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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익산 - 전북서북부여행(2)

by 연우아빠. 2013. 3. 16.

익산(3.1)

 

 

마동이가 왕이 된 이야기

 

다른 나라에는 미천한 계급 출신이 왕이나 황제가 된 사례가 제법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찾기가 힘들다.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은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널리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인데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되어 있는 무왕이 어째서 검은 용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백제 수도 보다 한참 남쪽에 있는 익산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는지

궁금한 일이다.

마를 팔던 마동이와 무왕은 어떤 관계이며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무엇인지

미륵사지 5층탑 사리감에서는 왜 선화공주가 등장하지 않는지도 의문이다.

 

또 백제의 왕경으로 알려진 공주, 부여와 다른 모습을 한 유물도 의문이다.

전남북지역은 일본 큐슈 지역과 함께 묶인 단일세력권이 아니었는지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오늘은 그런 신비한 이야기를 전하는 익산을 돌아보려고 한다.

 

입점리 고분전시관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어제 4월 하순처럼 따뜻했던 날씨는

찬바람이 쌩쌩부는 겨울로 돌아갔다.

 

밖으로 구경 다니기가 싫은 그런 날씨.

오늘 첫 번째 찾아갈 곳은 입점리 고분군이다.

 

호남 지역에는 영산강 일대에서 발견되는 장고형 고분이 독특하다.

이 고분은 전남북 지역은 물론 남해안을 따라 일본 큐슈와 혼슈까지 퍼져있다.

국경과 민족 개념이 강한 근대 민족국가가 등장한 이후

사람들의 이성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을 많이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현재의 국경과 민족을 근거로 과거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아닐까 한다.

 

전남북 지역과 일본의 큐슈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해류와 계절풍을 따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입점리 고분은 1986년 칡을 캐던 학생이 우연히 발견해 신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십수년간 지속적으로 발굴한 곳으로

동아시아 고대 문화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고분지역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해 주었다고 하고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세상에 압도적 강대국이 아닌 한 일방적으로 흐르는 문화는 없다.

지금과 같은 민족과 국경의 개념이 없던 시대였던만큼

필요에 따라 자연환경에 따라 주고 받는 한 문화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익산의 입점리와 영산강 일대에서 발견되는 묘터와 유물들은

양쪽 지역이 청동기 시대부터 활발하게 교류를 해 온 유물들을 담고 있다.


입점리 고분전시관



전시관 내부


유약을 바른 도자기가 나오기 직전에는 이런 경질토기가 제일 고급제품이었다.


입점리 금동관모는 나주 영산강 유역, 그리고 멀리 큐슈지역 출토품과 같은 사람이 만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관 뒷편, 고대 사람들의 모덤이 모여 있는 야산이 자리잡고 있다.


중턱에 있는 묘자리들은 생각보다 크기가 아주 작다.

어린이거나 아니면 뼈만 수습해서 매장을 한 풍습을 가진 것이 아니었을끼? 

 


무덤 노출상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았던 흔적, 고인돌.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고분전시관


마치 가야의 고분들처럼 입점리 고분은 산 위에 모여 있는 형태.


 

왕궁리 유적 전시관

 

마를 원료로 하여 독특한 음식을 만드는 집이 있어서

점심 먹으러 들어갔다가 맛에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내부 분위기는 좀 엉뚱했던 집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왕궁리는 익산이 한 때 백제가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무왕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왕궁리 유적은 현재 발굴된 규모만 따져도

남북 470m, 동서 280m에 이를 만큼 규모가 크다.

무려 4만평 정도 넓이인데 나침반으로 방위를 살펴 보니

거의 정확하게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넓은 땅에 남아 있는 것은 왕궁리 5층 탑이다.

중후반 신라 탑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제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왕궁리 5층탑은 해체 복원 작업 중에 명문 사리감이 발견되어

조성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확인 되었다.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인장기와만 해도 60가지나 된다고 한다.

문자 기록에서 사라진 행정구역, 사람이름 등으로 추정되는 글자와

다양한 기호가 찍혀 있는데 아직도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제는 기와 전문가인 와박사(瓦博士)가 있었다고 한다.

 

왕궁리 유적과 무왕과 의자왕의 활발한 대외활동을 보면

이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멸망한 듯한 느낌을 준다.

 

방대한 왕궁리 유적 한가운데 아름다운 5층탑만 덩그라니 남아 궁궐터를 지키고 있다.

봄이라지만 매서운 바람이 분다.

이 넓은 땅을 가득채웠을 그 많은 전각과 집, 그리고 사람들은 어디로가고

이렇게 찬바람만 불고 있을까?

훗날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역사의 평가보다 역사의 이름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왕이 세운 왕궁터가 있는 왕궁리 유적 전시관


왕궁리에서 발굴한 건축물의 기초공사 모형. 단단한 기초공사가 백제의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왕궁리에서 발굴한 특이한 토기


백제는 여러 분야의 기술전문가들이 있었다. 다양한 기와 제작자를 확인할 수 있는 글씨가 찍힌 기와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다양한 토기 그릇


4만평 정도나 되는 광활한 벌판에 천년 영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이 5층 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제가 만든 이 석탑은 이후 한반도 석탑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보석 전시관

 

추운 날씨를 핑계로

왕궁리 유적 근처에 있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쌍릉은 생략하고

실내 구경을 하는 보석 전시관으로 갔다.

 

어렸을 때 기억이 또렷한 큰 사고가 익산에서 있었다.

화약을 가득 실은 열차 안에서 관리자가 술을 마시고 초를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가 한 밤중에 폭발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사건.

이른바 이리역 폭발사건이었는데 그 후로 이리시는 옛지명인 익산으로 바뀌었다.

그때 당시 이리는 보석가공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보석이 원래 아름다운 것인지 빛을 받아 아름다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익산 보석박물관..다이아몬드를 형상화 한 것인지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일본규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금동신발

고구려 안악3호분에는 중갑기병이 말을 향해 달려드는 보병들을 이런 신발로 공격하는 모습이 있다.


수정


보석박물관 전시실


메모를 해 놓지 않아서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절로 알려진 미륵사는 무왕 때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 온다.

전해오는 기록이나 이야기를 보면

원래 습지였던 이 곳에 배수작업을 하고

산 하나 정도는 들어갈 만큼 흙을 다져 넣어 절터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도시를 조성할 때 이렇게 한 사례는 동서고금에 매우 많다.

이렇게 하면 넓은 평지를 조성할 수 있어 사각형 격자모양의

계획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미륵사터는 남북으로 560m, 동서로 245m

면적이 4만평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다.

경주 불국사처럼 절 앞에는 저수지가 있고

지금은 기초석만 남은 중앙탑과 좌우에 9층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륵사지 탑은 서쪽 탑의 일부로 6층까지 일부분만 남아있는 상태.

시멘트를 발라 임시로 지탱하고 있던 석탑은 2001년에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해체작업만 몇 년이 걸렸고 지금은 복원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해체작업에서 나온 사라함에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다르게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방대한 미륵사터 역시 차갑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어갈 건물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절터에서

과거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

눈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라는데....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바람은 더욱 차갑다.

 

익산 미륵사지 전시관


전시관 내부. 금동향로


미륵사터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바둑판과 바둑돌 모형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전 개로왕에게 도림이라는 승려를 위장 귀순시켰다.

도림은 바둑을 좋아하던 개로왕에게 훌륭한 바둑솜씨로 환심을 산 뒤에 무리한 토목공사를 권유해 백제를 내부에서 파탄냈다.

신하와 백성들의 반대를 듣지 않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즐겼던 개로왕은

얼마뒤 장수왕에게 망명해간 백제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사로잡혀 아단성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나라도 대규모 토목공사를 사랑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새겨 두어야 할 삼국사기 기록이다.

   


미륵사탑을 해체하기 전 모습

원래 9층이었던 탑이 6층만 일부 남아 있었고

1920년대부터 한쪽 면에 시멘트를 발라 겨우 지탱해 오고 있다가

2001년에 해체작업에 착수해 2008년 해체를 완료했다.


해체한 탑이 있던 자리는 문화재청에서 복원을 위해 건물로 감싸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백제 때 처음 건축했을 때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9층 동탑이다.


4만평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터에서 발굴된 석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미륵사 9층탑 서탑이 서 있던 자리.


미륵사는 원래 가운데에 거대한 9층탑과 좌우로 작은 9층탑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탑은 작은 9층탑 중 6층만 남아 있었던 서쪽탑이다.


 


삼일식당(전북 익산시 중앙동266-4 063-855-5272 참게백반)

익산 시내에 있는 참게백반 전문식당

수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의 참게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만큼 맛있었다.

먹다가 남은 참게장을 싸서 숙소로 가지고 와서 3박4일을 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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