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숲여행

제주도 동북지역 여행

by 연우아빠. 2011. 5. 18.

□ 5월5일 

숲속이라서 그런가? 늦게 도착해 늦게 잠들었는데 눈은 6시가 되기도 전에 떨어진다. 리조트 주변을 산책하면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주변 들판에서 고사리를 따고 있다. 참 못말리는 사람들이다. 아침을 먹고 아이폰에 일정표를 열어 날씨예보에 맞춰 재조정 했다. 그랬는데도 차에 앉으니 어딜 먼저 갈 건지 선뜻 선택이 안된다. 일정을 짜다 말아서 그런지 여행을 워낙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윤활유가 부족한 기어바퀴 같다.

이번 여행은 제주도의 현대사, 중산간 지역 답사, 제주도의 문화와 한라산 등산으로 크게 나누었다. 먼저 이 아름다운 섬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그날의 기억을 함께 하고 싶어 숙소 앞에 있는 4.3평화공원에 들렀다. 월드컵 경기장처럼 또는 도자기 사발처럼 생긴 4.3기념관에 들어서자 쓰러진 백비가 눈에 들어왔다. 위정자들도 사람인지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달았을 때 사과하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광폭한 해방전후시대에 저지른 엄청난 살육을 지금까지도 바로잡지 못하는 가짜 위정자들에게 백비는 누워서 시위하고 있는 듯하다.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은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사과하고 바로잡는 용기를 보여 준 위정자이기에 그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제주도민 1/10이 넘게 죽고 1/10이 일본으로 망명을 가고 대부분이 왕조시대 연좌제에 묶여 2세대를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았다. 우리를 점령했던 미국은 타국인들이니 그렇다쳐도 어찌 동족이라면서 뻑하면 단일민족이라고 하면서 저렇게 동족에게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태어나서 이름도 가져보지 못한채 죽은 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3,000명이 넘는 희생자의 위패가 봉안된 위령탑 앞에서 사람의 목숨 값을 생각해 본다. 인간이 폭력과 살인을 제도화 한 것이 ‘문명’이라면 정말 넌더리나는 문명이다. 마지막으로 다랑쉬굴 모형 앞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냥하는 인간문명의 파멸적 자해행위를 보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의 해를 가리고 붓으로 역사를 고쳐 쓸 수 있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 아름다운 공원에서 녹색 잔디밭에서 공을 차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들에겐 참으로 정의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절물휴양림 근처에 있는 제주4.3항쟁 기념관. 사발그릇을 닮았다.


쓰러진 백비를 세우고 저기에 비극의 역사를 글로 새기는 날 4.3항쟁 희생자의 넋은 비로소 위로를 받으리라.


미군은 일제 경찰을 등용해 주민들위에 군림하게 함으로써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젖먹이 아기의 희생과 경찰의 서투른 대응은 3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은 4.3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합리적이고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김익렬 장군에 대한 기록.
김익렬 장군은 훗날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자신의 일기에 남겨 두었다.
일기는 그가 아주 합리적인 군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비극 속에도 이성을 지킨 쉰들러는 있다.
무차별한 민간인 학살을 막은 문형순 경찰서장. 이 기념관에는 이런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 하나씩 빈칸을 채우고 있다.



기념관 안에 방문자들이 걸어둔 메모지들.
현대사는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였건만 너무나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다.


1만3천명이 넘는 희생자의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소.
건물 안에는 이름도 미처 짓지 못한 채 죽은 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피로 물든 제주도의 아픔이 가득차 있다.


제주 시내에 나와 민욱아빠 블로그에서 본 국수거리로 갔다. 제주도 음식의 특징이 곡물이 부족해 국수음식이 많다는 점인데 육지와 다른 점은 제주도에서 많이 키우던 돼지고기와 국수를 접목했다는 것. 고기국수는 제주도의 이런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음식이다. 민욱아빠가 소개해 준 <국수마당>에 들렀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고기국수와 물만두를 시켰는데 어찌나 맛이 좋은지...육지에서는 냉면에 편육을 얹어 먹는데 제주도 고기국수는 온면에 수육을 넣어 만들었다. 이 집 돼지고기에서는 잡내가 전혀 나지 않고 고기가 너무 맛있다. 국수지만 저녁때까지 뱃속이 든든한 음식. 제주도 출입 10여년 만에 드디어 제주도 안쪽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삼성혈은 바깥보다 훨씬 서늘해 신령한 기운이 감돈다.


제주도를 세운 세 성인은 바로 여기에서 솟았다고 한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인이 아니라 땅에서 솟은 신인이 제주도의 역사를 열었다.


제주도에 여러차례 왔었지만 탐라국을 창건한 세분 성인의 탄생지를 한번도 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준기가 꼭 가보자고 해서 삼성혈에 들렀다. 경주의 계림처럼 오릉처럼 삼성혈은 울창한 숲 속에 있어서 바깥보다 5도 이상 기온이 낮은 것 같다.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신성한 느낌을 더해준다. 단군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탐라 왕국을 세운 세사람에 대한 전설은 제주도가 동아시아 문명의 중간거점으로 또는 중계지로 아주 오래전부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바다를 통해 벽랑국에서 온 공주들을 아내로 맞고 제주도를 삼분해 다스린 세 성인의 전설은 동업이 불가능하다는 한국사회에서는 보기드문 사례가 아닐까?


성산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
저승에서 번 돈으로 이승의 자식을 먹여살렸다는 제주해녀의 고단하지만 위대한 여성의 역사를 담고 있다.


삼성혈을 나와 준기가 꼭 올라가고 싶다는 성산일출봉쪽을 향했다. 근처에 
해녀박물관은 빼놓을 수 없는 제주도의 독특한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 먼저 이곳에 들렀다. 제주도 말로 ‘잠네(潛女)’라 하고 일본식 한자어로 ‘해녀(海女)’라고 한다. 남자와 농토가 절대 부족했던 제주도 사람들의 강한 생활력을 엿볼 수 있는 잠녀문화는 제주도 여성의 고단한 생활을 짐작케 한다. 내부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 놓은 지라 이런 경우에는 몇 일이 지나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데 좀 아쉽다. 제주에서는 여자아이를 낳으면 잔치를 하고 남자 아이를 낳으면 발로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고 할 정도로 여성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제주 잠녀들은 멀리 일본과 연해주까지 이주해서도 물질을 했다고 한다.

해녀박물관을 나와 성산일출봉으로 갔다. 4년전 비행기 시간에 쫓겨 아버지와 나만 올라갔었던 성산일출봉을 준기가 꼭 봐야겠단다. 마지막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오늘 일정은 시간관리면에서는 빵점이다. 오늘밤 숙소인 서귀포와는 완전히 반대쪽에서 헤매고 있다. 다행히 해가 길어서 성산일출봉 올라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육계사주의 특징이 한눈에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이제보니 프랑스의 몽셀미셀과 무척 닮았다. 고립된 섬이 모래톱을 통해 육지에 붙은 모양. 화산폭발로 함몰된 구덩이는 언제봐도 독특하다. 꼭대기에 잘 생긴 장닭과 암탉, 게다가 토끼까지 놀고 있다. 이건 누가 생각한 일일까? 




부지런한 사람은 성산일출봉에서 일출을 보고
게으른 사람은 일몰을 본다.
일출봉의 해넘이.


일출봉의 화구호. 제주도는 200개가 넘는 기생화산이 있고, 비양도 처럼 생긴지 천년정도 밖에 안된 섬도 있다.


일출봉에서 사는 닭 한쌍.


그리고 작은 토끼 한마리. 사진으로 찍어 놓으니 실물보다 엄청 큰 느낌이 든다.


성산일출봉을 내려와 서귀포를 향해 해안도로를 달렸다. 동네 수퍼에서 내일 아침꺼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가게가 없다. 다행히 길가에 큰 농협마트가 있어서 쌀과 과일을 좀 사고 안개 낀 밤길을 달려 중문에 사시는 강 선생님 댁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가 넘었다. 10여년 넘게 인터넷 역사동호회 활동을 같이 했고 겨울에는 이 댁 귤을 주문해 먹었는데 말과 글로는 뵙지만 얼굴을 뵙기는 처음이다. 어두운 길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시고 환대해 주시는 강 선생님 부부께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을 드리고 숙소로 들어갔다. 강 선생님은 제주도 토박이 말이 한국 고대어의 원형을 간직한 말이라는 점에 착안해 만엽집의 시가들을 해석하는데 대단한 조예가 있는 분이시다. 나보다 연세가 많으신데 늘 조용하시지만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조용조용한 말씨에 열정이 넘친다.

'숲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 오일장 그리고 아픈 역사  (4) 2011.05.20
제주도 서남부의 박물관과 미술관  (4) 2011.05.19
4년만에 떠나는 제주도 여행  (0) 2011.05.17
천마산 봄꽃 구경  (2) 2011.04.12
서남해안 여행(4) - 완도  (0) 2011.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