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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를 찾아서

by 연우아빠. 2012. 8. 2.

짧은 캠핑, 긴 후기(3편) :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를 찾아서


2012. 7. 29


조금 부족한 아침을 먹고 양평 신원역 뒤에 있는 몽양 선생 생가를 찾았다.

수요일에 중미산 야영간다고 알려줬더니 준기가 여길 가보겠다고 찾아 놓았다.


휴양림에서 네비게이션이 가르쳐준대로 갔는데 나중에 지도를 찾아보니 먼길을 돌아 간 셈.

네비를 쓴 다음부터 지도를 소홀히 하게 되니, 

여행 준비도 건성이 되어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쓰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아들 녀석과 출발전에 지도를 꼼꼼하게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중앙선 철도 신원역 위쪽, 양평 시내가 멀리 보이는 언덕에 묘꼴이라고 부르던 동네가 있다. 

거기에 몽양 선생 생가가 있고 생가 앞에 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몽양 선생의 생가 앞에서 양평 읍내를 보면 이런 모습





언덕에 있는 몽양 기념관.

몽양(夢陽) 선생의 어머니께서 태몽으로 해를 본 것에서 호를 따 왔다고 한다. 



몽양 선생의 선조께서 이 자리에 자리 잡은 흔적은 기념관 앞에 작은 표지석으로 남았다.



좌익에게는 우파라고 욕먹고 우익에게는 빨갱이라고 욕먹은 몽양 선생.

그는 주자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고 한다.



人我人, 我不喜人

我不人, 我不怒

我人, 人我不人, 我人

我不人, 人我人, 我不人

欲知, 我人, 不人

我人, 我不人, 人之人, 不人

- 朱子 留客文 -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여도 내가 아니면 기뻐할 사람이 아니며

내가 사람이 아니라 해도 화낼 일이 아니다.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남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사람이며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 해도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한다면

내가 사람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사람이 사람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라.

주자 유객문(朱子 留客文)




좌우익의 협력으로 국토 분단을 막은 오스트리아와 달리 

우리는 남들이 그어 놓은 분단선을 우리 스스로 더욱 공고히 하여 

민족의 몰살을 불러올 냉전체제의 최전선에 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해 버렸다. 

몽양 선생을 비롯해 평생을 광복투쟁에 바친 많은 인물들이 시대의 어리석은 선택에 희생되었다.


여운형 선생은 뒤늦게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선생이 광복투쟁에 바친 노고에 비하면 겨우 작은 보답을 받은 셈이다.

그 작은 보답이나마 받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은 우리 민족의 협량이 아직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반증이리라.


여운형 선생 생가 터에 예전 모습을 복원해 문을 연 기념관은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그 분의 장례식에 썼던 만장이 남아 있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몽양 선생의 연표에서 강릉 초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 보인다.

초당 두부에 얽힌 사건의 계기가 된 몽양 선생의 강릉 체류.

준기가 선교장과 초당마을에 갔을 때 내가 해 준 말을 기억하고는 초당이라는 글자에 관심을 보인다.


준기가 묻는다.

“아빠! 왜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편을 갈라 싸웠을까요?”

“글쎄다, 아빠 생각에는 성리학의 악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리학이 어째서요?”

“너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봐서 알겠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선의 지식인들은 영양가 없는 이론 싸움질로 날밤을 지새우다 나라를 통째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식민지로 팔아먹지 않았니. 나와 아흔 아홉가지가 같아도 한가지가 다르면 사문난적이라 배척하고 오랑캐로 배척해 나라의 크기를 줄이고 포용하는 영역을 줄이는게 성리학의 악습이다. 대화와 타협은 눈꼽만큼도 없고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논쟁을 격렬하게 하니까 감정이 상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동족이니까 함께 통일된 나라를 만들 생각을 하고 조금 더 너그러웠더라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멀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한반도 밖으로 떠나게 만든 신라의 협량함

또, 거란, 여진을 오랑캐라 배척한 고려와 조선의 협량함.

가까이는 남북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현대의 협량함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국토 면적도 줄어들고

수백만 동포를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 넣고

가장 짧은 시간에 세계 최다의 다이스포라를 만들어 버린 우리의 어리석음과 속 좁음이 답답하다.


이런 상태라면,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개마고원이나 삼지연에서 야영을 해 보는 것은 불가능하겠다.

서울에서 출발해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여행은 요원하다.




오후 1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는 1시간도 채 걸리는 않는 시원한 길.

우리 민족의 장래도 이렇게 시원하게 뚫렸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은 더 멋진 세상이기를....







몽양 선생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선생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 뒤에 올라와 저격한 흉한의 총탄에 생을 마감했다.

절명 당시에 입었던 그 분의 옷에는 선혈이 가득 한 상태.



신체단련을 권장했던 몽양 선생은 아마도 20세기 최초의 몸짱이 아니었을까?

<현대철봉운동법(1934년 발간)>에 몽양 선생은 건장한 상반신을 선 보인 분이었다.


민족의 해방과 통일된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지덕체를 겸비한 장부의 전형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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