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러시아(2015년)

바이칼에 가다(2/8)

연우아빠. 2015. 9. 14. 18:30

광복 70년 한겨레 바이칼 평화 대장정(2/8)

(제5회 민족의 시원 바이칼을 향한 평화대장정)

  

(2) 2015.08.18. : 우수리스크 동포 마을 / 블라디보스톡

 

에어컨이 없어서 새벽에 조금 더웠다.

러시아에 오기 전에 한 달 동안 러시아의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대륙성 기후라 생각보다 기온이 높긴 했으나

실제로 더위를 접하고 나니 위도와 기온의 불일치가 신기했다.

아침 6시 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밤에 들어왔기 때문에 주변 풍경이 궁금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우수리스크 호텔 근처에는 이미 출근하는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이 풍경에 러시아 사람만 보이지 않는다면 한국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정말 우리나라와 비슷한 자연환경이다.

 

아침은 구름이 넓게 낀 약간 시원한 날씨였는데 습도는 조금 높은 느낌이었고, 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가까이에서 새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세수를 하고 짐을 정리하다가 잠이 깬 아들과 함께 밖에 나갔다.

아침 식사 시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아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즈드라스~뜨부이쩨!(안녕하세요, Здравствуйте)” 라고 러시아어로 인사를 건넸다.

낯선 발음에 깜짝 놀란 호텔 경비원들이 1~2초 정도 시차를 두고 웃으면서 “즈드라스 뜨부이쩨!”하고 화답 해준다.

11살 때 유럽여행 때는 부모 따라 다니느라 직접 부딪혀 볼 기회가 적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적극적이다.

 

우수리스크 호텔은 생각보다 큰 8층짜리 호텔이었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인증사진 몇 장을 찍고 객실로 잠시 올라왔다가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우리 일행 말고도 상당히 많은 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들이 이곳으로 여행을 많이 온 듯하다.

 

아침식사는 식판을 들고 가면 담당 조리사들이 음식을 담아 주는 방식인데 우리나라 업소처럼 빠르지는 않다.

러시아 가면 꼭 먹어보라고 사람들이 권유하던 음식인 귀리죽, 달걀, 러시아식 만두, 스프, 주스...한 가지씩 받다 보니

양이 평소 먹는 것의 2배는 되는 듯 하다.

음식이 모두 입에 맞았다. 강한 향신료나 양념은 없었고 인공적인 느낌이 없는 소박한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현지시각 09:30에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에 탑승했다.

우정마을 가는 곳을 안내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를 잘 못 알아들어서 엉뚱한 곳에서 기다리는 바람에

30분 이상 지체한 뒤에 선도차를 따라 마을로 향할 수 있었다.

우리 버스 기사는 아르메니아 사람이었고, 상대편 기사는 카자흐스탄 사람이라서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어로 통화하는 중에 번지수에 대한 청취에 착오가 있었다고 한다.

가족을 떠나 멀리 돈을 벌러 연해주까지 온 우리 버스 기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차창 밖에는 자작나무 아니면 침엽수가 계속 이어지는 풍경의 반복이다.

얕으막한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70년대 후반 우리나라 도로 포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시내 도로는 차도와 인도 사이에 작은 고랑이 있고 수목으로 사이를 차단해 놓아서

사람들이 자동차 소음에 덜 시달리며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었다.

 

길고 긴 화물열차를 끌고 가는 철도도 보이고

도심을 벗어났는지 넓은 초원에는 소와 양을 끌고 가는 사람들도 가끔 보였다.

 

우수리스크는 인구가 16만명이며 이 가운데 고려인은 약 10% 정도라고 한다.

연해주 전체 인구 역시 10%는 고려인이라고 한다.

 

우정마을로 가는 도중 박 사장님이 러시아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을 해 주었다. 

러시아 군대는 복무기간이 1년으로 짧은데 징병제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특수부대는 복무기간이 길고 모병제로 운영한다고 한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폭력적인 군주에게 시달린 경험이 많다.

특히 몽골에게 400여년이나 폭압적인 지배를 받았고, 그 지배를 물리친 이반 뇌제 같은 군주들 역시

별명이 보여주듯이 폭력적인 군주였다.

너무 넓은 땅을 지배하다 보니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는

설명이나 토론보다는 주먹이 손쉬운 방법이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상남자" 스타일에 박수를 보내는 풍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니 군대 역시 구타와 폭력이 만연하여 군 복무 중에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냉장고 한 대 살 돈만 있다면 군대는 가지 않는다"는 풍조가 많다고 한다.

 

또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뚝뚝한 표정을 짓는 것을 예의로 생각한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이 불칠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도 올림픽을 개최하기 전까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이 무표정하고 무뚝뚝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는데

러시아도 그런 모양이다.

 

모스크바, 상트 뻬쩨르부르크는 1인당 GNI가 3만달러 수준이며 

이르쿠츠크 동쪽에서 연해주 지역까지는 5천$ 수준이며

러시아 평균 GNI는 2만4천$ 수준이라고 한다.

연해주를 비롯한 동부 시베리아 지역은 러시아 내부에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라고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닥 나빠 보이진 않았다.

 

러시아는 수력도 풍부해 연해주의 수력발전소는 95만kw의 전력을 생산한다고 한다.

핵발전소 1기가 100만kw를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큰 전력이다.

 

 

차창 밖 우수리스크 풍경은 우리나라 ’80년대 초반 모습과 비슷했다.

거리에는 차도 많이 다니며, 어제부터 유심히 봤는데 닛산과 토요타 같은 일제차가 승용차의 대부분이었다.

가끔 시트로엥, 현대. 기아차가 보기도 했지만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반면 버스는 100% 한국산인데 러시아는 3년 미만인 중고차만 수입을 허용한다고 한다.

운전대가 좌우 섞여 있는 것은 중고차를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를 한잠 들어와서 우정마을에 도착했다.

우정마을은 한국의 길훈건설이 고려인 동포들을 위해 1,000세대 건설 사업으로 추진한 단지라고 한다.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얻어 예전 러시아 비행장 100ha를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1998년 대한주택건설협회 내에 연해주 한인동포 재활기금을 설립해 연해주 미하일로프카 군의 허가를 얻어

착공하였고 2000년에 31가구가 입주식을 했는데 운동장, 축구장, 공원까지 조성한 상태였다.

2004년에는 고려인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을 이 마을에 승계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때문에 1937년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해체 이후 다시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가 해체된 1990년대 부터 중앙아시아에  민족주의 열풍이 일어나 독립국가들이 탄생했고

소수민족인 고려인인 현지 국가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우정마을>이라 이름붙은 이유는 고려인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국가유공자들에게도 1/3정도 분양을 해서

고려인이 러시아인과 네트웍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마을에 어울려 살면서 고려인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갖도록 기회를 만든 것이다.

 

빨간 벽돌로 탄탄하게 지은 이 집은 고려인들이 하나 둘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집 외에 먹고 살 수 있는 직장이 없어서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제조업 투자가 절실한 것 같다.

 

연해주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발전 잠재력, 북한의 희토류 같은 것과 연계해 남북 그리고 러시아까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이 마을은 옛날 발해의 <솔빈부>가 있었던 곳이다.

“솔빈”이라는 유서 깊은 이름을 사용한 문화마당이 이 마을에서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재 러시아와 한국을 오가며 Non-GMO 콩을 수입하는 등의 사업을 하는 한국 사람이 있었다.

민간차원의 교류가 국가차원으로 어서 빨리 확대대기를 기대해 본다.

 

우정마을의 <문화마당 솔빈>에는 로지나(러시아어 고향) 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하고 중앙아시아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정착을 지원한다고 한다.

맞배지붕 형태의 러시아인 주택과 달리 고려인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을 갖춘 빨간 벽돌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마을은 처음 카자흐스탄 귀환 동포(21가구), 우즈베키스탄 귀환 동포(6가구), 기타 민족 가구(6가구)에게 분양했다.

중앙아시아 귀환 동포에게는 무료로 분양했고, 러시아 은퇴 공로자(경찰 가족) 3가구에게 분양한 뒤 마을 치안도 좋아졌다고 한다.

고려인과 한 마을에서 살게 된 러시아인들은 고려인의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있고,

러시아인 사이에는 살기좋은 마을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현재는 10가구가 러시아인으로 바뀌었는데 분양받은 집을 유지하기 힘든 고려인들이

집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한다.

동포들의 생활이 안정되려면 직장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 힘든 귀환동포들이

생활고 때문에 분양받은 집을 팔고 떠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국내의 빈민촌 재개발 사업과 비슷한 결말로 끝날까봐 씁쓸하다.

 

러시아는 개인주택은 세금이 저렴하지만 기업(법인) 소유 재산에는 세금이 매우 높다고 한다.

길훈건설은 33채에 대한 막대한 세금부담과 국내 송사가 겹쳐져서 결국 이 사업을 포기하고

지금은 모든 프로그램을 이 마을에 위임했다고 한다.

Non-GMO 콩 재배를 기반으로 두부공장, 메주, 장류 제조, 유기농 채소 재배 등의 사업을 통해

자활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고향마을에는 10여년 동안 이곳과 한국을 왔다갔다 하며 연해주 동포와 한국을 잇는 사업을 하는 분이 계셨다.

연해주는 non-GMO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는데 이 콩으로 메주, 된장, 간장을 생산해 수출하기도 하고

콩을 한국 동해시에 있는 <바리의 꿈(대표 김현동)>을 통해 국내에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 기사 : http://www.hani.co.kr/arti/society/ngo/698006.html )

 

 

우정마을에서 고향마을 가는 길 역시 끝없는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지대였다.

 

러시아는 화장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데 이건 유럽 문화권의 공통점인 듯하다.

공공 화장실은 물론 건물내 화장실 역시 건물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하여 

우리 일행은 늘 줄을 서서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들판에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집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가서 남자들은 볼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 우리나라 시골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 온 듯하다.

 

<고향마을>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데 소나기가 쏟아졌다.

피부가 아플 정도로 세차가 내리는 가운데 처마에서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편안한 느낌을 가졌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고향마을> 사랑방에서 마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시자료 구경했다.

 

고향마을은 2007년부터 조성하였으며, 원래 우정마을 건설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고향마을 땅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 연해주 최대의 양계단지였으나 소비에트 붕괴 이후 버려진 땅이 되었는데

현재는 동포들이 자활을 할 수 있도록 농장을 운영하거나 떡공장을 가동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생산한 콩은 한국으로 수출하는데 non-GMO 콩이라 한국정부의 쿼터를 늘려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GMO 콩에 대해 매우 철저하게 유입을 차단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가 WTO에 가입 신청을 했을 때, 영국과 미국에서 GMO 종자에 대한 완화정책을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러시아는 약 2년간 종자연구소나 실험실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GMO 재배를 허용했다가 WTO 가입이 완료되자(2012.08.22)

바로 GMO 종자 재배를 전면 금지시켰다고 한다.

의외로 한국과 가까운 러시아 땅이 non_GMO의 보고였다는게 놀랍다.

 

 

점심식사 때 들깻잎이 나왔는데 고향마을 사업을 하는 여사장님께서

한국에서 들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심었다고 한다.

농약 같은 것을 구하기 힘든 지역이라 자연스럽게 모든 농작물이 유기농이 되었다고 하며

노천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식물들이라 그런지 오이와 토마토는 매우 신선했고 억센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노지 재배한 채소를 먹는 그런 식감을 느꼈다.

 

연해주 일대의 벼농사 현황을 물어보았는데,

한카 호수 근처 땅에서 한 종교 단체가 중국인 노동자를 활용해 벼농사를 일부 짓고 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 벌목장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용 벌목 작업을 하는데

일본군, 체코군, 조선인 포로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 되기도 했는데

일본군 후손들이 조상의 흔적을 찾아 러시아를 찾아오기도 한단다.

 

비가 그치고 난 뒤, 1시 쯤 되어 <고향마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했다.

1시간 반쯤 지나 블라디보스톡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 중간 중간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나와 과일과 음식을 파는 노점을 하고 있어서

특이하게 보였다.

 

그 사이에 우수리스크 풍경에 익숙해졌는지 블라디보스톡 풍경이 굉장히 도회지스럽게 다가온다.

블라디보스톡은 우수리스크와 달리 언덕과 경사가 제법 있는 땅으로

10층 정도 되는 아파트와 건물들이 제법 보이고, 주 청사는 20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항일투쟁을 위해 민족지도자들이 세운 신한촌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마을이지만 1999년 8월15일에 <해외 한민족연구소>에서 세운 신한촌기념비는 그 자리를 알려준다.

이 지역은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따로 주차장 구획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길을 건널 때 여간 신경쓰이지 않는다.

 

신한촌 기념비는 남한, 북한, 그리고 해외 한민족 동포를 상징하는 탑 3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이 잠겨 있는 시간이라 쇠막대기 울타리 바깥에서 볼 수 밖에 없다.(10시~16시 사이만 개방)

조선이 조금만 대외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있었더라면,

또 폐쇄적인 사회질서를 깨뜨릴 힘만 있었더라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이건,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톡 중심가에 혁명광장이 있고 그 옆에 20층짜리 최신 건물로 만든 시청사가 있다.

이곳에서 블라디보스톡 역은 굉장히 가깝다.

 

우리는 역 광장 건너편에 차를 댔다.

그 곳에는 레닌 동상이 있다.

러시아 전역에 레닌 동상이 18개가 남아 있는데 모양은 모두 다르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 건너편 광장에는 “동방을 정복하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역 안으로 들어갔다.

러시아는 차도나 횡단보도에 진행방향으로 신호가 바뀔 때까지 남은 시간이 몇 초나 되는지 보여주는 디지털 시계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도 성격 되게 급한 모양이다.

 

 

블라디보스톡 역은 1903년에 문을 열었는데

하얀 건물 위에 거무튀튀한 색깔을 가진 지붕을 쓰고 있다.

역사 안에는 19세기 제국주의스러운 그림과 샹들리에가 있다.

폭파철거 하기 전에 봤던 조선총독부 내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밤 TSR 기차를 타기 전에 블라디보스톡 시내를 둘러보는 시간,

적백 내전을 승리로 이끈 연해주 최후의 전투가 있었던 곳 혁명광장으로 갔다.

1917년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22개국이 러시아에 군대를 보냈다.

이른바 적백내전의 시대.

 

짜르를 옹호하는 백군과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적군 사이에 1922년까지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고,

마지막으로 적군이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이 광장이라고 한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광장에는 비둘기가 모여 있고 평일 낮인데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놀러 나왔다.

볼세비키스러운 투박하고 강렬한 인상을 담은 거대 인물상이 광장 입구에 서 있다.

 

광장 건너편으로는 골든혼을 가로지르는 1.5km짜리 사장교가 보인다.

시원한 기분을 한껏 느낀 뒤 영원의 불꽃이 있는 잠수함 공원으로 갔다.

 

2차 대전 때 독일군 잠수함 10여척을 침몰시킨 C-56 중형 잠수함을 그대로 옮겨다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 옆에 영원의 불꽃은 천연가스 대국답게 내리는 비에 아랑곳없이 타오른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2차대전 때 숨진 장병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잠수함 함포를 그대로 가져와 기념비를 만든 스케일이 대단하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뚫고 저녁을 먹으러 북한식당인 평양관에 도착했다.

알아서 앉아서 먹는 방식으로 매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이번에는 노리꼬 여사 부부와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노리꼬 여사는 후쿠시마가 고향이란다. “요즘에 좀 유명해졌죠?” 하면서 웃는다.

일본에 가 본 적이 있냐고 물어서 25년전에 일본 키타큐슈와 도쿄에 세미나 참석차 갔던 적이 있다고 했더니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리코 여사와 대화를 하면서 이 분이 참 다른 사람의 말에 공감을 참 잘해주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평양관 직원들이 기타반주에 노래를 부른다.

1999년 금강산 여행 때 평양 모란봉 교예단이 불렀던 그 레파토리와 똑같은 순서.

남북 모두에게 익숙한 노래들을 잇달아 부르며 어서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민족이 함께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비가 내리고 구름이 잔뜩 낀 저녁이라 어둠이 금방 밀려온다.

블라디보스톡의 마지막 관광지인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갔다.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한다.

 

멀리 골든혼의 사장교가 보이고 불을 밝히는 항구는 감상적인 풍경을 보여주었다.

전망대 오르기 직전에 커다란 마트료시카 풍선이 화려한 색을 자랑하며 앉아 있다.

전망대 제일 높은 곳에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키릴문자를 전파한 키릴형제의 동상이 서 있었다.

 

56만 인구가 사는 블라디보스톡. 여느 나라 도시처럼 아름답고 번화한 도시였다.

퇴근시간의 러시아워가 익숙한 풍경이다.

해가 완전히 진 시간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블라디보스톡 역 근처로 왔다.

 

밤 늦은 시간,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안에 TSR을 타야하기 때문에 여행사 사장님과 가이드하는 사람들이 재삼재사 당부한다.

여권과 명단을 대조하고 침대칸에 타면 베갯닛과 매트리스 덮개, 그리고 겉이불을 준비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을 안내해 준다.

 

러시아는 푸틴 집권 이후 음주규제가 매우 강해서 저녁 9시 이후에는 술을 팔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어길 경우 처벌이 매우 강하다고 한다.

또 열차 안에서 과도한 음주를 하거나 차장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경우 체포될 수도 있다고 설명해준다.

서양 문명권에서 흔한 선상통제 규정이라 쉽게 이해가 되었다.

 

잠시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우린 주로 주전부리용)을 몇개 사고

이틀간 애용했던 버스에서 짐을 내려 역으로 건나갔다.

 

그런데 화물칸에 넣어둔 배낭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화물칸에 비가 새 들어간 모양이다.

이래서 패키지 여행에는 캐리어를 가지고 다녀야 하나?

 

갈아 입을 옷도 없는데 난감했다.

기차 안에서 얼마나 빨리 마를 것인가? 말릴 수 있는 공간이 있겠나? 걱정스럽다.

 

X-ray 조사를 거쳐 역 구내로 들어간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10시에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곳에서 넘겨준 명단과 여권을 일일이 대조하며 열차에 탑승을 하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손전등으로 명단을 비춰주자 쉽게 대조작업이 끝났다.

우리는 9, 10호차 전체와 11호차 일부에 나눠 탔다.

 

목포에서 온 김@모 선생과 나, 한결이, 준기가 한방에 배정되었다(10호차 3호실).

김 선생은 ’64년생으로 베토벤과 같은 외모라 예술분야 전공자인줄 알았는데 회계사라고 해서 두 번 놀랐다.

게다가 얼마 전에 칭창철도를 타고 티벳까지 다녀오셨다고 해서 또 놀랐다.

 

잽싸게 잠자리를 정리하고 안대와 귀마개를 준기에게 주었다.

“오늘은 푹 자거라. 이제 내리 때까지 사흘동안 별로 할 일도 없을 것 같다”라고 웃으면서.

 

준기가 잠을 청하고 나서

배낭에서 만약을 대비해 가져간 줄과 고리를 꺼내 실내 3면에 줄을 걸어 젖은 옷과 양말을 모두 꺼내 널었다.

피난민 수용소 같다.

 

혼자서 이번 여행에 나선 초등 6학년 한결이가 2층 침대는 자다가 굴러 떨어질 것 같다고 1층으로 오겠단다.

그런데 김 선생이 “한결아, 새로운 것도 해 봐야지. 2층 침대에 안전바가 있어서 굴러 떨어지기 어렵다.

그리고 이번 사흘동안 2층 침대에서 자도 괜찮다는 것도 경험해 보는게 좋겠구나”라고 타이른다.

 

김 선생의 의도를 알아채고 나도 한결이에게 2층 침대에서 한번 자 보라고 함께 권했다.

준기가 자기가 2층 침대에 올라가겠다고 했지만 한결이를 설득해 동의를 받았다.

한번 자보고 안되겠으면 1층으로 바꿔 주마고 약속했다.

블라디보스톡 역을 출발한 기차는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흘간 어떤 여행이 될지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우수리스크 호텔 외관

 

객실에서 내려다 본 호텔 마당, 우수리스크는 어딜가도 나무가 많다.

 

우리가 묵었던 객실호텔, 서유럽의 웬만한 호텔에 비해 빠지지 않는 내부 시설

 

 

우정마을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찍었다.

 

기차 역에는 긴 화물열차가 줄을 서 있는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이라 상태가 영 좋지 않다.

 

 

그냥 평원, 시내를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대충 이렇게 지평선이 주~욱 이어졌다.

 

 

고향마을의 사랑방인 문화마당 솔빈, 이 건물 안에 로지나(고향) 서당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솔빈을 둘러보는 우리 일행. 솔빈이란 이름은 대조영이 세운 발해왕국의 솔빈부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정마을에는 이렇게 생긴 집이 33채가 서 있다.

 

 

고향마을. 식당과 숙소를 겸하고 있다.

우정마을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숙소로 쓰던 곳을 지금은 연해주 고려인의 자활을 위한 사업기지로 쓰고 있다.

 

먼저 식사를 하고 구경을 했다. 각 테이블마다 오이, 고추, 파, 토마토, 마늘 등이 놓여 있었는데 유기농으로 노천 재배를 한 덕분인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먹었던 쌈채소처럼 억세고 단단했다. 자연스러운 맛에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먹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사진을 미처 찍지 못했다(사진-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렇게 뷔페식으로 장만해 놓으셔서 정말 과식했다. ^^

 

 

로지나 서당에는 이렇게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에서 지금까지 한 활동과 연해주 이주민의 역사를 소개해 놓았다.

 

 

우수리스크 일정을 마치고 이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바아가 도심 한 가운데에 있어서 아름다운 곳이다.

 

63만명이 거주하는 블라디보스톡은 큰 도시답게 복잡했다.

게다가 도시 안에 표고차가 심해서 다양한 주거환경을 보여주었다.

 

 

성벽처럼 빽빽하게 지어 놓은 아파트(?)

 

연해주에 돌아와 첫번째 도착한 곳은 언덕에 있는 신한촌 기념비.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던 한인촌을 기념해 그 터에 1999년에 비석을 세웠다.

1873년 블라디보스톡 군항 건설과 때맞춰 한인 집단 거주지가 생겼는데 이 곳을 개척리라고 불렀다.

한 때 7,500명이 살던 마을을 콜레라를 예방한다는 이유로 개척리 북쪽으로 한인들을 집단 이주 시켰는데 이 곳이 바로 그 곳 신한촌이다.

우리 항일투사들은 여기서 권업회를 결성하고 한인학교를 만들었다.

테라우치 총독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던 강우규 열사는 여기에서 '노인동맹단'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했었다.

 

 

 

블라디보스톡 시청사. 20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왼쪽 위에 혁명광장을 끼고 있다.

 

 

9,288km TSR의 시발역이자 종착역 블라디보스톡. 1903년에 역을 개통했다.

내부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블라디보스톡 역 맞은편에 레닌의 동상이 서 있다.

전국에 레닌 동상이 18개 정도 남아 있는데 모두 모습이 다르다고 한다.

이 모습은 "동방을 점령하라!"는 지극히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자세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혁명광장.

1918년~1922년 사이에 적백 내전 때, 적군은 바로 이 곳에서 백군에게 마지막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적백 내전 때 러시아에 살던 우리 동포들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개념으로 백군을 지원하던 일제에 맞서

적군 편에 서서 빨지산 활동을 벌이는 한편 이만 전투 등에서 큰 희생을 치르면서 소비에트 군대의 승리에 일조했다.

 

 

광장에는 그 당시에 참전했던 각계 각층의 러시아 민중을 형상화한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뒷편에는 여성 참전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총을 들고 간호병으로 활약한 여성을 형상화한 동상.

 

혁명광장 앞에 블라디보스톡은 서방의 대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약간 촌스러운 느낌 말고는....(사진 -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러시아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희생자를 기리는 "영원의 불꽃"이 있다.

혁명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잠수함 공원과 영원의 불꽃,

그리고 1941년~1945년 사이에 전쟁터에서 희생된 수많은 장병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서 있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정교회 성당이 보인다.

 

 

잠수함 공원에는 2차대전 때 실전 복무했던 C-56 잠수함을 그대로 가져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세계 최강의 독일잠수함을 무려 10척이나 격침시킨 소비에트 잠수함 부대의 전설은 지금도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날 비가 오는데도 많은 학생들이 견학을 하러 왔다.

 

 

1910년, 역사가 꼬이기 시작한 이래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민족.

블라디보스톡 시내 식당인 평양관에서 저녁을 먹으며 북한 접대원 동무(?)들의 공연을 보고 있다.

1999년 금강산 관광 때 모란봉 교예단이 불렀던 그 노래는 아직도 노래로만 그치고 있다.

언제 우리는 통일 한국을 이룩하게 될 것인가? 이 바보 같은 분단을 언제 우리 손으로 끝낼 수 있을까?

 

 

비가 오고 구름이 끼어서 날이 더 일찍 저물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마지막 구경을 했다.

러시아의 세종대왕 형제(?) 키릴 형제.

그들은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다듬어 사람들에게 보급함으로써 러시아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독수리 전망대 제일 위쪽에 자리잡은 키릴 형제상(사진-한겨레통일문화재단)

 

 

독수리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골든 혼(금각만).

러시아는 이 블라디보스톡을 천년간 영화를 누린 콘스탄티노플 처럼 만들려고 했다.(사실 지형도 비슷하다)

러시아의 상징 마트료시카, 그리고 밝게 빛을 내기 시작하는 졸로토이 브리지.

 

 

블라디보스톡 역 야경. 러시아의 야경은 서유럽 도시들과 비슷하게 밝은 곳이 별로 없다.

화석 에너지를 보유하지 못한 우리나라가 야경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탈 TSR. 엘라 차장이 우리 일행의 이름과 여권을 대조하고 있다.

총 9,288km인 이 열차를 우리는 절반인 4,500km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