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천(仇珍川) - 목숨을 걸고 방위산업 기술 유출을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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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서기 676년 지금의 경기도 마전 적성에서 한민족연합군(신라군을 주축으로 한 고구려, 백제 유민)은 20만명이나 되는 당나라 군과 한반도의 통합을 결정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서 첫 번째 민족통합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들어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로자 한 사람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 이 사람이 당나라에 굴복하였다면 신라군은 크나큰 곤욕을 치뤘을 것이다.
고대전쟁과 활
삼국시대에 활은 중요한 전투장비였다. 부여와 고구려를 비롯해 많은 기록에 활쏘기 관련 기록이 나오며 창업군주들은 대개 활쏘기를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기록에도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활쏘기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활은 삼국시대에 중요한 전쟁수단이었으며, 야사에는 고구려 군이 철궁을 이용해 침략자 이세민의 눈과 무릎을 쏘아 쓰러뜨려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1337년부터 116년간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초창기에 영국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육지에서 벌어졌던 첫 전투인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는 장궁대(장거리용 활로 무장한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다.
프랑스 군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퇴한 이유는 당시 유럽 활의 평균 사거리가 200보였는데 비하여 흑태자의 장궁대는 사거리가 무려 600보나 되는 활로 무장을 했고 이 활은 프랑스 기사단의 철갑을 단숨에 뚫어 버리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 활은 셔우드 숲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을 흑태자가 정규군의 무기로 채택한 것이다.(물론 유럽의 활은 우리나라 활과 다른 석궁-石弓-으로 어깨에 밀착시켜 총을 쏘듯 사용하는 활이었습니다)
총과 대포가 전투의 주무기가 되기 전까지 활과 기마병, 성곽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당나라로 끌려간 기술자 구진천
이치(李治 , 당고종 이하 "이치"로 표기)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위력적인 고구려 철궁을 가지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인 가운데서 그런 협력자를 찾지 못했던지 그는 문무왕이 우호관계를 열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오자 답방 사자를 파견하여 신라인 구진천을 데려갔다.(서기 670년)
구진천은 당시 벼슬이 사찬(신라 17관등 중 8번째 관등)이었는데 노사(弩師)로 재직하고 있었다.
☞ 弩師 : 弩는 화살을 연속적으로 쏠 수 있도록 만든 장치로 사람이 쏘는 활보다 관통력이 뛰어나 배에 장착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삼국은 경전, 천문, 지리, 기술 분야 등에 박사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사는 아마도 이 가운데 하나인 기술분야 전문가인 것 같다.☜
이치는 그를 데려다 나무로 된 쇠뇌를 만들게 했는데 처음에 화살이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치는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 보(1보는 36cm)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구진천은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치는 사신을 신라로 보내 목재를 요구하였고, 신라는 곧바로 대내마 복한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이 치는 즉시 쇠뇌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조한 후에 쏘아보니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 치는 그 이유를 물었다. 구진천은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치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구진천은 끝내 그 기술을 당나라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치는 아버지인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1천보가 나가는 고구려 철궁에 맞아 눈과 무릎을 잃고 병을 얻어 죽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고구려 멸망 후 안시성에 이세민을 위로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고구려를 쓰러뜨린 뒤 그 활로 군사들을 무장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의 기마군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중요한 방위산업 기술자를 당나라에 그냥 보내 줌으로써 676년에 당군과 마지막으로 치룬 전투의 결과가 달라질 뻔한 우를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만약 구진천이 당나라에 넘어가 활 제조기술을 넘겨주었더라면 신라는 통일전쟁에서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물론 구진천의 충성심을 믿고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국을 위해 방위산업 기술을 목숨으로 지킨 구진천은 비록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되지는 못했지만 신라인으로서 열전에 실린 그 어떤 인물보다도 먼저 열전에 실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구진천(仇珍川)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9년조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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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서기 676년 지금의 경기도 마전 적성에서 한민족연합군(신라군을 주축으로 한 고구려, 백제 유민)은 20만명이나 되는 당나라 군과 한반도의 통합을 결정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서 첫 번째 민족통합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들어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로자 한 사람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 이 사람이 당나라에 굴복하였다면 신라군은 크나큰 곤욕을 치뤘을 것이다.
고대전쟁과 활
삼국시대에 활은 중요한 전투장비였다. 부여와 고구려를 비롯해 많은 기록에 활쏘기 관련 기록이 나오며 창업군주들은 대개 활쏘기를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기록에도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활쏘기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활은 삼국시대에 중요한 전쟁수단이었으며, 야사에는 고구려 군이 철궁을 이용해 침략자 이세민의 눈과 무릎을 쏘아 쓰러뜨려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1337년부터 116년간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초창기에 영국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육지에서 벌어졌던 첫 전투인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는 장궁대(장거리용 활로 무장한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다.
프랑스 군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퇴한 이유는 당시 유럽 활의 평균 사거리가 200보였는데 비하여 흑태자의 장궁대는 사거리가 무려 600보나 되는 활로 무장을 했고 이 활은 프랑스 기사단의 철갑을 단숨에 뚫어 버리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 활은 셔우드 숲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을 흑태자가 정규군의 무기로 채택한 것이다.(물론 유럽의 활은 우리나라 활과 다른 석궁-石弓-으로 어깨에 밀착시켜 총을 쏘듯 사용하는 활이었습니다)
총과 대포가 전투의 주무기가 되기 전까지 활과 기마병, 성곽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당나라로 끌려간 기술자 구진천
이치(李治 , 당고종 이하 "이치"로 표기)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위력적인 고구려 철궁을 가지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인 가운데서 그런 협력자를 찾지 못했던지 그는 문무왕이 우호관계를 열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오자 답방 사자를 파견하여 신라인 구진천을 데려갔다.(서기 670년)
구진천은 당시 벼슬이 사찬(신라 17관등 중 8번째 관등)이었는데 노사(弩師)로 재직하고 있었다.
☞ 弩師 : 弩는 화살을 연속적으로 쏠 수 있도록 만든 장치로 사람이 쏘는 활보다 관통력이 뛰어나 배에 장착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삼국은 경전, 천문, 지리, 기술 분야 등에 박사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사는 아마도 이 가운데 하나인 기술분야 전문가인 것 같다.☜
이치는 그를 데려다 나무로 된 쇠뇌를 만들게 했는데 처음에 화살이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치는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 보(1보는 36cm)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구진천은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치는 사신을 신라로 보내 목재를 요구하였고, 신라는 곧바로 대내마 복한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이 치는 즉시 쇠뇌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조한 후에 쏘아보니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 치는 그 이유를 물었다. 구진천은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치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구진천은 끝내 그 기술을 당나라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치는 아버지인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1천보가 나가는 고구려 철궁에 맞아 눈과 무릎을 잃고 병을 얻어 죽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고구려 멸망 후 안시성에 이세민을 위로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고구려를 쓰러뜨린 뒤 그 활로 군사들을 무장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의 기마군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중요한 방위산업 기술자를 당나라에 그냥 보내 줌으로써 676년에 당군과 마지막으로 치룬 전투의 결과가 달라질 뻔한 우를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만약 구진천이 당나라에 넘어가 활 제조기술을 넘겨주었더라면 신라는 통일전쟁에서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물론 구진천의 충성심을 믿고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국을 위해 방위산업 기술을 목숨으로 지킨 구진천은 비록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되지는 못했지만 신라인으로서 열전에 실린 그 어떤 인물보다도 먼저 열전에 실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구진천(仇珍川)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9년조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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