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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_칠보산자연휴양림

by 연우아빠. 2006. 10. 18.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와 마지막 여행(칠보산자연휴양림)

2006.10.3~5(2박3일)

징검다리 휴가를 낼 수 있다면 한가위 연휴가 길어질 수도 있어 부산에 사는 동생에게 10월 4일 휴가가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동생은 휴가를 낼 수 있다고 한다.

2년전 통고산 자연휴양림에 온 가족이 함께 갔던 여행에 대해 모두들 반응이 좋아서
작년 여름에는 덕유산 자연휴양림에서 가족이 모였었다.

바다와 산을 함께 볼 수 있는 칠보산 휴양림을 가족여행지로 정하고 뒤늦게 예약사이트를 들락거리다
장미방과 참나리집 취소분을 잡고 부모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3일부터 2박3일간 휴양림을 중심으로 영덕여행을 하기로 했다.




경북 영덕 칠보산 자연휴양림에서 본 동해바다

칠보산은 예전에도 몇 번 가보려다 사정이 있어 예약취소를 자주 한 곳이라 이번에는 꼭 가 봐야겠다는 생각도 컸다.
재작년 한가위 때 긴 연휴을 이용해 통고산 일대와 7번 국도를 따라 울진에서 평해까지 여행을 하며 아름다운 바닷가의 가을을 맛보았던 터라
가족들 모두 즐거운 기대를 하고 있었다.

마침 사무실에서는 둘로 조를 나누어 2일과 4일에 연차휴가를 쓰기로 했는데,
먼 곳에 부모님이 계시는 맏아들의 처지를 배려해 준 덕분에 4일날 휴가를 낼 수 있었다.
2일날 근무를 마치고 저녁 8시에 집을 나서 부모님이 계시는 영주로 갔다.
11시 도착. 부모님은 주무시지 않고 반겨주신다.



상당히 가파른 구간이 있었던 칠보산 자연휴양림 산책길.


10월 3일

숯불 바베큐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칠보산쪽 정보를 들었기에 바비큐 대신 전기그릴을 가지고 갔다.
고기 좋기로 정평이 있는 시골 동네 정육점에서 목살을 사고 마당 텃밭에 가꾸는 채소를 적당히 솎아서 출발했다.

어머니께서 소일거리로 가꾸고 있는 텃밭은 농약을 치지 않아 채소의 뒷맛이 고소하다.
재작년 여행길에서 어머니는 멀미가 심해서 여행 중간에 막내동생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바람에 마지막날은 아버지만 함께 하셨다.
금년에는 멀미가 심한 어머니를 위해 차를 트라제XG로 바꾸었고 앞좌석을 뒤로 약간 뉘어서 편한 자세로 가실 수 있게 해 드렸다.

봉화 현동으로 가는 36번 국도를 타다가 영양 수비로 가는 31번 도로를 타고 다시 백암온천으로 가는 88번 도로를 탔다.
재작년에 어머니께서 보지 못한 백암온천에서 평해로 가는 길에 핀 배롱나무 가로수의 장관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일교차가 심한 오지라서 그런지 단풍은 제법 곱게 물들었고
오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어 탁트인 가을하늘과 함께 맑고 신선한 풍경을 천천히 감상하며 갈 수 있었다.
백암온천부터 평해까지 가는 길은 동해바다가 보이는 장관이었지만 아쉽게도 배롱나무는 아직 꽃봉오리가 그다지 많이 피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참 곱다라고 하시며 연달아 감탄하셨다.

구주령 정상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동해바다는 평해를 지나면서 우리 왼쪽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후포의 큰 마트에 들러 맛있는 사과 1상자와 포도 3상자를 사고 간식거리와 찬거리를 만들 재료를 샀다.




산책길에 핀 구절초



7번 도로에서 휴양림으로 진입하는 입구는 자동차 1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지만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별 탈없이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휴양림까지 8km를 가면서 산과 바다와 하늘이 짙푸른 색과 고운 단풍으로 사람의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점심도 먹고 천천히 온 까닭에 집에서 4시간 이상이나 걸려 휴양림에 도착했다.
열쇠를 받아 짐을 내려놓고 부산에서 오는 동생네가 도착할 때까지 휴양림 산책길 돌아보려고 나섰다.

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을 앓아서 고생하셨는데 4년전 상태가 좋지 않은 오른쪽을 인공관절로 수술을 하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기분이 좋으셨는지 손자 손녀들 손을 잡고 따라 나섰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경사가 있어서 좀 힘들었을텐데도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셨다.


어머니께서 힘들어 하실 것 같아 절반쯤 돌고 휴양관 가운뎃길로 내려오는 산책로를 따라 내려왔다.
제1휴양관 앞 망원경으로 동해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부산에 사는 동생이 도착했다.
짐을 내리고 모처럼 만난 사촌아이들끼리 배드민턴도 치고 “꼬마야 꼬마야” 줄넘기도 하면서 잘들 논다.

특히 연우는 저와 동갑인 사촌 희원이와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야외 숯불바베큐 대신 미리 준비해간 전기그릴로 고기를 구워 모두들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7번 국도의 가로등 물결과 바다를 둘러싼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 불빛,
그리고 하늘에는 거의 보름달이 다 된 달이 환하게 웃고 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완벽한 날이 있을까 싶다.



10월 4일

새벽 5시 아버지께서 나를 깨웠다.
아버지는 등산을 좋아 하시고, 연세가 드셨음에도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을 너무 좋아 하신다.
피곤해 하는 동생을 남겨두고 아버지와 함께 오랜만에 산행에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68살 동갑이신데 어머니와 달리 등산을 하시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등산용 지팡이를 드렸더니 힘이 더욱 나신단다.
810m 정도인 칠보산을 올랐는데 드문드문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많아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좋은 길이었다.
등산 2시간 15분, 하산 40분 정도 걸렸는데 아버지와 오랜만에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대처로 자식을 내 보내놓고 얼마나 심심하셨을까 생각하니 아버지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참나리 집에 짐을 옮겨 놓고 영덕 쪽으로 내려갔다.

7번 도로는 마치 고속도로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가는 도중에 해맞이공원과 풍력발전소를 찾았다.
풍력발전소 앞에 올라가니 바람을 맞아 물결치는 억새와 코스모스가 바다와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풍력발전소에서 내려다 본 초가을 풍경. 저 앞쪽 쪽빛은 하늘이 아니고 바다다

자식들 걱정에 좋아하는 여행도 아끼고 아끼시는 우리 어머니는 웬일인지 “얘들아. 여기 참 좋구나, 경치가 너무 예쁘다” 하신다.
주름이 많은 노인들 사진 자꾸 찍으면 뭐하겠냐고 사진을 잘 찍지 않으시던 분이 동생과 제수씨에게 사진도 찍어 달라고 하시고
아버지와 두 분이 사진도 찍었다.



 
영덕 해맞이공원 풍력발전소



단체사진도 한번 찍고

아름다운 공원과 발전소를 뒤로하고 강구항에 도착했다.
시장이 복잡하고 차도 많아서 한바퀴 돌아 다시 들어갔다.
동광어시장에 들어가 가족들이 먹을 모듬회를 주문하고 마침 어머니 고향분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게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영덕대게를 참 좋아 하신다.
옛날 강원도 바닷가에 사실 때에는 자주 드셨지만 내륙으로 이사 들어 온 뒤로는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대게 철이 아니어서 영덕대게는 없었지만 제일 비슷한 북한산 게가 있어서 6마리를 사서 쪘다.
모두들 맛있게 먹고 나니 어머니는 조카가 아파서 같이 나서지 못한 막내네 가족이 생각나셨나보다.
막내 주겠다고 게를 다섯 마리사서 얼음 포장을 했다.

다시 길을 나서 삼사해상공원에 도착했다.
어촌민속전시관은 요모조모 잘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에게도 재미있는 곳이고 바다가 넓게 보여 전망도 참 좋다.
주변에 새로 공사를 하는지 조금 정리가 덜 된 곳이 있었지만 잘 만들어 놓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나리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땅거미가 내린 휴양림을 온가족이 천천히 산책했다.



 
똘망 똘망한 눈으로 시뮬레이션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


 
맛있는 대게는 이런 것이랍니다.(어촌민속전시관 대게박물관)



 
어촌민속전시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강구항




어촌민속전시관 뒷마당


10월 5일

아버지께서 등운산도 올라가지고 하셔서 다시 새벽길을 나섰다.
등운산은 칠보산보다 조금 낮은  767m 였다.
솔숲이 아주 좋아 상쾌한 느낌을 준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아주 그만이었다.
다만 내려오는 길이 숲속의 집 근처에 와서는 아주 가팔라서 가족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좀 무리일 것 같다.

아버지는 그래도 전혀 힘들지 않으신가 보다.
어머니께서는 떡방앗간을 하는 외사촌 형의 추석대목 일을 도와야 한다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신다.
막내에게 게를 가져가 빨리 쪄주고 싶으신 모양이다.

9시 30분쯤 체크아웃을 하고 출발했다. 동생은 백암온천 길로 들어섰다.
나는 어머니께서 멀미를 덜 하시도록 울진 쪽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재작년에 못보신 월송정도 마음이 급하신지 그냥 지나가면서 보는 것으로 때우신다.
막내집에 도착해서 게를 찌고 막내 손자와 손녀를 안아 보시고 흐뭇해 하신다.




경북 울진 민물고기연구소 전시관



민물고기연구소 양여장



10월 6일, 가장 긴 한가위의 시작


아침에 늦잠을 잤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둘째네 차를 타고 아침에 본가에 가셨다고 한다.
10시쯤 둘째가 전화를 했다. 어머니께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신단다.
가족들 챙겨서 올라 가려고 했더니 10분쯤 지나 동생이 다시 전화를 했다. 빨리 올라오라고...


느낌이 이상해서 혼자 차를 끌고 본가에 갔더니 어머니께서 백짓장 같은 얼굴로 누워계셨다.
머리가 아프시고 자꾸 토한다고 하는데 먹은 것을 토하는 것이 아니라 신물만 토한다고 한다.
손과 발을 만져보니 아주 차다.
자주 체하시는 분이라 일단 손발을 주무르고 등뼈를 짚어보니 중간 쯤에 아프다고 하셔서 체한 것으로 생각했다.
머리를 맛사지하고 손발을 주무르니 손발이 좀 따뜻해 졌다.
체했을 때 쓰는 비방대로 제수씨가 손을 땃다.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어머니가 완강하게 버티신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송탄에 사는 누나와 자형이 내려오고 있다고 전화가 왔길래 어머니께서 누나를 보시게 하려고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제수씨가 죽을 끓여 들였더니 앉아서 잡수시고 다시 누우셨다.
얼굴빛이 조금 나아졌길래 안심을 하고 누나가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에 나와 둘째는 처가로 갔는데 밤 10시 조금 너머 깊은 잠에 드는 찰라에 전화가 왔다.

순간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다시 토하신다는 것이다. 자형이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고 한다.
나는 총알처럼 튀어나가 차를 끌고 병원으로 갔다.
출발한지 1분도 안돼 다시 전화가 왔다. 안동으로 간다고....

나는 안동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자형에게 말하고 급하게 차를 안동병원으로 몰았다.
도착하니 의사가 CT를 보여주며 아주 급박한 상황이라고 경북대학교 병원으로 옮기라고 한다.
서울로 모시고 가겠다고 했더니 의사선생님이 아주 단호하다.
어머니께서 지주막하출혈이라 대구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확률은 30%도 되지 못하고 서울로 가신다면 도중에 돌아가신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길로 대구로 달려갔다.
새벽 2시15분 경북대병원에 도착해 CT를 찍고 혈관조영촬영을 하고 의사는 수술직전에 나를 불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경우의 수를 모두 설명받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응급조치 탓인지 어머니의 손발은 따뜻했기에.... 아버지가 도착했다.

어머니 상태를 보시더니 눈물을 흘리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30년전 본 바로 그 눈물이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아버지께 상황을 설명하러 가는 순간
나는 알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의외로 담담하셨다.
이상하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수술실로 들어가시면서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나는 살아서 병원을 나설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7일 오전 10시 조금 지나 시작한 수술은 5시간 동안 계속됐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집도의께서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하셨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으로 여겼던 나는 우리를 알아보고 말씀까지 하는 어머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다행이다.
아버지는 침착하라고 하시면서 어머니께서 오래 병원에 계셔야 할 것 같으니
남매들이 순서를 정해 어머니 병상을 지키라고 하신다.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있는 신 교수님께 어머니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겠냐고 전화로 물었더니 병원의 조치와 판단은 적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런 외부 충격 없이 지주막하출혈이 생겼다는 것이 의외라고 한다.
대뇌 한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혈관이라 강한 외부 충격 없이는 터지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조금만 부딪치면 멍이 잘 드신 분이라 혈관이 약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만 할 뿐이다.


일단 어머니께서 안정된 상태라 하여 부산에 사는 둘째는 아이들을 부산에 데려다 놓고 바로 대구로 와서 병상을 지켰다.
그 사이에 누나와 나는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8일 오후 6시 둘째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경련을 일으키며 의식을 잃어 두 번째 수술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KTX를 타고 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이상하게 계속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된다” 도리질을 하며 대구에 도착했더니 수술을 마치고 나온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셨다.
어머니를 보니 다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아! 이게 천륜이라는 거로구나.
냉철하기 이를데없는 나도 결국 어머니 아들이었구나.
나는 어머니 손을 놓고 밖으로 나와 펑펑 울었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셨다.


“슬퍼하지 마라.
누구나 한번은 겪고 누구나 한번은 가야하는 길이다.
네 어머니는 아쉬운 나이이기는 하지만 아들 딸이 모두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을 보았고,
마지막에 좋은 곳에 여행도 함께 다녀왔고
자식들이 이렇게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삶을 마감할 수 있으니 한편으로는 행복할 것이다.
너무 슬퍼해 몸을 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게다”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9일 아침에도 어머니의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수술이 성공해 깨어나더라도 평생 혼자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며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신다.
억장이 무너지고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아! 하늘은 왜 내게 이런 아픔을 주시는가.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더 이상의 고통만 주는 수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고 의사에게 말했다.
잠시후 수술을 지휘한 의사 선생님이 내려와 그래도 30% 정도의 희망은 있으니
의사로서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고 하신다.
마지막 유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 3차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며 한없이 울었다.


3시간 걸린 수술이 끝나고 환자가족을 대기실에서 20분 정도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2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갑갑해서 죽을 지경이다.
30분이 더 지나서야 의사가 중환자실로 불렀지만 어머니는 백짓장 같은 얼굴에 손발이 차가웠다.
1차 수술이 끝났을 때 모습과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의사 선생님은 이제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절망감에 다시 터지는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녁 면회에서 어머니는 동공에 반응이 없었다.
산소 호흡기 없이 독자적으로 숨을 쉬지 못한다고 한다.
아아! 어머니는 마침내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무너져 내린다.


저녁 면회가 끝나고 의사가 불렀다. 가족들 모두 불러 모으라고..

어머니께 닥친 사실을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알릴 수가 없었다.
병원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날 것 같은 불안감에 울음을 참고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족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해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10일 새벽 2시 25분 아버지와 나, 둘째동생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는 한마디 말씀도 남기시지 못하고 영원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뱃속 깊숙이서 올라오는 울음과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건 인력으로도 이성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울음이었다.


사흘간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유골을 등에 업고 어머니 유언대로 경치 좋은 곳에 뿌려드리려고 산을 올랐다.
생각해보니 평생 단 한번도 어머니를 업어 드린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눈물을 곱씹으며 산길을 올라 부산 내려가는 둘째네와 고향 근처에 사는 막내의 집도 잘 보이고
서울 올라가는 우리들도 잘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어머니를 뿌려드렸다.


4남매 애써 키우시고 오늘날까지 노심초사 하시며 호강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어머니.
그 어머니는 우리의 애통한 울음을 남겨 놓고 가을바람을 타고 바다보다 푸른 가을 하늘을 날아 하늘로 가셨다.

앞으로 매년 한가위 때는 칠보산휴양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께서 아름답다고 하신 그 풍경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황망 중에 당한 일이라 어머니가 떠나셨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아마 살아가면서 어머니 생각은 지금보다 더 실감나게 많이 날 것 같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께서 너무나 깔끔하게 뒷정리를 해 놓은 것을 확인하고 더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부디 행복하세요.

* 이 글은 다유네(
http://www.dayune.com/)에 올렸던 글입니다.


 돌아오는 길, 검마산자연휴양림 근처에서 잠시 쉬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