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러시아(2015년)

바이칼에 가다(8/8)

연우아빠. 2015. 9. 18. 13:00

광복 70년 한겨레 바이칼 평화 대장정(8/8)

(제5회 민족의 시원 바이칼을 향한 평화대장정)

 

(8) 2015.08.24.(월) : 알혼섬 ~ 이르쿠츠크 ~ 귀국(8.25)

 

7시 반쯤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알혼섬을 떠나 이르쿠츠크로 가는 날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지 못해 몹시 아쉽고, 바이칼 호수에서 수영을 못해본 것이 못내 아쉽다.

아침을 먹고 그동안 배급 받았던 큰 물병 2개와 작은 물병 2개를 숙소에 남겨두고

1리터짜리 물병 1개만 챙겨 미니버스를 타는 곳으로 모였다.

길다면 긴 여행이었지만 돌아가는 길이 아쉽기만 하다.

 

10호차 미니버스를 같이 탔던 이 선생이 갑자기 뛰어 온다.

“찾았어요! 찾았어!”

어제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는 우리가 탔던 10호차에 맨 처음 달려가 차 안을 뒤져서 지갑을 찾은 것이다.

아, 이렇게 고마울데가....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챙겨주는 정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싶다.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는 그제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길을 쏜살같이 달려 알혼 선착장에 내려 주었다.

이제 알혼 섬과 작별이다. 언젠가 다시 오겠지?

 

다 스비따니야(До свидания)!

우리는 알혼섬을 향해 손을 흔들며 건너편 선착장으로 출발했다.

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얕은 곳은 바닥이 보인다.

검푸른 곳은 수심이 아주 깊은 듯하다.

신생대에 생긴 이 섬은 수많은 동식물의 보고인데 우리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전기가 들어오니 이제 훼손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다음에는 이 모습이 사라지고 없겠지? 오랫동안 원래 모습을 간직하기를 빈다.

 

여객선 두 척이 알혼섬과 사휴르따 선착장을 번갈아 오간다.

사휴르따 선착장에 내리자 그제 우리를 내려 준 그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수입한 탓에 우리말이 그대로 문에 남아 있다.

물범을 물고 있는 전설속의 동물 흑범을 지자체 문장으로 쓰고 있는 곳.

 

우리는 다시 황량한 스텝지대를 지나 이르쿠츠크를 향해 달렸다.

중간에 메텔리쨔(МЄТЄЛЦа)라는 간판이 달린 브리야트 전통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우리나라 삼계탕과 비슷한 닭요리가 나왔다.

끝없이 넓은 초원에는 소와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강변에 텐트를 치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뒤, 오후 4시경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들렀다.

수도원 옆 공원에는 적백 내전 때 백군 사령관이었던 꼴차크의 동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제독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1689년 여자수도원으로는 시베리아에 처음 설립된 곳이라고 한다.

현재 건물은 대화재 이후인 1762년에 새롭게 돌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쿠릴열도와 알래스카를 처음 탐험한 셀레호프의 묘도 이 수도원 안에 있다.

데카브리스트 유배자 가운데 처음으로 유형지로 따라 온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 부인의 묘도 이 수도원 마당에 있다.

 

본당 안에는 전형적인 동로마제국스러운 이콘 상들이 가득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초를 사서 봉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성호를 그으며 경건한 정교회 본당의 엄숙함에 젖어들었다.

 

수도원을 나온 우리 일행은 데카브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트루베츠코이 부부가 살던 집으로 갔다.

지금 기준으로봐도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이었는데 몰락한 러시아 귀족의 생활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트루베츠코이의 부인은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안락한 모스크바의 귀족생활을 포기하고 반역자로 유형에 처해진 남편을 따라 이 오지에 와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녀가 가꾼 이 집은 지금은 데카브리스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또 한명의 데카브리스트인 발콘스키 공작의 집은 오늘 휴관이라고 한다.

 

이르쿠츠크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본 유적은 1920년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당식이 있었던 건물이었다.

갑작스럽게 일행들이 나에게 이 역사적 건물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해서 당황한 나는 완강하게 사양을 했다.

 

박 사장이 건물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데 요시다카 선생이

우리 행동이 이해가 안된다고 부인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한국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데카브리스트 관련 유적은 자세히 관람하면서,

정작 한국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려공산당 창당 건물은 들어가보지도 않고

먼발치에서 보며 설명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이르쿠츠크 공산당을 결성한 같은 장소에서 같은 해에 몽골공산당도 창당을 했는데

그들은 1924년 적군의 도움으로 중국과 백군을 몰아내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파로 갈려 주도권 싸움을 하여 내부의 갈등을 불러왔고

항일무장군대 지휘권을 놓고 다투다가 자유시 참변이라는 끔찍한 내분을 초래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반목하면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다시 건널 수 없는 골을 만듦으로써

지금까지도 분열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관계로 고려 공산당은 묻혀버린 역사가 되고 말았다.

자유스(스보보드니) 참변은 항일전쟁 중에 아군이 아군에게 총을 쏘고 아군을 서로 죽인 동족상잔이라는 점에서

씻을 수 없는 역사적 타격이었다.

 

그러나 고려공산당이라는 이름은 동시대에 많은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1943년 인도네시아에서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조선 청년들이 비밀리에 고려공산당을 조직해

항일 투쟁을 하다 적발된 사례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르쿠츠크 시내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불두구제(Бурдугуз) 파크호텔에 들렀다.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앙가라 강을 따라 바이칼 호 쪽으로 40km를 내려가면 나오는 이 호텔은

바이칼에서 흘러나오는 앙가라 강변에 있다.

식사를 마치고 어코디언 반주에 맞춰 러시아 민요 공연을 구경했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왠일인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그런 노래였다.

우리나라 강강술래처럼 모두 손을 잡고 둥글게 둥글게 도는 놀이도 하며 러시아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랬다.

결혼식을 마치고 놀러온 러시아 사람들도 있었는데 강변에서 아주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 숲 사이로 보인다.

 

밤 하늘의 별은 아주 밝았다.

이르쿠츠크 시내로 돌아와 비행기 시간까지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이르쿠츠크는 인구 60만 정도로 큰 도시지만 우리나라 도시에 비해 가로등도 별로 없고 조용한 편이었다.

슈퍼마켓에 들러 연우가 주문한 기념이 될만한 것을 살펴보았지만 없다.

한결이는 여동생 주겠다고 귀여운 바이칼 물범인형을 샀다.

우리는 살게 없어서 기념으로 초콜렛을 한 상자 샀다.

푸틴이 만들게 했다는 루스키 스탠다드 보드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가게에서는 러시아 법을 철저하게 지키느라 밤 9시가 넘은 시각이 되자 술을 팔지 않았다.

제한 시간 전에 계산대에서 계산을 끝낸 사람을 사 가지고 나왔지만,

바로 뒤에 사람은 시간이 넘었다는 이유로 술을 진열대에 다시 갖다놓고 와야 했다.

 

현지시각으로 8월25일(화) 새벽 12:30분에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조그마한 지방도시 시외버스 터미널만한 이르쿠츠크 국제공항은 승객이 밀리거나 말거나

게이트 4개 중에 2개만 열어놓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보안검색과 보딩체크를 한다.

공항 안에 조그마한 가게에서 마뜨요시카를 발견하고 2,000루블을 주고 한 개 샀다.

상당히 조잡해 보였지만 다른 가게가 없다.

 

길고긴 보딩체크 시간,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대한항공 직원이 나와서 뭐라고 한참 얘기하고 나서야

게이트 4개를 다 열어서 처리했다.

우리 기준으로는 짜증날 일인데, 저 사람들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아쉬울 게 없다.

우리도 비행기에 짐을 부쳤으니 그냥 출발하지는 않을거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보딩체크를 마치고 나니 바로 면세점 비슷한 조그만 가게가 하나 보였다.

거기에서 사무실 직원들에게 줄 루스키 스탠다드 보드카를 한 병 샀고,

한별이는 2,000루블짜리 마뜨료시카 인형을 발견해서 한 개 샀다.

보안 검색 구역에 있던 가게 제품보다 훨씬 품질이 좋아 보였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사이에 비행기 트랩까지 타고 갈 버스에서 우리를 찾으러 러시아 안내원이 왔다.

얼른 뛰어가 버스를 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행들에게 미안한 인사를 건넸는데

다들 여유롭다. "얘네들도 느긋한데 우리라고 는데 조금 있다가 비행기를 향해 버스가 출발했다.

“음! 러시아는 아직 아프리카스러운 곳이 많군!”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한국시각으로 새벽 3시반이 넘어서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한국을 향해서 출발했다.

 

안녕! 러시아여! 다시 오마!

다음에 올 때는 가족 모두 동참하여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유럽 러시아 지역을 배낭여행을 하겠노라고 다짐하며 깊은 잠에 떨어졌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그려 놓은 미니버스.

 

 

알혼섬이여 안녕!

 

 

여행은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 시대도 있었다.

황량한 스텝지역에 죽은 이를 기념하는 정교회 십자가와 꽃이 돌 무더기 위에 놓여 있다.

 

 

알혼섬을 건너서 이르쿠츠크로 돌아오는 길 가운데 2시간은 이런 길을 달려야 한다.

 

점심을 먹으러 들린 브리야트 전통식당 마당에 사루비아 꽃을 비롯한 꽃이 예쁘게 피었다.

 

 

점심 때 나온 음식 중에 항아리에 담긴 닭백숙 같은 요리

 

 

넓고 넓은 평원에는 소도 방목을 하고

 

말도 방목을 한다.

 

경비행기 학교 같은 풍경도 보이고

 

드문 드문 집이 보인다

 

시베리아는 대륙성 기후라 여름에 몹시 덥다.습도가 낮아서 지낼만 할 뿐.

더운 날씨에 강물에서 물놀이를 하는 가족인 듯

이르쿠츠크는 겨울에 영하 40도 정도까지 내려가는데

시베리아 고기압의 중심지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한다.

습도도 낮고 바람도 불지 않아서 겨울 체감온도는 영하 5도 정도로 지낼만하다고 한다.

 

 

1918~1922년 적백내전 당시 짜르의 백군 총사령관 꼴차크(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동상

제정러시아 해군 제독이었으며 1차대전 러시아의 전쟁영웅이었다.

적백 내전 때 적군에게 쫓겨 시베리아로 퇴각 도중 이르쿠츠크에서 적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 뒤 시신은 바이칼 호에 던져졌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서 동상도 세우고 추모하는 꽃도 놓여 있다.

 

 

1689년 이르쿠츠크에 여자 수도원으로는 처음 세운 즈나멘스키 수도원

 

수도원 안에는 데카브리스트 유형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발콘스키 공작 부인이 묻혀 있다. 

수도원 주교관

 

예배당 정면 감실, 동방정교회의 특징인 이콘과 화려한 금색 치장이 가득하다.

 

 

수도원 종탑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이 극명한 러시아에서 꽃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다를 의미일 듯 싶다.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유배에서 풀려 살았던 집

 

내부에는  트루베츠코이 공작 부인의 초상화가 있다.

모든 사회적 부와 명예, 지위를 포기하고 머나먼 시베리아 유형지로 남편을 따라온 그녀는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듯.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집에서 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집을 짓는 도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트루베츠코이 공작부인이 사용하던 찻잔. 유럽의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도자기 찻잔이 그들의 생활수준을 보여준다.

 

유형이 풀릴 때까지 데카브리스트 들은 쇠사슬과 차꼬를 한 채 노동을 해야 했다.

 

 

발콘스키 공작의 집 뜰에 핀 꽃

 

 

이르쿠츠크 시내에도 레닌의 동상이 있다.

 

 

러시아 땅에 망명을 해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저 붉은 벽돌건물에 모여 1920년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해에 몽골 공산당도 창당식을 열었다.

몽골 공산당은 1924년 세계에서 두번째로 몽골 땅에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우리는 고려공산당 창당 이후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 파로 갈려 공산당 내부에서 큰 갈등을 겪었다.

특히 연해주 일대에서 이만전투에서 활약한 우리 항일 무장군대와 청산리 봉오동에서 승리한 항일 무장군대는

1921년 적백내전 때 자유시(러시아 지명 스보보드니)에 집결해 단일 교전단체를 결성하여 적군과 협력함으로써

일본군을 격퇴하고 러시아 내 한인 자치주를 획득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항일 무장군 가운데 자유대대와 이항군대 사이에

군 통수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르쿠츠크파는 자유대대와 연계되었고, 이항군대는 상해파와 연계되었던 바

이 들 사이의 갈등은 결국 적군의 개입을 불러왔고 무장해제를 거부한 부대에 대해

러시아 적군과 단일부대 통합에 찬성한 측이 공격을 가함으로써 우리 무장군 960명이 전사하고

1,800여명이 전사하거나 적군에게 체포되는 타격을 입었다.

이 일로 항일투쟁기간 내내 우리는 통합된 항일무장군을 갖지 못했고, 진영간 갈등으로 반목을 거듭했다.

지금도 그 불행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불두구제(Бурдугуз) 파크호텔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민속음악 공연 관람 중

 

 

우리나라 강강술래 같은 원무를 하는 것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호텔은 앙가라 강변에 있고, 배를 타면 바이칼호로 갈 수 있다.

결혼식을 마친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와 시베리아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하늘의 별이 정말 깨끗하게 보였던 이르쿠츠크의 밤이었다.

 

 

밤 12가 다 돼 가는 이르쿠츠크 시내

 

 

드디어 우리를 태우고 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낀 여정이었다.

 

 

기념으로 사온 마뜨료시카. 인터넷을 찾아보니 마뜨료시카는 모스크바나 상뜨 뻬제르부르크 쪽이 다양한 것 같다.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의 단락이 바뀔 때마다 한개씩 열어 사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