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1,915m) 등산
당대에 나라를 구했으니.....
(2018.10.03 개천절)
다시 지방근무를 하게 된 지 어언 100일이 다 돼간다.
10월 징검다리 휴일 때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무릎 수술한 뒤로 등산은 해도 하산은 하지말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 때문에 트래킹만 해 왔기에 솔직히 1915m 천왕봉을 오른다는 건 벅찬 느낌이었다.
천왕봉 등산 계획을 얘기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를 알려 주었다. 계획을 미루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천왕봉 간다고 얘기하며 헛계획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몇일간 지리산 정상의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바람도 강하고 기온도 최고 기온이 12도 내외로 서늘한 날씨. 배낭 무게 때문에 고민을 하게 만든다.
3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물, 사탕, 충무김밥식 김밥, 굵은 대추, 삶은 달걀, 치즈조각 등을 챙기고 중산리로 차를 몰았다. 새벽부터 안개가 너무 심해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해가 뜨지 대부분 사라졌다. 중산리 안내소 근처에 다다랐을 때 로드킬 당한 고라니가 길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산을 계속 파고 들어가니 동물들의 이동로가 단절되어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안내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국립공원 직원이 내려와서 주차장이 만차라 올라갈 수 없으니 도로에 바짝 붙여서 차를 대고 걸어 올라가라고 안내해 준다.
여기 주민 가운데 한 분이 자기 집 담벼락 옆에 차를 대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셔서 차를 대고 고도를 재보니 497m다. 중산리 안내소까지 걸어오르는데 30분이나 걸렸다. 해발 681m. 안내소에 있는 지도를 보고 장터목 대피소를 통해 올라가는 길 대신 법계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하는 등산이라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가까운 길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 좀더 완만한 장터목 대피소 길을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국립공원 앱을 이용해 네비게이터를 켜고 천천히 길을 올랐다. 지루하고 지리한 길의 연속이었다. 다만 하늘이 너무나 맑은 파란색이었고 1500m 이상 올랐을 때 드문드문 단풍이 보인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될 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행과 같았다. 1,000미터 이상을 지나면서 서서히 힘이 든다는 느낌이 들어서 2~5분씩 짧게짧게 쉬면서 탈진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었다. 마치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경험한 고산지대 걷기 같은 느낌이었다.
아, 내 체력이 많이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서두르지 않고 쉬고 쉬면서 힘을 비축해 한 단계 한 단계 계단 구간을 통과했다. 땀을 식히며 올라온 길을 되돌아 보고 고도가 계속 높아지는 것에 한 걸음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면서....
1800미터 지점에서 다시 마지막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1200미터 지점부터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가파른 계단이 하늘 높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마지막 기운을 비축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 정도야 못 오를까?
멀리서 봤을 때는 너무 가팔라서 한숨이 나왔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오를만한 계단이었다. 인생은 역시 포기하면 안되는 것이다. 정상에 도착해서 계산해보니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무려 5시간이나 걸렸다. 안내도에는 3시간 50분이 적혀 있었는데 내 체력이 그만큼 떨어진 것이렸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에는 수십명이 모여서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다. 차례로 줄을 서서 찍으면 좋으련만 꼭 줄을 하나 더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기만 급하지 절대 남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절은 넘는다. 해서 기다리면서 매너 없는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단체로 온 사람들일수록 머릿수를 믿고 그러는지 더욱 배려심이라고는 없다. 정상석 앞 뒤를 배경으로 찍고 배너들고 찍고 누구랑 같이 찍고 ... 찍고 찍고 또 찍는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죄송할 짓을 계속한다. 그리고는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정상도착의 기쁨을 만끽한다. 추가적인 인증샷은 밥 다 먹고 해도 되겠구만 매너가 그 모양이다.
줄서서 겨우 인증샷 찍고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천왕봉의 탁트인 하늘과 풍경을 감상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맑은 날씨는 당대에 나라를 구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풍경이라 자위하며 천천히 파노라마 사진을 찍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가을하늘에 상승기류를 타고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 3명이 보인다. 풍경이 너무 광활해서 내려갈 생각을 잊고 사진을 찍다보니 40분이나 지나버렸다.
2시 40분 장터목을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죄다 화강암 덩어리로 된 산길이다. 무릎보호대와 마운틴폴을 양쪽에 들고 하산을 시작했으나 고행은 시간이 갈수록 가중됐다. 1시간 만에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는데 마치 5시간은 걸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질 시간을 고려해 보니 쉴 틈이 없을 것 같다. 걸어가면서 사탕을 물고 물을 마셨다. 무릎의 고통은 발목에서 엉덩이 그리고 허리까지 올라왔다. 등산하기에는 최악의 바윗길이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산 그림자가 깊어져 해가 진 것처럼 어두워진다. 발바닥에 불이 날 것처럼 화끈 거렸고 무릎도 아팠다. 연골파열이 걱정스러워 등산로 옆 개울에서 신을 벗고 발을 담궜다. 얼마나 차가운지 발을 집어넣고 열을 세기도 전에 꺼내야 했다. 그래도 물집이 생기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물에 담그기를 여러 번 하고 등산 수건을 물에 적셔 양쪽 무릎의 열을 식혔다. 새벽 일찍 등산을 시작했더라면 이렇게 고통을 참으며 하산을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내려오던 사람들 가운에 청년 3명이 있었는데, 예전에 1100미터 부근에서 곰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 해 준다. 곰을 보고 먼저 피했는데 곰이 따라와서 바위 위에서 뛰어내린 아찔한 경험을 들으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게다가 그 청년이 얘기한 바위에 곰을 주의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니 머리카락이 쭈뼛선다. 칼바위 근처에 와서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운틴폴 두 개를 쓰고 있으니 배낭에 있는 플래시를 꺼내 들 수도 없는데, 뒤에 내려오던 젊은 친구가 일부러 등을 비춰주며 내 보조에 맞춰 천천히 내려와 주었다. 감사를 표하는데 한참 뒤에서 일행인 듯한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혼자 가냐고 등을 비춰주던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등을 비춰주던 젊은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오, 여자랑 가는 거구나!” 이러더니 “뽀뽀 해! 뽀뽀 해!”를 연발한다.
청년과 나는 피시시 웃었다. 마침내 칼바위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고 바로 중산리 탐방안내소를 향해 내처 걸었다. 무릎은 말할 수 없이 아팠고, 마운틴폴에 의지해 겨우 겨우 걷는 상태였다. 하산을 시작한 지 3시간 30분 정도 걸려 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비로소 곰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얼굴에 흐르는 물에서 짠맛이 났다. 군복무 중에 20km 행군할 때가 생각났다. 다행히 중간중간 고열량 간식을 섭취한 덕분인지 아니면 기초체력이 아직 쓸만해서인지 탈진하지 않고 잘 내려온 셈이다.
너무 어두워져서 빨리 자동차에 가고 싶은 맘에 쉴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동차까지 가는 길은 왜 이렇게 먼 것인지, 산 모퉁이를 몇 개를 돌아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산 짐승들 움직이는 소리 같아서 길 바깥쪽으로 멀리 피해 걸었다. 깜깜한 길에 걸어가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다.
하늘에는 토성과 화성이 뚜렷하게 보였다. 탐방안내소에서 거진 30분 가까이 걸려 자동차에 도착했을 때는 만사가 귀찮을 지경이었다. 저녁 7시, 이 장소에서 등산을 시작한 것이 아침 8시 45분이었으니 10시간 15분을 걸은 셈이다.
등산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은 뒤 병에 남아 있는 물을 마음껏 마셨다. 세상 어떤 맛보다도 훌륭했다. 차에 올라 진주로 돌아오는 길은 시원한 가을 저녁 공기 덕분에 상쾌했다.
8시 30분경 중산리 안내소 아래 쪽 마을에 도착해 고도를 측정
중산리 안내소까지 20분 정도 걸어 올라갔다.
주차장은 이미 가득찬 상태라 20분 이상을 걸어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안내판을 보고 코스를 가늠해 본다.
아주 오랜만에 등산이라 다른 사람들이 권유해 준 중산리>장터목>천왕봉 방향을 생각했으나
같은 길을 왕복하는 건 싫고, 힘이 남아 있을 때 오르는 길이 좋을 것 같아 중산리 > 로타리 > 천왕봉 방향을 선택했다.
이 안내판은 탐방지원센터 근처에도 있고 중턱인 법계사 근처에도 있는데 중턱에서 찍은 사진.
소요시간은 적어도 주말마다 산을 다니는 사람 기준으로 작성된 것.
통천길을 지나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갈수록 고도계를 자주 쳐다보게 되고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으나
실제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을 느끼며 올라간다.
삼릉석처럼 생긴 칼바위
이 곳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장터목 대피소 방향으로 해서 천왕봉에 오르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가장 가파르지만 짧은 길로 오르게 된다.
중산리 탐방센터에서 1.1km 오르는데 42분 소요.
예상과 달리 바람한점 없이 쾌청하고 따뜻한 날씨여서 준비해 간 옷이 오히려 짐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나무 그늘이 짙어서 햇빛으로 인한 고통은 없었으나 전망이라 할 것도 없다.
해발 1177미터 망바위 통과. 탐방 안내소에서 1시간 33분.
쉬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해발 1,200미터 정도에 오르자 조금씩 능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여름 풍경 그대로다.
몇일간 일기예보를 봤는데 이날도 최저 1도에서 최고 14도까지 바람은 초속 4미터로 예보되었으나
남쪽 사면이라 그런지 바람한점 없이 등산하기 좋은 서늘한 기온이었다.
국립공원 산행 앱을 다운 받으면 이렇게 등산 네비게이션으로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체력 안배를 해 가며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있으니 더더욱 좋다.
다만 이 걸음은 자주 등산을 다니는 사람의 페이스일 거다.
덕유산 향적봉 등산을 마지막으로 3년 반이나 지났으니
10분 걷고 1~2분 휴식하는 형태로 올라갔다.
해발 1,200m쯤 오르자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늘은 정말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그런 하늘이다.
안내소에서 여기까지 소요시간 2시간 20분 정도
5분뒤 로타리대피소에 들러 화장실에 다녀왔다.
여기 통과 제한시간은 오후 1시, 1시가 지나면 정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하산시간 때문에 한라산처럼 시간 제한을 하는 듯.
5분 정도 쉬고 천왕봉을 향해 다시 길을 오른다.
여기는 샘물이 있기 때문에 물병은 하나만 준비해도 당일치기 등산객은 충분할 듯.
1g이라도 무게를 줄이려고 행동식은 사탕, 깐 밤, 작은 덩어리 치즈 이렇게 준비했다.
1,500미터를 넘어서자 단풍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늘은 정말이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쉬는 시간은 늘어나고 능선 사진을 의미없이 찍어 둔다.
산악 네비게이션은 남은 거리와 시간을 알려주는데,
정상으로 갈수록 소요시간은 앱이 알려주는 시간보다
2배는 늘어나는 느낌이다.
탐방안내소부터 벌써 3시간 30분이 지났다.
기온은 여전히 10도 아래쪽이라 생각보다 땀도 덜나고
걷기에 좋은 날씨
심장마비를 조심하라는 경고문구가 곳곳에 나 붙어 있다.
심장마비로 사망자가 발생한 지점이라는 경고문과 함께.
마치 고산병이 생겨서 걷지 못하는 것처럼
계단 구단을 통과할 때마다 3~7계단 오르고 숨을 한번 고르고 오르기를 반복한다.
국립공원 안내도라면 이미 천왕봉에 도착해야 할 시간이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도 단풍과 능선의 모습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법계사에서 1시간 10분을 걸어왔는데 겨우 1.3km를 걸었을 뿐이라니!!!!!
개선문을 통과하고....
하늘은 새털구름으로 곧 가을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바닥은 죄다 바윗돌.
쉬면서 무릎보호대를 착용해 부상을 예방한다.
이제 저 까마득히 보이는 계단만 통과하면 천왕봉 정상이다.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아득해 보인다.
예상보다 많이 늦어져 점심시간도 꽤 지체가 되었다.
중간 중간 열량을 보충했기 때문에 3년반만에 오르는 산인데도 잘 올라왔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아주 급한 경사로에 설치한 계단을 타고 천천히 천천히 천왕봉을 향해 올라갔다.
음, 생각해보니 나이가 드니까 고소공포증 같은 것도 둔감해 지는 것 같다.
중산리 안내소에서 무려 5시간만에 정상에 올라왔다.
이제 한반도 대륙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온 셈.
인증 사진을 몇장 찍고 장터목 방향으로 내려가는 쪽에 앉아
김밥, 삶은 달걀, 치즈, 사탕을 먹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행글라이더 타는 사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시야는 정말 좋은 날씨였다.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은 이런 날씨일까?
생각해보니 짧은 가을 해가 지기 전에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장터목까지 1.7km는 온통 바위로 길을 만들어 놓아서 그런 것인지 원래 바윗길이었는지
무릎, 발목에 부담을 가중시켰다.
마치 등대처럼 바위가 우뚝 솟았는데 무릎관절이 염려가 되어
출발 30분만에 다시 쉰다.
이런 길은 두터운 등산화를 신더라도 고통을 참기 어렵다.
차가울 것을 대비해 가져온 옷은 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았지만
쇠퇴해진 체력을 더 소진하게 만든다.
오래전 사진으로 보았던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를 통과.
도벌꾼의 탐욕으로 불탄 사진속의 고사목은 30년 넘는 세월동안 많이 사라졌다.
겨우 흔적만 남았고 산림청에서 식생 복원작업을 하느라 심어 놓은 나무들이 다시 자라고 있다.
하산길의 제석봉은 황량하고 힘든 돌길이었지만 좌우에 식생 복원용 나무들 덕에 미래의 희망을 본다.
하산 1시간만에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하산 한계시간을 넘긴 시각.
쉴 틈 없이 다시 남은 길을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
이 후에는 사진 찍을 시간도 아껴가며 하산을 서둘렀다.
무려 3시간이나 더 지나서 중산리 안내소에 도착했다.
다녀본 산 가운데 이 길을 최악의 등산길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래도 한반도 대륙 남쪽의 최고봉을 다녀 온 것에 의의를 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