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6.30(수)
런던 판크라스 역을 출발하는 유로스타(08:55분)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아이들을 7시에 깨워 준비를 하고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어제 파운드화를 다 써버렸는데 다행히 구내 식당에서 유로화를 받아 주었다.
판크라스 역은 역시 예상대로 구조가 복잡하고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우리가 타야 하는 플랫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시간은 다가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막판에는 뛰다시피 달려갔다.
서두르는 나에게
차 떠나지 않는다고 “Slow, Slow, Relax”를 웃으면서 반복하는 역무원들의 여유 있는 행동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함을 되찾았다.
대륙의 도시간 철도와 달리 이곳은 공항출국 체크하듯 보안검사도 하고 외국가는 기분으로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객실이 20량이나 매달려 있는 기차라서 18번 객실까지 가야하는 우리는 정말 오래 걷는 기분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출발 시간이 될 것만 같은 길.
기차 내부는 프랑스의 TGV랑 아주 비슷하다.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창밖에 런던이 아쉽게 보인다.
런던이여 안녕! 영국이여 안녕! 다시 또 오마!!
우리를 배웅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깥에 보이는 런던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08:55분 기차는 천천히 판크라스 역을 떠났다.
잠시 가더니 작은 시골역 같은 황량한 곳에 서서 사람들을 태웠다.
으잉! 판크라스 역에서 파리 북역까지 논스톱으로 가는 게 아니었군.
유로스타는 파리 북역을 향해 천천히 달렸다.
기찻길 주변 시골마을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 황량한 느낌을 준다.
간간히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어느 새 잠이 들었다.
해저터널 통과에는 40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프랑스에 들어와 있었다.
아름답고 조용한 초록들판. 그리고 누런 밀밭과 키 작은 옥수수 밭이 계속 이어졌다.
평원에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가 간간히 보인다.
잠시 후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런던과 파리는 경도상 거의 차이가 나지 않지만 표준시는 1시간 차이다.
그 덕에 실제 걸린 시간보다 시계상의 시간이 덜 걸린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오! 파리.
1년만에 다시 보는 파리.
여전히 북적대고 다른 어느 곳보다 다양한 피부색과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정신없이 몰려 다는 곳.
파리 북역에 내려 숙소인 라데팡스에 가기위해 지하철 표를 사러 갔다.
오는 동안 잠을 자느라 기차 안에서 화장실을 가지 못해서 오줌이 마려웠다.
준기도 화장실 가고 싶다고 따라온다.
유럽에는 유로화장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앞으로 기차나 공공장소에서 볼 일을 보고 다녀야 된다고 준기에게 설명을 하며 화장실에 도착했다.
도심이라 그런지 좀 비싸다.
1인당 70센트. 급해서 동전 교환하는 줄에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가서 기계에 1유로 동전을 넣었더니 그걸로 끝.
잔돈을 돌려주지 않고 먹어버린다.
결국 둘이서 오줌 누는데 2유로를 날렸다.
유료 화장실에 대해 아빠의 사전 설명이 있었건만
준기는 “프랑스는 치사한 나라. 사람들 생리현상으로 가지고 장사하는 후진국”이라고 흥분했다.
다시 자세한 설명을 해 줘야 했다.
누군가 화장실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시설관리비, 청소비, 인건비가 필요한 거라고.
그리고 그 비용은 누군가 부담을 해야 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 부담하는게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용자가 돈을 내야 하는게 맞다고.
설명을 듣고 나서도 그래도 치사한 나라란다.
처음 온 준기에게 파리의 인상을 구기는 상황.
지하철 승차권 자동발권기 앞에는 처음 파리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티켓 사기를 치는 녀석들이 늘어서서 사람들을 호리고 있었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에게 가격이 똑 같다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파리만 세 번째인데 사람 잘못 골랐다.
순서를 기다려 발권기에 가서 까르네 한 묶음을 샀다.
발권기를 작동하면서 잇달아 실수를 해서 다시! 다시!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잠이 덜 깼나. 아내의 가벼운 핀잔. “우리 신랑도 이제 총명한 맛이 갔네.”
이번 여행은 왜 이렇게 계속 허둥대는지 모르겠다.
긴장과 수면 부족인가? 아니면 총명함이 정말 사라지고 있나?
아니야, 전에 왔을 때는 같이 온 사람들과 역할 분담이 돼서 내가 신경써야 하는 게 한 두 가지였는데
이번 여행은 모든 것을 다 신경써야해서 그런거야.
머릿속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합리화를 해본다.
지하철과 전철을 번갈아 갈아타고 숙소가 있는 라데팡스 역에 도착했다.
구글어스를 통해서 대충 규모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와보니 역이 상상불가를 외칠 정도로 너무너무 크다.
아니, 프랑스 사람들도 거대건축물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나, 무슨 건물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지었데?
온갖 쇼핑센터, 식료품점, 바, 레스토랑 등등 도대체 역인지 도시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크다.
아이폰을 열어 봤지만 여기도 구글 지도검색이 먹질 않는다.
처음 켰을 때 딱 한번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먹통.
다행히 주소에 있는 위치를 찍고 나서 먹통이 되어 대충 방향은 잡아서 나갈 수 있었다.
역 바깥에서 길을 가는 신사를 붙잡고 숙소의 주소를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이 분도 정확히는 모르는 듯, 여기저기 물어보더니 택시 승강장에 가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가서 길을 물어본다.
엥? 우리나라 관행으론 이건 허용불가한데.
주소를 본 택시기사께서 정확한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시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두 분께 좀 과장 섞인 인사를 했다. 정말 친절한 사람을 곳곳에서 자주 만나니 나 같은 여행자가 힘이 난다.
숙소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숙소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역에서 조금 걷긴 했지만 주변 모습이 우리나라 일산 신도시 같다.
1970년대에 새로운 파리를 위해 조성한 이 지역은 파리 시가지와 달리 높은 건물이 많은 비즈니스 센터와 상업용 건물 그리고 주거지가 복합된 신도시인데
스카이라인이 아름답고 주변 경관도 잘 가꿔놓아 쾌적한 느낌을 준다.
묘하게도 건물의 조화를 이뤄놓은 때문인지 빌딩이 위압적이라거나 지나치게 높다라는 느낌은 주지 않았고
바람이 사방에서 잘 불어와서 답답한 느낌도 전혀 없다.
음! 니네들 선진국 맞구나.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처럼 생긴 구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을 곳 레지던스(Residhome Parc du Millnaire). 라데팡스 역에서 800미터 쯤 떨어진 곳이다.
프런트에서 아이폰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WiFi가 개방되어 있다. 좋구나!
체크인 시간이 1시간 남아 있었지만 우리 방이 청소가 다 되어 있다고 들여보내 준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모두 만세를 불렀다.
피카딜리 서커스의 군용침대 같던 숙소와 너무나 비교가 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침실.
같은 가격인데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다니.
그런데 이상하다. 방에는 더블베드가 있는데 거실에는 소파와 탁자 뿐 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리셉션에 내려가 물어보니 거실의 소파가 더블베드로 변신하는 겸용 소파였다.
유럽의 일반호텔에는 4인실이 거의 없어 아이들을 동반하는 가족여행의 경우 이런 식의 레지던스나 가족호텔을 이용한다고 들었다.
아니면 유스호스텔의 가족실을 이용하던가.
파리 몽파르나스 역 근처에 있는 꼼빠닐 호텔에 빈 방이 없어서
여행사에 근무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예약한 곳이었는데 가족들이 모두 좋다고 하니 기분이 좋다.
아침식사는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고 또 주방이 갖춰져 있어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다.
식기세척기도 있어서 우리나라 콘도 이상으로 훌륭한 숙소였다.
런던과 거의 비슷한 금액인데 이렇게 큰 차이가 나다니....
오는 도중 점심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일단 먹을 것을 찾으러 나섰다.
숙소에서 서쪽으로 4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빵집을 발견했다.
(주소 17 Rue des Étudiants 92400 Courbevoie)
크로와상을 비롯한 맛있는 빵과 음료수를 사서 맛있게 먹었다.
주인도 아주 친절하고 직접 구워내는 빵이 아주 맛있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이 집을 자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계획은 오늘 저녁에 시내에 나가서 에펠탑에 올라가 파리를 구경하고 밤에는 센강 유람선을 타는 것이었는데
피곤이 몰려온 아내가 그냥 쉬자고 한다. “그래, 뭐 그러지. 이번에 못보면 다음에 또 와서 보고.”
6년이 넘는 여행 경험에서 터득한 것은 절대 서두르지 말자는 것.
다음에 와서 또 보면 된다는 한가한 생각은 실제로 그 곳에 또 가서 볼 기회가 의외로 쉽게 온 경우가 많았다는 경험이 쌓일수록 커졌다.
여행의 첫 번째 즐거움인 먹을 것을 찾아 식료품점으로 갔다.
닭가슴살, 돼지고기, 초밥, 감자, 소시지 등을 사서 숙소로 가져와 음식을 했다.
아내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준기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던 빵집으로 크로와상과 바케트를 사러갔다.
다른 투숙객이 레지던스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그리로 나가봤다.
아름다운 신도시. 작은 공원 겸 아이들 놀이터가 있어서 마치 집에 온 것 같다.
빵가게까지 가는 길도 훨씬 가까웠다.
많은 사람들이 빵을 사려고 줄을 서 있고 오븐 앞에서 남자분이 빵을 구울 준비를 하고 있다.
갓 구운 빵은 맛있어 보인다.
거의 대부분 바케트를 사 갔고 우리 차례가 되자 점심 때 왔던 우리를 기억한 주인이 반가운 인사를 한다.
동양인은 우리 밖에 없는 가게. 연우가 좋아하는 크로와상도 몇 개 사고 바케트도 한 개 샀다.
아내가 요리한 저녁을 아주 푸짐하고 맛있게 먹었다.
식품점에서 사온 스시와 김밥도 제법 맛있었고
서양음식을 잘 먹지 못할 때를 대비해 가져온 생협스프를 끓여 바케트를 찍어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갑자기 난민에서 중산층으로 올라온 느낌.
특히 아내가 식품가게에서 사온 씨알이 작은 프랑스 감자가 의외로 참 맛있었다.
내일 돌아다닐 때 간식으로 먹으려고 달걀도 삶았다. 역시 여행 다닐 때는 삶은 달걀이 제일 좋은 듯.
여행에서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다.
여유를 찾은 아내가 한결 상태가 좋아졌다.
앞으로는 처음 일정대로 하기보다는 일정표에서 열거한 곳 가운데 꼭 가볼 곳을 하나 골라서 보고 그 다음에는 쉬엄쉬엄 다니기로 했다.
그제서야 아내는 여행 가이드북을 읽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WiFi가 너무 잘돼서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트윗에 열심히 올렸다.
연우는 아이폰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글을 써서는 자기 반 친구들을 위해 카페에다 올렸다.
내일 시내 구경을 하기 위해 일찍 잠을 자려고 했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거의 12시가 다 돼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상 고온이 계속 되었지만 에어컨이 나오는 숙소는 기분 좋은 잠을 이룰 수 있어서 행복했다.
런던 성 판크라스 역에서 파리 북역까지 가는 유로스타 기차
내부는 프랑스의 TGV와 거의 비슷했다.
시설과 주변환경으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파리 라데팡스의 레지던스.
런던의 피카딜리 백팩커스 호스텔과 거의 같은 가격에 이런 멋진 숙소라니....
우리 숙소를 찍지 못하고 우리 숙소 앞에 보이는 레지던스를 찍었는데 이 동네는 다 이렇게 생겼다.
1970년대에 파리 서북쪽 외곽에 신도시로 건설했다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 만든 도시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우리가 묵은 레지던스 뒷마당으로 나가면 이런 공원이 자리잡고 있고 주변에는 아파트와 레지던스가 많았다.
시내까지 지하철을 타면 15~20분쯤 걸리고, RER선을 타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
음식을 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 놓은 주방.
이날 저녁,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었다.
주변에는 시장과 상점이 많아서 질좋고 값도 싼 재료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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