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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뜨거운 남도 여행 ...낙안, 천관산 자연휴양림

by 연우아빠. 2008. 7. 29.

뜨거운 남도, 아름다운 예술감각이 살아 있는 곳

2008.7.25~27(2박3일) 휴양림 숙박과 여덟번째 야영

마른 장마 탓에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석유 가격은 올라가고, 아직 가보지 못한 국립휴양림에 대한 답사 욕심과 함께 금요일 숙박, 토요일 야영 방식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나름 실속있는 것 같아 7월 추첨이 끝나고 나서 금요일 빈방을 이리저리 찾던 중 순천에 있는 낙안민속휴양림 휴양관(사랑방)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준기가 순천만 탐사 가자고 하던 터라 얼른 잡았다. 너무 먼 길이라 쉽게 나서지 못할 곳이었는데 작년 8월말 이 지역 출장을 기회로 삼아 낙안민속과 천관산 두 곳 휴양림을 혼자 다녀왔지만 가족여행을 통한 전국국립휴양림 답사계획에 작은 구멍이 생길 것 같았는데 이걸 메우려는 이유도 있었다. 설마 저 먼 천관산휴양림 야영장이 꽉 차지는 않으리라 하는 생각도 있었고, 만약 천관산휴양림에서 자리를 못 찾으면 휴양림을 통해 천관산 등산을 하고 목포를 거쳐 토요일 밤에 올라오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태풍 갈매기 도착 전후로 비가 엄청나게 와서 아버지께서는 여행 떠난다는 우리를 걱정 하셨지만 내 맘속에는 우중 야영도 가능하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설마 이 빗속에 야영객이 얼마나 될까 하면서... 기상청 예보가 워낙 자주 틀려서 일본 기상청과 우리나라 기상청에 들어가 위성사진을 열람했다. 전남 해안에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는 있었지만 위성사진 상으로는 비가 올 것 같지가 않다.

수납의 압박을 피하고자 OKoutdoor 오프라인 판매장에 가서 초소형 버너를 하나 더 장만해 부루스타를 대체하기로 하고, 동네 매장에서 45리터짜리 아이스박스를 대체할 26.4리터짜리 아이스박스를 샀다. 

25일 2~3시쯤 순천만 도착, 순천만생태전시관 관람, 순천만 관람, 용산 전망대, 휴양림 도착
26일 아침 등산, 강진 다산초당과 청자박물관, 천관산휴양림 도착, 생일잔치
27일 목포 자연사박물관, 해양박물관 관람, 귀가

대충 일정을 이렇게 짰는데 낙안과 천관산은 두 곳 모두 물놀이장 이용중지, 숯불구이 금지란다. 먹을 음식 구성이 아주 단순해졌다. 

입체 테트리스 하는 기분으로 차곡차곡 짐을 챙겨넣고 나름 흐뭇한 기분으로 있는데 아내가 26일이 연우생일이라고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하나를 더 들고 내려온다. 생일케이크 ?! 순천가서 사자고 했는데 생협에서 미리 주문한 거라고 한다. 순식간에 테트리스는 무너지고....

몇일 계속 오던 비는 출발시간에도 오락가락한다. 도로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오늘 순천만을 제대로 보려면 오전 9시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역시나 10시 넘어서고 짜증 섞인 소란 후에야 10시 30분 넘어서서 간신히 출발. 기름을 채우고 고속도로에 올라가자 마자 ‘지체’라는 붉은 글씨가 전광판을 장식한다. 대전까지는 역시나 많이 막혔다. 점심은 차 안에서 간식으로 건너뛰고 익산에서 20번 고속도로로 갈라져 완주TG를 빠져나왔다. 17번 국도를 타고 전주 외곽을 따라 내려가는데 속도가 별로 나지 않는다. 이러다 굉장히 지체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30여분쯤 지난 다음부터 자동차전용도로를 따라 고속도로 못지않게 잘 빠진다. 주변에 GS칼텍스 주유소는 수도권보다 리터당 100원 이상 싸다. 아까웠지만 이미 7만원(35리터 정도)어치 채운 터라 입맛만 다시면서 순천을 향해 달려갔다. 순천만자연생태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40분쯤, 약 5시간이 걸렸다. 그런대로 만족한 속도.

순천만자연생태관(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에 들어서자 2층 높이 정도 되는 재두루미 모형이 방문객을 맞아준다. 입장권을 내니 안내하는 할아버지께서 우리 아이들에게 순천만 생태를 담은 CD를 한 장씩 가서 보라고 주신다. 전시관에는 순천만을 찾아오는 새들이 만드는 새 둥지를 비롯해, 알의 모습과 특징, 서식환경, 표본모습 등 철새 생태에 대해 이해를 돕는 많은 전시물을 상당히 훌륭한 솜씨로 배열해 놓았다. 인천에 있는 국립생물자원관 못지않은 훌륭한 전시관이다.


순천만 자연생태관 내부

자연생태관 관람을 마치고 순천만 탐방데크로 들어섰다. 데크에 올라서자마자 준기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빠! 여기 게가 있어, 망둥어도 있어, 게가 서로 사귀나봐..... 몇 일 전 태풍에 쓰러진 듯 갈대밭 상당부분이 한쪽 방향으로 쓰러진 모습이다. 용산 전망대 쪽으로 걸아가는데 정말 날씨가 푹푹찐다. 준비해간 얼음물을 차 안에서 반 이상을 마신 때문에 물이 모자랐다. 아이스박스 안에 있는 얼음을 더 가져가야 했는데 잠깐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용산 올라가는 수문 앞에서 가져간 물이 바닥났다. 예비로 배낭에 끼워둔 보온병 속 얼음이 조금 있었지만 용산 전망대 가는 동안 꽤나 투덜거린다. 결국 전망대 3백미터 앞 표지에서 준기맘과 연우는 벤치에 앉아 쉬겠다고 하고 준기만 데리고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 가는 도중에 건너편 마을에서 이장님께서 느긋한 남도 억양에 구수한 사투리로 주민들에게 안내방송을 하신다. 한 5분 이상 엄청 길게도 하신다. 날이 더워 그런지 동네 장닭이 ‘꼬기요~~~오’ 울어 댄다.  


순천만


순천만 S자 샛강


다 덤벼! 하는 자세로 서 있는 게


합수지점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는 왜가리


순천만의 짱뚱이와 게

저녁노을을 한번 볼까 기대하고 갔는데 뿌연 안개와 습기 때문에 시계가 별로 좋지 못했다. 왔다갔다는 인증사진으로 준기를 세워놓고 두어장 찍는데 표정이 영 협조가 안된다. 갑자가 연우가 “짠!”하면서 나타났다. 엄마랑 둘이서 뒤 쫒아 왔단다. 사진 찍는다고 얘기하고 찍으니 두 녀석 모두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는 구름이 몰려온다. 물을 찾는 아이들에게 보온병에 남은 마지막 얼음물을 먹이고 되돌아가면 아이스크림 사주겠다고 격려를 하면서 생태관으로 향했다. 용산 전망대에서 데크로 내려가는 길 목에서 커다란 두꺼비를 만났다. 몸이 붉은 물두꺼비 암컷인 모양이다. 느릿느릿 걸어간다. 데크로 내려오면서 순천만 기수지역(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을 오가는 탐사선이 보인다. 연우는 배멀미한다고 탈 생각 전혀 없단다.  

데크로 내려오는 길에 수문을 열어 물을 빼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쇠백로 한 마리가 우아하게 날아오더니 사냥감을 찾는다. 물이 요동치는 곳이나 합류지점에는 항상 새들이 물고기를 노리고 있다. 망둥어와 게가 서로 섞여 사는 모습, 게 구멍 속을 들락날락 하는 모습, 커다란 집게발로 먹이를 붙들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고작 가로 세로 3~4cm에 불과한 작은 게들이지만 종류도 다양하고 색깔도 제각각이다. 사람이 들여다봐도 전혀 겁을 내거나 피하지 않는다. 아무도 게들을 괴롭히지 않으니 사람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나 보다. 

태풍 때문인지 탐사데크 앞에 있는 매점이 박살이 났다. 생태관 내에 있는 매점도 6시가 넘어서 문을 닫았다. 두 녀석의 입맛을 다시게 했던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차 안에 있는 얼음을 꺼내 물을 마시고 휴양림을 향해 출발했다. 20여분 쯤 지나 휴양림 안내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음식물 쓰레기봉투와 소각용봉투를 샀다. 휴양림 다니면서 늘 불만이었는데 처음으로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준비해 둔 휴양림을 만났다. 휴양관에 들어가니 바닷가보다는 시원하다. 얼른 밥을 짓고 단촐한 저녁을 먹었다. 휴양림 다니면서 이렇게 단촐한 저녁을 먹어본 것은 처음이다. 낙안민속휴양림은 EBS 방송을 볼 수 있어서 준기에게는 좋은 휴양림이다. 로봇파워 보고 나서 일기와 숙제를 하고 휴양림 산책을 했다. 좁은 휴양림인데도 한바퀴 돌고 오니 땀이 많이 난다. 후덥지근한 기운은 밤이 되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일기예보에는 열대야 현상이 있다고 한다. 내일은 전남 해안지역에 비가 온다는 예보...천관산에서 야영데크 잡기가 쉬울 듯하다. 내일을 위해 10시쯤 잠을 청했다. 하지만 휴양관 이곳 저곳에서 아이들과 여자들 비명소리가 잠을 방해한다. 나방이 날아 들어온 듯, 살충제를 뿌리는 소리가 무척 오랫동안 나면서 사방이 시끄럽다. 놀란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도 요란하고. 아마도 휴양림에 거의 처음 온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문을 열어놓고 잤는데 새벽에 약간 추워서 깼다. 아이들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5시 30분쯤. 금전산(667.9m)을 올라가보기로 했다. 휴양림 직원 얘기로는 왕복 2시간 반쯤 걸린다고 한다. 나서려는데 아내가 눈을 뜨더니 같이 가잔다. 아이들이 일어나면 보라고 메모를 남겨 놓고 06:15 아내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활엽수와 소나무가 섞여있는 산길은 걸어 올라가는 동안 얼굴에 무수히 많은 거미줄이 걸린다. 우리 때문에 많은 거미들이 아침 식사를 걸렀을 것 같다. 계곡을 지나는 동안 날벌레가 엄청 많이 따라왔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거미가 많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등산을 시작한지 45분쯤 돼서 궁글재(해발 500m) 이정표 앞에 도착했다. 왼쪽 금전산 정상까지 1.2km라 표시가 있다. 10분쯤 능선을 걸어가다가 커다란 거미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큰 거미가 있었나 싶을 만큼 크다. 준기에게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고 거미줄 아래를 엎드려 통과했다. 30분쯤 지나 금전산 정상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이정표의 거리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되돌아가는 길 표지에 있는 거리를 계산해 보니 궁글재까지 2.4km쯤 되는 것 같다. 정상에서는 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있어 사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상의 돌탑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다. 08:40 휴양림에 도착해 아침을 준비했다. 연우 생일을 위해 집에서 끓여온 미역국을 덥혀 단촐한 아침을 먹고 짐을 대충 정리했다. 바깥 햇살이 정말 따갑다. 천관산휴양림에 들어가서 생일케익을 자르려고 했는데 연우가 방에서 하자고 졸라 점심 대신 생일축하케익을 잘랐다. 연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밖에서 차려본 생일이다. 늘 준기생일 때 휴가여행을 다니느라 준기생일을 밖에서 했었는데. 


금전산 등산길에서 만난 엄청나게 큰 거미,
준기맘이 계속 들여다보니까 오줌을 누더니 줄을 타고 옆에 있는 나무로 대피합니다.
거미가 오줌 누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고속도로 같은 2번 국도를 따라 강진으로 출발했다. 일기 예보와 달리 비가 올 기색은 전혀 없고 먼 산을 배경으로 강한 뭉게구름과 국지성 소나기가 오는 것이 몇군데 보였다. 걱정이 돼서 천관산휴양림에 전화를 했다. 야영데크가 많이 비어 있다고 한다. 주말에도 야영데크가 다 차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행이다. 마음을 놓고 먼저 강진을 둘러 보기로 했다.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세대들이 답사여행의 첫방문지로 삼는다는 강진, 다산초당. 경세가로서 목민관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다. 

오후 1시가 거의 다 돼서 다산유물전시관 앞에 도착했다. 유물전시관은 패스하고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초당은 18년 유배생활을 한 다산선생이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여년을 귀양살이 한 곳으로 여기에서 500여권이 넘는 여유당전서를 완성했다고 한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황톳길은 일부러 조성한 듯. 부드러운 느낌을 받으며 고불고불 다산의 길고 긴 유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두충나무를 빽빽이 심어 놓은 길 안에는 누군가 정성을 다해 닦은 듯 바닥이 반질반질한 원두막 같은 정자에서 할머니가 손자인듯한 아기를 눕혀 시원하게 재우고 있다. 옛 언덕을 일부러 깎아내 낮게 만든 길에서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 

작은 굽이를 몇 번 돌아 나무뿌리가 계단처럼 드러난 언덕에 도착하자 연우가 힘들다고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브라키오사우르스처럼 생긴 나무가 지주에 얹혀 세월의 이끼를 덮어 쓰고 있다. 이 시골에서 진사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한 다산의 제자이자 외가 인척인 윤종진(尹鍾軫) 진사의 부부묘가 길 가에 있다. 조선 중기 학문과 벼슬로 당대의 인정을 받았던 해남윤씨 가운데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서도 강진과 해남 일대에 정착한 사람이 많았고 다산의 외가가 해남윤씨였던 관계로 인척이자 제자인 해남윤씨들과 관련한 유적도 많다.

 
광각렌즈의 압박을 많이 느낀 다산초당 

조선 후기 서학을 통해 이 땅에 천주교를 들여온 이승훈, 이벽, 이가환 등의 인사들,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와 종형제들, 그리고 해남윤씨 가문은 조선 후기 학문의 수준을 높였고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선비들이었으나 결국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무대를 잃어버린 주연배우들처럼 후손들에게 역사적 안타까움만 남긴 채 뜻을 펴지 못한 아픈 역사가 있었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재집권한 수구파의 집단이 노론벽파에게 내몰려 이 먼 곳까지 유배를 온 정약용은 나라를 위해 재능을 써보지도 못하고 인생의 황금기를 이 곳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길을 걸어서 유배지로 가던 정약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해남과 강진 일대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때로 형 정약전이 유배를 간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굳은 뜻을 꺾지 않았던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게 정약용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천일각(天一閣)에서 바라본 강진만,
누각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정약용 선생은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생각했다고 한다.

초가집은 후대 사람들이 기와집으로 바꿔 놓고 흑산도 쪽을 바라보던 자리에는 천일각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았다.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강진만을 바라보았다. 정약용은 동암과 서암이라는 초막을 짓고 거기에서 이웃에서 모여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당 오른쪽에는 연못을 파고 왼쪽 뒤편에는 바위에 정석(丁石)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 정약용의 마음은 바위와 같이 굳세다라는 뜻이었을까? 18년 기나긴 유배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노론벽파와 끝내 타협하지 않았지만 정약용 같은 인재를 수용하지 못한 노론벽파는 200여년 집권기간 동안 호의호식하다가 일본에게 은사금을 받고 환호작약하며 나라를 팔아먹었다. 지금도 그 후예들은 잘했다고 목에 핏대를 올리고 있다. 터널같은 어두운 숲길을 빠져나와 청자박물관으로 향했다. 

 
정약용의 의지는 바위처럼 굳고 단단하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약용이 글씨를 쓰고 석공을 불러 바위에 새기게 했다는 정석
정약용의 마음은 바위와 같이 굳고 한결같다라는 뜻일까요?
 


18년간 억울한 유배를 마치고 귀향명령을 받았을 때 다산은 어둠을 빠져나온 기분이었을까?

청자박물관을 향해 가던 중 점심을 먹자고 해서 네비게이션에서 ‘청자골기와집’을 찾았다. 새로 업그레이드 된 네비 프로그램에 익숙하지 않아 강진읍내를 들러서 들어가야 할 것을 그냥 박물관으로 가고 말았다. 우리 여행은 자주 금강산 구경 후에 밥 먹는 꼴이 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별로 점심 생각이 없다. 


강진, 청자박물관스러운 청자 가로등

청자박물관은 화려한 기술과 예술을 자랑하던 고려 청자와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잘 정리해 놓았다. 마침 8월8일부터 청자도자기축제를 시작한다고 안내 팜플렛을 나누어 준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인 9세기부터 황해 연안을 따라 발달한 송나라의 월주요에서 도입한 기술을 바탕으로 비취색 청자를 빚는 기술을 갖게 되었다. 작년 KBS에서 도자기 스페셜 프로그램을 6회에 나누어 방송한 적이 있다. 중국과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도자기 제조기술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도자기가 문명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정리해서 보여준 돋보이는 다큐멘터리였다.  

박물관 입장료는 어른 2천원, 어린이 1천원씩 받는다. 박물관 안에는 완, 합, 병 등 각종 도자기가 저마다 아름다운 빛과 문양을 자랑한다. 강진 일대에서 발굴한 수많은 가마터와 도자기 유적은 이 지역이 과거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연안항로를 따라 멀리 중국 월주에서 황해를 건너 일본까지 이어주는 교역로 역할을 통해 도자기 무역이 동양 3국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역사의 편린들을 보여준다. 한때 수십억 수백억을 호가하던 호사가들의 도자기 유물은 신안, 십이동파도 등 서해안 곳곳에서 발굴한 중세 청자 무역선 창고에서 쏟아진 도자기 세례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상황도 만들었다. 낚시에 걸려 나온 주꾸미가 달고 나온 청자 대접 하나가 계기가 되어 서해안 ‘보물선’ 탐사작업에 착수해 지금까지 고려 무역선과 송나라 무역선을 발굴해 냈다. 여기에 실린 고급, 중급, 보급형 청자는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즐거운 각종 청자 도자기 전시품, 강진 청자도자기박물관

 

한때 세계에서 1개 밖에 없다던 매화병이 신안해저유물선에서 3개가 나왔고 그 전에 다른 2개가 당시 가격 10만원에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졌다. 이제는 보물로서의 가치보다 당시 해상무역로와 교역규모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 점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할 만큼 청자무역선 발굴은 대단한 문화사적 가치를 제공했다. ‘청자’라는 이름으로 통칭하는 도자기 하나하나는 독특한 빛을 띠고 있고 모양이나 문양은 보는 사람의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 조선의 ‘사기장’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의 ‘도공’이 되어 17세기 유럽 귀족들의 로망이 된 일본자기를 탄생시켰고 이 기술을 자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유럽 왕실들은 도자기 전문가 양성을 위한 왕립학교를 다투어 세웠다. 이들의 손을 통해 유럽을 대표하는 마이센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명품들이 탄생했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상관없이 떨어진 듯 한 곳에서도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청자박물관을 나오니 너무 덥다. 근처 가게에서 얼음과자 하나씩 물고, 강진청자축제 안내 팜플렛에 소개해 놓은 강진읍내의 ‘청자골기와집’ 식당으로 가 봤다. 고대광실 같은 한옥집에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았는데 가격을 보고 경악했다. 한상 단위로 판다는 한정식은 최하가 8만원이다. 이천 쌀밥집에서 우리 가족이 먹어본 양이 있는지라 절반도 못먹고 쓰레기 장으로 가야할 금액이 분명하여 식사 포기하고 휴양림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마누라의 ‘쫀쫀한 신랑’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지만 이건 택도 없는 가격과 음식낭비라는 생각이다. 안내 팜플렛에 있는 다른 집들을 찾아가 봤지만 영업을 하지 않거나 저녁이 거의 다 돼서 그런지 음식이 안된다고 하는 집들이 상당수다. 포기하고 휴양림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중간에 연료를 넣으려고 보니 수도권과 거의 같은 가격이다. 3만원만 넣고 내일 목포로 가는 길에 다른 주유소를 찾아 채우기로 했다. 

역시나 천관산 도립공원을 굽이굽이 돌아들어 입구에 도착해 다시 산 중턱을 따라 낸 길을 굽이굽이 돌아 휴양림으로 들어갔다. 작년에 왔을 때와 달리 네비에 이 길이 표시가 되어 있고 도중에 도로 확장공사를 하는 차량이 몇 군데서 작업 중이다. 오른쪽 언덕을 올려다보니 비가 많이 오면 바위가 쏟아지지 않을까 좀 걱정스럽다. 관리소에 도착해 데크비를 내고 천관산 등산에 대해 물어 보았다. 복사해 둔 등산안내도를 보여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왕복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야영장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짐을 올렸다. 대부분 이 지역 차 번호인 것을 보니 역시 수도권에서는 너무 먼 곳이다 싶다. 

뿔난 마누라를 못 본 척 혼자서 그늘을 넓히려고 타프를 쳤다. 혼자 치면 당연히 시간 몇배로 들고 힘 몇배로 든다. 열심히 치고 있는 동안 배고픔에 지친 아내가 포기하고 쌀을 씻으러 갔다. 정말 썰렁한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가 휴양림 여행 하면서 이번처럼 빈약한 식사를 계속한 것은 처음이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내와 연우는 겨울 침낭을 쓰고 몹시도 더워서 준기와 나는 여름 침낭을 쓰기로 했다. 아내는 어제 순천만 답사에 오늘 아침 등산을 한데다 더위에 점심을 걸러서 지쳤는지 바로 잠이 들었다. 연우와 준기는 불을 켜 놓고 일기를 열심히 쓴다. 옆 텐트에서 라디오 소리가 계속 들린다. 문명의 소리를 산 속에서 들으니 귀가 아주 거슬린다. 연우도 잠들고 막 잠을 청하려는데 준기가 춥다고 한다. 차에 가서 침낭을 하나 더 가져와 이중 침낭을 만들어 준기를 집어 넣었다. 침낭을 가지러 주차장으로 내려 가는데 밤하늘의 별이 마구 쏟아진다. 별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낮에 그렇게 뜨겁더니 언제 그랬냐 싶다. 원래 타프를 낮게 쳐 놓고 이너텐트만 칠 계획이었는데 해가 지고 나니 기온이 급강하 하는 것 같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아 플라이를 덮고 펼쳐 놓았던 바람막이를 모두 닫았다. 대단한 산의 날씨. 

이젠 적응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아마 야영장에 켜 놓은 가로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깊이 잠들려는 순간 갑자기 준기가 막 매달린다. 일어나서 보니 어느새 침낭 밖으로 나와있다. 침낭 밖이 몹시 추우니 살이 따뜻한 아빠에게 본능적으로 잠결에 매달린 것이다. 침낭속에 다시 집어넣고 화장실에 가려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 하늘이 온통 하얗다. 눈이 오는 것처럼 쏟아지는 별빛과 작은 그믐달이 온 산을 덮었다. 잠결에 감탄을 하며 아이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아침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에 해가 뜨고 햇살이 따갑게 텐트를 파고 들었다. 머리도 무겁고 팔과 어깨가 몹시 쑤신다. 힘이 죽 빠지는 느낌이다. 휴양림 관리소에서 아이들 물놀이장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제 물을 채우려는 모양이다. 아내도 간신히 일어나긴 했는데 오랜 자동차 길과 등산으로 지친모양이다. 아침을 준비해서 먹고 천관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따가운 햇살과 무더위가 너무 심하다. 우선 내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운전을 해서 목포를 거쳐 집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에게 애들을 데리고 이 더위에 등산은 무리인 것 같다고 얘기하고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쉽게 잠들지 못한다. 한 10여분간 누워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 구름이 몰려 온다. 일단 등산은 포기하고 짐을 챙겼다. 이미 점심때가 되었다. 아내가 어제 들렀다가 그냥 나온 청자골기와집에 새로 산 등산모자를 두고 왔다고 해서 그것을 찾으러 강진 읍내로 다시 들어갔다. 모자를 찾고 나서 재작년 영암에서 먹었던 독천식당의 낙지요리가 생각이 났다. 네비게이션을 검색해 보니 휴양림에서 30분 정도 거리다. 가족들에게 더위를 이길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독천시장을 향해 갔다. 재작년에 왔을 때는 한밤중에 이 지역 사람의 안내를 받으면 따라왔던 길이라 시장이름과 위치만 생각이 났는데 낮에 와보니 독천시장 전부가 세발낙지 식당이다. 

개천변에 있는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재작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독천식당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가게로 들어갔다. 따뜻한 연포탕으로 기운을 돋우려고 했는데 준기가 언제 먹어봤는지 산낙지 회를 먹겠다고 한다. 좀 어이가 없었는데 2년전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머니가 사 주신 산낙지 회를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력이 놀랍고 어린 녀석이 꼬물거리는 그 낙지를 먹겠다는게 우습다. 한접시에 4만원이나 하는데 주인께서 반접시도 판다고 한다. 낙지연포탕(14,000원/인 × 2인분), 준기가 원한 산낙지 회 절반(20,000원), 낙지구이 절반(20,000원)을 주문해서 포식을 했다. 가족들 모두 대만족. 대도시에서 먹는 낙지요리 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맛있는 집이다. 청도나 밀양, 진주처럼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에서 싸움소에게 여름에 기력보강을 위해 낙지를 먹이는데 역시 기력회복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음식이다. 휴양림 하루 숙박비를 한끼 식사에 다 쏟아 부었다. 

독천에서 리터당 1,860원 하는 GS칼텍스 주유소를 만나 리터당 100원 할인하는 카드로 7만원어치 주유했다. 배도 부르고 차도 부르고 이제 느긋하게 목포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했다. 3시가 좀 넘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무안과 목포시가 연합해 야심차게 만들고 있는 목포신도시에 바다를 낀 해변에 자연사박물관, 문예역사관, 도자기전시관, 남농 미술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한곳에 모아 놓은 아주 멋진 곳이다. 

목포자연사박물관 입장료(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를 내면 옆에 있는 문예역사관을 함께 볼 수 있다. 자연사박물관은 국립생물자원관과 차원이 다른 예술적인 박물관이다. 전시공간을 구성하고 기획한 큐레이터가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물 하나하나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인 조화와 문양을 구성하여 박물관 전체가 한 개 유기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준기는 너무 좋아한다. 이 정도로 잘 만들어 놓았을 줄은 예상을 못했는지라 생각해보니 남은 관람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내부에서 유물 보전을 위해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해서 관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좀 단축할 수 있었지만 하루 온종일 볼 만한 곳인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본 목포자연사박물관

 
목포자연사박물관,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성훈 장관의 기증품 전시실, 이런 기증문화 아름답습니다.

애들을 재촉해 문예역사관, 남농미술관, 도자기전시관은 패스하고 길 건너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여기는 내가 과거 역사스페셜을 방송할 때부터 점찍어 놓은 곳이었다. 고대 항해의 전문가인 우원식 선생의 많은 노력이 들어간 이 유물전시관에는 실물크기로 구조물 일부를 덧대 복원해 놓은 신안해저유물선 실물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배는 과거 중세시대 동 아시아 무역선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실감난다. 중국 동해안 영파의 경원항을 출발해 산동반도에서 장산곳과 개경 벽란도를 경유, 목포 신안앞바다를 지나 일본으로 가던 청자 무역선이 이 근처에서 침몰해 십만점이 넘는 청자가 고스란히 8백년간 바다에서 잠자고 있다가 발견된 것이다. 당시 무역체계의 부족부분을 상당부분 밝혀줄 귀중한 자료를 전해준 이 유물선은 현재 좌현쪽만 남아 있는데 몇 년에 걸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여기 전시해 놓았다. 함교에서 서서 배를 바라보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전시해 놓아 고려 무역선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금년 말까지 이 전시관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목포자연사박물관, 해양유물전시관, 문예역사관이 자리잡고 있는 바닷가

준기가 유물 퍼즐을 맞춰보고 있을 때 학년이 더 높은 아이가 뒤늦게 와서는 자기가 빼앗아 맞춰본다. 준기가 항의하지만 그냥 무시당한다. 뒤늦게 아이 엄마가 쫓아와 자기 아들을 나무랐지만 들은체만체 한다. 준기는 화가 나서 마구 쏘아댄다. 왜 차례를 지키지 않느냐고, 힘이 세면 다냐고... 아주머니는 매우 미안해하며 사과했지만 그 분의 아들은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준기를 달래 퍼즐 맞추기를 하도록 했다. 원리원칙주의자인 아빠를 닮아 준기도 살아가는게 좀 고달프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것은 안 닮아도 되는데...끌끌...

 
8백여년전 중국 남부 월주 경원항에서 출발해 산동>벽란도>신안을 거쳐 일본 하카다로 가던 청자무역선이 신안앞바다에 침몰했다.
2천톤 규모를 자랑하던 거대 선박은 지금은 선박 좌현부분만 남아 보전처리후 여기 전시되었다.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유물선.

이렇게 많은 박물관과 전시관을 한 군데 모아놓고 공원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처음 기획한 사람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적어도 계획도시라면 이런 개념을 가지고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도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짧아서 너무 아쉬웠지만. 박물관 카페테리아에서 팥빙수를 사먹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 팥빙수는 팔지 않는다고 한다. 얼음과자 하나로 더위에 지친 입을 달래고 오후 5:40 박물관을 출발했다. 집까지 332km, 예상도착시간 10:00,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달려 집에 도착한 시간은 다행스럽게도 9:30분, 중간에 저녁을 먹은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남짓 만에 달려온 것이다. 두 녀석에게 이번 여행의 울림은 아직도 계속 남아 있다. 천관산 등산을 인연으로 남겨 두었는데 아내도 가을에 천관산 등산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