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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인도기행(2009년)

첸나이

by 연우아빠. 2008. 12. 16.
2008.12.12(금)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에 자잘한 붉은 자욱이 많다. 이 소장은 아마 개미일거라고 한다. 내부가 온통 대리석인 집이고 침대 위에서 자는데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역시나 적도에 가까운 곳이라 겨울이라고 하지만 상당히 덥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주는 밥은 부실하고 반찬도 부실하고 주인 아주머니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두 인도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다. 밥도 인도 남자들이 하고 있으니 그 맛이야 말해 무엇하리. 부실한 아침을 대충 때우고 오늘 첫 번째 방문지인 첸나이 대학을 찾아 나섰다.
 
마당에서 일하는 인도사람들이 지나가는 오토릭샤를 잡아 준다. 첸나이 대학까지 50루피에 흥정까지 해준다. 첸나이는 식민지 시대에 ‘마드라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곳이다. 몇 년전 도시이름을 첸나이로 바꿨는데 대부분 지명에 마드라스가 남아 있다. 세계 3대 모래해변으로 유명하다는 마드라스 해변을 따라 오토릭샤를 타고 달렸다. 이 소장은 인도에서 양복입고 오토릭샤 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가 처음인 셈?
 
첸나이 대학은 마드라스 해변에 붙어 있다. 1847년에 영국인들이 런던 대학교를 모델로 해서 첸나이, 뭄바이, 캘커타 3곳에 대학을 세웠다. 인도에서도 알아주는 세계적인 석학들을 배출한 대학이다. 건물은 식민지시대에 지은 티가 나는 붉은 벽돌 건물로 모스크를 닮았다. 인도 건물들은 겉은 멀쩡해도 속은 형편없다는 말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시간 10분 늦게 도착했는데 S. Aravamudhan 교수가 꽃까지 들고 나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이런 환대는 처음이다. 우리 사업에 대해 설명하다가 강의를 마치고 나온 P.T. Srinivasan 학장실로 올라가 찾아온 목적을 설명하고 면담했다. 아라바무단 교수 말은 영어는 영어인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더니 스리니바산 학장의 영어는 그나마 좀 알아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소장 말로는 처음에 인도 영어가 들리지 않더니 몇 달 지나서부터 알아듣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후부터 CNN영어가 들리지 않더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맞아 준 두 분 교수님을 뒤로 하고 마드라스 해변 근처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드라스 해변은 백사장이 폭 400m에 길이가 200km나 된단다. 유럽사람들이나 외국인들은 마드라스 남쪽으로 2~3시간 거리에 있는 그림 같은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긴다고 한다. 거기를 제외하면 이 아름다운 해변은 해수욕을 할 수 없는 더러운 바닷물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사람들이 더럽힌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나머지 2개 업체를 찾아가 공식적인 일을 마쳤다. 무더운 날씨에 양복입고 넥타이 매고 헉헉 거리며 일을 마치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7시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다시 부실한 저녁을 먹었다. 이 소장이 본국에서 숙소를 예약하지 말고 자기에게 얘기했으면 이런 곳을 잡지는 않았을 거라고 미안해한다. 우리가 현지 사무소장 고생한다고 폐를 덜 끼치려고 한 일인데 이럴 땐 신세를 지는 게 좋을 뻔했다. 첸나이는 델리에 비해서 잘 정비된 편이다. 도로 상태도 델리에 비해서는 아주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 지방도로 수준은 되는 것 같다.
 
별로 할 일도 없고 유흥업소가 전혀 없는 청정한(?) 인도인지라 멀뚱하게 앉아 있다가 이 소장이 쇼핑센터나 한번 찾아가 보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오토릭샤 운전사와 흥정을 해 4km 떨어진 곳을 50루피(우리 돈으로 1,600원) 주기로 하고 탔다. Landmark라 이름 붙은 쇼핑센터인데 1,100만명이 산다는 첸나이에 이런 쇼핑센터가 달랑 두 개가 있단다. 외관은 옛날 신세계 백화점 비스므리한데 안에는 걍 종합상가다. 우리나라 양판점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이다. 여기 서점에서 파는 영어책이 아주 싸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책을 많이 사 가는데 영국에 가져와서 파는지 루피화 표시도 없이 파운드화 가격으로 표시해 놓은 책도 많다. 30분쯤 둘러보고 나니 볼 것도 없다. 마지막 저녁인데 호텔에 가서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해서 호텔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경찰관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대답이 제각각인데 그들이 말한 곳 어디에도 호텔이 없다. 여행가면 현지 땅을 밟으며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걸어서 가보자고 했더니 이소장이 말린다. 외국인이 걸어다닐 수 없는 나라란다. 그 말대로다. 화려한 쇼핑센터 뒤는 드라비다 족들인지 머리가 검고 고슬고슬한데다 인도 사람들 가운데 가장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빈민가다. 길에도 사람이 누워있고, 도랑은 썩은 물이고 불빛하나 없다. 그 곳 반대쪽으로 갔더니 보도블럭이 제대로 깔려있는 곳도 없고 울퉁불퉁하다. 이 소장이 발을 조심하면 머리에 뭔가 와서 부딪치고 머리를 조심하면 발이 구덩이에 빠진다고 한다. 과연 그 말대로다. 가로수도 제멋대로여서 어떤 곳은 몸을 절반은 꺾어야 지날 수 있고, 아무튼 성한 곳이 없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길을 깨끗이 정비하고 다듬는 일만 해도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받는 돈으로 좀 더 깨끗하고 위생적인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만들 수도 있을텐데 라고 했더니 상위 카스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의 거의 2년마다 큰 선거가 있는데 그 때마다 현금을 풀어 손에 쥐어주면 유권자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단다. 만약 누군가 3~4년 고생하면 우리도 너 낫게 살 수 있다고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돈을 들인다면 인도인 누구도 그 정당에 표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멀리 내다 볼 줄 모르는 인간들이 만든 세상!
 
 
우리가 길을 걸어가니 인도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갑자기 떠들썩한 곳이 보이더니 불빛 화려한 곳으로 우리보고 들어오라고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이 부른다. 알고 보니 결혼식 피로연 중이라 지나가는 사람을 모두 불러들이는 중이다. 재미있는 나라다. 30여분 걷다가 포기하고 10시쯤 오토릭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려고 했다. 인도사람들은 보통 영어를 기본으로 3~4개 말을 하는데 이번 오토릭샤 기사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쇼카 스트리트를 얘기했더니 아는 것 같지 않은데 무조건 안단다. 50루피로 흥정을 하고 탔는데 아니나 다를까 길을 모르는 모양이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더니 한참 가다가 또 길가는 사람에게 뭔가 물어본다. 결국 우리를 데려다 주긴 했는데 어이없게도 우리가 탄 곳에서 불과 2km쯤 떨어진 곳이다. 웃음이 나왔다.
 
다시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다. 내일은 오후 1시에 비행기를 타고 델리로 가서 거기에서 인천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장장 18시간이다.
 
2008.12.13(토)
요령이 생겨서 팬을 1단으로 틀어놓고 창문을 열어놓고 잤다. 벌레에게 물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시원해서 어제보다는 좀 낫다. 아침에 일어나 부실한 식사를 하고 방값을 치루고 렌트카를 빌려 성 토마스(St. Thomas) 성당을 구경하러 갔다. 비행기 시간까지 3시간 정도 여유가 있을 듯 해서.
 
마드라스의 성 토마스 성당은 서양의 유명한 전설이 모티브가 되었다. 사라센제국이 번성했을 때 유럽 정복에 나선 사라센 사람을 피핀이 간신히 막았다. 프랑스 남쪽 투르, 푸와티에 두 곳에서 이긴 덕분에 유럽전체가 사라센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는 것을 간신히 막은 유럽 카톨릭 세계는 자기들을 구원해 줄 신화를 만들어냈다. 예수의 12제자 중 토마만이 로마로 오지 않았는데 동방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만들어냈다. 유럽인들이 알고 있는 동방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는데 로마가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뻗친 다음에는 동방은 인도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 토마가 인도에서 카톨릭 왕국을 만들어 서방 카톨릭 세계가 위험에 빠졌을 때 프레스타 존이라는 왕이 카톨릭 군대를 이끌고 서방세계를 구원하러 온다는 신화를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유럽을 위협하는 사라센 세력에게 견디는 정신적 위안을 삼았다. 그들은 징키즈칸의 네 마리 늑대 가운데 하나인 제베가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바그다드를 공격했을 때 인도에서 온 사람도 아닌 그를 프레스타 존 왕이라 하여 교황이 직접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 남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식민지 야욕에 불타던 폴투갈 인들은 이 지역을 성 토마가 살았던 곳이라 주장하며 식민지화했다. 1551년에 성당을 지었고 그 근처에다 1894년에 큰 성당을 따로 지었다.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성 토마는 그가 남겼다는 설이 있는 토마 복음서도 교황청에서 바이블을 체계화하던 시대에 이단시 하여 성서외전으로 분류하였다. 그런 성 토마는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성인의 역사와 행적을 창작하고 마침내 마드라스라는 이름으로 그 땅을 수백년간 지배 착취하는 근거로 악용됐다. 성 토마의 유해라는 근거가 없음에도 이 땅에서 발굴한 사람의 유골을 성 토마의 것이라 하여 이 성당 지하 제단 유리관 속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이 터에서 발굴했다는 유물 전시관에는 모두 중세 이후의 카톨릭 유물만 있었다.
 
아무튼 로마의 산 삐에뜨로 성당, 에스빠냐에 성 제임스 성당, 그리고 마드라스의 성 토마 성당 이렇게 세 곳이 예수의 12사도의 시신 위에 세운 3대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근처는 인도에서 희귀한 기독교 관련 시설물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첸나이에서 가장 높은 성 토마스 언덕에 올라가면 또 다른 기념 성당이 있다. 이 언덕에서 보면 첸나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얕으막한 평지인데 이 언덕만 약간 높은 편이라 아스라이 보이는 도시에는 초록색이 가득하다.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학습을 왔는지 선생님과 기념사진도 찍고 있다. 남학생 한 무리는 외국인 3명이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겠느냐고 했더니 한꺼번에 몰려와 우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어디에서 왔느냐?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등등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이를 물어보니 15살이 대부분이다. 역시나 호기심 많은 나이라 그런지 사진을 찍고 나더니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쉬지 않는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은 다음 첸나이 공항으로 갔다. 첸나이에서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는 확률은 대략 10~15% 수준인데 하필 그 확률에 걸렸다. 거의 1시간 가까이 늦게 출발해 델리에 도착했을 때는 국제공항까지 내달려야 했다. 먼저 수하물을 부치면 그 다음은 사람이 올 때까지 비행기가 가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우리를 도와준 이 소장과 변변히 작별 인사도 못하고 검색대를 통과해 출국수속을 마쳤다. 힌디어로 나마스떼라고 인사를 했더니 세관 아줌마가 반갑게 인사를 받는다. “단야밧(고맙습니다)” 이 인사는 힌디어를 쓰는 사람도 잘 모른단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의 하지 않는 이 나라 문화 탓이라나?
 
예정보다 1시간 늦게 델리 공항을 이륙했다. 길고 긴 비행 끝에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부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세관 통과와 수하물 찾는데 불과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정말 바쁘게 살긴 사나보다. 대타로 갔다 온 출장이라 인도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발동하지 않았지만 남루하고 더럽게만 느꼈던 인도가 또 다른 모습으로 정리됐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을 외부의 침략자들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카스트를 악용하고...거기에 지배 계층이 인도의 이런 모습을 즐기며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많이 들게 하는 나라였다. 다시 가겠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NO다. 이 소장은 인도에는 신이 3억3천만명이나 있어서 한번 다녀간 사람은 그 신 가운데 누군가가 꼭 부르기 때문에 다시 온다고 한다.
 
정부정책 때문에 올해 말에 철수해야 하는 이 소장은 인도에 미련이 새록새록 늘어난다고 한다. 금년 초에만 해도 그런 미련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떠나야 하는 날이 가까이 다가 오니 인도를 떠나고 싶지 않고 꼭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든단다. 알다가도 모를 인도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나라. 세상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8.12.12~13

델리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 정도 날아가면 있는 첸나이. 식민지 시대 마드라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모래해변을 가진 곳인데 몇년전 크리스마스 때 이 곳을 덮친 쓰나미 때문에 폐허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서 내 다 본 주변 풍경. 야자나무가 많습니다.


첸나이 대학(마드라스 대학)을 찾아가는 오토릭샤에서 바라 본 첸나이 해변. 델리보다는 도로나 공기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끝없이 이어진 첸나이 모래 해변. 물이 더러워 해수욕은 못한다고 합니다. 폭 400미터, 길이는 무려 200km


첸나이 도로에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앞에 보이는 여자는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입니다. 저 옷은 천 하나를 몸에 둘둘 말아 걸친 것으로
저렇게 타고 가다가 오토바이 뒷바퀴에 옷자락이 걸려 죽는 사람도 무척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타고 다닙니다.

 


신호 대기중인 사람들

 


첸나이 해변에 있는 노동자 동상. 이 해변에는 많은 동상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공산당이 여러번 집권한 주라고 합니다.

 


여기는 타밀 주 지사를 지냈던 사람의 기념공원입니다. 첸나이 백사장에 있습니다.

 


타밀 주 지사 기념공원에서 본 마드라스 대학교 본관 건물. 겉은 멀쩡한데 속은 폐허처럼 낡았습니다.

 

 


1896년 서양사람들이 성 토마스 성당을 세웠습니다. 지하에 토마스의 시신 모형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성 토마스 성당 박물관에 있는 1896년 기념 비석

 


다양한 십자가 문양이 있는데, 이 지역을 식민지배한 폴투갈 사람들이 남긴 유물입니다.

 


1559년 비석, 근처에 1551년 폴투갈 사람이 세운 성당이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여기에도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 성당은 그 건물터에 1894년에 새로 세운 것입니다.

 

성당 지하에 내려가면 소위 성 토마스라는 사람의 기념물이 있습니다.
성 토마스가 인도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라는 조형물도 있습니다.
인도를 식민지배하려던 제국주의자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성 토마를 여기 인도 마드라스에 갔다 붙여서 전설을
창조하고 역사를 왜곡해 이 땅을 지배하고 착취했습니다. 종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악용한 간교한 자들이
만든 거짓 신화는 이렇게 시청각 교육자료가 되어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거짓 정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전승은 포르투갈이 인도를 식민지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성 토마스 성당터에서 발굴했다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 16세기 이상 올라가지 않습니다.
현재 저 성당 유물보관실에 전시하고 있는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59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진 돌비석입니다.

성당 지하실에 안치해 놓은 "토마스의 유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토마스가 살았던 당시에 유럽이나 오리엔트 사람이 알고 있던 것은 데칸고원 북쪽 인도뿐이었고
인도(무갈제국)가 데칸고원을 넘어 첸나이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도 17세기 이후 입니다.
이 당시에 첸나이 지역에는 힌두교도도 있지 않았습니다.

토마는 실제로 지금의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토마를 시리아의 수호사도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4세기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토마는 파르티아(당시 로마제국 동쪽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적대국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로마시대 아타나시우스 파가 배척한 때문에 바이블 안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도마복음서는 지중해 연안(특히 이집트, 시리아 일대)의 영지주의 교파들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 말라바스 해안에 있는 캘리컷에 유럽 사람으로는 처음 도착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침략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대 왜국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으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옛 영토를 되 찾은 것뿐이라는 견강부회를 만들어 냈는데 그 원조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폴투갈 인들이 여기에서 발굴한 사람뼈를 모아 성 토마스의 유해라고 우기면서 이 땅을 자기들 식민지로 삼는데 악용했습니다.
시신의 모형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성 토마스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1551년 폴투갈 인들이 세운 성당입니다. 좌 우 건물은 최근에 지었습니다.
폴투갈 사람들은 여기가 성 토마스가 순교한 곳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인도인들이 산상수훈을 듣고 있는 조형물

 


성 토마스 언덕에 올라가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테레사 수녀의 기념상이 있습니다.
인도 학생들이 단체로 야외학습을 왔는지 단체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지나가자 모두들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러 몰려갔습니다.

 


초록색 가득한 첸나이. 인구 1,100만명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힐을 중심으로 주변은 인도에서 거의 유일한 기독교 집결지입니다. 붉은 십자가를 단 교회가 보입니다.

 


토마스 힐에서 본 첸나이 풍경. 사방이 평지라 전망이 좋습니다.

 


인도식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깃발

 


토마스 힐에 특이하게 생긴 나무가 있습니다. 마치 줄을 널어 놓은 것 같은 나무

 


토마스 힐에 있는 교회. 두어해 전에 이 건물을 짓는 모습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아주 최근에 지은 모양입니다.

 


첸나이 공항 근처에서 인도식 피자로 점심을 먹고

 


역시 바깥 세계와 너무나 다른 호텔.
손님이 식사를 하는데도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어서 우스웠습니다.

 


첸나이 국제공항

 


하늘에서 본 마드라스 모래해변. 정말 기가 막히게 길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날았는데도 여전히 모래해변이 이어지더군요.

 


우리를 따라오는 신의 계시일까요? ^^
아닙니다. 비행기 조종석 유리에 비쳐 무지개가 생겼습니다.
첸나이 공항을 벗어나 구름 위에 올라선 순간부터 델리까지 계속 비행기를
따라왔습니다.

 


스모그가 정말 심한 델리 상공. 인도는 하늘에서 보니 남북이 확실히 구분됩니다.
남쪽은 파란하늘 맑은 공기, 북쪽은 회색하늘 탁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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