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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서대문 형무소의 속살

by 연우아빠. 2012. 1. 11.

2012.1.7(토)
아들 녀석의 성화에 몸살 후유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요일에 서대문 독립공원 답사를 다시 갔습니다.
지난 11월 5일(토)에는 효창원을 집중적으로 보느라고 서대문 독립공원은 문 닫는 시간에 도착을 한 탓에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이번에는 안에 꼭 들어가 봐야겠답니다.

연우는 멀리 전학간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거기 데려다 주고
남은 가족 셋이 서대문 독립공원을 보러 갔습니다.



날씨는 좀 풀렸다고 하지만 역시나 겨울인지라 쌀쌀합니다.
더구나 일반 유적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형무소 유적이니 오싹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에서 꼭 해보지 않아도 될 경험 가운데 하나가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는데 말입니다.
형무소 유적을 올라가는 길입니다. 19세기~20세기 제국주의 시대 건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저 붉은 벽돌일 겁니다.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관람료를 내고  형무소 안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왼쪽은 나가는 문, 오른쪽은 들어오는 문. 오른쪽에 보이는 문은 이 감옥에서 시간을 보낸 분들에겐 끔찍한 문이었겠죠.
1908년에 일제가 세운 감옥.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거죠.



문을 들어서면 바로 역사전시관이 있습니다.
관리동으로 쓰던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입니다. 1, 2층 전시실은 난방이 되는데 그 외 건물은 난방이 전혀 안됩니다.
안그래도 썰렁한 날씨에 한서린 역사가 담긴 건물이라 더 추웠습니다.


전시관안에는 대한제국 멸망의 시작부터 보여주는군요.
1854년 미국 페리제독의 함포외교에 굴복했던 일본은 20여년 뒤에 이웃나라인 조선에게 똑같은 수법을 써먹습니다.
1875년 무단으로 조선의 영해를 침범해 수로 측량을 하며 해안지대에서 함포사격을 하는 등의 도발을 하였으며, 특히 일본군함 운요오호를 강화도에
접근시켜 수로측량과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에 도발하였고, 강화도 초지진 포대에서 대포를 발사한 것을 핑계로 강화도를 침략하였습니다.

서양 무기로 무장한 일본에게 1592년에 침략을 당했던 조선은 다시 서양무기로 새로 무장한 섬오랑캐에게 또 시 수모를 당했습니다.

병자수호조규라 이름 붙은 이 조약은 제1관에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시작하고 있지만, 이 조문의 목적은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
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주권국이므로 조선 침략은 청나라에 대한 도발이
아니므로 청은 개입하지 말라는 저의를 담고 있다. 

이 조약을 체결한 한일 담당자는 신헌과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인데 둘은 묘한 인연이 있다고 한다. 신헌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장군의 8대손이며, 구로다는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군 3방면 지휘관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8대손이라고 한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안주하고 있던 조선은 되돌릴 수 없는 치욕의 역사를 밟아가는 첫 발을 내디딘 셈이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의 한일병탄조약문과 이를 게시한 관보.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식보도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는 초기부터 조보(朝報)라는 이름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공식적인 소식을 전하던 수백년 된 소식지가 있었다.
일제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이 소식지는 관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모형.
관리동, 일반감옥, 사상범(광복운동 투사들) 감옥, 노역장, 지하고문실,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 교수대, 시구문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일제가 설치한 근대식(?) 형무소 시설 배치도



일제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는 돈 없으면 정신도 타락한다는 점일 것이다.
돈이 없더라도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던 조선은 정신도 함께 타락했는데 광복된 대한민국은
일제가 남긴 더러운 유산을 재활용 했다.
조선총독 관저는 대통령 집무실이 되었고, 조선 총독부는 중앙청이라는 이름의 정부청사로, 그리고 서대문형무소는 서대문 구치소로
재활용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때 광복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는데 해방된 대한민국의 군사반란정권들은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는
도구로도 악용했다.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두려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진정 부끄러운 일은 두렵고 부끄럽다고 외면하고 감추고 미화하는 비겁함이다.



1908년 대한의 선비들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 진공작전을 펼쳤다.
그 선봉에 섰던 허위를 비롯한 의병장들이 일제에게 잡혀 재판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허위, 이강년, 이인석, 박정빈... 네분을 일제가 재판한 기록문서가 전시되어 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고 해서 선열들이 조용히 있었던 시대는 아니었다.
1919년 3월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매국노 처단과 일제 주요기관을 공격했던 27명의 결사대가 있었다.
깨알같은 역사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용기있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책임을 남겼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순국한 영원한 민족의 누나 유관순열사, 류관순 열사
기존의 영정이 친일화가가 그린 것이라 많은 비판을 받아오다가 새로 만든 영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옆에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여자분이 <유관순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조기 교육은 역시 오래 각인 되나보다.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교과서에서 이 분을 <누나>라고 배웠다.


이 형무소에서 고문과 투옥 그리고 죽음까지 불사했던 용기있는 선열들의 모습이 네 군데 벽을 가득 채웠다.



그 가운데 무작위로 세 분의 사진을 찍어서 집에와서 자료를 뒤져 보았다.
이 분은 얼핏보면 영화배우 정재영 씨를 닮았다.
임혁근 지사. 전북 익산이 고향이시고 이 사진이 찍힌 1930년 당시 32세였던 분입니다.
1930년 12월22일 일제에 항거한 덕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은 분입니다.
치안유지법은 일제판 국가 보안법입니다.


 


그리고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진 이수섭 지사.
1929년 식민지 노예 교육을 타도하자는 학생운동을 고무하는 격문 240매를 인쇄, 우송 배포하였다는 죄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분입니다.
당시 나이 22세. 경북 청송 사람이군요.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이 분은 임예환 선생입니다.
천도교 대표로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분입니다. 당시 나이가 55세였네요.


 

1980년대부터 젊은 사학자들은 항일전쟁 시대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그동안 친일파와 군사반란정권에서 의도적으로 금기시했던 묻혀있던 역사적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1928년 원산 총파업. 원산시를 완전히 마비시켜버린 이 사건은 항일전쟁이 계급전쟁으로 비화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1920년~1930년대는 전세계 피압박 민족과 계급, 그리고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 막시즘, 무정부주의는 들불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막시즘의 세례는 소련의 지원아래 몽골, 중국으로 번졌고 몽골에 두번째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습니다. 항일투사들 가운데는 이들의 힘을 이용해 일제를 타도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는데
간도지역에서 강력한 투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는 막시즘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산당과 노조를 불법화하고 강력한 탄압을 가합니다.


이 사진들은 사실 <고문>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약한 피해 모습입니다.
현장에 가서 보시면 인간이 얼마나 잔악할 수 있는 지 모골이 송연할 지경입니다.
<문명>이란 것은 기술의 발달을 수반하는데 고문기술 역시 고도로 발달하는 것이 <문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고문에 굴복한 분들에게 결코 비난을 가하지는 못할 듯 합니다.
이런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은 분들에겐 한없는 존경을 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오늘 우리가 독립된 국가를 유지하는데 기초가 되신 분들입니다.



일제 순사부장과 형무소장이 허리에 차고 다녔던 왜검
한일 문화의 차이는 선비(士)에 대한 관념도 달랐습니다.
일본의 선비는 칼을 찬 무사였지만 조선의 선비는 붓을 든 사대부였습니다.
일본의 관리는 당연히 칼을 차는 것이 권위를 상징했고 조선의 사대부는 붓을 들었던 것입니다.
붓을 든 나라에 칼을 찬 침략자는 결코 같이 살 수 없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감옥 시설.
2층으로 되어 있는 복도형 구조입니다.
감시하는 일제 간수인형이 2층에 있네요.



서대문독립공원 개관 기념으로 생존해 계신 유명한 항일투사들의 족적을 본 떠 전시한 곳입니다.
이병희 여사. 2008년 KBS에 출연해 일제가 어떤 고문을 가했는지 그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어떠했는지 생생한 증언을 하신 분입니다.
어린이에겐 절대 보여줘선 안될 잔악한 내용입니다. 이병희 여사는 그 고문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병희 선생은 저
항시인이자 행동하는 항일투사였던 이육사 선생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분입니다.

오마이 뉴스에도 기사가 났군요. 자세한 기사(  http://goo.gl/epdxI  )


행동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대화> 등 한국 현대 지성사를 대표하는 역저를 남기신 분이시기도 하고
6.25 때는 국군 장교로, 언론인으로, 학자로서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사반란정권에 대항해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신 분이며, 자신의 오판에 대해서는 겸허하고 솔직한 반성을 하신 면에서도
한국 현대사의 대표 지성인으로 손색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 분도 군사반란정권 때 여기에 갇혀서 고생을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작년 겨울 이소선 여사는 먼저 간 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
2011년 1월 세상을 떠난 이 변호사는 군산반란정권 하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몸은 던진 사람들을 위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싸웠던 인권변호사의 대부였다.


18살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 열사가 잔악한 일제의 고문에 숨을 거둔 지하감옥 모형.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하 감옥은 철거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뒤쪽에는 독립된 건물이 하나 있다.
한센병을 앓고 있던 죄수들을 가둬 두었던 병동. 이 건물에만 난방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 수천년간 우리 주변에는 세계를 주름잡았던 강대국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거란, 몽골, 여진....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살아 있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마사다 저항사건>을 미화해서 가르친다고 한다.
이스라엘 군복무자들은 모두 마사다(또는 맛사다) 언덕에 올라 <마사다는 다시는 함락당하지 않는다>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저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저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시는 외적에게 함락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민주주의를 지킬 것입니다.
당신들에게 진정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