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 3(토)
몇 주 전부터 아들이 가자고 졸랐던 강화도 답사를 떠났다.
여러 차례 다녀온 강화도지만 아들은 어렸을 때라 기억이 나는 것은 거의 없단다.
거창하게 1코스 ~ 4코스까지 일정을 짜 놓은 아들 계획표를 보고
아무래도 1박 2일이 나을 듯 하여 숙소를 예약하려고 했지만 가격도 엄청 비싸고, 만만한 곳이 없었다.
따뜻할 때 같으면 함허동천 야영이라고 할 수 있으련만...
비교적 저렴한 석모도 자연휴양림은 인터넷이 안돼 예약을 할 수 없었고,
달빛동화마을은 빈 방이 있었지만 딸래미가 토요일에 친구 만나기로 했다고 해서 취소.
결국 아내는 딸래미 걱정되서 남고,
아버지를 모시고 남자 3대만 떠나는 답사가 되었다.
날씨는 걱정과 달리 아주 좋았다.
길도 거의 막히지 않아 쉽게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화도는 고조선사에도 등장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땅이다.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연개소문의 출생지,
그리고 몽골 침략기에 고려왕이 40여년간 피난했던 요새였다.
고려 전성기에는 예성강, 한강, 임진강 물길을 따라 벽란도와 개경으로 사라센 왕국의 상인들이 드나들 때
강화도는 무역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1627년에 있었던 정묘호란 때는 인조임금이,
그리고 9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피난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한국사 비극의 현장으로 더 크게 각인된 것은
아마도 19세기 열강의 조선 침략 때문일 것이다.
초지대교를 지나서 가장 가까운 유적인 초지진. 진성에 포탄자국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1871년 4월23일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은 강화해협에서 초지진을 향해 포격을 가하는 한편,
상륙한 육전대 450명을 동원하여 이 초지진을 공격, 점령하였다.
1976년 미국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는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는 도덕외교를 들고 나왔고
당시 미국에서 5대 독재자로 설왕설래가 있던 박정희 정권은 이런 미국의 외교 정책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이런 대외 전쟁의 흔적을 복원, 복구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초지진 진성 옆에 서 있는 소나무에 남은 당시의 포탄 자국.
침략을 당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은 물론 초목도 성치 못하다.
초지진 안에 전시해 놓은 대포.
16세기 말~17세기 초,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명나라를 통해 들여온 홍이포 종류.
사거리 700m 쯤 되는 대포인데 효종 때 북벌을 위해 개량한 수준에서 200여년간 전혀 발전이 없었다.
프랑스, 미국, 일본 침략군은 포탄이 작렬하는 대포로 발전했음에도 조선의 대포는 여전히 포환을 날려 보내는 구식 대포였다.
초지진 위에서 바라 본 강화해협과 초지대교.
최대 폭이 1.5km 정도인데, 포대에서 적 함선을 명중시키지 못했다니 조선포병의 훈련수준을 알 수 있는 듯.
역사에 만약이 없다지만 조선 포병이 적 함선을 명중시켰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초지진에서 북쪽으로 2km쯤에 덕진진의 대문인 공조루(控潮樓)가 강화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공조루 안에는 망원경이 있어서 강화해협을 살펴볼 수 있는데 성능이 너무 좋아서 건너편 해병대 초병이 보일 정도다.
대문 이름을 보면 이곳이 강화해협에서 물살이 제일 거친 모양이다.
이곳 덕진진은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 최대의 해안포대가 있었다.
1866년 프랑스 군의 침략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포수부대는 이 곳을 통해 해안 건너편 정족산성으로 이동해 프랑스 군을 격퇴했다.
1871년 미국의 침략 때는 아군의 최대 포대였음에도 반나절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0년(1232년)에 강화도 전체를 두르는 강화외성을 쌓았고, 고종 37년(1249년)에 중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해안의 성벽은 고려시대 이래 수축 보수하여 계속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 뒤 쪽에 바다이므로 이 곳이 안쪽인 셈.
강화도에는 단감이 달려 있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공조루(控潮樓) 옆에도 새들이나 먹을 수 있는 높은 곳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안해루 옆길로 언덕을 넘으면 해안 포대가 보인다.
이곳에는 조선 말기에 포대 12좌가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조금 이해가 안되는 것은 포대가 낮은 곳에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대포는 직사화기였을까?
복원이라곤 하는데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여럿 있었다.
돌을 쌓은 방식이 조선식인 그랭이공법이 아니라는 점, 대포를 발사 할 수 없는 각도로 포구를 복원했다는 점...
포대를 지나 용두돈대까지 내려왔다.
왼쪽 가운데 보이는 것은 연못으로 전투 중에는 식수원 역할도 했다고 한다.
대원군의 경고비가 서 있는 용두 돈대 포대로 가는 길
이 곳 성벽 역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그랭이 공법이 보이지 않는 단순 들여쌓기 방식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웠다는 경고비석
"타국의 배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바다를 지켜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비판하는 논문들이 참 많지만
그 당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개혁에 성공했지만 기득권 층의 집요하고 조직적인 반발은 결국 일시적인 성공에 그치게 했고
외세가 밀물처럼 밀려왔을 때, 조선의 멸망을 조금 늦추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1871년 4월23일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4.24일 용두,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이어서 바로 광성진를 공격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미군이 동시에 공격을 한 탓에 아군 해안포대의 방어력은 크게 위축되었던 모양이다.
고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통진(通津)의 진지에서 보고한 내용
「적의 괴수가 북쪽으로 대모산(大母山) 꼭대기에 올라가면서 육지로 대포를 실어다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며 마구 쏘아대고
소총으로도 일제히 쏘아댔습니다.
그리고 미시(未時)에는 적의 괴수가 광성진(廣城津)으로 꺾어 들어가서 성과 돈대(墩臺)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광성진에서 일제히 조총을 쏘아대어 한바탕 혼전을 벌였는데
한참 뒤에 광성진은 붕괴되고 적들이 광성진의 위아래 돈대를 차지하였습니다.
덕진(德津)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賊船)도 광성진을 향하여 기동하므로
손돌목〔孫石項〕 남성두(南星頭)에서 연이어 대포를 쏘니
적선도 그대로 닻을 내리고 대포를 무수히 난발하여 손돌목의 성이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적들은 광선진을 탈취하고 그곳 진사(鎭舍)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벙거지를 실어갔습니다.
그리고 손돌목을 내려다보니 성안에서도 대포를 쏘았습니다.
바다와 육지로 공격해오니 적은 수의 군사가 의지하여 무기를 사용할 곳이 없었고,
좌우가 이미 서로 의탁할 형편이 못된 조건에서 막아낼 길이 전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덕포진(德浦鎭)에다 진지를 옮겼습니다.
당일 정오에 광성진 양곡담당 아전인 전용묵이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오늘 묘시(卯時)에 서양놈들 4, 5백명(名)이 덕진진(德津鎭)으로부터 곧장 광성진에 침입하였으므로
중군(中軍)이 어영군(御營軍)과 본 군영의 별무사(別武士)들을 동원해 보내어 중도에서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양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은 비 오듯 날아왔고,
육지의 적들이 쏘아대는 조총알은 우박 쏟아지듯 마구 떨어졌습니다.
좌우로 적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우리 군사들은 막아내지 못하여 선두 부대가 곧 패하게 되었고,
뒤의 부대도 이어 패하였습니다.
서양놈들은 이 기세를 타서 곧바로 올라와 장대(將臺)를 포위하였는데 그 형세는 철통같았습니다.
우리 큰 진지에서의 대포소리는 여전히 끊어졌으니 지금 이때의 군사형세로 말하면 그 위험이 경각에 다달았습니다.
광성진의 대문인 안해루(按海樓). 바다를 장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걷기 열품 덕분인지 강화도에도 해안을 따라 걷는 길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만, 찻길과 같이 붙어 있어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매연은 고역이 아닐까 싶다.
찻길과 완전히 분리된 차단 가로수가 풍성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광성진은 덕진진에서 북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있다.
1871년 4월 24일 덕진진을 점령하고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온 미군과 최대 격전이 벌어졌다.
미국 해병대 극동함대는 80여문의 함포 사격을 가하면서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광성진을 포위 공격했다.
당시 상황은 고종실록에 이렇게 보고되어 있다.(1871.4.25)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이달 25일 적들이 물러간 다음 휘하의 군관(軍官)을 파견하여 자세히 조사하게 했더니,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에, 「찰주소(札住所)의 광진(廣津) 보루에 달려가 보니, 보루는 텅 비었고 흙 참호는 모두 메워졌기에,
즉시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흙을 파냈더니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친동생 어재순(魚在淳), 대솔 군관(帶率軍官) 이현학(李玄鶴),
겸종(傔從) 임지팽(林之彭), 본영(本營)의 천총(千總) 김현경(金鉉暻)이 피를 흘리고 참호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시체들은 몸과 머리가 썩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성진 별장(廣城津別將) 박치성(朴致誠)의 시체는 조수가 나간 다음 강변에서 드러났는데
인신(印信)을 차고 있었으므로 주워서 바칩니다.
별무사(別撫士) 유예준(劉禮俊)의 시체는 아직 찾지 못하였는데 붙잡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별무사 이학성(李學成)의 보고 내용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중군은 직접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김현경은 손에 환도를 잡고 이쪽저쪽 휘둘러대며 적을 죽이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별무사 유예준은 중군 가까이에서 바싹 따라다니다가 총에 맞게 되었고,
어영청(御營廳)의 초관(哨官) 유풍로(柳豐魯)가 앞장에서 사기를 돋구었으며,
이현학이 큰 소리로 적들을 꾸짖는 것을 목격했지만 저도 적들한테 부상당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해가 진 뒤에야 간신히 빠져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중군 형제의 시체는 장리(將吏)를 보내어 염습해서 영구(靈柩)를 본 고장으로 가져가는 예식을 각별히 돌보도록 하였으며,
전사한 장수와 병졸들의 이름은 그가 말한 데 따라 성책(成冊)해서 올려보냅니다.
중군 어재연의 겸종 김덕원(金德源)이 칼날을 무릅쓰고 도장을 주어가지고 와서 바쳤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죽은 사람이 53명(名), 부상당한 사람이 24명이다.]
쌍충비각 안에 있는 천총 김현경, 덕진진 별장 박치성의 비석
4월24일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미군이 물러간 4월 25일 조정에서 확인했다.
중군장 어재연은 그의 동생 어재순과 함께 침략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어재순은 군인도 벼슬아치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되었다.
조정에서는 두 사람의 공을 기려 어재연의 아들에게 상을 내렸다.
어재연의 중군수기는 미군이 노획하여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쌍충비각 아래쪽에 미군과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을 모신 신미 순의총이 있다.
광성진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은 고종실록에는 59명의 이름을 확인한 것으로 되어 있으다.
중군 어재연 이하 모든 장병들이 총알이 떨어져도 항복하지 않고 돌멩이를 던지고
모래와 흙을 미군의 눈에 뿌려가며 저항하는 모습은 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광성진까지 점령했던 미군은 전사자 3명이라는 미미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4월25일 강화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광성진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손돌목 돈대. 여기에서 보면 강화해협이 한 눈에 보인다.
광성진 관할 돈대 가운데 강화해협 바깥 쪽으로 튀어나간 용두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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