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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유럽연수(2007년)

영원한 도시 로마 (3) - 바티칸 (1)

by 연우아빠. 2008. 2. 16.

2007.12.24 영원한 도시 로마 그리고 바티칸


한동안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지만 어느덧 냉담의 시기를 넘어 졸업(?) 단계까지 와 버린 나.
바티칸!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앞에 서니 묘한 기분이 든다.

한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온화한 미소와 그의 인간적인 품성에 환상을 품었던 때도 있었다.
성당에서 맺은 많은 인연들 때문이기도 했고, 또 공격적인 종교강요 행위에 강하게 저항했던 개신교와 달리
나 스스로 받아들였던 카톨릭이었기에 
시스티나 성당의 크리스마스 성가를 들을 수 있거나,
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자정미사를 바티칸에서 참례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일정한 감흥이 일어났던 것은
"역사적"인 것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매력적인 사실이기도 했다.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미사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지금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않으며, 바티칸 자정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참례할 수 있는 표를 나눠준다고 한다.
오후 4시 이전에 성당에 입장하면 참례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 일정상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혹시 광장에서 참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베네틱토 16세로 바뀐 뒤에는 그가 보여주는 인간미가 전임 교황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이곳 신자들도 실망감을 표시하는 것을 듣고는
"꼭 참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다.


아침 8시까지 떼르미니역 구내 맥도널드 햄버거 앞에서 문화가이드 하는 분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
조금 늦을 듯 해서 마구 달려갔더니 다행히 우리보다 늦게 오는 두 팀이 있었다.
<헬로우 유럽>을 운영하시는 조은영 사장께서 직접 가이드를 해 주셨다.

지금은 비시즌이라 직원들이 휴가를 많이 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에는 자신이 직접 하기도 한단다.
소매치기에 대한 주의사항과 방지법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바티칸으로 향했다.




떼르미니역에서 다섯 정거장을 가서 옥타비아누스 역(Ottaviano San Pietro)에 내렸다.
이 역을 나와 남쪽으로  700m쯤 내려가면 로마와 바티칸의 국경을 가르는 알렉산더 교황의 문이 있고 거기를 통해 바티칸에 들어간다.




드디어 사진으로만 보았던 산 삐에뜨로(성 베드로) 성당이 있는 바티칸 광장에 들어섰다.
지난 밤에 비가 내려서 공기가 깨끗하다. 사실 공기가 좋지 않을 때도 서울보다는 공기가 깨끗하긴 하지만...

앞에 보이는 산 삐에뜨로 성당의 지붕에는 예수와 12제자의 석상이 서 있고, 오른쪽 원주열 건물 위에는 카톨릭 성인들의 석상을 세워놓았다.





원주열 건물 지붕에 있는  성인들의 석상
건물이 받는 하중과 지진에 견디기에는 불안한 구조물 같은데...




삐에뜨로 광장 한 가운데에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 왕국에서 선물 받았다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남북 축을 따라 남쪽과 북쪽 가운데 지점에 이렇게 생긴 분수가 각각 한개씩 있다.




16~17세기 당대를 대표할만한 거장들이 참여해 만든 산 삐에뜨로(성 베드로) 성당
겉모습은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8만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본당 건물이다.



바티칸 광장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자신의 신성을 높이고자 남의 신성을 모독하는 교만한 종교의 정신적 폭력을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왼쪽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해 놓았다.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이집트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카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십자가를 꽂아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꽂혀 있다.

아무도 믿는 자가 없는 종교라지만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종교 기념물 위에 자기네 신의 상징을 꽂는 행위,
무슬림과 알라를 모욕하는 소설에 대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운위하는 자들이 남의 종교적 상징에는 저런 짓을
버젓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인격은 믿는 신의 종류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품격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11시에 문을 여는데 그 전에 베드로 성당을 관람하고 10시부터 박물관 입장준비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든다.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 관람을 한다.



교황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
제일 위층 오른쪽 2번째 창문이 교황의 집무실인데 크리스마스 때 저 문을 열고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발표하며
그 모습을 전세계로 중계방송을 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계실 때 왔으면 좋았을 것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을 자정미사를 준비하느라 광장 이곳저곳을 분주히 사람들이 오간다.



알렉산더 7세 교황의 문
폰트 막스(PONT MAX).. 거대한 다리라는 뜻.
로마시대에는 장군이나 최고 사령관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원래는 군단 사령관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바뀌면서 황제가 군단사령관을 겸임했기 때문에
황제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고 카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면서 교황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거대한 다리...



베드로 성당을 등지고 서서 산탄젤로 성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산탄젤로 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으나 중세에는 교황의 피난처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로마와 바티칸의 경계선까지 거리는 약 270m 정도.



성 베드로 성당 내부. 중앙 통로

정면에 보이는 검은 제단은 발다키노라고 하는데 <천국의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성당의 건축감독을 했던 베를리니는 저 발다키노를 만드는데 필요한 청동을 조달하기 위해
로마시대에 만든 수많은 청동상을 가져와서 녹여 저 발타키노를 만들었는데,
다른 도시에서도 저 발다키노를 본 떠 성당을 장식했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에서 왜 루터가 카톨릭의 부패를 공격했는지 짐작이 간다.
자정미사 때 이 안에 8만명이 들어간다고 한다.



성당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거장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만든 피에타 진품이 방탄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려고 몰려들기 때문에 차분하게 사진 찍기는 어려운 곳.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조각상이기도 하다.

<바로크>는 '어이없는' '웃기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3
4세에 죽은 예수에 비해 어머니인 마리아의 모습은 20대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그런 시대적 이름이 붙어다고 한다.
혹시 저 여자는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를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빈치 마을 출신 네오나르도는 무명 조각가였는데 이 작품을 만든 다음에 조각상 뒤에 숨어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다른 작가를 이야기하자 다빈치는 마리아의 옷깃에 자기의 서명을 새겨 넣었다.
다빈치의 작품 중 유일하게 여기에만 서명이 들어 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에 젊은 조각가가 저 작품을 그대로 재현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뒤 좌절감에 빠져 망치로 마리아 상의 코를 깨뜨렸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복원을 한 뒤에 지금처럼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베드로 성당 지붕은 이렇게 한치도 빈틈이 없이 화려한 그림과 황금장식으로 차 있습니다.




이 지붕을 장식하는 무려 300톤이나 되는 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히 종교라는 조직이 신을 빙자해 권력을 휘두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 성당 조성공사가 한창이던 16~17세기는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종교권력이 심각한 쇠퇴를 맞던 시기로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로 사람들을 압도하면서 신의 권능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반영된 건물이다.

개인의 신앙은 아름답지만,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종교는 이미 권력인 모양이다.
크리슈나 무르티가 자신의 교단을 해체하며 남긴 유명한 말이 생각나는 장소였다.




이 모두가 황금이라고 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
300톤이나 되는 황금은 대부분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식민지 침략왕국의 지배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재물을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쓰기보다 신의 이름으로 황금치장을 하는데 사용하였던 모양이다.
하긴 불교를 믿는 나라던 크리스트교를 믿는 나라건 재물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곳에 사용하기 보다 이렇게 치장을 하는데 사용하는 공통점이 있다.
종교를 가진 것과 인간적인 성찰과는 별 관련이 없는 듯 하다. 




성당 기둥은 이렇게 생겼는데 베를리니가 "축소법"을 사용해 설계를 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거나 사진으로 보면 별로 커보이지 않지만 실제 사각 추춧돌의 높이만 1.5m가 넘는다.
수학적 비례를 이용해 착시현상을 만들어내 8만명이 들어가는 거대한 성당임에도
그닥 커보이지 않는 
아주 묘한 건물이다.



그레고리우스력을 만든 교황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죽으면 그 시신을 밀랍인형 속에 안치했다가 20년이 지나면 뼈만 추려서 성당 지하 역대 교황 무덤으로 이장하는데 
1963년에 사망한 요하네스 23세(요한 23세) 교황은 20년이 지나도 전혀 썩지 않아 그대로 유리관 안에 모셔서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 요하네스 23세의 카톨릭 개혁

요하네스23세는 당시만 해도 부패하고 축첩과 결혼을 일삼던 주교나 추기경이 많았으며,
자신의 사생아를 추기경이나 주교에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음.
요하네스23세는 이런 행적을 가지고 있는 역대 교황과 추기경, 주교를 모조리 사후 파문하였으며
그때까지도 공공연히 결혼을 하던 사제들에게 카톨릭 교회의 독신원칙을 확립하도록 하였음.
교황과 사제는 향후 결혼을 금지하도록 공식화하고 첩, 재산을 모두 금지시킴.
원래 삐에뜨로 이래 368대 교황이 있었으나 중간에 100여대 교황을 파문해 버림으로써 263대 교황으로 정통 교황의 연대력이 정리됨.
그의 시신이 썩지 않은 것은 평소 업적과 행적이 기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여 20세기 교황 중 유일하게 성인의 반열에 오름




오른쪽 벽의 작품을 감상하며 가운데 발다키노까지 도착
입구에서 130m쯤 되는 곳에 있다.
사람의 크기와 비교해 보면 이 발다키노가 얼마나 높은 지 짐작할 수 있다.



성당 중앙 돔의 창문을 통해 눈부신 햇살이 들어와 장엄한 분위기를 더욱 높여준다.



빛을 받아 천장은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창문처럼 보이는 비둘기 조각
정면에 보이는 비둘기 상은 길이가 4m가 넘는 큰 작품인데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투광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가까이 가서 보면 비둘기가 뚜렸하게 보인다.



종교적 경외감이 높았던 시절에는 이런 것을 볼 때 장엄하고 엄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성이 발달(?)한 지금에는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과 과시욕의 전시장으로만 보인다.



교황 알렉산더 7세(재위 1655.4.7~1677.5.22)와 그 아래에 깔려
뼈만 남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년 12월 7일 ~ 1680년 11월 28일)의 모습
자주색 융단처럼 생긴 대리석은 한덩어리라고 한다. 베르니니는 교황이나 인간이나 모두 죽으면
뼈만 남게될 인간임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바이블>의 한 대목을 묘사한 '예수의 신비한 변모'
회화 작품을 대리석 모자이크 작품으로 만든 것으로 베드로 성당 안에는 거장들의 회화를 대리석 모자이크로 만든 작품이 꽤 많다.



16세기 네오나르도 다 빈치가 디자인한 군복을 입고 있는 교황 근위병

교황이나 루이 16세 그리고 마리 앙투아넷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조국 스위스의 후손들이 용병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계약의 신용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밖에 없었던 중세 스위스의 비극이 담겨 있는 교황 근위병.


<교황 근위병이 된 스위스 청년들>
합스부르크가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 스위스는 열악한 자연환경 때문에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했다고 합니다.
사방이 모두 적국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었죠. 
이에 젊은이들은 유럽각국에 용병으로 팔려가 급료를 받아 그것을 본국에 가족에게 송금해서 먹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6세기, 독일 황제가 로마를 약탈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교황청을 지키던 근위대는 15개국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교황청에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교황 집무실에서 비밀통로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대피하곤 했다고 합니다.

근위대는 도피한 교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 로마약탈 당시에는 

오직 스위스 근위병만이 남아서 교황의 도피로를 지켰는데 

그 과정에서 16명만 살고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신용을 지키지 못하면 다시는 스위스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하네요.
그 뒤 교황은 스위스 청년들만 근위대로 고용을 하게 되었고 지금껏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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