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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친절하고 깨끗한 소백산 남천야영장

by 연우아빠. 2014. 7. 14.

국립공원 야영장에 첫발을 내딛다 (2014.7.11~7.12)



5월 첫째주에 지리산휴양림을 다녀온 뒤,

한 주, 한 주 취소한 휴양림 야영장은 어느덧 7주 연속 취소하는 기록을 남겼다. T_T


고등학생이 된 딸은 여행 자체를 포기한 상태이고

그나마 중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다니려고 휴양림을 예약했었는데 주말마다 일이 생겨

아까운 휴양림 예약을 계속 취소하는 불상사가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7월26일에 정읍에서 제6회 샘골역사대회에 가족이 참여하기로 하면서

행사장 가까운 곳의 숙소를 찾다가 1년여 만에 국립공원 야영장 예약 사이트를 들어간 것.


내장산 국립공원 야영장에 예약을 성공한 뒤, 전국에 예약제로 운영하는 국립공원 야영장이

33개나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국립공원 야영장 전국일주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국립공원 야영장을 찾아보니 치악산 금대 야영장에 금요일 빈자리가 있어서 예약을 했다.

물론 주말에는 자리가 없고.

마침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연수를 받는데 금요일 일정이 오후 4시에 끝나는 것을 기회로

아들과 함께 가 보기로 한 것.


하지만, 아들은 소백산이 더 좋겠다고 해서 위약금 10%를 물고 소백산 남천야영장으로 갈아 탔다.


목요일 밤, 오랫만에 떠나는 야영에 준비물 구멍을 방지하려고 몇년만에 준비물 목록을 뽑아 동그라미를 쳤다.

적어 놓고 보니 A4용지가 한장이다.


길은 막히지 않았으나, 영춘면까지는 정말 멀었다.

영춘면사무소 소재지에 들러 미리 봐둔 하나로 마트에서 맜있는 안심을 한 팩 샀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사서 남천 야영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시.

다행히 아직 해가 남았다.


저 다리를 건너면 남천 야영장이다.


태풍 너구리는 일본에는 엄청난 폭풍우를, 우리에게는 엄청난 열기를 선물하고 사라졌다.

심산 유곡인 이 곳도 후끈한 열풍이 불었다.


짐을 옮기느라 땀으로 목욕을 하고, 

텐트를 치는데 열풍이 몰아쳐서 방수포가 이리저리 날아 다니는 통에

타프 치는 것은 깨끗이 포기했다.

우리가 자리 잡은 12번 사이트는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준기는 텐트 안에 들어가 텐트가 날아가지 않게 누워 있었다.


서둘러 팩을 박아 텐트를 고정시키고 허겁지겁 안심스테이크를 구웠다.

고기는 다 구웠는데, 감자와 양파를 깎으러 보낸 준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멀쩡하게 잘 생긴 취사장은 전깃불 켜고 끄는 스위치가 보이지 않았는데,

전깃불이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해 안그래도 배고픈 우리를 지치게 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사람을 불렀다. 확인 결과 타이머 세팅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



9시가 넘은 시간에 쌀을 씻어 솥을 불에 올리고 우린 허겁지겁 손에 잡히는 먹을 거리로 배를 채웠다.

고기 먹으면서 대충 밥이 된 것 같아서 먹으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압력밥솥의 밥은 죽밥이었다.

나와 준기는 아랑곳없이 폭풍 흡입을 시작했다.

 


마침 보름달이 환하게 떠 올랐다.

오랫만에 숲 속에서 보는 보름달은 참 아름다웠다.

골바람과 산바람이 교체하는 시간이 지났는 지, 야영장의 바람은 조용해졌다.




취사장 옆 계곡은 이렇게 널찍한 물놀이장이었다.

밥을 먹고 난 뒤, 준기와 함께 폭포 같이 물을 쏟아 부으며 번갈아 등목을 했다.

최근 가뭄과 열기 때문에 계곡 물은 허벅지 정도가 제일 깊었고, 미지근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쏟은 땀과 짜증은 등목을 하고 나니 깨끗이 사라졌다.



대구와 가까워서 그런지 우리 옆 사이트는 대구에서 온 가족이었다.

8살, 7살 두 형제는 준기에게 놀아 달라고 쫒아왔다.

가로 5미터 세로 8미터 사이트라 1동만 예약해도 텐트 2개를 충분히 칠 수 있었고

내가 예약한 12번 사이트는 사람 사이즈에 잘 맞춘 야외식탁이 있어서 이렇게 텐트만 쳤다.


최근 사무실 동료에게 얻은 야전 침대 2개가 있어서 새로운 야영 경험을 하게 되었다.

11시에 잠들어 토요일 새벽 5시 반까지 푹 잠들었다.

머리가 상쾌하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조금 더 잘까 하다가 일어나서 캠핑장을 돌아 보았다.

 


왼쪽 비닐은 유진아빠에게 몇 년 전에 얻은 비닐하우스용 장수비닐로 우리 식탁을 덮어 놓은 것.

저녁이 늦어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타프치는 것이 귀찮아 졌다. ^^



20동 정도 되는 사이트 가운데를 따라 짐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원래 여기는 7~8월 두달만 선착순으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최근 국립공원이 보수 공사를 하고

인터넷 예약제로 전환하면서 계속 개방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예약제로 바뀐 탓인지 예약해 놓고 오지 않는 곳도 있었고, 취소한 사이트도 있었다.

2박3일 그냥 지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1박2일 준비만 하고 온 터라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취사장 안에는 이렇게 세면장이 잘 갖춰져있다.

청소를 얼마나 깔끔하게 잘 하시는 지 자주 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니 사람들도 저절로 깨끗하게 이용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야영장 끝에는 글램핑이 가능한 풀옵션 야영장으로 건너가는 길이 있다.



그 길 끝에는 이렇게 텐트로 만들어 높은 곳과, 방갈로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야영이 낯설지만 장비없이 한번 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계곡 안에 이렇게 좋은 곳을 1박에 4~5만원 하는 풀옵션 사이트로 만들어야 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풀옵션 야영장 아래 계곡은 여름 물놀이와 수영에는 정말 으뜸일 것 같다.



다시 돌아온 일반 야영장, 제일 끝 입구가 우리 사이트다.

사실 오기 전에는 땡볕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사이트 마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지내기에는 그만이었다.



메뚜기 한 마리가 우리 텐트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어제의 열기는 사라지고 역시 깊은 산 속 답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한 공기가 상쾌하게 가득찼다.


둘이 먹기에 너무 많은 안심살, 

어제 저녁으로 먹고 남은 안심살 절반을 넣고 김치와 된장, 양파와 감자를 넣고 찌개를 끓였다.


"아빠, 국적 불명인 찌개지만 너무 맛있다!"

"그렇지 아들? 역시 많은 재료를 넣어서 끓이면 맛있어. 

게다가 준기를 시켜서 감자와 양파를 썰고 깎고 해서 만들었더니

더 맛있는 듯 하구나! ㅎㅎ"


"응, 어제보다 오늘은 감자 깎기가 더 쉬웠어"

"그래, 연습하면 할수록 더 잘 할 수 있을거야. 

어제 짜증내서 기분 나빴지? 오랫만에 나온 야영이라 힘들었구나.

하지만, 너가 조금만 더 잘하면 야영은 더 편해질 수 있어. 우리에겐 그게 필요해."


어제 저녁 텐트 칠 때부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들때문에 더 힘들었다.

어린 청소년이 오랜시간 학교에만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라운드 시트를 깔고, 텐트를 치고, 감자를 깎고, 양파를 깎고, 간을 맞춰보고, 밥을 해보고, 버너에 불을 켜보고 하는

모든 것들이 준기의 성장에 도움이 될텐데

그동안 나 혼자 너무 신나서 해 버린 탓에 아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아무것도 주지 않았음을 반성했다.


"다음에는 벌레를 찾아 먹으면서도 만족해 하며 하쿠나마타타를 외치는 심바를 만들지 않아야겠구나.

너에게도 사냥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해."




철수하는 짐을 챙기는 동안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영복을 가져 갔었는데, 그냥 나오기가 참 아까웠지만 준기가 가보고 싶어한 단양의 유적지를 찾아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레디! 액션!"을 연발하며 수십번을 시도했지만 아이폰으로 찍는 사진은 내 맘 같은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계곡 물에 머리를 담그고, 세수를 하고 발을 씻는 것으로 남천 계곡의 물을 떠나야 했다.



네비게이션으로 '온달산성'을 찾았더니 엉뚱한 곳으로 두번 가게 되었다.

지도를 찾아보고 나서야 온달관광지 뒷길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성에 올라가려고 등산화를 찾았느데 없다.

목록을 보고 체크를 했지만 등산화는 거실에 놔두고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준기는 챙겨온 등산화를 신고 산 길을 올랐다. 왕복 한 시간.


땀은 비오듯 쏟아졌고, 산성까지 이어진 계단 때문에 무릎이 너무 아팠다.

무릎보호대를 하고, 등산 지팡이까지 짚고 오른 길이었지만, 그동안 돌아다니지 않는 영향이 컸다.


올라가는 도중 정자 근처 계단 아래에 집을 짓고 살던 벌집에 충격이 갔었나 보다.

준기가 순식간에 손가락 한 군데와 종아리 두 군데를 쏘였다.


비명을 지르는 준기.

준기는 내 손목을 잡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내려 가야 하지 않을까?"

"왜?"

"벌에 쏘이면 알르레기 반응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잖아?"

"괜찮아"

"아빠는 아들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걱정이 안돼?"

"응, 넌 내 아들이야. 죽지 않아"

"흥, 어제는 엄마 아들이라더니. 말귀도 못알아듣고, 텐트 칠 때도 도움도 안된다더니.."


"응, 아빠도 재약산에서 호박벌에 쏘여 봤는데 11초가 지나도 아무일 없었어.

5분동안 찬 물에 냉찜질 했는데 근육통만 조금 있었고 거품 물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어"

"사람마다 다르잖아?"

"하지만 아빠 유전자를 물려 받았으면 아들도 비슷해"

"그래도 다리가 점점 아픈데"

"손가락, 발 어디에도 붓거나 하지 않잖아. 이따가 내려가서 티트리 오일 바르면 괜찮아.

그리고 더우니까 아빠 팔 잡지마. 땀이 비오듯 하잖니?"

"헐! 아빠가 사악해."


"아니, 아들. 너도 이제 무파사처럼 사자가 되어야해. 철없는 심바 같은 행동은 이제 어울리지 않는 나이야."


우리는 묵묵히 땀을 흘리며 산성으로 산성으로 올라갔다.

쉼터 마다 앉아서 쉬어야 했다.

그때, 8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우리를 추월해 갔다.


"준기도 어렸을 때는 저렇게 잘 올라갔는데..."




이렇게 낮은 곳을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 보기도 드문 일이다.

마침내 도착한 산성에는 개망초 풀이 안팎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산성에서 보이는 동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이렇게 높은 곳에 돌을 져 나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뙤약볕에서 아무것도 볼 것이 없으니 서둘러 내려왔다.

산성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묵밥과 잔치국수 감자전을 시켜서 배불리 먹었다.

어제 오늘 이틀간 엄청나게 먹었다. 


식당을 나와서 다음 목적지인 도담삼봉으로 출발했다.

출발한 지 5분도 안돼서 젊은 처자 둘이서 손을 흔든다. 

차를 세워달라는 듯.


사정을 알아보니 온달관광지에서 타고온 버스를 놓쳐서 단양읍내까지 걸어간다고 한다.

네비를 보니 단양읍내까지는 20km가 넘는 거리.

단양읍내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을 만나면 무작정 출발하지 마시고, 

관광안내소나 근처 식당에 물어서 콜택시를 부르세요. 

오는 도중에 보았듯이 차도 다니지 않고 먼 길인데 위험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잖아요?"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행 잘 하세요"




두 사람을 내려주고 도착한 도담삼봉


1970년대 초, 이 지역에 엄청난 홍수가 휩쓸고 간 적이 있었다.

도담삼봉보다 더 높은 지대에 있던 단양역이 침수되어 

그 때 서울 고모할머니 환갑에 가셨던 아버지께서 단양에서 길이 끊어져 되돌아 오셨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다리도 무너진 기억이 또렷하다.

그때 도담삼봉도 완전히 물에 잠겼고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도담삼봉에 있는 정자는 정도전이 어렸을 때 공부했던 곳이라고 한다.

삼봉이라는 호도 이 삼봉에서 따 온 것이라 하고...

이젠 관광지가 되어서 사람들이 유람선과 보트를 타고 다닌다.


준기가 재미있는 전설을 하나 얘기해 주었다.

"옛날에 도담삼봉이 정선에서 떠내려 왔는데

정선 군수가 이걸 핑계로 단양에서 세금을 받아갔다네.

근데 정도전이 어렸을 때, 

정선 군수에게 '우리 동네에는 이 물건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세요.' 라고 했는데

그 뒤로 정선 군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


"어때, 정도전 똑똑하지?"

"아들아, 아빠가 정도전이었다면 '도로 가져가지 않으면 보관료 물라'고 해서 그동안 가져간

단양군의 돈을 모두 되돌려 받았을 거야"

"헐~"



몇 년전 수양개 유적을 보지 못하고 강건너에서 바라보며 지나갔던 기억이 또렷한 단양 수양개유적 전시관


범람원과 퇴적지가 넓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곳이다.

충주댐 공사로 수몰될 상황에서 7차례에 걸쳐 발굴을 했고 그 유물들을 모아 이 전시관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각기리 선돌.

3천년 전 청동기 시대에 마을 경계를 표시하게 위해 세운 선돌이라고 한다.

암 수를 상징하는 바위 두 개를 세웠는데 금줄로 엮어 놓았다.

여기는 3천년 전 사람들도 살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오랫만에 떠난 길은 처음 생각과 달리 체력이 달리는 느낌이다.

올라오는 도중에 치악산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20분 정도 잠을 청해야 했다.


예전처럼 다니긴 힘들겠지만, 내년까지는 아들이나 아버지와 함께 캠핑을 조금씩이라도 해 봐야겠다.

짐에 도착하니 피곤이 해일처럼 온 몸을 덮친다.

그래도 준기가 원하는 단양 유적은 모두 돌아보았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