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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충주 문경 나들이

by 연우아빠. 2011. 10. 31.
2011.10.22~10.23(1박2일, 솔바람 - http://cafe.daum.net/foresttour - 정모)

9월 첫째주에 계획을 잡았던 우리 동호회 정모는 회장님의 딸이 급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성사 여부가 불투명했다.
결국 회장님을 제외하고 11가족이 참석하는 것으로 정모일정은 확정되고, 오랫만에 1박2일 나들이에 나서는 준기는 신바람이 났다.
가는길에 들릴 곳을 지도를 샅샅이 훑어 결정해 놓고 아빠에게 들이민다.

여행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갈수록 준비에 게을러지는데, 아들은 이제 세상물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나이가 된지라
아기 때 다녔던 기억은 젖혀두고 새로운 여행 준비에 늘 신이 난다.


첫번째 들른 곳은 바로 중원 고구려비.
충주 입석마을에 있던 작은 비석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가 대부분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고려태왕>이라는 글씨와 <신라매금>이라는 글씨 등 시대를 판정할 수 있는 부분이 해독되어 어느정도 시대윤곽은 잡혔다.
장수왕 이후 한반도 남쪽으로 세력을 최대한 확정했던 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비.
이제 1,600여년의 오랜 세월을 견딘 비석은 현대적 기술로 방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아직은 한창 공사중이라 미완성인 건물 창문으로 들여다 보며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다.
이 비석을 통해 고구려는 당대에 자신의 나라를 고려라고 불렀으며, 왕은 태왕이라 하고, 신라를 매금왕이라 부르는 등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가진 패권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중앙탑(충주 소재).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의 패권을 차지했을 때
그들은 자국 영토 가운데에 중앙탑을 세웠다.
탑의 모습은 7세기 경에 완성된 석가탑의 모습을 그대로 본 뜬 모습
신라탑이지만 백제인 아사달의 기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신라 통일기의 전형적인 탑이지만 유일한 7층석탑이다.
당시에는 거대한 논의 한 가운데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신문왕은 여기로 도읍을 옮기려 했으나 경주귀족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실패했고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친 경주의 지리적 부족함을 메우려 전국 각지에 5개의 작은 수도를 두었다.
충주에는 중원경을 설치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국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앙탑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주변 모습.



탄금대 공원(충주).
임진왜란 발발 나흘째인 1592년 4월 17일(음력)
도원수 신립은 왜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하자 포위망을 뚫고 이 곳 탄금대로 피신해 왔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때 죽은 8천명의 조선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탑이 탄금대 공원 한 가운데 있다.
류성룡은 신립이 공만 다투며 잔인하여 병사들의 목을 함부로 베고 야심이 커 큰 사고를 칠 것을 식자들이 우려했다고 징비록에 기록했다.
문경 일대에 있는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평지인 충주에서 조총을 든 왜적과 싸운 그의 어리석음은 두고두고 역사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동천 권태응 선생의 노래비
마침 문학동호인 한무리가 모여 인솔자에게 권태응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왼쪽에 신립장군과 8천 군사의 위렵탑, 가운데에 6.25 사변 전후에 죽은 이 지역 사람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다.
평지 한 가운데에 있는 언덕에 자리잡은 탄금대는 아름다운 가을빛이다.



신립과 김여물 장군이 왜적을 피해 투신한 바위
바위 바로 앞은 수직으로 달천으로 떨어지는 절벽이다.
준기는 "장수라면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죽어야지, 왜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게야"라며 수백년전의 선조가 선택한 자살을 비판한다.
나도 장수가 패전했다고 자살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물론 적에게 목이 잘려 시신에 욕을 당하거나 아군에게 심리전 도구로 역이용 당할수도 있겠지만 자살은 장수가 할 처신은 아닌 것 같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의병장 김천일은 죽는 순간까지도 적군 두명을 옆구리에 끼고 동반 투신하는 투지를 보인바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평상시에도 신립이 의욕만 과해 과대평가 받고 있는 점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립이 본 마지막 풍경은 신록이 우거진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강가에는 시원한 수상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야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정에서 내려다 본 신립의 투신처
망국의 악사가 가야금을 탄 곳과 국가존망의 위기를 막지 못하고 몸을 던져야 했던 총사령관의 비운이 서린 곳이지만
가을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탄금정 아래 신립장군의 혼을 위무하는 비각이 있다.
조정은 그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군 총사령관도 충장, 의병대장의 시호도 충장.
200년 평화를 깨는 동아시아 대전은 조선 조정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충격을 주었나보다.

시간이 늦어 임경업 장군의 유적은 생략하고 오늘 모임 장소로 달렸다.


문경 새재 입구에 있는 새재주말농장팬션. 가을 하늘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 하늘아래 모인 사람들도 모닥물 주변에 아름답게 둘러 앉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생과 미취학 아동들만 참가하는 보물찾기를 했는데 보물은 아이들이 찾았지만 내용물은 모두 엄마들이 좋아할 것들이라
아이들에게 좀 미안했다. 다음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것들을 준비해 보리라.


문경 특산품 약돌돼지고기. 너무 맛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진맘님과 해지찬 맘님이 가지고 오신 밤도 엄청 구웠다.



한쪽에는 술바람(?) 모임을 결성한 남자들의 웃음꽃이 퍼지고...


방안에서 두편으로 갈라 윷놀이 내기를 했다.
저녁 설겆이를 할 팀과 일요일 아침준비와 문경철로자전거를 예약하러 갈 팀을 정하는 윷놀이.



일요일 아침.
우르르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생각없이 준비없이 조령산 등산에 나섰다.
배낭, 물, 간식, 카메라까지 하나도 챙기지 않고 그냥 생각없이 등산에 따라 나선 것.
성영아빠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을 멋진 산행이었다.

카메라가 없는 날이 경치가 정말 멋지다.
눈으로 찍어 마음 속에 아름다운 경치를 담아두고 아이폰 사진은 기록용으로 남겼다.(3G 아이폰의 한계)

1시간 반쯤 걸어서 조령산 정상(1,025m)에 도착했다.
백두대간 이화령을 지나는 길로 아마도 청소년백두대간 탐방팀이 남긴 듯한 낙서도 보인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가 들쭉날쭉 했는데 아마도 아이들이 "속았다"고 하며 다녔을 법한 길이다.

해돋이와 구름바다 사진을 찍으러 오신 분에게 부탁해 함께 찍은 정상인증 샷.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조령산은 정상부분은 겨울 배경 같다.



지현옥(1959년 - 1999년), 논산 출신 여성 산악인.
1988년과 1993년 5월 10일에 대한민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매킨리 산와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성공.
1999년에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한 후에 하산 중 실종되었다.
그 분을 기리는 비목. 마침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의 소식이 가슴 아픈 때다.
그동안 안나푸르나에서 정말 많은 한국 산악인들이 최후를 맞은 듯.

성영아빠 해설로 조령산 사방에 보이는 봉우리들을 조망하며 가을산행의 아름다음을 만끽한 아침이었다.
상인들이 다니던 길, 양반들이 다니던 길, 천민들이 다니던 길...새재길이 셋이나 있다는 사실은 여행에서 얻은 새로운 지식이었다.
하산을 서둘렀는데 대절버스를 타고온 등산객들이 파상적으로 밀려 올려온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압사할 뻔....


하산 한 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열심히 설겆이를 하는 동안 미리 귀가하는 분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숙소를 나선 우리집, 유진네, 은주네는 철로자전거 쪽으로 가 봤지만 예약이 꽉차서 불발
아이들을 데리고 1박2일 여행을 나섰는데 일요일에 할 일이 없다.



고모산성 위로 올라가 토끼비리를 찾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왕에게 쫓겨 도망갈 길을 찾지 못하다 마침 토끼 한마리가 달아다는 것을 보고 뒤를 쫒아가 화를 면했다는 좁디 좁은 길.
고모산성과 석현성 벽을 따라 난 길은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가장 짧은 길이라고 한다.


난간에 서서 아래로 사진을 찍어본다.
한번 구르면 2~3분 정도 굴러 그대로 강물에 추락할 것 같은 좁고 위태로운 길


진남문 쪽을 향해 되돌아 간다.



가는 길에 보니 카트라이더 타는 곳이 길 바로 아래에 보인다.
재작년에 여기 왔을 때 저기에서 진남문까지 올라가는 길이 40분이나 걸린다고 들었었는데
웬걸! 10분이면 걸어올 수 있는 언덕길이다.


"오늘 모든 정보가 다 왜 이래?! 엉터리잖아! 시간만 낭비하고 말이야...."  은주아빠의 썩소에 할 말이 없다.
준기와 함께 무슨 얘기를 하고 가시나요? 은주아빠.



천혜의 요새 답게 고모산성 앞에는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유적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죽 이어온 역사성을 증명하는 고분이 수십기가 있다


계곡을 막아서 만든 고모산성, 그 옆에 옹성을 두른 석현성 유적...
경치도 아름답고 요새로도 완벽한 곳이지만, 고모산성에 세운 진남문은 임진왜란 이후에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곳이지만
전투는 단 한번도 치뤄본 적이 없는 성문이라고 한다.



진남문에서 진남휴게소 쪽으로 걸어 내려오니 오정산과 고모산성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으러 세가족이 유명한 진남매운탕 집으로 갑니다.
지금은 폐쇄된 경북선의 옛철교 진남철교를 건너 진남교반의 경치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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