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의사 기념관을 찾아서
2016. 5. 7. 전북 정읍
[유언]
나는 몇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설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례의 영예를 위하여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위에 놓아 주기 바랍니다.
- 백정기 의사가 이시하마 감옥에서 운명하기 며칠전 같은 감옥에 있던 동지인 이강훈, 원심창 의사에게 남긴 유언.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죽이려고 준비하던
백정기 의사는 동료였던 일본인 아나키스트 오키의 배신으로
함께 거사를 준비 중이던 이강훈, 원심창 의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4살때부터 이 곳 정읍에서 자랐다.
1934년 6월 5일 39살 나이로 순국할 때까지
아나키스트로서 멋진 남자로서 무장 광복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백정기 의사를 기념하는 의열사 정문이 저 멀리 보인다.
들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백정기 의사의 말씀 비석(1937. 3.17 거사 준비 중에 동료들에게 한 말)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 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백정기 의사는 1932년 상하이 홍구 공원 거사를 준비했으나 입장권을 구해주기로 한 중국인이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홍구 공원 앞에서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만큼 백 의사는 열정적인 광복 전사였다.
들어가는 오른쪽 편에는 백정기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뒷편에는 백정기 의사가 한 말이 새겨 놓았다.
그는 열렬한 무장 광복투쟁가였다.
의열단, 흑색공포단 등 그가 주로 활동한 영역은 일본과 무력 항쟁 쪽이었다.
문 앞 오른쪽에는 백정기 의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청의당(聽義堂) 건물이 있다.
왼쪽에는 전시실이 있는데 여기에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과 수류탄이 전시되어 있다.
육삼정 의거 준비 중에 체포된 이강훈, 원심정, 백정기 의사를 다룬 당시 기사에서
인물 사진과 사용했던 폭탄 사진을 발견했다고 한다. 백정기 의사의 눈빛이 살아있다.
존영을 모셔 놓은 전각 앞 의열문
의열문을 들어서면 백정기 의사 초상을 모신 전각이 있다.
초상을 모신 의열사 전각
참배를 마치고 뒤를 돌아 정문 쪽을 바라본 모습
이 곳은 평지라서 위압적인 느낌이 없어서 좋다.
아들은 방명록에 서명을 남겼다.
정읍에 내려 올 때마다 들르고 싶었는데 매번 올라가는 시간에 쫒겨 참배하지 못했던 죄스러움을 조금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