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여행 (2) 양산과 마산
영남 여행 (2) 양산과 마산
2015.10.09~2015.10.11
10월10일
아침에 일어나니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만 9년이 되는 날.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아쉬움이 남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새롭다. 아버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알고 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늘은 양산 통도사와 경남 마산 일대에 있는 3.15 의거 현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9시에 경산을 출발해 10시쯤 통도사에 도착했다. 화엄종의 격식을 제대로 갖춘 큰 절인데 불상을 보며 경배를 하고 들어가는 많은 불자들을 보니 이 지역의 불심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겠다. 전각마다 스님들이 독경을 하는 장면을 보여서 살아있는 절 같다. 규모도 크지만 구역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국화꽃과 밝은 가을햇살이 더 아름답게 빛난다.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통도사를 나와 웅천읍성을 찾아 간다. 작고 얕으막한 성곽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길 건너편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 관헌에게 죽음을 당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 평양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가 고향이라고 한다. 웅천읍성 안쪽을 돌아보니 성벽은 일부만 복원을 한 모양이다. 독일의 로텐부르크 성이 생각나서 비교가 된다. 유럽 사람들은 오래된 성도 살아있는 것처럼 그 당시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와 즐길꺼리를 갖추어 놓았는데 우리는 그런 문화적인 관리능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듯하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에도 들러 둘러 본 뒤에 오늘의 핵심 여행지인 마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마산에 도착해 아들이 꼽아놓은 50년된 화교 중식당을 찾아갔는데 하필이면 쉬는 날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화교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진해가 가까워서 그런지 해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많이들 점심을 먹고 있다. 외박을 나온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마산 3.15의거 기념관과 기념탑, 유해를 모셔 놓은 국립묘지에 들렀다. 이승만과 독재에 아부한 자들의 부정행위에 이들이 항거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북쪽의 김일성 왕조와 같은 변형된 군주국이 되지 않았을까? 3.15의거 기념관과 묘지를 둘러보며 3.15의거 희생자들에게 타도의 대상이었던 이승만 같은 인간을 “국부”로 삼겠다는 자들의 정신세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재와 불법에 항거하는 비무장 자국민에게 총질을 해 대는 인간이 어떻게 “국부” 따위가 될 수 있겠는가? 희생자 대부분이 10대 중고등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이 투표권을 가진 인간들보다는 100배 낫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어제 포항의 학도의용군 기념관에서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린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주열 열사의 가묘를 비롯한 희생자들의 묘역에서 그 분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지금도 국민의 안녕과 민주주의 발전을 불편해 하는 자들이 역사의 퇴행적 잘못을 반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희생자들에게 미안하고 기가 찰 일이다. 어리석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는 막아야 할 것이다. 범죄자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에 범죄자와 그 옹호세력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범죄를 반복하려고 시도한다고 본다. 국립묘지는 경사가 너무 심한 곳에 조성하여 오르내리는데 힘이 들었다. 언덕 아래에 커다란 소주공장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국립묘지에서 내려와 마산 합포구청(옛 마산시청)으로 갔다. 구청 안에 주차를 하고 지도를 보니 합포구청 일대는 3.15의거 현장이 반경 1km 안에 집중되어 있다.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떠 오른 마산 중앙부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마산병원. 시신을 감추고 시민의 접근을 무력으로 막던 독재의 친위대 경찰. 이런 나쁜 유습은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고 ’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학우들의 시신 탈취와 같은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3.15의거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작고한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숨진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시신이 마산항 중앙부두에 떠 올랐던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산 시청 건너편 마산의료원에 안치된 처참한 시신 사진을 본 시민들은 4월12일 다시 궐기했고 마침내 4.19혁명으로 연결됐다.
3.15의거 기념탑으로 가려다가 마산합포구청 길 건너편 성지여고 방향으로 언덕길을 올라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장장군 묘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도로 안내 표지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아들과 함께 찾아보았다. 장군이라는 지명과 가게 이름이 밀집되어 있는데 어디 숨어 있는지 정작 장장군의 묘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뱅뱅 돈 끝에 골목 어귀에서 축대 위에 조성해 놓은 무덤을 발견했다. 고려 때 왜구가 350척이나 되는 배를 나눠타고 마산을 침략한 적이 있는데 관군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다 전사한 청년이 있었다고 한다. 오직 장씨라는 성만 알려져서 장장군으로만 부르고 있다는데 마산시민들은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잊지 않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빗방울이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 3.15기념탑 근처에 차를 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을 찾아보았다. 3.15의거 당시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키라고 세금으로 사준 총을 비무장 시민들에게 쏜 것도 모자라 초등학교 안으로 도망가는 시민들을 쫓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만행 현장을 확인했다.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은 철거했다가 예전 총알자국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결국 5.18항쟁에 대한 학살극 역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적 연원이 있는 셈. 초등학교에다 총질을 해대는 일제 부역 매국 경찰 출신들의 악행을 확인하니 더러운 인간이 깨끗한 인간이 되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깨우쳐 준다. 이 더러운 인간들의 이름과 악행은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꼭 전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이 역사적 컨텐츠는 수십년간 수천만명의 관객을 끌어 모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수십만 수백만명이 계속 이 곳을 찾을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2.28대구 궐기부터 3.15의거, 4.12 궐기, 그리고 4.19로 이어지는 혁명의 스토리는 레미제라블처럼 장대한 컨텐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3.15 기념탑 건너편에는 쿠빌라이 칸의 명으로 일본 원정에 나선 몽골군이 마셨다는 몽고정이 있다. 그 우물 옆에는 이 물을 이용해 100년 역사를 이어온 <몽고간장> 회사가 있었다. 어렸을 때 TV광고에서 봤던 몽고간장이 아직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만약 고려-원 연합군이 일본 정복에 성공했더라면 우리의 근세사는 달라졌을까?
마산 중앙부두에는 특이한 사진이 트랙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연기 문신 선생(1923~1995)의 사진. 이 지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한다. 그의 경력에 걸맞는 독특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산-창원-진해를 하나로 합친 것이 의아하다. 세 도시가 각각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굳이 합쳐서 어떤 것을 기대한 것일까? “내 고향 남쪽바다” 마산은 이제 노랫말 속에서만 있는 것인가?
중앙부두 뒤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수도권과 달리 막히지 않아서 너무 편했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소고기 육전을 고명으로 얹은 교동냉면을 먹는 냉면 매니아 아들의 표정이 흐뭇하다. 길이 막히지 않으니 여행의 재미는 더 크고 피로도는 훨씬 낮다. 수도권이 아닌 곳에 살면 삶의 질은 분명 높아질 듯.
양산 통도사
통도사 영산전 벽화. 서역사람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웅천읍성. 임진왜란 이전 삼포왜란 때 왜구들의 습격이 있었다.
개신교의 대세였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숨진 주기철 목사 기념관
역사를 되돌리려고 하는 인간들이 "국부"로 떠받들고 싶어하는 이승만의 불법 부당한 독재에 항거했던 마산 시민들의 의거를
증언하고 있는 3.15의거 기념관
기념관 위에서서 내려다 본 마산의 모습
희생된 민주수호 영령들을 기리는 고은 시인의 시
일제에 부역했던 식민지 경찰 출신들이 무차별 발포한 총에 맞아 희생된 의인들
3.15 당시에 희생되었다가 4.11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과 당시 기록들
이 시신 사진이 보도된 다음날 마산시민들은 다시 궐기했고 마침내 일주일 뒤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언덕 높은 곳에 있는 3.15 의거 기념조형물
언덕이 가팔라 웅장한 모습을 주긴 하는데 접근하기는 힘든 구조
김주열 열사의 가묘.
당시 독재수호에 앞장 선 경찰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고향인 남원으로 빼돌려 매장하였다.
사당 앞에 서 내려다본 마산 전경
공민왕 때 마산을 침략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젊은 장수의 무덤
3.15의거 기념탑 옆에 있는 몽고정, 이 우물에서 일본 원정에 나선 몽골군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3.15 의거 기념탑
기념탑 오른쪽 아래에 있는 무학초등학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 오른 마산 중앙부두.
이 지역 출신의 세계적인 미술가 문신의 사진이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