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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벌초,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한 통고산휴양림 야영

by 연우아빠. 2009. 9. 22.

벌초,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한 통고산휴양림 야영

2009.9.18~20

9월18일(금)

지금까지는 큰집과 우리집이 조상님 묘지의 영역을 나누어 벌초를 해왔다. 묘지간 거리가 멀기도 했고, 큰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주로 해 오신 관계로 자식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묻어둔 상태. 작년까지는 가끔 따라갔었지만 험한 산속을 오르내리느라 지형지물도 파악이 안되고 당최 기억이 정리가 안됐다.

큰아버지 여든셋, 아버지 일흔하나.

이젠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벌초할 기력도 없어지고, 늦기전에 자식들에게 제대로 위치라도 가르쳐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긴 한 것 같은데 두 분 다 형제간에 말이 그리 없는 편이시라 사촌형은 큰 아버지 따라 나는 아버지 따라 각자 맡은 영역만 벌초를 해왔다. 연세드신 어른들 벌초에 계속 따라다니는 것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지난 주 사촌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예초기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할 필요없이 같이 만나서 함께 벌초를 하자고 했다. 봉화가 고향인 블로거 가운데 ‘뭉크’님 벌초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도 벌초와 캠핑을 연계해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기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지난해 지리산을 다녀온 이후에는 잘 따라 나서지 않는 아버지께 아들과 함께 어쩌면 단둘이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야영이 될지도 모르는데 벌초하고 나서 이 아들과 함께 통고산에서 야영이나 하자고 권했다. 아버지 특유의 긍정반 부정반 답변. 전화를 하는 나에게 “야영을 하러가는 건지, 벌초를 하러 가는 건지”하고 아내가 핀잔을 준다. 애들이 학교가는 토요일이라 혼자 내려가는 김에 야영을 아버지와 야영을 하는 일은 벌초만큼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내가 대충 정확하게 싸준 짐.

심플하게 챙긴다고 했건만 야영짐은 침낭과 웨버 때문에 차안에 가득하다. 출발준비는 전혀 해 놓지 못한채 연일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 게다가 목요일은 12시가 거의 다 돼서 퇴근하는 바람에 금요일 밤에 출발하는데 상당한 부담이 갔다. 금요일 일과 마치자 마자 사무실에서 달려나와 택시를 탔는데 대방역까지 가는데만 걸어가는 것 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집에 도착해 밥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또 밥을 입에 넣고 씹고 짐 챙기고...이런 분주한 상태로 짐을 차에 던져 넣고 아버지와 함께 출발한 시간이 8시 40분. 다행히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아서 영주에 있는 막내동생 집까지 11시 40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일 아침 9시 봉화 애당에서 사촌형을 만나기로 했기에 막내동생과는 변변한 얘기도 못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기.

 

9월19일(토)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한다고 왔다갔다 하신다. “5분만 더” 하다가 일어난 시간이 7시 15분. 세수하고 밥먹고 나서니 8시 20분. 36번 국도를 타고 춘양까지 냅다 달렸다. 동생 둘은 일정이 안맞아 함께 갈 수 없고, 막내동생은 대신 시원하게 마시라며 큰 PET병 2개를 꽝꽝 얼려 놓았다. 1년전에 비해 36번 국도의 자동차전용도로화 공사는 별로 진척이 없는 것 같고, 춘양부터 애당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작년 수해 흔적이 곳곳에 깊게 남아 있다.

도로 보수 복구 공사 때문에 결국 만나기로 한 곳에서 8백미터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뛰어 올라가 사촌형과 큰아버지를 만났다. 의외로 큰어머니도 함께 오셨다. 반갑게 인사하고 70도가 넘는 경사진 길을 직선으로 올라가는 난코스를 따라 첫 번째 벌초 장소까지 올라갔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아래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아버지는 정확한 장소를 알려 주시러 같이 올라갔다. 이 길은 송이버섯 따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면 1년내내 길이 보이지 않는 급경사 너덜지대. 옛날 널을 지고 어떻게 이 길을 올라왔을까 하는 생각이 늘 드는 길이다. 아버지 가라사대 이 땅은 우리 선대의 공동묘지 구역인데 옛날에는 밭뚝에 가묘를 해서 1년 정도 모셨다가 뼈만 수습해 지게에 지고 여기까지 올라오셨다고 한다. 꼭 전라도 지역의 옹관묘 매장 풍습 같은 세골장.

다행히 작년 큰 비에도 별다른 피해는 없었는데 축대를 쌓아놓은 바윗돌 몇 개가 군데군데 이빠진 것처럼 빠져서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진 채였다. 바위를 임시로 다시 채워놓고 다음에 보수하기로 했다. 대대로 자손이 귀한 집안이다 보니 후손이 끊어진 묘도 많아서 가까운 친척 묘는 우리가 벌초를 해 드린다. 아버지는 “얼굴을 직접 뵌 조상까지만 벌초해라. 이젠 이런 풍습도 너희들까지 하면 더 이상 남을 것 같지 않다. 우리 대는 모두 화장해라. 이 무슨 생고생이냐. 조상 묘 돌보는 정성을 들이는 시간에 자신을 다듬는 노력을 해서 잘살도록 하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다”라고 하시며 지금까지 고생한 이야기를 대신하신다. 이성적으로는 수긍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씁쓸한 면이 있는 조상 모시기. 그래도 작년과 재작년 수해 때 피해가 없는 것을 보니 다행이긴 하다. “예가 명당이다. 개발에 눈먼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지도 않고 그 덕에 묘를 이장할 일도 없고, 송이 따는 사람 외에는 여기까지 오는 사람도 없으니 그야말로 돌아가신 분들에겐 명당이지”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하긴 그렇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분산보관한 곳이 여기 가까운 곳에 있는데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명당이긴 하다.

너덜이 미끄러지는 길을 따라 다시 내려와 곳곳을 파헤쳐놓은 길을 건너 다시 도심까지 들어갔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같이 다녔을 때는 하룻만에 다 할 수 없어서 꼭 하룻밤 이상은 자고 나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도로도 잘 되어 있고 차를 타고 다니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하신다. 개천 보수공사를 어떻게 해 놓았는지 맑은 물이 콸콸 흐르던 동네 거랑에 물이 거의 다 말랐다. 사람이 떠나니 물도 마르는가? 물이 마르니 사람도 떠나는 건가?

다시 산길을 한참 올라가 이번에는 예초기로 넓게 작업을 하고 돌이 많은 곳은 낫으로 일일이 작업을 했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낫은 3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나니 손아귀에서 저절로 빠져 나간다. 이 곳 작업을 마치고 할머니 산소를 찾아 거의 90도 가까운 산비탈 길을 나무등걸을 잡으려 간신히 헤쳐나간다. 이 곳에서 올라온 길로 내려가 할머니 산소를 찾으려면 올라오는 길이 한참 멀기 때문에 늘 이 위험한 길로 길없는 산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몇 번 미끄러진다. 이 길은 바위산은 아니기 때문에 굴러도 좀 덜 아플 것 같긴 하지만 거의 90도에 가까운 경사길이라 서서 가는 건지 엉덩이를 산에 붙이고 가는 건지 구별이 잘 안될 정도. 진땀을 흘리며 산을 넘었다. 헌데 재작년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광경. 그 우거진 숲을 완전히 쪼개버린 계곡이 생겼다. 폭이 10m 깊이 3m는 넘을 것 같은 엄청난 계곡을 보니 수해 피해가 정말 엄청났을 것 같다. 이 지역에서 작년인가 재작년 수해 때 6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먼 친척들 가운데는 끝내 조상님 관곽을 찾지 못한 경우도 여럿 있다고 한다.

할머니 산소는 아버지가 여러 가지 표시를 해 두었지만 벌초 때마다 와서 보면 사람 키의 2~3배가 넘는 풀이 자라서 어디가 어딘지 전혀 구분이 안되는지라 몇 번을 헤매곤 했는데 이번에는 훤하게 보인다. 할머니 산소 옆에 흐르는 약숫물 나던 샘길이 계곡으로 변해 버렸다. 50년 생은 넘을 것 같은 아름드리 전나무와 소나무가 곳곳에 쓰러져 있다. 재작년에 벌초 중에 벌집을 본 적이 있어 약간 긴장했는데 다행히 벌이 없다. 예초기로 쳐 내고 낫질을 하니 금방 끝이 났다. 계곡을 내려오며 올밤이 떨어진 것을 몇 개 줍다가 산간수 암거를 내 놓은 곳에 떨어진 밤을 주우러 내려갔다가 흠칫했다. 갈색 나뭇잎 같은 것이 움직인다 했더니 독사였다. 쇠살무사 같은 모습. 사촌형이 얼른 나오라고 소리치고..그러고 보니 암거가 깊어 독사가 숲으로 다시 나오긴 어렵겠다. 도와주자니 독사라는게 꺼림칙해서 그냥 놔두고 나왔다.

계곡을 따라 내려와 보니 1시가 거의 다 됐다. 그 사이에 먼 친척 가운데 한 분이 큰 어머니께 사과를 두 꾸러미를 선물로 주셨나 보다. 하나씩 가져가라고 주신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고 점심을 먹자고 하고 차를 타고 할아버지께로 갔다. 내가 태어나기 한해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아주 어렸을 때 사진으로 한 번 본 적이 있긴한데....할아버지는 힘이 장사여서 앉은 자리에서 술 한말을 드시고 장정 3사람 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몰락해서 자식들에게 제대로 해 준 것도 없이 고생만 같이 엄청나게 하시다 돌아가신 어른. 묘터가 너무 좁아 할머니와 합장을 할 수도 없는 곳에 자리잡고 계시지만 큰 길에서 가까워 벌초하기는 제일 쉽다. 예초기 덕분에 금방 벌초를 마치고 내려오니 큰 어머니께서 집에서 싸 온 밥을 내 놓는다. 직접 담그신 된장이며, 맛있는 채소에 쌈을 싸먹는데 큰어머니께서는 옛날처럼 커다란 대접에 고봉밥을 만들어 주신다. 2시 넘어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주는대로 다 넘어간다. 3시 조금 넘어 다음을 기약하며 큰 집 식구들과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춘양시장으로 갔다.


새롭게 단장한 춘양재래시장. 다음에 이 지역에 야영을 가면 꼭 이용하고 싶은 곳

돼지목살과 상추를 사러 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춘양 장날이다. 상인단체에서 주최하는 노래자랑 행사가 한창인데 역시나 젊은 사람은 없다. 중기청에서 주는 재래시장 현대화계획 자금을 받아 시장을 정비했는지 시장이 깔끔하다. 돼지고기 한근을 주문했는데 주인이 760g을 준다. 11,000원. 그런데 10,000원만 내란다. 그렇게 깎아 주면 이문이 남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는 취급물량이 많아서 한번에 돼지 몇 마리 분을 처분하는 관계로 다른 집보다는 훨씬 사정이 좋다면서 웃는다. 목살이 상당히 좋아 보인다. 다음에 이쪽에 휴양림 여행을 오면 이집을 이용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채소가게에서 상추 반근을 천원에 샀는데 거의 한근을 준다. 깻잎도 3꼭지에 천원.

늦으면 데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통고산으로 달렸다. 다행히 수도권이나 충청권과 달리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 우리 집까지 6집. 얼른 텐트를 치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샤워를 하러 가셨다. 조용히 앉아 있으니 별로 할 일이 없다.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우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배가 고프지 않다고 그냥 주무시겠다고 한다. 하긴 점심을 워낙 많이 먹어놔서 밥 생각이 없다. 아래에 동서가족끼리 놀러 온 듯한 두 가족은 장비도 깔끔하게 제대로 갖추고 아이들을 위해서 해먹도 설치하고 아주 즐겁게 지낸다. 가정학습 휴일 신청하고 아이들 그냥 데리고 올 걸 하는 생각도 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춘양장날이라서 노래자랑이 있었다.


노래 자랑을 구경하는 사람들. 한때 이 지역은 춘양목으로 때돈을 번 갑부들이 살던 곳이었다

7시쯤 찬물만 나오는 샤워장에서 씻었다. 상쾌하다.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잘 어울리는 숲에 서서히 어둠이 내렸다. 어제 오늘 잠을 제대로 못잤으니 잠이나 푹 자보자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는 않는다.

“내가 이젠 먼길 나서는 것이 힘들어 이번 야영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숲이 참 좋긴 좋구나. 전혀 피곤하지 않구나”
“그럼요. 가끔은 좋은 숲으로 다녀야 한다구요. 몸이 무겁다고 집안에만 계시면 더 힘들어진다구요”

“꼭 그런 건 아니다. 너도 나처럼 나이가 많이 들면 체험하게 되겠지만 아이들 데리고 재미있게 놀 수 있을 때 어른이 방해가 되면 좋지 않다”
“야영은 몰라도 저희가 방을 잡아 놓고 같이 가자고 할 때는 같이 가세요”
“이렇게 왔으면 됐지. 나이 든 사람 챙기느라고 시간 많이 잡아 먹는 건 좋지 않다. 함께 다니는 나한테도 즐거운 일이 아니고”

바람이 서늘하니 4인텐트에 두사람만 누워서 그런지 더 썰렁하다. 그래도 침낭 속은 따뜻한 것이 기분이 좋다. 주변 텐트에 야영객들은 12시가 넘어서도 잠을 자지 않는 듯. 알게 모르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통고산자연휴양림 제2야영장에서 아버지와 캠핑. 아래텐트에 온 아이들. 아마도 사촌사이인 듯. 

 

9월20일(일)

아침에 일어나니 7시 15분. 나무가 해를 가려 시간이 이렇게 지난 것을 몰랐다. 일어나 밥을 올려 놓고 숯불을 붙였다. 훈연한 목살의 부드러움. 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는 보통 숯불구이와 전혀 다른 맛에 감탄을 하시고 두 사람은 밥 3인분과 돼지고기 750g, 그리고 상추 절반을 아침으로 먹었다. 숲에서 먹는 아침밥은 정말 새로운 상쾌함을 준다. 커피 한잔까지 하신 아버지는 숲을 살펴보러 산책 올라가고 그 사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혼자서 하니 3시간 가까이 걸린 것 같다. 짐을 챙겨 1시에 휴양림을 나와 처가에 들러 장모님께 추석 때 오지 못하는 대신 선물을 드리고 고춧가루 등속을 받아 집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풍기에 들러 그 유명하다는 정도너츠 집에 들러 생강찹살도너츠를 3개 사서 하나는 점심겸 간식으로 먹었다. 아버지는 10개들이 한상자에 칠천원이면 너무 비싸다고 하시고, 나는 명품은 그만한 대접을 해 줘야 명품이 된다고 하면서 “맛있다”를 연발하며 어느덧 9개나 먹었다. 원주까지는 고속으로 달렸건만 역시 라디오에서 전국 고속도로가 60~70km씩 지체구간이 있음을 알려준다. 원주에서 집까지 100km를 오는데 3시간이 걸렸다.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한 동생들에게 내년에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야영삼아 가자고 얘기하며 덕분에 재미있게 잘 다녀왔음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