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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천년왕국의 수도 경주여행 (2)

by 연우아빠. 2009. 6. 4.

답사 둘째날(5월31일)

분황사>황룡사>대릉원(미추왕릉, 천마총)>첨성대>계림>내물왕릉>반월성>김유신묘>안압지>감은사>이견대>대왕암


5월31일 분황사. 비석 좌대에 추사 김정희가 남긴 글씨라고 합니다. 


분황사. 선덕여왕이 지을 것을 명했다고 합니다. 꽃가루 날리는 임금,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말일까요?


동남쪽에서 쳐들오 오는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세웠다는 이유로 일제 침략자들에게 다리가 잘린 동남쪽 석수.
불국사가 아니고 분황사 였군요.


분황사와 황룡사 경계에 서 있는 당간지주. 앞쪽이 분황사. 건너편이 황룡사 터 입니다.


거대한 황룡사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안내판. 기초석만 남아 있는 건물터로 추측하건데 왕궁보다 컸을 것 같고
1만명이 넘는 스님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은 황룡사.


대릉원. 5세기 무렵에 조성된 이 무덤지역은 금관이 묻혀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천마총 출토 유물은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갔고 여기에는 모조품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적석목곽분의 거대한 구조를 들어가서 볼 수 있습니다.


미추왕릉과 천마총을 지나 계속 걸어가면 다시 입구로 나가는 길이 나옵니다.
너무나 유목민 같은 유물이 많이 나오는 대릉원 떼무덤 지역


첨성대. 대릉원에서 월성 왕궁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걸어가면 있습니다.
중간 쯤에 보이는 창문(?) 아래부분은 흙으로 채워놓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요. 그 흙 때문인지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아랫단은 조금 기운 듯이 보이기도 하고
벽돌 사이의 틈이 조금씩 벌어진 상태입니다.
별을 관측했다는 것은 중국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지 계림. 사진은 계림비각입니다.
원래 시림이었는데 닭울음과 함께 금궤에서 나온 알에서 태어난 김알지 때문에 계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지요.


신라 17대 내물왕릉.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 왕이지요. 물론 김씨랍니다. 김일지 탄생지와 100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계림을 나와 월성과 석빙고 방향으로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신라 전성기 때 왕성이 있던 월성지역이 나옵니다.
여기에 왕궁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왼쪽으로 계속가면 왕궁 끝자락에 신라의 왕실전용 냉장고 석빙고가 있습니다.
여기에 왕궁을 복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작은 언덕이지만 경주 전체를 볼 수 있을 만큼 좋은 입지입니다.


월성에서 다시 대릉원 쪽으로 걸어가면 왼쪽으로 고분떼가 보입니다.


대릉원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서 개천을 하나 건너면 얕으막한 산 중턱에 김유신의 묘가 있습니다.
신하이지만 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일제는 김유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이 무덤 앞으로 철길을 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무덤을 두르고 있는 12지신상 호석. 이 사진 보시는 분들 돈 많이 버시라고
돼지를 찍어 올렸습니다. ^^


안압지. 월성 아래 쪽에 만든 신라시대 인공 저수지를 발굴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임해전 전각을 복원해 놓은 모습. 광각 렌즈의 즐거움을 느껴 봤습니다.


안압지 발굴 때 뻘 속에서 발견한 신라시대 통나무 배를 복원한 모습.
저 배를 타고 주령구를 굴리며 음주가무를 즐겼을 신라사람들....전성기의 모습을 짐작해 봅니다.


임해전 건너편에서 본 안압지


감포 입구에 있는 감은사터 금당 바닥 모습.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며 쉴 수 있도록 금당 바닥에 이렇게 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장에 와서 보니 역시 감은사는 절이기도 했지만
감포에 상륙한 왜구가 경주로 들어가지 못하게 길목을 지키는 군사요새라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감은사 안쪽에서 본 감은사 3층 쌍탑. 풍수상 이 땅은 용의 머리에 해당하고
저 쌍탑은 날카로운 용의 송곳니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탑 정수리에는 쇠로 만든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꼿아 적의 기운을 누르는 비보풍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술적인 가치도 무척 높은 아름다운 탑이지요.


성의 없는 복원. 원판과 다른 밋밋한 사각형 널판입니다.


신라사람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둥근 모서리에 살짝 하늘로 들린 날렵한 모습입니다.
좌(원판) 우(복원판)가 너무 뚜렷하게 달라 보여서 국보를 다루는 사람들의 안일한 자세가 한심스럽습니다.
이왕 돈을 들여 문화재를 복원할거면 제대로 하는게 옳을텐데...
원판 모습이 사라지면 어떻게 복원하려고.....


감포 앞바다를 볼 수 있는 이견대.
신문왕은 여기서 만파식적을 얻었습니다.
신문왕 대에 신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한 것이죠.


이견대에서 바라 본 문무왕릉(대왕암)
부왕의 릉을 참배하며 신문왕은 바다로 쳐들어 올 왜구를 경계했겠지요?


가까이 가서 본 대왕암. 해변에서 170m쯤 떨어져 있는 암초를 활용해 문무왕의 유골을 장사지냈습니다.
유언대로 죽어서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었겠죠? 백제유민이나 일본이 백제 멸망을 보복하러 오지 못한 것을 보면....



눈을 뜨니 아침 5시. 벌써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아침을 해먹고 오늘은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이 된 시대를 중심으로 답사길을 잡았다. 숙소에서 가까운 분황사를 먼저 들렀다. 34년전 수학여행 때 분황사 탑을 설명하던 스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분황사 탑 사방에는 신라의 적을 제압하려는 전설상의 짐승을 배치했다. 그 가운데 오직 남동쪽을 지키는 동물만 다리가 잘렸는데 그것은 일본 쪽인 동남쪽을 제압하는 그 동물의 기운을 없애려고 일제가 다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1,40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네 마리 동물은 사자, 해태, 오수견 같은 짐승들과 비슷한 모습인데 남동쪽을 지키는 동물은 다리가 잘렸고, 북동을 지키는 동물은 얼굴이 절반 가까이 깨져 버렸다. 남서쪽을 지키는 동물이 그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분황(芬皇)은 누구였을까? 꽃향기를 풍기는 임금, 이 절을 짓도록 명한 선덕여왕을 지칭하는 것일까? 그녀가 왕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칭을 바쳤다. 성스러운 할머니 황제? 그래서 이 분이 왕이 되었을 때는 이미 60이 넘은 노인이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잘라 쌓아 올렸다는 이 탑은 비록 3층밖에 남지 않았지만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기억에 오래 남는 탑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분황사 주변에 대한 지표조사를 매우 광범위하게 하고 있었다. 분황사를 나와 황룡사와 분황사의 경계에 서 있는 당간지주를 지나 분황사 남쪽, 황룡사 터를 찾았다.

몽골의 침략으로 8백여년전 잿더미가 돼버린 황룡사. 신라 번영의 기초를 닦았던 진흥왕의 명으로 공사에 착수해 4대 93년간 건설했다는 이 절은 비록 신라 땅에 있지만 백제의 기술자들이 만든 절이다. 대웅전 앞에 높이 88m 정도 되는 거대한 9층 목탑을 건설해 신라 주변에 있는 9개 나라를 굴복시키겠다는 뜻을 담았다. 영토를 대대적으로 넓혔던 진흥왕 대부터 선덕여왕 대까지 신라의 자신감이 넘치는 절이라 하겠다. 지금 확인된 땅만 가로 × 세로가 300m × 300m가 넘는 거대한 절이다. 이 탑 위에 올라가서 경주 일대를 둘러 볼 수 있었다고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평지에 세운 도시에는 모두 이런 높은 탑이 하나씩은 있는 모양이다. 준기는 몽골이 불태워 버린 것을 아쉬워하며 다행히 불국사가 화를 면했다는 점에 위안을 삼는다. 몽골군은 산 쪽으로는 당최 가질 않았던 모양이다. 한 때 이 절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엄청난 재정부담 때문에 지금은 쑥 들어간 상태. 남아 있는 주춧돌의 크기도 대단하고 확인된 면적만 봐도 왕성이었던 월성 못지않게 크다. 황룡사를 뒤로 하고 황금으로 가득찬 시대를 만들었던 대릉원으로 갔다.

대릉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니 어렸을 때 어렴풋한 기억만 있는 거대한 무덤들이 줄을 서 있다. 5세기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하는 이 무덤과 이웃한 노동리 고분군에서만 금관이 발굴되었다. 그 이전 시대에도 등장하지 않고, 그 이후 시대의 무덤에서도 나오지 않는 금관. 가까이는 몽골지역의 흉노 땅과 멀리는 중앙아시아 이식지방, 그리고 시베리아 무덤과 터키 지역에서 나오는 금관과 유사점이 너무 많은 신라의 금관들. 비록 시기상으로는 3~4백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이런 이질적인 유물을 만든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 지금도 갑론을박이 요란한 상태다. 생전에 사용했다기 보다는 무덤의 부장품으로 특별히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설이 많은데 이에 대한 신라인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학자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한다. 엄연히 경주김씨 집안이 남아 있는 지라 함부로 발굴은 하지 못하고 일제 때 주로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면서 발굴된 금관들이 많고, 광복 이후에는 1946년과 1975년(천마총) 두 차례가 있었을 뿐이다. 모르긴 해도 근대적인 학문체계가 자리 잡기 전에 사라져버린 왕릉급 무덤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금관이 나오는 무덤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주변에 강자갈과 큰 돌들을 켜켜히 쌓아올려 무덤을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도굴은 쉽지 않은 상태. 아마도 대릉원 주변에 남아 있는 무덤들을 발굴한다면 거의 대부분 금관이 나올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호사가들은 이 대릉원의 주인공은 중앙아시아의 백인계 흉노족이 경주 땅에 흘러들어와 토착세력을 지배하면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정복자는 무덤을 크게 만들고 왕궁도 거대하게 지어 위엄으로 누르려 하지만 토착세력은 인심을 얻기 위해 백성들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하려는 경향이 있어 건물이나 무덤이 소박하다고 한다. 경주 김씨 최초로 왕이 된 미추왕릉을 지나며 이서국의 침략에서 신라를 구한 미추왕과 죽엽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추왕릉 옆에는 대나무가 다른 곳보다 유난히 많다. 자작나무로 만든 장니 위에 그린 하얀 천마로 유명한 천마총은 대릉원에서 유일하게 내부를 볼 수 있는 무덤이다. 진품은 모두 박물관으로 갔지만 모사품이 남아 있어 아이들에게 신기한 볼거리다.

대릉원을 나와 옆에 있는 경주 찰보리빵 발명자 집이라는 곳에서 점심대용 찰보리빵 한상자를 사서 애들도 다 아는 첨성대로 갔다. 지도로 확인해봤는데 반월성, 석빙고까지도 거리가 1km 정도라 걸어갈 만했다. 첨성대 가는 길에서 4인승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데 30분에 만원이라고 한다. 더운데 빌릴까 하다가 30분이라는 시간 제약이 구경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냥 걷기로 했다. 첨성대는 34년 전과 달리 담도 생겼고 입장료도 받는다. 갑자기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모래바람이 불어 먼지를 뒤집어 씌운다. 첨성대도 너무 오래 서서 힘이 드는지 아랫배부분이 상당히 밀려 나와 있다. 첨성대 내부 중간 허리쯤까지 흙이 차 있는 구조라서 조금씩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다. 기단부도 상당히 기울어있는 듯이 보인다. 선덕여왕 때 만들었다는 기록을 보며 “선덕여왕은 참 많은 일을 했네”라고 아내가 한마디 한다. 기록에 남아 있는 선덕여왕은 주관이 바르고 임금다운 풍모가 있다. 하늘을 관측했는지 제사를 지냈던 흔적인지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여전히 많은 학자들의 지식놀이터가 되고 있다. 첨성대 옆에는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이 있다. 훗날 한반도의 주인이 된 신라의 문무왕은 자신의 조상이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소호금천씨이며 투후의 후손이라고 비문에 새겼다. 지금도 서기전 2세기 경에 전한에 항복해 온 흉노족 왕자 김일제가 바로 이 투후이며 김알지는 김일제라는 주장이 있다. 김알지가 계림의 금궤에서 태어난지 7대 만에 경주김씨는 마침내 신라의 주인이 되었다. 계림에는 계림비각이 남아 있고 숲 안쪽에는 신라 초기 나라의 면모를 일신한 내물이사금의 릉이 있다. 30도 가까운 무더위에 계림 안은 시원하다. 계림 안에 있는 작은 개울 때문인지 마치 함양에 있는 상림을 보는 듯하다. 계림을 나와 반월성으로 올라갔다. 성터만 남아 있는 땅은 아이들에겐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 반월성의 위치는 아주 훌륭하다. 좌우에 숲이 있고 평지 가운데 약간 언덕진 구릉에 자리를 잡아서 방어는 물론 주변과 격리된 듯 하면서도 수도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궁궐을 복원한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장소가 될 것 같다.

이웃에 있는 석빙고를 찾아 가려는데 아내가 그냥 내려가잔다. 아이들도 석빙고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다지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김유신 묘와 무열왕릉을 가자고 해서 대릉원으로 돌아와 황남빵을 한상자 사고 김유신 묘로 갔다. 김유신은 폐쇄적인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특이한 존재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로 신라 귀족에 편입되긴 했지만 성골이나 진골 귀족과는 결혼을 할 수 없는 계급이었다.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단양 척경비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혁혁한 무공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김서현은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진골 귀족인 여자와 결혼했다. 친정의 격렬한 반대로 집안의 감옥에 갇혔으나 때마침 벼락이 떨어져 감옥 문이 부서지자 비바람을 뚫고 야반도주를 감행해 만노군까지 찾아가 김서현과 결혼을 한 것이다. 김유신은 젊은 시절 가야출신이라는 한계에 좌절을 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훈육으로 남다른 노력을 경주해 젊은 시절부터 무공을 드 높였다. 마침내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주선하고,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 왕통이 끊어지자 당시 최고 귀족이었던 상대등 비담과 대등 염종이 왕위를 이을 최 우선권이 있다고 귀족회의에서 주장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도와 이들과 반대편에 섰고 비담과 염종을 공격해 이들을 제거한 뒤 김춘추를 진골 출신 첫 번째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가야 출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는 신라 최고의 벼슬인 각간에까지 올랐지만 백제 멸망의 공으로 대각간이라는 특별한 지위에 올랐고 왕위를 이은 그의 생질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그가 79세를 일기로 죽은 다음에는 후대 왕들이 그의 지위를 더욱 높여 흥무대왕이라는 왕으로 추존하였다. 동양사회에서 황제의 자녀가 아닌 신하가 왕으로 추존된 경우는 3명이 있다. 공자, 관우, 그리고 김유신이다. 자신이 처한 사회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 우리 역사 무대를 대동강 이남으로 좁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후세 사람에게 많은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김유신의 묘는 왕릉과 같이 12지신상을 호석으로 둘렀는데 오랜 세월 때문에 몇몇은 조각이 희미하다. 훗날 김유신의 손자는 당나라와 연합해 발해를 공격하는 전쟁을 지휘하기도 했고, 반란혐의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때 김유신의 무덤에서 한 줄기 빛이 나와 무열왕의 무덤으로 들어가 신라가 내 후손을 괴롭히니 이제 신라를 떠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김유신의 손자를 사면함으로써 김유신의 대가 끊기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김유신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라고 준기가 한마디 한다. 신라인은 신라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얘기해 주니 한국사편지에서 읽은 지식이 있어서 수긍을 하면서도 그래도 아쉽다고 한다. 하긴 지금 남북이 서로 자신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서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사편지와 같은 역사인식은 쉽게 수긍해 주긴 뭣하다. 그래서 차마 삼국통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야기 해 줄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통일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차라리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인데 연우와 준기가 고등학생 쯤 되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지. 김유신 묘 아래쪽에 있는 숭무전을 구경하고 안압지로 향했다.

안압지는 한반도의 주인이 된 신라가 월성 아래쪽에 만든 수변 정원이다. 저수지를 파고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화초와 진귀한 동물들을 키웠다고 한다. 임해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도 복원해 놓았고, 1975년 발굴작업을 통해 신라시대 통나무배, 목간, 주령구와 같은 놀이도구 등 다양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령구는 안압지 바닥에서 발굴한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로 참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진품은 유물 보존 처리 도중에 부주의로 불타버렸고, 지금은 복제품만 남아있다. 요즘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놀이랑 비슷한 내용이 많아서 술놀이문화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임해전을 돌아 안압지 반대쪽 면까지 한바퀴 돌았다. 백제와 신라의 궁궐 전용 수변공원 문화는 조선에도 이어져 지금의 경회루가 그런 역할을 했다. 안압지를 구경하는 동안 사진을 찍어 주겠다던 준기는 카메라를 거꾸로 돌려 찍기도 하고 대각선으로 찍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사진찍기 놀이에 빠져 낄낄 거린다. 안압지 반대쪽에 안압지로 들어가는 물길이 있다. 장난치던 준기는 그만 그 물에 빠져서 한쪽 신이 젖어버렸다.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감포에 갔다와도 되겠다.

경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치술령을 넘어가서 울산으로 나가는 길과, 지금의 4번 국도를 따라 감포로 나가는 길을 사용했다. 이 길은 왜구가 경주를 쳐들어 올 때 주로 사용하는 길이기도 했다. 한반도의 주인이 된 다음, 신문왕은 아버지인 문무왕을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모셨다.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탈출했는데 당시 일본의 국왕은 의자왕의 여동생이었던 제명천황이었다. 그녀는 신라를 치기 위해 지금의 큐슈에 대재부를 설치하고 왕궁을 떠나 거기에 머물면서 신라를 치려고 했고, 663년 숨을 거둘 때 아들에게 신라를 공격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들인 천지천황은 백제 기술자를 등용해 대마도를 비롯한 곳곳에 신라의 침략에 대비해 백제식 석성을 쌓는 한편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숨을 거둔 문무왕은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했고 왕을 바다에 모시면서 신라인들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했다. 부왕의 무덤이 바다에 있었으니 신문왕은 자주 여기에 행차할 수 밖에 없었고, 왜구의 주요 침략루트인 이 길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풍수지리학상 용의 머리에 해당되는 이 지점에 용의 이빨을 세웠으니 그것이 지금 남아 있는 감은사 3측 쌍탑이다. 이 탑은 꼭대기에 날카로운 쇠가 꽂혀있다. 비보풍수의 하나로 왜구가 쳐들어 오는 길목의 기운을 제압하겠다는 의미도 있고 이 절을 근거로 병사들이 주둔하면서 항상 바다를 경계하도록 한 것이다. 절 터 본당 건물 아래에는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2열 공간을 만들어 둔 특이한 건축물이다. 감은사 터에 올라서 경주로 들어가는 길을 바라보니 과연 훌륭한 요해처다. 몇 몇 무리를 지은 아이들이 인솔자인 사람에게서 이 절에 대해 열심히 배우고 있다. 1,300년여 동안 왜구를 지켜온 이 탑은 여기저기 훼손되어 복원작업을 했는데, 복원이 치밀하지 못해 살짝 하늘로 날아갈 듯한 곡선의 탑신을 밋밋한 사각형에 직선으로 덧대놓아 복원 작업의 무성의를 그대로 보여준다. 훗날 신라인이 만들어 놓은 부분이 망실되면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 놓은 부분만 남아 원래 탑 모양은 영영 사라지고 말텐데 어찌 이렇게 일을 해 놓았는지.

감은사를 나와 300m 쯤 바다로 나가면 이견대(지금은 이견정)가 있다. 신문왕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과 전란과 병을 사라지게 만드는 만파식적을 얻은 곳이 이곳이다. 여기는 감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대왕암도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여기에 행차해 대왕암을 참배했던 모양이다. 만파식적 전설은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이 된 뒤 신문왕 대에 이르러 9주 5소경을 완성하고 태평성대를 누렸던 상황을 잘 묘사한 설화이다. 개인적으로 신문왕대에 대해 유감이 있는 것은 지나친 중국화 정책으로 우리 고유문화를 없애고 지명까지도 모조리 중국식 한자어로 고쳐버려 우리 언어생활에 엄청난 피해를 준 것이다. 심지어 훗날 기러기 아빠의 도움으로 조기 유학을 갔던 최치원은 우리말이 천하고 부끄럽다라고 까지 했으니 신문왕이 남긴 한화정책의 정신적인 폐해는 실로 크다. 주말인데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감포해변의 횟집밀집지역에서 늦은 점심이자 이른 저녁을 먹었다. 지역에 사람이 없으니 마치 버려진 도시 같다. 한쪽은 사람으로 미어터지고 다른 쪽은 유령도시같고...

한반도의 주인이 된 다음 신라 왕실은 수도를 지금의 대구로 옮기려고 했으나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이 격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수도를 다섯 개나 두었다. 그러나 국가를 일신하지 못하고 백제와 고구려인들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신라는 2백년 만에 다시 세 나라로 갈라지고 말았다. 감포 횟집지역의 텅빈 모습에서 지역균형발전의 필요성을 새삼 되새겨 보는 것은 나의 지나친 오버일까?

저녁을 먹고 경주로 돌아오려고 했더니 준기가 대왕암을 보고 가야한단다. 아까 이견대에서 보지 않았냐고 했더니 먼 곳에서 본 거라 안된단다. 이왕 온 거 가까이 가서 보자 싶어 감은사에서 차를 돌려 대왕암으로 갔다. 거리는 2km도 되지 않는다. 해변에서 약 170m 떨어진 수중 암초.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 온다. 작은 자갈들을 튀겨 올리는 파도. 바다를 향해 아내가 돌을 던지자 준기가 문무왕이 노해서 파도가 높아진다고 방방 뛴다.

감포 남쪽에는 바다건너 용성국 왕자 탈해가 가야를 거쳐 신라땅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바다를 대표하는 석탈해, 기마 문명의 성격이 강한 박혁거세와 김알지. 이들 세력이 모여 세운 신라. 작은 세력이 결국은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지금 네가 어디에 서 있는지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한 신라 전성기의 인물들...6시가 넘어 경주로 다시 들어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실수다. 석탈해 도래지를 찾아 내려가서 치술령 쪽으로 넘어왔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