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매천 황현선생의 자취를 찾아서
■ 매천 황현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2015. 5. 5.)
떠나기 싫은 남해편백휴양림을 뒤로하고 광양으로 길을 떠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나 여행에서 중요한 맛있는 음식을 지나칠 수 없는 것.
광양에 왔으니 광양숯불구이를 생략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황현선생 생가를 찾아 가다가 삼대숯불구이집을 찾았다.
식당 근처에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고 걸어서 식당에 도착했는데 점심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했다.
순번이 되면 전화를 준다고 해서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식당에서 큰 길 건너편에 행사가 한창이다.
모범택시기사 단체와 지역봉사단체들이 나와서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안전하게 길을 건너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길을 건너서 서천변을 보니 이렇게 소방차까지 대기시켜 놓은 큰 행사장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들을 위해 지역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모아서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비해 놓고, 여러가지 행사를 하는 모습에서 광양 사람들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다.
길 건너편에 유명한 식당가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식당도 손님이 많았다.
30분쯤 기다려서 호출전화를 받고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얇게 저민 소고기를 구워먹는데 절반쯤 먹었을 때부터 연기가 많이 났다.
그러자 햐얀 옷을 입은 사장님이 오셔서 소고기 숯불구이를 맛있게 먹는 법을 직접 가르쳐주셨다.
연기도 나지 않게 구워 우리에게 맛을 보라고 주시는데
"으잉! 이게 같은 소고기란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고 맛이 좋을 수가 있지? 달라도 너무 다른데?"
사장님께서 소고기를 맛있게 굽는 방법을 정리해 주셨다.
1. 소고기를 얇게 썰 것
2. 좋은 숯불에 올릴 것
3. 소고기가 중첩되지 않게 잘 펼 것
4. 육즙이 충분히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에 뒤집어 잘 펼 것
5. 뒤집은 뒤 반대쪽으로 육즙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바로 접어서 먹을 것
이렇게 하면 연기도 거의 나지 않고 촉촉하고 감칠맛나는 소고기를 즐길 수 있다고 직접 보여 주시고 해 보라고 하셨다.
사장님의 시범을 맛보고 나서 나머지 고기를 굽는데 전혀 다른 맛이 나니 그저 감탄스럽다.
좋은 비법을 알려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며, 계산을 하러 갔는데
어린이 날이라고 값을 깎아 주셨다.
과연 3대를 이어가는 집은 다르다.
예술적인 맛을 본 뒤 황현 선생 유적을 찾아갔다.
생가 윗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이렇게 공원이 나오고 여기에 매천 선생과 가족의 묘가 있다.
시골의 선비로 평생을 지내며 조선말기의 상황을 '매천야록'이라는 기록으로 남기신 분.
그리고 지역의 항일무장의병을 지원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과거에 응시했다가 민황후 일족과 매관매직으로 부패한 관료를 목격하고 출사를 포기한 천재 선비.
그의 묘소는 이렇게 가족과 함께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다.
문병란 시인이 황현선생을 기리는 시를 헌정해 묘소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묘소 아래 쪽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묘소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생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천변에 차를 대 놓고 걸어서 올라갔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 안에 선생이 사셨던 초가집이 있다.
5칸 정도 되는 작은 초가집. 거기에 매천헌이라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대청마루에 빈팀없어 보이는 황현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현대에 와서 명성황후를 미화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는데
그 시대에 살았던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은 한마디로 명성황후를 "죽을 때 죽을 자리만 잘 만난 요망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간 원흉 중에 하나인 민황후
가문을 위해 나라를 망치고, 푸닥거리 하는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매관매직을 일상화하고, 나라를 끝내 멸망시킨 그런 요망한 인간.
황현의 매천야록은 역사를 미화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남긴 방대한 매천야록 기록 가운데 몇 몇 부분을 뽑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원자가 탄생한 이후 궁중의 기도와 치성은 절도가 없어 그 행사가 팔도의 명산까지 미치고, 고종도 마음대로 유흥잔치를 즐겨 상을 줄 경비가 모자랐다. 임금과 중전이 하루에 천금을 소모하여 내수사에 있는 물량으로는 지탱할 수 없으므로 호조와 선혜청의 공금을 공공연히 가져다 썼으나 재정을 관장하는 사람이 감히 거절을 할 수 없어, 1년도 안되어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다 동이 났다. 이로부터 매관매과(관직과 과거급제를 돈으로 사고 파는)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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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내전을 들어가다가 창황히 후문으로 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고종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으나 왕비는, "내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보인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고종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좌우 시녀에게 물었으나 모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 민후가 천천히 말하기를, "전각이 깊어 혹 요귀가 들끓은 것이니 기도와 치성을 드려야겠습니다"라고 한 후 더욱 기도하는 곳을 늘렸다. 고종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민후가 대전을 이와 같이 우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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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閔后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小村室의 딸은 민후를 보고 확인하였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屍身을 검은 두루마기에 싸가지고 鹿山 밑 樹木 사이로 가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埋葬하였다. 閔后는 20년 동안 政治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을 통해 흥선선대원군의 집권부터 경술국치까지 보수주의자로서 근왕파로서 유학자로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조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멸망했는지 백성들과 관료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기록했다. 조선왕조는 멸망에 합의 한 뒤 기녀들을 불러 하루종일 잔치를 벌였던 정신없는 사람들이 팔아먹은 나라로 남았다.
황현은 자신을 매장시킨 왕조에 대해 사대부로서 마지막까지 의리를 다한 선비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5백년 종사와 목숨을 같이 하는 선비 하나 없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비참한가라고 탄식하며
아래와 같은 <절명시>를 남기고 1910년 9월 7일 자결했다.
亂離袞道白頭年 난리를 겪다보니 머리만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妖氣掩翳帝星移 요망한 기운에 가려서 임금 별자리 옮겨지니
九闕沉沉晝漏遲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穀 끝맺음이 겨우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당시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출처 : 매천 황현 선생 생가, 절명시 현판>
황현 선생 생가와 묘소 주변에는 조용한 봄날의 햇볕만 가득했다.
무거운 발길을 돌려 시내로 내려왔다.
연우가 전국의 <설빙>가게를 다 돌겠다는 의지(?)인지
다음 숙소인 덕유산 자연휴양림까지 갈 길이 먼데도
설빙에 들러 빙수를 먹어야겠다고 한다.
시내까지 한참 내려와서 빙수를 먹고 해지기 전에 덕유산 휴양림에 도착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