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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가족배낭여행(2010년)

(11일째) 하이델베르크

by 연우아빠. 2010. 8. 20.

□ 2010.7.6(화)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에 못한 카페 글올리기를 절반만 하고 포기했다.
출발시간이 지체되어 PC를 껐는데 연우가 자기반 카페에 올린 글을 확인 못했다고 울먹울먹한다.
진작 얘기를 할 것이지. 항상 입안에서 뱅뱅 돌다가 지나간 다음에 울상이다.

할 수 없이 다시 PC를 켜서 확인을 시키고 한참 늦은 11시가 다 된 시간에 출발했다.
우리를 위해 휴가를 낸 친구 덕분에 방학을 맞은 두 딸을 포함해 모두들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혜원, 혜선 두 딸은 함께 하이델베르크 간 게 언제였던가 하며 아빠를 놀린다.

친구가 운전하는 차에는 아이들을 모두 태우고,
부인이 모는 차에는 우리가 타고 1시간 정도 아우토반을 달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가을과 겨울에도 아름다웠는데 여름에는 더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
이번에는 궤도열차를 타고 성으로 올라갔다.
가족사진을 서로 찍어주고 성에서 시내를 한참 내려다본다.
준기는 친구의 이름을 가지고 강철왕 카네기라고 별명을 지어놓고 저 혼자 좋아하며 놀려댄다.
버릇없는 아들은 둔 아빠의 창피.


어딜 찍어도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성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
이번에는 그동안 전혀 몰랐던 독일 전래의약품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었다.
우리나라 한약처럼 독일도 오래 전부터 전통의학과 제약산업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세까지 그 유구한 전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허브와 각종 약재를 이용한 치료전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름이 지금도 게르만계 국가의 약국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기후가 좋지 않은 독일은 중세부터 각종 제약업이 발달했고 그 전통이 오늘날 바이엘을 비롯한 세계적인 화학과 제약회사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나 보다.
우리도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그 전통을 계속 이어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영주의 부인과 바람을 피운 사람이 남겼다는 발자욱의 전설을 들은 준기가 그 발자욱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며 자기 발을 집어 넣어 본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준기의 장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해져서 가끔은 통제를 해야 했다.
“얼음!”
이 한마디에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손으로 비는 시늉을 하면서 우리를 웃겼다.

성을 내려와서 우리가 점심을 대접했다.
13년전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 우리를 불러 남산타워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뒤
한번도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우리에게 기회를 줘야한다고 우겨서.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은 점심시간이 지나서 점심영업은 끝났다고 해서 다른 레스토랑으로 갔다.
맛있게 식사를 하는 도중 깨진 접시가 몇 개 보였다.
“왜 깨진 접시를 그냥 쓰지?” 했더니
부인께서 “여기는 다들 그냥 써요. 일반 가정집이나 레스토랑이나 심지어 호텔까지도” 하신다.

왜 그럴까?
나름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은 일본이 조선 막사발을 다완이라며 애지중지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한다.
송나라 정덕진의 도자기와 일본 에도시대의 도자기를 보고 너무 갖고 싶었던 유럽의 왕실에서 그 제조비법을 알아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고
수백년에 걸친 노력 끝에 마이센 도자기를 비롯해 경쟁적으로 각국 왕실이 좋은 도자기를 생산했다.
너무나 귀했기에 가격이 비쌌고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흙이 귀했던 유럽에서는 깨진 도자기라도 쉽게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게 지금까지 이런 풍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도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유리병 제품 가운데는 철사로 깨진 부분을 엮어서 사용한 것들이 꽤 있다.
지중해 지역에서 수입해 온 귀한 유리병이라서 그랬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점심을 먹던 도중에 연우 이가 하나 빠졌다.
“집어 던질 지붕도 없는 나라에서 어떡하니?” 친구의 부인이 웃으면서 연우에게 농을 건다.
“지붕에 던져야 까치가 새 이를 가져다 주지”하면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냅킨에 쌌다.
적당한데다 버리고 가려고. 나중에 이를 버린 곳을 찾으러 유럽에 다시 오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웃으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지나 도시의 대로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구경을 했다.
케테 볼파르트(Käthe Wohlfahrt) 장난감 가게 분점이 보였다.
또 갖고 싶었던 도이터, 바우데 등 탐나는 배낭이 한국의 절반가격으로 팔고 있었는데
뮌헨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와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친구는 하루라도 더 묵고 가기를 바랐지만 이미 뮌헨 숙소는 국내에서 지불을 마친 상태였고,
다음 일정과 친구 가족들에게 폐를 더 끼칠 것 같아 뮌헨으로 가겠다고 했다.
너무 아쉬운 작별. 친구와 부인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조카 같은 두 딸에게 30유로씩 용돈을 주었다.
작은 선물을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봉투에라도 넣어서 주면 손이 덜 부끄러웠을 것을 이렇게 밖에 뭔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을 전달할 수 밖에 없어 미안했다.
친구 부부가 있을 때 줬다가는 분명 안된다고 할테니.

 

한 시간을 바람처럼 달려 프랑크푸르트 역에 도착해 뮌헨으로 가는 기차를 여유있게 탈 수 있었다.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아쉬워하는 친구를 향해 나도 아쉬운 맘으로 손을 흔들었다.

 

“언제 다시 오지?”
“3년쯤 있으면. 그리고 한국에 돌아올 때 돌아오더라도 오래오래 여기서 힘내서 사는 게 아이들에게도 좋을 거야.”
“그래. 나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볼게”

 

20대 청년일 때 처음 만난 우리는 벌써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다시 먼 작별을 고하며 이 작별이 그다지 오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기를 기원하는 동안 뮌헨행 기차는 천천히 프랑크푸르트 역을 빠져나갔다.
차창 밖으로 그가 우리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곧 다시 보자.

역을 벗어난 기차는 쏜살같이 달려 10시가 넘어서 뮌헨에 도착했다.
다행히 아이폰 지도검색이 잠깐 되는 구역에서 숙소 위치를 확인하고 어렵지 않게 찾았다.
열쇠를 받아서 방문을 열어보는데 열리지 않는다.

뒤에서 들리는 한국 여학생의 목소리. 그녀가 도와주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프런트에 가서 도움을 청하려다 딸깍 하고 걸리는 부분에서 힘을 주어 더 돌리니 열렸다.
2중 걸쇠가 된 구조인가 보다.

방 안에는 튼튼해 보이는 철재 2층 침대 2개만 있는 그런 호스텔이었다.
침실 내부에 화장실과 세면장이 없어서 그렇지 문을 열면 바로 앞이 화장실과 세면장이어서 불편함은 없었지만 여자들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숙소. 준기를 데리고 나가서 수퍼마켓을 발견해 물과 과일을 샀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이 뮌헨 역이다. 우리가 숙소를 찾을 때 먼 길을 돌아서 온 셈.

 

요기를 하고 잠잘 준비를 하다가 연우 이를 하이델베르크 레스토랑에 그냥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언젠가 그 레스토랑에 다시 가면 놓고 온 이가 생각날까?
쓰레기통으로 가버렸겠지.
이야 미안하다. 언젠가 연우가 그 이를 두고 온 레스토랑을 찾아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가겠지.



중세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벌써 3번째 방문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여름이었다.
철학적인 분위기인 늦가을이나 초겨울과 달리 여름은 생동감이 넘친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 성 모자 상 앞에서.

두번째 하이델베르크 여행때 포스팅은 여기 -> http://foresttour.tistory.com/54



첫번째는 걸어서 올라 갔었고, 두번째는 승용차로 올라가서 걸어 내려왔었는데
이번에는 여자분들의 원성을 살까하여 궤도열차를 타고 편하게 올라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통.
전쟁으로 고립되면 와인보다는 물이 필요했을텐데...



사람의 키와 비교해보면 정말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아빠의 친구가 그렇게 맘에 들었었니?
내 친구에게 끊임없이 장난을 걸며 웃는 준기를 친구가 번쩍 안아서 한바퀴 돌려 주고...



영주의 부인과 바람을 피운 범인이 남긴 발자욱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
맨발로 뛰어 내려서 남은 자욱이라는 설명에 준기는 자기 발을 갖다가 대 본다.
그런데 이상하지? 어떻게 한쪽 발로만 뛰어내렸을까? 다른 한쪽 발은 자욱이 없네?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
세번이나 갔던 곳인데 성 안에 이런 박물관이 있는 것을 몰랐다니.
독일의 오랜 제약 역사를 보여주는 독일전통제약박물관.
약재를 넣어두는 서랍이 마치 우리나라 한약방처럼 생겨서 재미있었다.



각종 약탕기와 제약실험 도구들.
1년중 절반은 비오는 날이라 피부병도 많고 병에 걸려도 잘 낫지가 않는 환경.
그래서 독일은 화학과 제약분야에는 남다른 역량을 갖고 있다.
이 전통을 존중해서 원래 화학과 제약분에는 독일어로 이름을 부르는게 관례다.
물론 미국물(?)을 먹은 사람들이 많은 한국에서는 이런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비타민, 백신, 그리고 약국을 뜻하는 영문표기까지 원래 독일어다.
그들의 오랜 전통을 볼 수 있는 이 박물관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흥미를 끌었다.



하이델베르크 정원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하이델베르크 다운타운.
네카 강 건너편은 칸트가 산책했다는 철학자의 거리가 있는 마을
고등학교 때 칸트를 너무 좋아했던 나는 저 길을 꼭 걸어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저 다리까지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는 시가지
독일의 강은 물살이 거세서 늘 흙탕물이다.


옆에서 본 하이델베르크 성.
17세기 중반, 1차 대전 못지않은 30년 전쟁동안 독일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 성 역시 대포에 맞아 망루가 무너졌다.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다운타운으로 내려와서 배경사진을 찍어주시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학생감옥이 있는 시가지로 구경을 나섰다.
원래는 황태자의 첫사랑에 등장하는 식당에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점심영업 끝났다고. T_T



이 원숭이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이렇게 하는 거야.
사람 머리를 원숭이 상 속에 집어 넣고 사진을 찍는데 준기는 키가 닿질 않아서 친구가 이렇게 가르쳐 준다.



친구 덕분에 오랫만에 4명 가족 모두 들어있는 사진도 남기고, 멋진 하이델베르크를 배경으로 부부사진도 함께 남겼다.
헐! 배를 너무 내밀었나? 아님 숨을 크게 쉬었나. 나도 배가 나왔구나.  T _ 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