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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상당산성 휴양림

by 연우아빠. 2013. 10. 22.

얼이 있는 역사와 얼이 없는 역사의 차이...청주청원 여행


2013.10.19~20(1박 2일)



2009년 대야산 휴양림에 갔을 때 상당산성에 휴양림을 만든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 휴양림이 2012년 12월에 뒤늦게 개장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올 1월 <48시간의 행복> 책자를 엮을 때 이 휴양림의 후기도 넣자는 얘기가 있었지만

이미 완성단계에 접어든 상태라 다음 기회로 넘길 수 밖에 없었다.


2008년 10월 황정산 휴양림을 끝으로 전국국립휴양림 일주를 마친 뒤에도 

황정산(삼척), 대야산(문경)에 차례로 생겨서 다녀온 뒤에는 여행 동력이 많이 떨어졌다.


2012년 말에 상당산성 휴양림을 개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여행 기운이 발동을 하여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이리저리 시간이 흘러 이제 기회를 얻었다.


아이들 시험 때문에 장모님 생신 모임도 일주일 미뤘더니 공교롭게도 결혼기념일과 겹쳤다.


아들을 제외한 다른 식구들 굼뜨기는 이미 익숙해진터라

일정을 잡을 때 많이 보겠다는 생각은 일체 하지 않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청남대나 둘러보고

일요일에는 상당산성 등산과 고인쇄박물관 둘러 보는 것으로 정했다.


운보미술관은 아무리 볼만하다고 한들 도화서 화공들이 그린 의궤만한 감동도 없을 것이고

세종임금과 관련 있는 초정리는 완전히 물장사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 번잡스럽기만 할 뿐

이리 저리 이유를 찾고보니 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그래도 날씨가 좋으니 길 떠나는 기분은 좋다.


금요일 밤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12시 넘어 집에 도착했다.

늦으면 길 막힌다는 생각에 토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긴 했으나 출발은 10시쯤...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위로해 본다.


도로가 많이 막힌다는 정보를 보고 39번 국도로 내려가 평택-안성 고속도로를 탔다.

운이 좋아서 12시 5분전에 청남대 입구에 있는 부부농장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점심을 마쳤다.

예약하고 오는 손님들이 많나보다.


부부농장은 주인장의 부친께서 오랫동안 땅을 일궈 자손들에게 큰 행복을 준 듯 하다.


식탁 위에 올라온 상추며 푸성귀들은 모두 이 농장에서 직접 가꾼 모양이다.

상추 씨앗이 맺힐 때까지 키운 것을 시골에서 텃밭 가꿀 때 본 이후 근 40년 만이다.

싹이 나지 않는 씨앗으로 장난질치는 다국적 농업기업들의 횡포 때문에 생명이 망가지는 것 같은 분노가 문득 치민다.


한비자는 인간이 원래 사악한 것이 아니라 종사하는 직업이 사람을 사악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 씁쓸하다.


4만평 가운데 1만평만 가꾸고 있다는 이 농장이 부럽다.

하긴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땅을 준다고 해도 경작을 못할거다.



30분 정도 부부농장을 둘러보고 나서 청남대로 떠났다.

군사반란 수괴 전두환이 만들었다는 남쪽 청와대.

많은 국민들을 죽이고서 희희낙락하는 휴가 모습이 역겹다.


본관 뒤편 모습을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 찍어 보았다.

이 곳은 국민을 죽이고 뇌물을 챙겨먹고 끝끝내 비겁했던 반란군 수괴이며 독재자인 

범죄자를 계속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을 시민들에게 돌려준 상식적인 대통령에 대한 기억과 함께

민주주의를 협잡으로 얼룩지게 만든 자들에 대한 기억도 함께 남을 것이다.



이 곳을 시민에게 돌려준 대통령을 기억하는 기념물



그리고 결코 용서해서는 안될 범죄자들에게 불필요한 관용을 베픈 마음 약한 분에 대한 기억도 함께...

그 쓰레기들을 왜 용서하셔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진창에 빠지게 했는 지 원망이 든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650여개의 계단을 힘들게 올라서 대청호 전체를 조망해 본다.

기온이 올라가서 그런지 약간 뿌연 느낌이 들어 최근 30여년의 역사만큼 갑갑한 느낌이다.


청남대를 대충 돌아보고 나니 어딜 또 들리기에는 어정쩡한 시간이 되었다.

해 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가자는 생각에 휴양림으로 길을 잡았다.


장모님과 큰처남이 바리바리 싸 온 채소며, 과일이며 맛있게 먹었다.

휴양림 안에는 떠드는 사람도 없고 정말 조용하다.


저녁을 먹은 뒤, 준기는 외삼촌에게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문화충격을 받았다.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에 청소년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얼마나 이해했을 지 궁금하다.

이 날 밤 외삼촌에게 들은 이야기는 준기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운 일이라는 진리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일요일 아침, 알람시계 소리에 일찍 일어났다.


2000년 이후에 개장한 휴양림들이 대개 그러하듯 숲의 규모는 작지만 잘 다듬어 놓았다.

이제 국립휴양림은 그만 만드는게 어떨까 싶기도 하다.

새로 개장한 휴양림들은 숲의 규모가 작아 숙소 이외에 숲이 주는 느낌이 매우 옹색하다.





아침을 먹고 상당산성까지 등산을 했다.

나무 그늘로 죽 이어진 오솔길은 땡볕을 막아 줘서 걷기에 좋았다.


1시간 반쯤 걸었을까? 산성 아래에 도착했다.

청주 쪽에서 친구와 함께 여길 올라온 게 벌써 15년이 훨씬 넘었다.


조선 후기 양란을 겪고 난 다음에 겨우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숙종 무렵에는 많은 토목공사가 있었나 보다.

이 산성 역시 숙종 때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둘레가 4.4km에 내부에는 관청과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이 성은 백제시대에 상당현이라는 곳에 쌓았다 하여 상당산성이라 하기도 하고

김유신의 아들이 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고한다.

김유신이 화랑으로 처음 출전해 승전했다는 낭비성이 이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선조실록에 보면 상당산성과 관련한 원균이 이야기가 나온다.

상당산성을 새로 쌓을 때 원균이 감독을 한 모양인데 

부유한 마을이건 가난한 마을이건 사람들을 똑 같이 징발해

가혹하게 다뤘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고,  

움막인지 토굴인지를 지어놓고 열심히 감독했다는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철이 말하기를 그렇게 관리감독을 하며 쌓았다는 성이 바로 무너졌다는 비판을 합니다.

뭘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왜 그렇게 빨리 승진을 했는지 신기하다.



점심 때가 다 돼서 성을 돌아보긴 그렇고 서문인 미호문까지만 다녀왔다.

햇살이 한 이틀 강렬하더니 옅은 습기 때문에 전망이 좀 흐릿한 것이 아쉬웠지만

청주, 청원 일대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산성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성들은 병사들이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피할 수가 없는 성들이 대부분인데

상당산성 역시 그런 구조였다.



휴양림을 나와 인공조미료 맛이 가득한데다 어설픈 반말을 찍찍 던지는 식당에서 묵밥을 먹고

단재 선생님 사당을 찾았다. 아들 녀석의 강력한 희망사항 때문에...



성균관 박사에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선비이자 대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

초대 대통령이란 작자는 하와이에서 국적 칸에 버젓이 '일본'이라고 써내는 시대였는데

왜놈들과 싸우느라 일생을 던진 이 선각자는 해방된 조국에서 후손들은 국적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왜놈에게 출생신고 할 수 없다는 단재 선생님의 생각으로 아드님을 출생신고하지 않아

한국 국적과 단재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원금도 받지 못하는 곤욕을 치렀다.

참 더러운 시대를 만났는데 깨끗하게 살다 가신 분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을 삼습니다.



하늘북 노래(天鼓頌) / 신채호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 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 하리라..



충북 청원에서 자란 단재 신채호 선생.

그는 열렬한 광복전사였고, 학자였고, 문장가였고, 선비였다.

그의 글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이 절절히 베어있고

영혼과 힘이 가득하다.

이런 절절한 시를 교과서에 싣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강렬해서 일까?

이 정도로 절절함이 담겨 있는 시라면, 광복투쟁에 나선 선열들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강렬했는 지

굳이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번 여행길에서 만난 단재 선생님의 시비는

아직도 일제 침략의 망령을 떨쳐 버리지 못한 못난 후손의 가슴을 파고 든다.

단재 선생님의 사당과 기념관에 찾아 오는 이가 별로 없다는 말씀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배웠어야 여길 찾아 오지...



기념관과 사당을 둘러보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누워 계실 단재 선생님의 묘소에 올라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인쇄 박물관에 들러 현존하는 인쇄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했다는 흥덕사 터와 박물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이 근처 흥덕사에서 인쇄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서 만들었다는 건데 

불행하게도 우리문자가 없어서 극소수 식자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을 찍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역사적 파급은 미미했다.


만약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독일어 바이블이 아니라 라틴어 바이블을 찍는데 썼더라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역시 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고려금속활자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도구나 기능이 뛰어나봤자 담긴 얼이 형편없으면 별로라는 것을 확인하는 현장이랄까.

훌륭한 금속활자로 귀족들이나 읽을 책을 인쇄하고 

뛰어난 붓질 능력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봉사하는 그림을 그린다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여행이었다.


아름다운 가을여행이었지만 한편으로 가슴이 답답한 여행인 것은 

세상을 답답하게 여기는 마음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