해 많은 고려인들이 다시 부모의 고향인 연해주로 이주해 왔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변변한 제조업이 없는 이 지역에서 경제력을 갖추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고려인들의 힘든 역정에 동포로서 많은 공감이 갔다.

참석자 여러분들이 질문을 했는데 본국에서 고려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에너지 자원을 보유한 만큼 제조업 기반 투자를 통해 중국-러시아-북한-일본 다각 무역의 축으로 활용해 연해주 지역 고려인의 생활안정과 함께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증진시킬 수단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0시가 넘어 숙소인 우수리스크 호텔에 도착했다.

러시아에서 숙박을 하면 반드시 여권을 가져가 어디에서 숙박했는지 신고하고 기록을 남긴다고 한다.

우리나라 1970~80년대와 비슷한 제도인 듯.

 

호텔은 큰 길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밤늦게 까지 지나다니는 차량과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다.

호텔은 시설이 깔금하고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도 되는 곳이었다.

우리와 같은 220V 전압을 사용해서 편하게 충전도 할 수 있었다.

땅 넓이와 숲, 그리고 커다란 강이 있는 이 축복 받은(?) 도시에는 많은 나무가 있어서 공기도 쾌적했다.

낯선 러시아 땅이지만 낯설지 않게 잠들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을 향하여...200인승 정도 되는 크기가 좀 작은 비행기였다.

 

 

가까운 길 놔두고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짓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은

광복 전쟁 중에도 분열되어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이런 바보짓을 해야 하는가?

 

 

블라디보스톡 공항 착륙을 위해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있다.

한반도 자연환경이랑 너무 비슷해 다른 나라 같지가 않았던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 가는 길에 창밖 풍경

우리나라 1980년대 초반과 비슷했다.

 

 

2차대전 무명용사들의 혼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꽃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어 독립을 지키려고 애썼던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수이푼 강가에 한국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선생의 넋을 기억하고 있다.(사진-한겨레통일문화재단)

 

 

수이푼 강가, 이상설 선생 유허비 근처에 핀 꽃

 

 

수이푼 강.  이상설 선생의 유해는 이 강변에서 화장해 수이푼 강에 뿌렸다고 한다.

 

 

옛날 발해의 성터가 있는 땅.

광활한 대지에 말을 달리던 고구려와 발해의 용사들은 사라지고 적막한 땅만 남았다.

 

 

꼬로뜨스코이 공원( Городской парк. Volodarskogo, 35, Ussuriysk, Primorsky Krai)안에 있는 거북이 비석 받침

1864년 러시아 극동탐험대가 우수리스크에서 발견해 이 공원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러시아 인들은 이 유물을 금나라 유물로 안내해 놓았지만, 윤관이 세운 고려척경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해주 항일전쟁의 모든 것을 지휘했던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에 살았던 집

올해 우리 정부에서 인수해 박물관으로 만드려고 한다고 전한다.

최재형 선생은 이 집 앞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이틀 뒤 총살형을 당했다고 한다.

 

 

 

1918년 3월 해외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한 전러시아 고려인 동맹 결성장소

여기에서 1919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한다.

 

 

연해주의 1인당 GNI는 불과 5천 달러 수준이지만 우수리스크 같은 작은 도시에도 이런 스타디움이 있다.

저녁을 먹고 나온 곳에서 이런 천연잔디 구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보니 부럽기만 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이들은 유니폼이 없어서 한팀은 웃옷을 입고, 한팀은 벗고 피아를 구분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스타디움 옆에는 1914년에 세운 건물이 서 있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 문화센터

 

이 센터 안에는 1864년 함경도의 조선사람들이 러시아로 이주한 지 140주년이 되는 2004년에 세운 기념관이 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연해주의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 전쟁을 치렀는지 알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지원한다고 천명하여

러시아에 있던 많은 고려인과 유민들이 적군의 편에 서서 백군의 편에 선 일본군과 싸웠다.

김 알렉산드라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볼세비키 당원이 되었는데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그녀는 죽는 순간에도 조국의 동포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19세기말 20세기초 연해주에 거주하던 우리 동포들의 모습.(사진-한겨레통일문화재단)

 

 

김 발레리아 여사의 강연을 듣기 전 이런 과자를 대접해 주셨다.

인공 감미료나 단맛이 없어 담백하고 맛있었다.

 

 

김 발레리아 여사가 <극동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와 고려인의 삶>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사진-한겨레통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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