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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여행

회문산에서 지리산까지 (1)

by 연우아빠. 2008. 5. 8.

회문산에서 지리산까지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린 산하

회문산 : 2008.5.1~3(2박3일)


회문산휴양림 중턱에 빨지산 남부군사령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낭화


휴양림을 산책하다가 길앞잡이를 잡고 흐뭇해하는 준기.
길앞잡이는 육식곤충인데 빛깔이 아주 강렬합니다.

 


회문산자연휴양림 휴양관

 


휴양림 계곡에 얕은 여울에는 올챙이가 해바라기를 하느라 바글바글합니다.
올챙이를 관찰하기에 좋습니다.

 


옥정호, 네비게이션만 믿고 다니면 막다른 길로 인도합니다.

 


정읍, 전봉준 장군이 밀고자에게 속아 일본군에게 잡힌 주막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강천산 군립공원 입구, 폭포가 정말 시원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강천산 군립공원. 가족과 함께 산책하기에 너무 좋은 곳입니다.

 


다람쥐들이 사람을 겁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나봅니다.

 


맨발로 강천사까지 걸어 갈 수 있습니다. 돌아오면 발을씻고 말리는 곳도 있습니다.

 


계곡에 티없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사네요.

 


중종임금이 사가에 있을 때 혼인을 한 신수근의 딸이 역적이라는 이유로 내칠 것을 주장하는 반정세력들에게
항의한 3명을 기리는 삼인대 비각 

 


깨끗하게 정비해 놓은 강천산군립공원

 


회문산휴양림 작은지붕 올라가는 길에 있는 야영장

 


명당 길지라서 그런 것인지 빨찌산 사령부가 있어서 묘를 쓸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그런 것인지
회문산 작은지붕과 큰지붕 사이에는 많은 무덤이 있습니다.

 


빨찌산 토벌 때 회문산이 모두 불탔다고 하는데 이 나무(여근곡)는 화를 피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회문산의 철쭉

 


힘찬 석각. 천근월굴. 옛 선비의 힘찬 글씨와 어울리지 않는 페인트 글씨. 

 


회문산 정상 큰지붕(해발 837m)에서 본 주변 풍경 


 
지리산휴양림 애벌레(하정옥)님 숲해설에서 알았습니다. 칡은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아 올라간다는 것을. 둘을 나무 옆에 좌우로 심으면 나무를 감아 올라갈 때 마다 부딪치는 갈등(칡과 등나무)을 일으킨다는 것을....회문산에서 지리산까지 이번 여행은 바로 그것을 오롯이 보여준 여행이었습니다.

  사람은 평생 선택을 하면서 삽니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이 많은 후회와 갈등(?) 을 낳기도 하지요. 4월28일, 월요일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 일어납니다. 회사와 구성원 전체의 장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잇달으면서 5월1일 노동절에 출근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계속 들어옵니다. 한달전부터 아버지 칠순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계속 회사사람들에게 전했던터라 5월2일 휴가를 냈습니다. 실장님은 4월30일 마지막까지 보류하셨다가 OK사인을 하시고는 노동절에 출근하라는 ‘부탁’을 합니다. 5월6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중요한 보고문건을 1~2일 사이에 만들어야만 하는 지라 회문산 ~ 바래봉 ~ 지리산을 4박5일간 여행하려고 휴양림 예약을 다 끝냈는데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겠습니다. 사실 30일 밤 늦게까지 작업을 끝냈기 때문에 5월1일에 출근할 이유는 없었습니다만 팀원들에게는 나오지 말라고 하고 입사 동기인 팀장 둘만 나오기로 했습니다. 회문산에서는 안전운전 하시라는 문자가 날라오고....수정작업을 마치고 나니 오후 3시 반, 동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서둘러 집으로 날았습니다.

  제가 느긋하니 아내가 준비성이 좋아졌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짐을 다 꾸려 놓았더군요. 차에 싣고 5시 반에 출발했습니다. 회문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언제 도착하느냐고... 네비를 보니 9시가 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 계절방학이라 길이 많이 밀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 차가 너무 잘 빠졌습니다. 동군포IC에서 전주까지 2시간 만에 도착했습니다. 전주비빔밥만 알고 있는 가족에게 왱이콩나물국밥집 맛을 보여주려고 갔습니다. 1인분 4천원, 감칠맛 나는 남도 사투리, 친절하고 빠른 배식, 맛있는 김, 국물, 콩나물 무한 리필, 피로가 싹 풀리는 식당입니다. 가족들은 대만족이었고 아이들은 ‘왱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나 봅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꿀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꿀벌처럼 달콤한 음식을 부지런히 제공하고 손님도 벌떼처럼 모였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8시 반, 다시 휴양림으로 날아갑니다. 국도가 대부분 자동차 전용도로화 되어 달리기에는 좋았지만 캄캄한 밤이라 아름다운 남도의 풍경을 보지 못하고 그저 달리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휴양림 근처에서 조류인플루엔자 방역소독을 하느라 지나가는 차마다 소독약을 뒤집어 씁니다. 남쪽 지역을 다니는 동안 계속 눈에 띕니다. 드디어 휴양림 표지가 보이고 구불구불 높은 경사길을 따라 휴양림에 도착했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상큼하고 시원한 공기가 숲향기와 함께 온몸을 휘감습니다. 열쇠를 받아들고 산벚나무 동을 찾아 올라가는데 숲속의 하얀집 세채가 눈에 띄네요. 그 집 바로 옆에 전용주차장(?)을 갖춘 숙소에 도착...아이들 일기 쓰고 얼른 잠들었습니다.

 

회문산(回文山, 會門山)에서

  2일 새벽, 처음 듣는 아주 맑고 고운 새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아버지는 벌써 산책을 나가셨네요. 아침을 먹고 온가족이 함께 숲 산책에 나섰습니다. 숙소 앞에 있는 개울에서 올챙이와 물고기를 발견한 아이들은 작은 뜰채와 그릇을 가지고 올챙이를 잡습니다. 나중에 다 놔주기는 했지만 얕은 물에 햇볕 쬐던 올챙이들은 납치를 당한 셈인가요?

  산책로를 모두 시멘트로 포장했던데 아마도 회문산 큰지붕에 있는 방송중계탑 관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등산과 산책에는 영 좋지 않습니다. 휴양관 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곤충해설을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따라가서 곤충 전시실에서 회문산에 사는 곤충을 구경하며 상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곤충표본을 만드는 과정도 보여주시고, 따뜻하고 구수한 남도 억양이 참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곤충도감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는 준기의 방해(?)에 설명하시느라 많이 불편하셨을 것 같아 죄송스럽기도 하고.....제가 모르는 곤충을 준기가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설명해주시던 분께서 날씨 따뜻할 때 텐트를 가지고 휴양림에서 야영을 하면서 자연을 느끼고 별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겠느냐고 권유하시는데 정말 공감합니다.

  곤충전시실 옆에는 목공예 방이 있습니다(체험비용 천원). 생강나무, 야광나무 같은 것을 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시는데 앞으로는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적어놔야 할 것 같습니다. 비단처럼 반짝이는 화려한 껍질을 갖고 있는 길앞잡이가 우리 앞쪽에서 뛰어가다 날아가다 합니다.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니 육식곤충답게 인상 험악하게 생겼습니다. 다른 곤충들은 사람을 피해 수풀 속으로 달아나는데 이 녀석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 달아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진을 확대해 보니 사람 쪽을 보며 경계를 하면서 달아나는 모양입니다. 예쁜 날개를 한 나비도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호젓한 숲길을 걸어 올라가다가 빨찌산 사령부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남부군’이 생각나데요.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 빨찌산이란 말은 원래 파티(parti : 무리, 정당, 조직)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프랑스어로는 파르티잔이라 하고 러시아어로 빨찌산이라고 합니다. 게릴라(스페인어)와 같은 뜻으로 비정규전(저항전)을 수행하는 사람 또는 조직을 말합니다.

  준기는 뜰채로 길앞잡이를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눈이 다 감길 정도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길앞잡이를 놔주고 휴양림 밖으로 나가 옥정호~정읍 산외면(한우마을)~강천산 구경을 하기로 했습니다. 옥정호는 네비를 잘못 찍어서 막다른 마을까지 들어갔습니다. 물이 많이 마른데다가 한 낮이라 그런지 그저 그랬습니다. 역시 호수는 새벽에 보는 것이 제일 운치가 있을 것 같네요. 산외면에 도착하니 한우를 파는 정육점과 식당이 무지 많습니다. 현지아빠께서 드셨다는 맛있는 집을 찾아 가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메모를 해 놓은 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시네요. 입구에서 좀 들어가서 왼쪽이라는 것만 기억하셔서 왼쪽을 따라 들어갔는데 중령 세분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식당 겸용 정육점이 있더군요. 필이 팍 오더군요. 한 분이 우리를 보더니 고기 드시려면 이 집에서 드시라고 하네요. 자기들도 대전에서 이 집 소문 듣고 왔다고. 거북정육점(063-537-3563)에 들어가 모듬 하나 시켜서 먹었는데 등심은 좀 질긴 맛이 있고 다른 부위는 부드럽고 참 맛도 좋았습니다. 등심 5근과 국거리 1근을 사니 7만5천원, 모듬구이 2만천원(쌈채소 3인분 값 3천원 포함).

  한우거리를 나오니 김개남 장군 유적지 표시가 있었습니다만 강천산 가는 길이 멀 것 같아서 그냥 지났는데 1시간 쯤 가다보니 전봉준 장군이 사로잡힌 유적표시가 나옵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는지 아내가 저기 가 보자고 합니다. 1894년 동학혁명을 주동한 전봉준 장군이 이 고장 사람인 김경천의 밀고로 이 주막에서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당시 주막을 복원해 놓았는데 너무 깔끔하게 복원을 해 놓아서 옛스런 맛은 떨어집니다만 그냥 유적지 표지만 남긴 것 보다는 사람들이 찾아 올만한 기념물 역할은 할 것 같습니다. 전시관에도 당시 동학혁명군이 썼던 사발통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 자료들을 깔끔하게 정리 전시 해 놓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정읍이네요.

  ‘앉으면 죽산 서면 인산’이라고 묘사한 수많은 농민들이 봉기해 체제 변혁을 원했지만 결국 ‘존왕양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의 한계를 깨뜨리지 못하고 중도에 꺾인 농민혁명은 이 회문산이 보듬고 있는 피의 역사이자 격렬한 시대의 몸부림으로 100년 뒤 사람들에게 기억을 새롭게 합니다.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강천산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이상하게 개울마다 물이 너무 많고 힘차게 흐르는 것이 보입니다. 한참을 더 가니 산을 뚫어 물을 반대쪽으로 돌려 수력발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강천산 주차장은 아주 한산했습니다. 도선교 지나면서 바로 보이는 병풍폭포는 20미터는 넘을 것 같은데 물보라를 흩날리며 시원하게 떨어집니다. 폭포 아래에는 제법 큰 물고기도 보입니다. 갑자기 올라간 기온에 지친 사람들을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강천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아주 편안하고 부드럽습니다. 맨발로 강천사까지 다녀 올 수 있게 신발주머니도 갖춰 놓았습니다. 다람쥐가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 사진기를 들이대니 일어서서 가만있습니다. 마치 포즈를 취하는 듯....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니까 금방 사라집니다.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자랑이 어울리는 산입니다. 아기자기하고 개울물도 풍부하고 맑고 볼거리도 많고 걷기에 아주 좋은 산입니다. 중턱을 따라 계속 이어진 숲 관찰로는 올라가보지는 않았지만 멋질 것 같습니다. 이런 곳 근처에 산다면 유럽 어느 도시도 부럽지 않을텐데...

  강천사 올라가는 길 중간 쯤에 사방댐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 물고기가 바글바글 하더군요. 애들이 작은 돌맹이를 하나 던지니까 먹이인줄 알았는지 사방에서 물고기가 한군데로 모여 드는데 정말 멋있었습니다. 재미를 붙였는지 연우랑 준기가 번갈아 하나씩 던지고 또 모여들고...아버지는 새벽에 회문산휴양림 임도를 샅샅이 돌아 다니셔서 피곤하신 탓인지 여기에서 쉬시겠다고 하고 아이들은 물고기 옆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아내와 둘이서만 강천사까지 갔습니다. 아이들 놀이터도 잘 만들어 놓았고 원앙이 사육장에서는 아름다운 원앙이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만 갇혀서 날지 못하는 원앙이를 보니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천사를 돌아보고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순창 고추장마을에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여름 같은 봄날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납니다. 고추장 마을에 들어서니 언덕을 따라 고추장 집이 몰려 있는데 나름 특색있습니다. 제일 위쪽에 있는 고대광실 같은 기와집에서 파는 문옥례할머니고추장집에서 고추장 2kg, 모듬장아찌 1kg을 샀습니다. 너무 맛있더군요. 깔끔하고....( http://kochujang.go.kr/2008/image/int/03_01_02.gif ) 숙소로 돌아와 저녁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회문산 휴양림 숙소는 바닥이 적당히 따뜻해서 좋았습니다. 3일 새벽에도 눈은 저절로 떨어지고 바깥에 나가니 상쾌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쌉니다. 기온이 엄청 높을 것 같습니다. 새벽인데도 후끈한 기운이 감돕니다. 아버지는 역시나 새벽산책을 나가셨네요. 이번 여행의 메인이벤트는 지리산 노고단 올라가는 것인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수를 하고 작은 배낭을 챙겨 회문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힘들어서 쉬시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깨면 아침을 먹이고 바래봉으로 떠날 준비를 해 놓으라고 아내에게 부탁하고 시간을 단축하고 땅을 밟기 위해 지름길로 올라갔습니다. 숲 곳곳에 민족의 비극을 기억하고 희생된 넋을 기리는 시비를 세워 놓은 것이 보입니다. 숙연하게 만드는 산입니다.

  회문산은 어쩌면 모든 문재(文材)들이 모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시 만나 원을 풀어야 하는 문(回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양림 제일 위쪽에는 야영장이 있습니다. 텅 비어 있었습니다. 헬기장 바로 앞까지 차를 가지고 올라올 수 있도록 길이 넓었습니다. 헬기장에서 바라보니 작은지붕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주변 산 봉우리와 산 줄기가 장쾌합니다. 여기 오니 봄 같습니다. 평지보다 한 달 정도 계절이 늦게 가는 듯 연두색이 아름답습니다. 오랜만에 등산을 해서 그런지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땀이 비오듯 합니다. 주변사진을 찍고 어서오라 부르는 작은지붕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조선시대 무덤부터 현대 무덤까지 이 높은 산봉우리에 무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여기까지 널을 지고 올라온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올라 온 것일까요? 이 가운데 빨찌산으로 활동하다 죽은 사람 무덤도 있을까요? 무연고 묘를 처분한다는 공고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니 사연많은 무덤도 꽤 될 듯합니다.

  10여분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있는 여근목(女根木)이 있습니다. 빨찌산 토벌 때 온 산에 불을 질렀는데 이 여근목과 바로 앞에 있는 반송만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답니다. 산의 크기에 비해 나무가 너무 어려서 의아했는데 회문산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던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을 나무가 거의 없었던 모양입니다. 세계 내전 역사상 우리나라와 같은 참혹한 비극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이런 비극을 만들지 않도록 똘레랑스를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처럼 불타는 회문산 불구덩이 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여근목과 반송이 다시 회문산을 돌아오게 만든 뿌리인가 봅니다. 과연 호남의 어머니 산이라 부를만합니다. 여근목 위쪽으로 연분홍이 화사한 철쭉이 함박 피었습니다. 붉은 연산홍이 화장한 미인이라면 철쭉은 생얼미인 같습니다. 헬기장에서 작은지붕에도 다음 목적지까지 안내판만 있고 거리표시가 없습니다. 아마도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보여서 그런 걸까요? 큰지붕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큰지붕에 도착할 무렵 등산로 왼쪽 10여미터 안쪽에 천근월굴(天根月窟)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전서가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에 페인트 글씨로 조악하게 갈겨 놓은 표어는 짜증 지대로입니다. 안쪽으로 들여다보니 글씨도 예사롭지 않지만 바위의 형상이 생명을 잉태한 근원의 모습입니다. 김석은 이라고 써 놓은 것 같은데 각서에 대한 지식이 짧아서 쓴 사람의 정확한 이름과 내력을 모르겠습니다. 그 옆에 초서체 회문(會文)두 글자도 예사롭지 않은 힘이 있습니다. 쓴 사람의 호를 옆에 새겨놓은 것 같은데 어디를 찾아봐도 쓴 사람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쉽습니다. 이 높은 산에 석공을 데리고와 이정도 각서를 할 정도라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석공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진을 찍으며 올라왔는데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큰지붕(해발 837m) 표지판을 배경삼아 셀카를 찍고 주변 경관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내려오다 순창출신 시인 권진희님이 쓴 시를 안고 있는 바위를 만났습니다.

 

비목을 위하여 / 권진희

마지막 신음소리
포연속에 사라지고
이름조차 지워진
피맺힌 그대의 혼백
비목으로 서 있네

누가 쏜 총알이었는가
동족상잔의 서러운 역사
소쩍새 애절한 울음으로
구천을 헤매어 온
한 맺힌 원혼이여.

누구를 탓해야 할까
우리는 모두 한겨레
은원이란 흘러 보내고
그대 원혼을 위해
경건히 손 모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